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해줘 홈즈'가 그리는 새로운 집의 세계, 이제 1년 살기까지

 

커다란 창 가득 제주도의 풍광이 한 가득이다. 파란 하늘과 초록빛 녹지들. 야자수들이 바람에 흩날리는 넓은 정원 저편으로 우뚝 솟아오른 산방산과 제주도 바다가 펼쳐져 있다. 이런 풍광을 일 년 정도만이라도 보며 살 수 있다면 한 평생의 기억에 남는 시간이 되지 않을까.

 

MBC 예능 <구해줘! 홈즈>가 간 곳은 제주도. 그런데 이번에 의뢰인들이 구하는 건 '1년 살기 집'이다. 제주도의 독특한 임대방식인 '연세(1년치 세를 미리 한꺼번에 내고 사는 것)'로 1년을 살아볼 집을 구하는 것. 사실 최근 들어 많은 이들이 한 번쯤 꿈꿨을 로망을 <구해줘! 홈즈>가 소재로 가져왔다.

 

제주도라는 공간이 주는 보는 것만으로도 힐링되는 그 곳에서 장동민과 김혜은 그리고 공간 디자이너 안소연이 찾아간 첫 번째 집은 서귀포시 안덕면에 위치한 이른바 '야자타임 하우스'다. 이국적인 휴양지 분위기를 물씬 품고 있는 그 곳은 방이나 거실에 난 커다란 통창으로 보이는 제주도의 풍광이 그림 같은 집이었다. 특히 2층에서 창밖으로 보이는 대자연은 모두를 감탄하게 만들었다.

 

배우 한채영과 노홍철 그리고 공간 디자이너 임성빈이 찾아간 곳은 제주시 구좌읍이었다. 영화 <계춘할망>의 촬영지이기도 했던 그 곳은 바람과 돌담이 어우러져 가장 제주스러운 곳으로 정평이 나 있는 곳이었다. 그 곳에서 찾아간 집 '82년생 한옥임'은 '야자타임 하우스'와는 또 다른 매력을 가진 집이었다. 1982년에 준공된 집을 옛맛을 살리면서 리모델링한 그 집은 정원에 감귤나무, 무화과나무가 가득했고, 300평이 넘는 공간에 밭까지 있어 농사를 하고 싶어하는 의뢰인에게도 어울리는 집이었다.

 

제주의 감성이 물씬 풍기는 돌담을 따라 들어가면 앉아서 앞마당을 바라볼 수 있는 데크가 있는 그 집은 전통적인 제주 단층 주택의 느낌이 물씬 나는 내부 구조를 보여줬다. 다소 단출한 내부 구조를 갖고 있지만 그것이 오히려 매력으로 다가오는 집. 이 집 역시 창 밖 풍광을 내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고, 바깥채가 따로 있어 작업실이나 게스트룸으로도 활용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런 제주도 집에서 1년 살이를 하는데 드는 비용은 얼마나 될까. '아자타임 하우스'는 보증금 2,000만 원에 연세 2,000만 원이었고. '82년생 한옥임'은 보증금 500만 원에 연세 1,800만 원이었다. 의뢰인이 원했던 연세 최고 2,500만 원보다 조금씩 저렴한 가격. 사실 1년 살이에 연세로만 2,000만 원 가량의 비용을 쓴다는 것이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도시생활을 오래도록 해 일생에 한 번이라도 그걸 벗어나고픈 분들에게 이 비용은 충분히 감당할 만 하지 않을까. 온 가족이 해외여행을 간다고 했을 때 드는 비용과 비교해보면 그런 잠깐의 여행이 아닌 1년 살기의 가치는 더 크지 않을까.

 

주목해야 할 건 <구해줘! 홈즈>가 1년 살기라는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집'의 개념으로 끌어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실 집이라고 하면 우리에게는 여전히 아파트를 먼저 떠올리고, 전세, 월세, 매매만을 생각하는 면이 있다. 하지만 1년 살기의 콘셉트는 연세라는 새로운 임대 방식을 가져와 집에 대한 개념을 소유보다는 경험으로 보는 시각이 자연스럽게 담긴다.

 

혹자는 1년 살기를 '집'으로 과연 볼 수 있는가에 의구심을 제기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집을 반드시 소유개념으로만 파악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한 달 살기를 하든 1년 살기를 하든 아니면 단 하루를 살아도 집은 집이 아닐까. 그 하루하루의 경험들이 쌓아가며 사는 것이 우리네 삶이라는 걸 생각해 보면. 그래서 <구해줘! 홈즈>가 우리네 고정관념 속에 있는 집에 대한 관념을 다양한 양태의 라이프스타일이 담겨진 집을 보여줌으로서 깨주고 있는 건 의외로 중요한 일로 다가온다.(사진:MBC)

<우사남>, 김영광은 오해와 편견을 넘을 수 있을까

 

KBS 월화드라마 <우리집에 사는 남자>에서 고난길(김영광)이라는 이름은 의미심장하다. 웹툰 원작답게 장난스런 작명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이 인물이 격을 오해와 편견은 말 그대로 고난 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집에 사는 남자(사진출처:KBS)'

젊은 남자가 나이든 여자와 사랑을 하게 되고 결혼하는 것이 흠인 세상은 아니다. 하지만 그 여자의 딸인 홍나리(수애)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황당할 수밖에 없다.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젊은 남자가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새 아빠라고 나서게 되는데 그 누가 당혹스럽지 않겠는가. 뭐라고 불러야 할지 호칭 자체도 불편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그 새 아빠라는 사람이 없었다면 자신에게 상속될 집과 가게가 그의 소유로 되었다면 더더욱 오해와 편견은 깊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 지역에 부동산을 사들여 사업을 벌이려하는 덕봉(이수혁)이나 홍나리와 결혼을 약속한 남자친구 조동진(김지훈)의 눈에 그 새 아빠라는 고난길이 이상하게 보이는 건 당연하다. 의도적으로 나리의 엄마에게 접근해 재산을 뜯어내려 했다는 의심.

 

하지만 홍나리는 그것이 의심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믿고 싶지는 않은 일이다. 그것은 사고로 죽은 엄마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의 마음은 양갈래로 나뉜다. 고난길이 의도적으로 접근한 것이 아닌가 싶어 그의 방을 뒤져보기도 하지만, 동시에 조동진이나 덕봉이 의심을 할 때는 엄마의 선택을 존중하고 믿고 싶어 하는 속내를 드러낸다. 그러면서 조동진이나 덕봉의 의심이 너무나 속물적이라고 치부한다.

 

그래서 상황을 받아들이려 하지만 그래도 마음 한 자락의 의심을 접을 수가 없다. 그런데 그럴 때 보이는 고난길의 모습은 사뭇 진지해진다. 홍나리가 엄마를 떠올리고 싶을 때 어떻게 하냐고 묻자 고난길은 눈을 감고 생각하면 그 모습이 떠오른다고 말한다. 또 자주 엄마의 산소를 찾느냐고 묻자 엄마가 좋아하는 시각에 찾곤 한다고 말한다. 한없이 가볍게 상황들을 보여주던 드라마는 고난길의 이런 장면에서는 굉장히 진중해진다. 그것이 바로 그 많은 오해와 편견 속에서 그의 진심을 드러내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우리집에 사는 남자>가 엄마가 갑작스런 사고로 죽고 젊은 새 아빠를 맞게 된 홍나리의 로맨틱 코미디로서 시종일관 달달함과 유쾌한 웃음으로 이야기를 풀어가지만, 그럼에도 이상하게 어떤 따뜻하고 위로받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는 건 바로 이 고난길이 홍나리의 엄마에 대한 진심어린 사랑의 마음을 드러낼 때나 그녀의 딸인 홍나리를 마치 딸 바보처럼 챙기는 마음을 드러낼 때다.

 

진상 손님들이 수시로 진상을 부려도 네 고객님하며 깍듯하게 응대해야 하는 승무원이라는 직업의 피곤과, 갑작스런 엄마의 사고사 그리고 오래도록 사귀어 이제 결혼을 앞두고 있는 남자친구가 회사 후배와 바람이 난 상황, 게다가 자신의 집과 가게가 고난길이라는 새 아빠에게 넘어간 상황은 홍나리가 처한 힘겨운 현실들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난길이라는 인물을 통해 보여지는 보호받고 지지받는 듯한 느낌은 이 드라마가 왜 힐링드라마가 되는가를 잘 말해준다. 결국 그건 그 오해와 편견을 넘어서는 고난길의 진심에서 생겨나는 따스함이다

<육룡>, 민초들의 대변자 신세경의 일갈

 

그럼 전 뭘해요? 산다는 건 뭔가 한다는 거잖아요. 근데 전 아무 것도 할 게 없어요. 길을 잃었다고요. 그럼 그냥 이렇게 죽어요? 뭐라도 해야 사는 거잖아요.” SBS 월화사극 <육룡이 나르샤>에서 분이(신세경)는 정도전(김명민)에게 이렇게 토로한다. 그녀는 절망하고 있다. 아니 백성들이 그렇다. 자신들이 경작한 쌀의 무려 8할을 세금으로 뜯어가는 양반들이다. 그것도 모자라 9할로 세를 올렸다. 잦은 왜구들의 출몰로 백성들을 돌보기 위함이라는 미명하에.

 


'육룡이 나르샤(사진출처:SBS)'

<육룡이 나르샤>에서 민초들은 그들이 경작하는 땅을 고스란히 닮았다. 그들이 경작하는 땅이 그렇듯이 제 몸이 제 몸이 아니고 끊임없이 수탈당한다. 정도전은 절망에 빠진 분이에게 한 가지 희망을 전한다. 버려진 황무지를 개간해서 곡식을 경작해보라는 것. 하지만 이런 시도는 금세 들통이 나버린다. 한때는 성균관의 지식인이었으나 모진 고문 끝에 변절하고 이제는 앞장서 백성들을 수탈하는 홍인방(전노민)의 가노들이 들이닥쳐 민초들을 짓밟고 경작한 곡식을 빼앗는다. 그들은 말한다. “고려의 모든 땅은 다 나라 땅이야.”

 

분이와 살아남은 민초들을 구해준 이방원(유아인)은 굳이 관아에 가겠다는 그녀를 막아 세우며 결국 너희들이 국법을 어겨 이 사단이 난 것이 아니냐고 말한다. 그러자 누르고 눌렀던 분이의 분노가 폭발한다. 이방원의 뺨을 올려붙인 그녀는 당신 귀족 따위가 뭘 알아?”하고 쏘아붙인 후 그녀가 태어나서부터 지금껏 당해왔던 일들을 줄줄이 털어놓는다.

 

원래 우리 땅에서 한 해에 4백석의 곡식이 나왔어. 국법? 국법에 의하면 40석은 나라에 40석은 향리에 바쳐. 그게 바로 법이야. 하지만 난 태어나서 단 한 번도 그런 걸 본 적이 없어. 내가 태어나던 해 우린 240석을 바쳤대. 내가 여섯 살이 되던 해 320석을 바치고 그리고 얼마 전에 주인이라고 주장하는 여덟 명의 귀족에게 자그마치 360석을 바쳤어. 남아있는 40섬으로 일 년을 살아야 되는 인원은 200명이 넘어. 그게 어떤 숫자인지 모르겠지? 하루에 밥 두 숟가락씩만 먹고 살아야 된단 이야기야.”

 

9할의 세금. 물론 이건 여말선초의 극단적인 상황을 말하는 것일 게다. 하지만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샐러리맨들에게도 분명 울림이 있다. 매달 월급 명세서를 보면 어디로 어떻게 사용되는지도 모른 채 각종 보험료가 숭덩 잘려진 쥐꼬리만한 월급이 들어오고 치솟는 전세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무리해서 은행 빚 얻어 산 집은 집값은 뚝뚝 떨어지는데 이자는 따박따박 나간다. 아이들을 점점 커가고, 몇 년도 안 되어 계속 바뀌는 교육정책 때문에 이리저리 휘둘리며 여기 찔끔 저기 찔끔 보내는 학원비도 만만찮다. 결혼을 기피하고 출산율이 떨어지는 건 육아와 교육이 마치 사치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육룡이 나르샤>9할의 세금은 그래서 지금 현재 우리에게는 여러 명목으로 쪼개진 채 샐러리맨들을 압박하고 있는 중이다. 그나마 직장이 온전한 샐러리맨들은 사정이 괜찮은 편이지만 이제 사회에 나가야할 청춘들은 이미 대학교 때부터 지게 된 등록금 빚으로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살아간다. <육룡이 나르샤>의 백성들이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건 좀더 나은 세상을 원하는 그런 사치스런 일이 아니다. 그것은 생존이다. 삶이 삶이 아닌 현실에서의 생존.

 

그래도 우린 살아야 됐고 그래서 이 황무지를 파고 또 팠어. 올해 추수를 하는 그 첫 수확이었고 근데 사람을 죽이고 곡식은 다 빼앗아 갔어. 그래서 난 3년 동안 개간하고 낱알 하나 먹지 못하고 간 죽은 언년이를 위해서라도 뭐라도 할 거야. 살아있으면 뭐라도 해야 되는 거니까.” 분이의 일갈은 지금의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줄까. 그리고 9할의 세금이 상기시키는 것들은 무엇일까. <육룡이 나르샤>의 민초들을 보다보면 자꾸만 현재의 허리띠를 조이는 서민들과 샐러리맨들이 아른거린다. 국가는 도대체 무엇일까. 아니 어떤 것이어야 할까.



<강남1970>은 왜 이민호를 캐스팅했을까

 

<강남1970>은 제목에 시간적 공간적 배경을 그대로 집어넣었다. 1970년대의 강남.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이것은 지금의 강남이라는 공간이 막연히 표징하는 의미와 맞닿아있다. 테헤란로를 중심으로 도열한 빌딩들과 회사들은 우리네 상류층의 막강한 자본을 상징하고, 도곡동에서 대치동, 압구정동에 들어찬 천정부지의 집값을 자랑하는 아파트들은 부동산 버블을 타고 커버린 개발시대의 경제에 맞닿아 있다. <강남1970>은 현재의 강남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하는 그 시원을 따라가는 영화다.

 

사진출처: 영화 <강남1970>

어찌 보면 자못 탐구적이고 탐사적일 수 있는 이 영화를 유하 감독은 누아르로 풀어낸다. 마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의 우울함에 <영웅본색>의 핏빛 액션이 그 겉모습이고, 그 이면에는 강남이라는 공간으로 표징되는 부동산 경제가 어떻게 경제와 정치 그리고 폭력의 야합으로 만들어졌는가가 다뤄진다.

 

그러니 이 영화는 종대(이민호)와 용기(김래원)가 밑바닥에서부터 성공을 위해 안간힘을 쓰며 올라가는 그 액션 누아르에 초점을 맞춰 즐기는 것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게 연출되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이어지는 형제애와 욕망의 줄다리기는 전성기 시절의 홍콩 영화처럼 때론 속 시원하고 때론 긴장과 이완을 덧붙이는 연출로 즐거움을 주기에 충분하다.

 

이민호라는 꽃미남으로 이미지화된 배우를 캐스팅한 것은 그래서 다분히 모험적이지만 결과적으로 잘된 의도라고 판단된다. 이민호는 자칫 의미 과잉이 될 수 있는 영화를 멋진 액션 영화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그저 서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이 배우가 조폭들 사이에서 화려한 액션을 보일 때는 카타르시스마저 느끼게 해준다.

 

그러면서 영화는 결코 1970년대의 강남이라는 우리네 현대사에 대한 의미화를 버리지 않는다. 어찌 보면 말끔해 보이는 그 강남이라는 공간은 마치 이민호가 멋진 슈트를 차려입고는 있지만 그 자리에까지 오기 위해 무수한 피들이 그의 손에 묻혀졌던 것과 같은 의미로 다가온다. <강남1970>은 그렇게 피로 세워진 이 도시의 한 시절을 그려낸다.

 

물론 그 이면에는 개발시대의 군부독재와 그 정권을 유지하려는 정치인들, 그들과 손대려는 자본가들 그리고 몸뚱어리 하나가 부서져도 욕망을 쟁취하려는 조폭들의 커넥션이 있다. 그 단단한 커넥션은 결국 맨 꼭대기의 권력자들만을 남긴 채 그 밑은 끊임없이 희생되고 대치되는 시스템의 세계다. 시스템을 운용하는 이들을 제외하고, 모두가 제 손에 쥐었다고 생각하는 욕망을 그들은 끝내 쥐고 있지 못한다. 그것이 게임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유하 감독이 <말죽거리 잔혹사>, <비열한 거리>에 이은 <강남1970>으로 이른바 폭력 3부작을 통해 일관되게 다룬 것은 권력 시스템과 부딪쳐 깨지는 개인의 문제였다. 그들은 모두 시스템에 저항하거나, 적응하거나 혹은 그 시스템을 장악하려다 실패한다. 그리고 그렇게 몸뚱어리 하나를 갖고 부딪친 개인들의 희생을 발판으로 시스템의 주인들이 권력을 장악한다.

 

<강남1970>의 마지막 장면은 이 70년대의 이야기가 현재와 어떻게 마주하고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과거 70년대 손에 피를 묻혔던 그들은 지금 현재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그 말끔한 양복 아래 숨겨진 잔인함은 강남이라는 공간의 말끔함을 다시금 바라보게 만든다. 유하에게 강남은 그런 공간이었을 것이다. <강남1970>은 그래서 1970년대를 향수하는 영화가 아니다. 대신 그것은 지금의 문제가 1970년대의 한 지점에서부터 비롯되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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