‘악마판사’의 통쾌함과 불편함은 어디서 오나

악마판사

또 다른 다크히어로의 탄생이다. tvN 토일드라마 <악마판사>는 대놓고 주인공에 ‘악마’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모범택시>, <빈센조>에 이어 <악마판사>까지. 도대체 다크히어로들은 어쩌다 전성시대를 맞이하게 된 걸까.

 

<미스 함무라비> 문유석 판사 작품 맞아?

사실 <미스 함무라비>를 쓴 문유석 작가는 우리에게는 ‘판사’로서의 이미지가 강하다. 그건 그가 드라마 작가로 데뷔하기 전 <개인주의자 선언>이라는 책을 통해 전 부장판사였다는 사실이 대중들에게 각인된 바 있고, 무엇보다 <미스 함무라비>가 바로 자신의 경험이 녹아 있는 판사들의 이야기를 다뤘다는 점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그가 새로 쓴 tvN 토일드라마 <악마판사> 역시 판사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사실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하지만 적어도 <악마판사>를 기점으로 문유석은 ‘판사’보다는 ‘작가’라는 직함이 더 어울리게 될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은 법정의 현실을 담은 <미스 함무라비>와는 사뭇 다른, ‘가상의 디스토피아 대한민국’을 배경으로 ‘전 국민이 참여하는 라이브 법정 쇼’를 소재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판사로서의 현실 경험보다는 작가로서의 상상이 더 드러나는 작품이 바로 <악마판사>다. 

 

본래 작품의 판타지는 현실의 결핍에서 비롯되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가상의 설정을 갖고 있지만 거기에는 현실의 그림자들이 어른거린다. ‘라이브 법정 쇼’에 처음 서게 된 JU케미컬 회장 주일도(정재성)는 독성폐수를 무단 방출해 한 마을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인물이다. 우리네 현실에서도 이런 유사한 사건들은 분명히 존재했다.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의 모티브가 됐던 91년에 있었던 낙동강 페놀 방류사건이나, 여전히 법정에서 피해자들이 외로운 싸움을 벌이고 있는 가습기 살균제 참사가 그렇다. 그런데 이런 사건들을 야기한 가해 책임자들은 거기에 합당한 처벌을 받았을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하지만 <악마판사>에서 라이브 법정 쇼를 통해 강요한(지성) 재판장은 주일도 회장에게 금고 235년이라는 충격적인 판결을 내놓는다. 또 두 번째로 열린 라이브 법정쇼에서 엄마가 법무부장관이라는 사실 때문에 안하무인 갑질을 일삼아온 피고는 ‘태형(때리는 형벌)’ 30대를 선고하고 그 과정을 생중계한다. 현실에서는 벌어질 수 없는 일들을 가상의 국가와 라이브 법정쇼 같은 설정을 통해 시청자들에게 잠시간의 ‘사이다’를 안기는 것. 

 

이런 이야기 구조는 SBS <모범택시>와도 유사하다. <그것이 알고 싶다>의 PD이기도 했던 박준우 연출자는 그 프로그램이 다뤘던 실제 사건을 허구의 드라마 속으로 가져와 그 가해자들에게 ‘사적 복수’를 가하는 무지개 운수팀의 사이다 액션을 그린 바 있다. 여러모로 문유석 작가는 이제 현실의 문제를 좀 더 가상을 빌어 풀어보려는 작가적 욕망을 드러내고 있다고 보인다. <악마판사>는 바로 그런 욕망의 소산이다. 

 

이 라이브 법정쇼가 겨냥하고 있는 것

<악마판사>는 그러나 라이브 법정쇼라는 ‘사이다 법 정의’의 이야기만을 담고 있지는 않다. 강요한(지성)이라는 주인공을 ‘악마판사’라 세우고 있는 데는 그가 과거 어떤 불행을 겪었고 그래서 절치부심 복수극을 펼쳐가고 있다는 걸 드러낸다. 버려진 아이로 대부호의 집에 입양되어 살아온 강요한을 그의 배다른 형인 강이삭(진영)이 살뜰히 챙겨줬지만, 10년 전 그 막대한 유산을 사회적 책임재단에 전액 기부하려던 중 발생한 의문의 성당 화재로 인해 형 부부가 모두 사망하게 된 것. 강요한은 형의 딸 엘리야(전채은)와 함께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고 그 기부를 전면 취소했다. 당시 화재 현장에 있었던 사회적 책임재단 인사들은 그래서 마치 강요한이 그 화재를 일으키고 그 재산을 모두 강탈한 것이 아닌가 의심했지만 사실은 달랐다. 그 날 성당에 있던 사회적 책임재단 인사들은 아이인 엘리야를 밟으면서까지 탈출한 그런 비정한 인물들이었다. 그들 사회적 책임재단 인사들은 지금도 이 가상의 대한민국을 쥐락펴락하는 권력자들이 되어 있었다. 대통령 허중세(백현진), 법무부장관 차경희(장영남), 사회적 책임재단 이사장 서정학(정인겸), 민보그룹 회장, 사람미디어그룹 회장 등등.

 

결국 <악마판사>가 보여주고 있는 구도는 사회적 책임재단으로 불리며 마치 나라 걱정을 하는 이들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사적 이익에만 혈안인 이들에 대한 강요한의 처절한 복수극이다. 아직 그 실상이 드러나진 않았지만, 당시 성당의 화재와 형인 강이삭의 전 재산 기부 같은 사안의 이면에는 아마도 보이지 않는 사회적 책임재단의 음모가 숨겨져 있을 것으로 보인다. 강요한이 하는 ‘라이브 법정 쇼’는 그래서 전 국민이 보고 참여하는 라이브 쇼라는 방식을 통해 실제 법이 해결하지 못하는 사법 정의를 구현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비극을 겪은 가족을 위한 복수극이 펼쳐지는 곳이 될 것으로 보인다. 

 

악마가 판을 치는 다크히어로 전성시대

<악마판사>는 제목에서 느껴지듯 선한 주인공이 아닌 다크히어로를 그리고 있다. 그 크기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넓은 집이지만 텅 비어 있어 어딘지 음습하고 쓸쓸한 대저택은 거기 살고 있는 강요한이라는 다크히어로를 잘 표현하고 있다. 그는 마치 <배트맨>의 브루스 웨인을 닮았다. 고풍스런 대저택에서 살지만 고독하고, 어딘가 과거의 아픈 상처를 숨긴 채 살아가는 어두운 인물. 그래서 드라마는 초반에 라이브 법정 쇼로 전 국민적인 사랑과 지지를 받는 강요한이라는 인물이 그 모습과는 다른 ‘악마적인 면모’가 있다는 걸 슬쩍 드러낸다. 그의 등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십자가 모양의 커다란 화상의 흔적은 ‘요한’이라는 그의 이름과 묘하게 어우러지면서, 십자가를 진 채 저들 악마의 불길 속으로 뛰어든 다크히어로의 아우라를 만든다. 결국 그가 악마가 되기로 한 건, 그래야만 저 악마보다 더 한 사회적 책임재단의 가면을 쓴 어둠의 카르텔과 맞설 수 있기 때문이다. 

 

<악마판사>에서 단박에 <모범택시>가 떠오르고, 그 어두운 인물의 면면에서 tvN <빈센조>가 떠오르는 건 이들 드라마들이 모두 다크히어로를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어서다. <모범택시>의 김도기(이제훈)는 부모가 모두 살해당하는 일을 겪었지만 정작 가해자에 대한 미온적인 사법 처리 과정을 겪으며 ‘사적 복수 대행’이라는 선택을 하는 인물이다. <빈센조>는 이탈리아에서 온 마피아 변호사로서 “악은 악으로 처단한다”고 말하고 이를 실행에 옮기는 인물이다. 어쩌다 지금 정의를 메시지로 담은 드라마 속 주인공들은 선이 아닌 악을 선택하게 된 걸까. 그건 이 정도의 강력한 대응이 아니면 저들끼리의 카르텔을 형성하고 심지어 ‘성실하기까지 한’ 악을 대적할 수 없다는 공감대에서 비롯된 일이다. 다크히어로는 그래서 어설픈 착함이 아니라 프로페셔널한 악함으로 저들과 싸운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러한 다크히어로 전성시대의 밑그림에 어른거리는 대중들의 정서는 사법행정에 대한 불신이다. 도저히 용서하기 어려운 범법자들이 돈과 권력의 힘으로 제대로 처벌받지 않고, 법 위에서 오히려 법을 이용하는 행태를 우리는 너무나 많이 봐왔지 않은가. 그래서 서민들의 ‘무전유죄 유전무죄’라는 외침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현실 속에서 다크히어로는 탄생한다. 그들이 주는 사법 정의가 물론 일시적인 통쾌함을 선사할 뿐일지라도 잠시간의 사이다일 뿐일 지라도 그 시원함을 맛보고 싶어진다. 물론 그 통쾌함 뒤에 남는 건 이런 식의 가상까지 동원해야 하는 현실이 주는 불편함이지만.(글:매일신문 사진:tvN)

<탐정 홍길동>, 한국형 판타지 히어로물의 탄생

 

사실 <탐정 홍길동>이라는 영화의 제목은 낮설다. 홍길동이라는 고전적 영웅 서사의 인물에 탐정이라는 현대적인 직업(?)을 덧붙였으니 그런 낯선 느낌은 어쩔 수 없을 게다. 게다가 <탐정 홍길동>은 사극도 아니고 그렇다고 현대극이라고 할 만큼 현실적인 바탕을 내세우고 있지도 않다. 마치 <배트맨>의 고담 시티 같은 가상의 공간이 <탐정 홍길동>에도 주요 배경이 된다.

 

사진출처:영화<탐정 홍길동>

마치 프랭크 밀러와 로버트 로드리게즈 감독이 만들었던 <씬시티>를 우리 식으로 재해석한 것 같은 장르의 혼용과 만화와 실사의 결합이 놀랍게도 <탐정 홍길동>에는 그리 부자연스럽지 않게 시도되어 있다. 이야기는 그래서 배경보다는 홍길동(이제훈)이라는 미스테리한 인물에 맞춰지고 그가 속한 활빈당이라는 비밀조직과 그들이 대항하는 광은회의 대결구도가 영화의 주요골격이 된다.

 

어린 시절의 충격적인 사건 때문에 기억과 두려움을 모두 잃어버린 홍길동이 한 마을로 들어가 자신의 과거를 캐고 복수를 하는 일련의 단순한 과정들이 영화의 내용이지만, 영화는 의외로 흥미진진하다. 만화에서 막 튀어나온 듯한 캐릭터들이 무지막지한 액션들을 선보일 때 관객들은 그 비현실성도 잊은 채 카타르시스에 빠져든다.

 

이미 영화의 장르적 문법들에 익숙한 관객들은 <탐정 홍길동>이 아무 것도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않는 현실적 소재나 공간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 다만 하나의 게임을 하듯 인물들이 부딪치고 추리하고 문제를 해결하고 또 어떤 반전을 이루는 그 과정들을 즐기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 말이다.

 

하지만 그래도 홍길동이라는 이름을 붙였을 때는 그 캐릭터가 갖는 함의는 분명 존재했을 터다. 왜 이 현대적인 판타지 히어로물에 굳이 홍길동이라는 고전적 영웅 서사를 붙였는가 하는 건 활빈당이라는 그가 속한 조직의 성격과 맞닿아 있다. 가난한 서민들을 위해 싸우는 정의 조직.

 

바로 이 지점에서 <탐정 홍길동>은 하나도 직설적으로 현실적인 부분을 언급하지 않으면서도 어떤 우리네 현대사의 현실성을 상징적으로 유추하게 만든다. TV를 통해 나오는 정치인의 모습이나 군인의 모습은 80년대의 어느 한 시점을 떠올리게 하고, 광은회가 한 마을에 퍼붓는 엄청난 폭력 역시 우리네 현대사의 아픈 지점을 건드린다.

 

결국 <탐정 홍길동>에서 벌어지고 있는 끔찍한 사건들은 우리네 뒤틀어진 현대사의 상징처럼 보인다. 무고한 마을 주민들이 있고 그들에 대한 엄청난 폭력과 착취가 행해지며 그렇게 얻어진 부는 정치권과 군부에 맞닿아 있다. <탐정 홍길동>은 어쩌면 현대사를 겪어온 우리네 심연 속 어느 마을로 찾아가 그 아픈 기억들을 헤집고 판타지를 통해서나마 이를 극복하려 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이 영화는 전형적인 판타지 히어로물로 즐길 수 있는 작품이다. 특히 어찌 보면 서구의 장르적 문법이라고 할 수 있는 갱스터 무비의 성격을 우리 식으로 해석한 점은 그 자체로 흥미로운 대목이다. 하지만 <탐정 홍길동>은 이런 장르적 재미를 충실히 이행하면서도 그 안에 우리네 정서와 메시지들을 놓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수작이라 할만하다. <늑대소년>에서 어떤 장르적 경계를 허무는 실험을 보였던 조성희 감독은 <탐정 홍길동>을 통해 한층 더 자신의 세계를 공고히 구축해 보여주고 있다.

반인반수 영웅으로 재탄생된 이승기의 구미호

 

왜 <구가의 서>가 다루는 우리네 민초들의 영웅은 반인반수로 태어났을까. 이승기에 의해 재탄생된 구미호는 우리가 <전설의 고향>에서 보던 “서방님 하루만 더 참았어도...”하며 원망의 눈길을 보내던 그 구미호가 아니다. 우리네 전설에서 구미호라는 존재가 한이 내면화된 민초들의 억압에서 탄생한 존재라면, <구가의 서>의 반인반수 최강치(이승기)는 안으로 꼭꼭 숨겨두는 한보다는 겉으로 터져 나오는 분노에서 탄생한 존재다.

 

'구가의 서'(사진출처:MBC)

확실히 지금은 조선시대의 수동적인 구미호의 신파가 감흥을 잃은 시대다. 아마도 70년대 가부장적인 가족체계 내에서라면 이른바 고부갈등과 시집살이에 꾹꾹 눌려진 억압이 구미호의 신파적인 변신만으로도 눈물로 풀어져버렸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달라진 시대는 달라진 구미호를 요구한다. 최강치가 그려내는 구미호 이야기는 그래서 신파가 아니라 활극에 가깝고, 내면화된 욕망을 풀어내는 공포가 아니라 좀 더 겉으로 드러내는 판타지에 가깝다.

 

“다 죽여버릴거야!”라고 외치는 분노의 최강치는 그래서 그 최대의 적이 바로 자신이다. 물리적인 힘으로는 도무지 그 누구도 그를 이길 수 없지만, 바로 그런 엄청난 반수의 힘은 어느 쪽으로 사용되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진다. 마치 핵을 가지고도 누가 사용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듯이, 최강치는 지금 왜구의 침략에 대비하여 거북선을 만들려는 전라좌수사 이순신(유동근)과 백년객관을 빼앗고 왜구들과도 결탁해 무언가를 꾸미고 있는 희대의 간웅 조관웅(이성재) 사이에서 줄다리기가 되고 있는 존재다.

 

조선시대의 구미호 전설을 재해석하고 있지만 <구가의 서>는 그래서 무수한 현대의 영웅담과 판타지물의 흔적들이 들어있다. 분노하면 반수로 변신해 자신도 모르게 모든 적을 살상하는 그 모습은 헐크를 닮았고, 다른 존재로서의 외로운 영웅의 모습은 스파이더맨이나 슈퍼맨을 닮았으며, 영웅의 인간적인 고뇌는 배트맨을 닮았다. 그래서인지 이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전라도는 배트맨의 고담시처럼 고립된 인상이 짙고, 그걸 장악하는 조관웅은 고담시나 뉴욕을 꿀꺽 삼키기 위해 테러를 일삼는 악당을 닮았다.

 

물론 여기에는 영웅담 이외에 판타지물의 흔적도 담겨 있다. 지리산을 지키는 신수 구월령(최진혁)과 소정법사(김희원)는 <반지의 제왕>의 요정과 마법사를 떠올리게 하고, 담여울(수지)과 최강치의 관계 설정은 일본 만화 <이누야사>를 닮았다. <구가의 서>는 이처럼 그간 <전설의 고향>이 다루던 전통적인 구미호와는 확연히 다른 캐릭터다. 우리만의 특수성을 가진 구미호라는 캐릭터를 전 세계 보편적인 변신 캐릭터들(이를테면 뱀파이어나 늑대인간에서 현대적인 슈퍼히어로에 이르는)로 그리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달라진 구미호 최강치는 민초들에게 어떤 영웅일까. 과거의 구미호 텍스트들은 구미호보다 더한 인간의 모습을 그려내는 것으로 당대의 신분구조가 주는 억압을 해체시켰다. 양반과 상놈의 신분구조는 인간과 구미호로 치환되었고, 구미호는 공포의 존재가 되어 인간을 깨우치는 이야기로 그려진다. 2000년대가 넘어 재탄생된 구미호 이야기들은(이를 테면 <여우누이뎐>같은) 구미호보다 심지어 더 공포스런 인간들을 비판한다. <구가의 서>가 그리는 구미호도 다르지 않다. 여기에는 인간이지만 반인반수보다 못한 조관웅이 등장한다.

 

하지만 최강치라는 새로운 영웅이 하려는 것은 조관웅을 죽이는 사적인 복수에 머물러 있지 않다. 이순신이라는 존재가 굳이 등장한 이유다. 이 반인반수의 영웅은 임진왜란과 무적의 이순신이라는 존재 옆에 생겨난 판타지다. 그런 점에서 <구가의 서>의 구미호는 사회적 억압이 만들어낸 공포의 캐릭터가 아니라, 사회적 분노가 만들어낸 영웅에 가깝다. 권세에 기대 뭐든 갖고 싶은 것을 취하려는 조관웅은 그래서 사회적 분노를 일으키는 공공의 적이 된다.

 

최강치라는 새로운 구미호는 현대인들의 분노가 응축되어 만들어진 캐릭터다. 분노에 의해 만들어진 그의 강력한 힘은 이미 신분체계의 벽을 넘어선다. 하지만 괴물과 싸우면서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스스로가 괴물이 되지 않는 일이다. 최강치에게 남겨진 문제는 그래서 그 힘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가 된다. 현대인들이 갖고 살아가는 분노가 그러한 것처럼.

‘일지매’, 우리식으로 해석한 가면 영웅담

현대식으로 재해석된 갑의와 가면, 그리고 일지매(이준기)의 은신처가 연상시키는 것은 배트맨이다. 깊은 지하에 숨어 그만큼의 깊은 고독을 가진 존재로, 밤에 주로 활동하고, 이중생활을 하며 슈퍼맨처럼 초자연적인 힘을 가진 것이 아니라 과학의 힘을 빌려 활용한다는 점에서 일지매는 배트맨을 닮았다. 그래서일까. 변식(이원종) 대감이 습관적으로 붙여버린 ‘박쥐새끼’라는 별명 또한 우연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배트맨을 닮았지만 무언가 다른 일지매
하지만 ‘일지매’가 사극이라는 점은 이 외국산 슈퍼히어로물의 답습을 허락하지 않는다. 비록 사극 속에서이지만 ‘일지매’가 가진 현대적인 스타일은 물론 지금의 젊은 층들이 열광하는 세련된 슈퍼히어로를 닮은 것이 분명하지만, 일지매는 전형적인 한국적 정서를 그 안에 담고 있다. 이것이 주로 발견되는 것은 일지매가 쓴 그 가면을 활용하는 지점에서다. 대부분의 슈퍼히어로들이 신분을 노출하지 않기 위해 가면을 쓰지만, 일지매는 그 목적이외에도 가면이 활용된다.

대부분의 가면 영웅들이 그러하듯이 가면을 쓰느냐 안 쓰느냐에 따라 일지매도 두 인물로 분화된다. 그 하나는 용이고 다른 하나는 겸이다. 일지매라는 가면의 영웅은 겸이로서 과거 아버지의 죽음을 해명하고 복수하려는 인물이며, 용이는 현재의 쇠돌(이문식)과 단이(김성령)의 아들로서 조금은 불량기가 있는 청년이다. 따라서 가면을 쓴 상태의 일지매는 과거의 아픔을 가진 슬픈 존재며, 벗은 상태의 용이는 이와는 정반대의 인물로 생각 없이 건들대는 그런 존재다.

이 두 인물이 공존하는 일지매는 그 가면이 주는 간극 속에서 서로의 내심을 숨겨야만 한다. 용이는 늘 그런 거들먹대는 사람처럼 연기해야 하고, 겸이는 가면 아래 자신의 과거와 슬픔을 철저히 숨겨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도 얼굴을 보여줄 수 없고, 자신을 키워준 쇠돌과 단이에게마저 불량아로 취급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은 이미 어린 시절, 어머니를 부정해야 자신이 살 수 있었던 그 순간부터 일지매에게 예정되었던 불행이다.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수십 년이 지나 다시 어머니를 만난 그 순간에도 반복된다.

가면 속의 슬픈 정서, 서민들의 얼굴
따라서 일지매라는 슈퍼히어로가 가진 정서는 가면으로 가려지면서 더욱 배가되는 슬픔이다. 가면의 영웅이 영웅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주변사람들이 가면 속의 진짜 얼굴을 보지 못했을 때까지다. 따라서 가면이 벗겨지는 순간, 영웅이 계속 존속하기 위해서는 그 얼굴을 본 자가 사라지거나 죽거나 혹은 영원히 비밀로 간직할 수 있을 만큼의 사랑으로 엮이는 것이다. 이것은 대부분의 가면 영웅들이 가진 공식이다. 하지만 이 양상이 ‘일지매’로 와서는 그 특유의 슬픔의 정서와 만나면서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흘러간다. 그것은 얼굴을 본 자가 일지매를 위해 저 스스로 죽음의 길을 기꺼이 달려간다는 것이다.

쇠돌이 일지매의 은신처를 찾아내는 순간 사실 그의 죽음은 예고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쇠돌이 용이의 불쌍한 삶을 이해하게 되고 기꺼이 일지매 가면을 쓰고 죽음을 선택하는 것은 관계에 열광하는 우리네 정서를 잘 활용한 가면의 활용법이다. 이러한 선택은 봉순(이영아)에게로 고스란히 이어진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가면이 이런 슬픈 정서에 활용된 것일까. 그 이유는 ‘일지매’ 특유의 서민에 대한 따뜻한 시선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잘 생각해보면 이 사극에서 가면을 쓴 자는 일지매만이 아니다. 일지매는 그것이 상징적으로 도드라지게 표현된 것뿐이지, 드라마 상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민초들은 저마다 자기만의 가면을 쓰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어린 시절 오빠가 살해당하는 아픔을 겪은 봉순이, 그 살인을 저지르고 죄의식을 숨기며 살아가는 공갈아제(안길강), 자신의 출생을 모른 채 얼자로서의 온갖 설움을 받고 자란 시후(박시후), 친 혈육 한 점 없는 극단의 고독을 숨기며 살아온 쇠돌(이문식), 그리고 첩으로서 버려지고 아들마저 버릴 수밖에 없었던 단이까지 모두가 겉으로 보기에 때론 유쾌하고 때론 아무 일도 없어 보이는 얼굴의 가면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아무 일 없어 보이는 가면의 얼굴은 우리네 서민들의 얼굴이기도 하다. 늘 웃고 있지만 그 안에 힘겨움과 아픔과 고통을 숨기고 있는 서민들의 얼굴 말이다. 일지매가 보여주는 가면의 슬픈 정서는 바로 이 현재를 살아가는 서민들의 슬픈 자화상을 그대로 담고 있다. 진정한 의미로 일지매가 의적으로서 서민들의 영웅이 되는 것은 바로 이 슬픔의 정서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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