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의 후예>, 가상공간에 세운 본능적인 이야기

 

KBS 수목드라마 <태양의 후예>는 한 편의 영화 같다. 기존 지상파 드라마들과는 여러 모로 다르다. 물론 이런 해외 로케이션을 한 블록버스터 드라마가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놀라운 풍광을 가진 이국적인 로케이션에도 불구하고 그 이야기가 그 공간에 매몰되지 않고 거기 있는 사람들의 보다 극적인 이야기로 풀어지고 있는 드라마는 보기 드물다.

 


'태양의 후예(사진출처:KBS)'

여기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는 것이 왜 <태양의 후예>가 굳이 우르크라는 가상의 국가를 배경으로 내세웠는가 하는 점이다. 실제 촬영은 그리스에서 이뤄졌지만 어딘가 아랍권과 경계를 둔 분쟁지구 같은 느낌을 주는 공간이다. 그 곳의 한국군 주둔부대에서 유시진(송중기)과 강모연(송혜교)은 각각 군인과 의사로서 재회한다.

 

유시진이 강모연과 오랜만의 만남에 대해 반가움을 표하며 이야기를 나누다 짐짓 그녀가 지뢰를 밟은 것 같다며 장난을 치는 장면은 우르크라는 공간이 아니면 나올 수 없는 에피소드다. 그 장난 같지만 분쟁지구에서나 일어날 법한 극적인 이야기들을 우르크라는 가상공간 설정이 가능하게 해준다.

 

아랍의 무바라크 의장을 수술해야 하지만 타국의 의사가 몸에 손을 댈 수 없게 하는 수행원들과 서로 총을 겨누고 대치하는 상황도 그렇다. 우르크라는 우리가 막연히 생각하는 어떤 공간을 상정하지 않으면 이런 상황은 우스운 이야기가 될 것이다. 하지만 분쟁지구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결국 군인으로서 유시진이 강모연을 보호하고 의사로서 강모연이 사람의 생명을 살리려 노력하지만 그 두 사람이 모두 그것 때문에 위기에 처하게 되는 이 상황은 이 드라마만이 가진 이야기의 재미를 확실히 드러내준다.

 

아마도 우르크라는 가상공간이 아니라 우리가 잘 아는 지명이었다면 어땠을까. 그것은 여러모로 이야기의 한계를 만들었을 것이다. 실제 현실과 끊임없이 비교될 수도 있고 그래서 더 자유로운 이야기 전개의 발목을 잡을 수 있었다는 것. 우르크는 그런 점에서 보면 <태양의 후예>의 이야기에 날개를 달아주는 힘을 부여했다고 볼 수 있다.

 

그 안에서 벌어지는 유시진과 강모연이 만들어가는 이야기는 꽤 남자와 여자의 본능을 자극한다. 그것은 어찌 보면 어린 시절 누구나 소꿉장난 같은 것을 통해 했던 이야기들이다. 골목 한 켠에 가상의 공간을 설정해 놓고 하는 남자들의 군대 놀이와 여자들의 병원 놀이 같은. 그렇게 보면 <태양의 후예>의 무엇이 우리의 마음을 그토록 사로잡는가를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의식하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매료되는 이야기의 소재와 구조를 담고 있다.

 

우르크라는 가상의 공간과 그 위에서 펼쳐지는 군인과 의사의 전쟁 같은 사랑. 이만큼 드라마틱하면서도 우리의 본능을 건드리는 이야기가 있을까. 이것이 한 번 들여다보면 눈을 뗄 수 없고, 우르크라는 공간에 매료되다가도 그 안에서 서로 부딪치는 남녀의 사랑에 마음을 빼앗기게 되는 <태양의 후예>가 가진 근원적인 힘이 아닐까. 가상이지만, 아니 가상이기 때문에 더더욱 빠져들 수밖에 없는.

<인터스텔라> 광풍에 가려진 <카트>의 현실

 

영화 <카트> 상영관이 팍 죽었어요. <인터스텔라> 흥행 광풍에 직격탄을 맞고 휘청이다가 빌빌거리는 중입니다. 제작자로서 뼈가 아프네요. 가늘고 길게라도 오래 가고 싶습니다. 함께 사는 세상을 향해 절박한 맘으로 만든 영화, 많이 봐주세요. 힘이 돼주세요.”

 

'카트(사진출처:명필름)'

명필름 심재명 대표가 자신의 트위터에 올린 글에는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마치 <카트>라는 영화의 처지가 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소외된 노동자의 처지처럼 다가왔다. 자신들이 원하는 건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 달라는 것이라는 영화 속 주인공의 이야기는 지금 우주 스펙터클의 광풍 속에서 들리지 않는 메아리로 울려 퍼지고 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인터스텔라>는 감독의 이름처럼(?) 놀라운 작품인 것만은 분명하다. 이토록 우주로 날아가 심지어 차원을 뛰어넘는 새로운 스펙터클을 보여주는 영화가 있었던가. 심지어 작은 스크린에서 본 관객들은 영화를 제대로 본 게 아니라며 아이맥스 영화관에 줄을 서는 기현상이 벌어질 정도다. 이 정도면 스펙터클의 새 장을 연 것이나 마찬가지다.

 

놀란 감독이 대단한 것은 이 우주적인 스펙터클을 다시 가족애와 같은 인간적인 끈으로 묶어낸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 안에 들어 있는 복잡한 과학 지식 따위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되지 않는다. 우주 반대편에서 모니터 하나를 통해 저 편에서 날아온 자식의 메시지를 들으며 눈물을 흘리는 아버지의 모습. 그것 하나만으로도 이 복잡하고 신비한 우주의 스펙터클 속에서도 우리는 길을 잃지 않게 된다.

 

하지만 놀란 감독의 <인터스텔라>가 그렇게 대단하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당장 처한 현실만큼 중요하다 여겨지지는 않는다. <카트>의 제작자 심재명 대표가 최근 상영관 축소에 대한 안타까움을 토로한 것은 그래서다. 비정규직의 문제. 어찌 보면 지나는 길에 누구나 한 번쯤을 봤을 지도 모르나 내 현실이 더 급박해 서둘러 발길을 돌렸던 그네들의 이야기.

 

<카트>는 그들의 이야기가 사실은 우리들의 이야기라는 걸 들려주는 영화다. 대단한 주장을 하는 영화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념적인 영화는 더더욱 아니다. 그저 우리 옆집 아줌마가 어느 날 갑자기 겪게 된 이야기를 어떤 편향 없이 담담히 보여주는 그런 영화. 그래서 그것이 누구나의 코앞에 닥칠 현실이라는 걸 알려주는 영화.

 

물론 영화가 어떤 당위에 의해 봐야 하는 그런 것일 수는 없다. 하지만 <카트>는 충분히 재미있는 영화이고 또 의미도 있는 영화다. 무엇보다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을 드러내고, 그걸 통한 각성을 일깨워주는 영화이기도 하다. 그런 영화가 블록버스터들의 광풍 속에 가려져 많은 이들에게 보여질 기회조차 조금씩 박탈되고 있다는 것이 안타깝다는 이야기다.

 

우주의 스펙터클이 잘못됐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의 현실도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이다. 스펙터클이 주는 잠시 간의 마취적인 매혹이 나쁜 건 아니지만, 그것이 자칫 가려버릴 우리네 현실은 저 여전히 존재하는 비정규직들의 절규조차 들리지 않게 만들 수도 있다. 듣지 않으면 우리의 미래가 될 그 현실을.

 

<명량>, 애국영화보다는 <변호인>에 가까운 까닭

 

요즘은 영화관에서 박수를 치는 것이 이상하게 여겨지지만 70년대 말 80년대 초반만 해도 영화를 보며 박수치는 일이 흔했다. 이렇게 된 것은 과거에는 영화가 연극이나 비슷한 실제 무대 체험으로 받아들여졌던 반면, 이제는 영화가 그저 하나의 가상체험일 뿐이라고 인식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명량>을 보다보면 저도 모르게 이 시간을 거슬러 박수라도 쳐주고 싶은 충동을 순간순간 느끼게 된다.

 

사진출처:영화 <명량>

장수된 자의 의리는 충을 좇아야 하고 충은 백성을 향해야 한다. 백성이 있어야 나라가 있고 나라가 있어야 임금이 있는 법이지.” 이순신이 아들에게 던져주는 이 한 마디는 이 영화의 굵직한 메시지를 고스란히 담는다. 자신은 압송되어 고문까지 당하고 백의종군하게 되었지만 여전히 나라를 지키는 최 일선에 서 있는 이순신. 그 이유는 왕이 아니라 백성이라는 것. <변호인>국가는 국민입니다!”라는 한 마디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명량>은 후반부의 해전 장면이 압도적인 스펙타클을 보여주는 블록버스터지만 그렇다고 단지 전투의 재미만을 보여주는 영화는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다. 영화의 전반부가 다소 지루할 정도로 이순신 장군의 내면을 향해 있는 건 그 장수로서의 고민을 감성적으로 이해한 연후에야 바다에서의 전투가 더 깊은 감동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죽음을 향해 스스럼없이 나아가는 자에게서 느껴지는 숭고미는 <명량>이 이순신 장군을 재조명하면서 바라보려는 것이다. 점점 다가오는 330척에 달하는 왜군의 배와 대적해야 하는 고작 12척 남은 배. 한 대 남은 거북선까지 불타버리고 병사들도 두려움에 탈영하는 상황에서 이순신은 단 하나 남은 희망의 불씨를 떠올린다. 그것은 두려움을 용기로 바꾸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스스로 죽음을 향해 나가야 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다.

 

명량이라는 회오리 바다는 그래서 바로 이 죽음에 대한 완벽한 상징으로 다가온다. 죽은 자들의 외침처럼 들려오는 그 바다의 울음소리가 주는 두려움을 내려다보는 이순신의 모습은 두려움을 용기로 바꾼다는 표현이 중의적이라는 걸 말해준다. 그것은 이순신을 포함한 조선 병사들의 마음 속을 회오리치며 헤집고 다니는 두려움을 이겨내는 일이면서, 저 울돌목 바다가 만들어내는 무서운 조류변화를 오히려 전투의 기폭제로 활용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명량>은 저 77년 반공시절의 <난중일기> 같은 다소 애국심에 호소하는 영화와는 여러모로 궤를 달리한다. 영화는 국가 같은 애국에 호소하기보다는 차라리 백성들을 위하는 애민에 더 호소한다. 국가로부터 버림받은 장수가 백성들과의 의리를 위해 기꺼이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영화다. 게다가 영화가 포착해내는 이순신의 내면은 그것만으로도 국적과 상관없는 위대한 인간승리의 휴먼드라마를 보여준다.

 

김한민 감독은 <최종병기 활>이 그랬던 것처럼 <명량>에서도 역사적 상황을 바탕으로 단순하지만 묵직한 대결이 주는 액션의 묘미를 선사하면서도, 동시에 그 속에서 활이나 바다가 주는 의미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액션 속에 인물들의 감정이나 정서를 잘 얹는 감독인 만큼 죽음의 바다를 향해 나가는 이순신의 내면이 압도적인 전투신과 절묘하게 어우러지게 만들었다.

 

최민식의 연기는 한 마디로 압권이다. 그 스스로는 이순신 장군의 내면을 100% 이해하지 못해 흉내만 냈다고 했지만 영화는 최민식이라는 배우가 있어 비로소 수백 년 전의 영웅을 부활시킬 수 있었다. 표정 하나 동작 하나도 빼놓을 수 없는 그의 연기는 죽음 앞에서 오히려 담대하게 맞섬으로써 죽고자 하면 살 것이라는 걸 몸소 보여준 이순신의 면면을 되살려놓았다.

 

만일 영화를 보면서 박수를 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된다면 그것은 명량 해전 당시 유일한 희망이었던 이순신 장군에 대한 백성들의 마음과 공감하는 바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절체절명의 국가적 위기 상황 속에서 정작 나라를 지켜야할 정치인들은 저 살길만을 찾을 때, 오롯이 백성들만을 생각하며 선선히 죽음을 불사하고 나가는 리더십에 대한 강렬한 대중의 욕망이 수백 년을 넘어 전해지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앞에는 아직도 저 명량의 회오리 바다가 놓여있다.

 

<군도>의 평가와 다른 흥행돌풍, <명량>에 미칠 효과

 

영화 <군도 : 민란의 시대(이하 군도)>의 평점은 6점대까지 떨어졌다. 이례적으로 관객과 평단의 평가가 거의 비슷하다. 항간에는 격한 목소리로 <군도>를 비판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만큼 기대가 컸다는 얘기겠지만 실상 <군도>의 기획은 엇나간 부분이 없지 않다. 너무 스타일로 폼을 잡다 보니 정작 <군도>의 핵심이랄 수 있는 민중의 정서가 빠져버린 탓이다.

 

'사진출처:영화 <명량>'

만일 민중의 적으로 묘사된 조윤 강동원과 그와 맞서 싸우는 의적 도치 하정우의 스타일리쉬한 액션이 아니라 봉기하는 민중의 한 사람이었던 장씨 역할의 김성균이 좀 더 부각됐으면 어땠을까. 만일 이 스타일이 잘 빠진 액션 활극을 민중들의 분노와 좀 더 끈끈하게 엮어냈다면 이 작품은 더 놀라운 결과를 만들었을 지도 모른다.

 

마케팅적으로 보면 4일 만에 2백만 관객 돌파 같은 속도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얼마나 입소문을 타고 그 흥행이 유지되느냐가 더 중요하다. <군도>는 그런 점에서 불리한 입장이다. 보고 나온 관객과 평단 모두 좋지 않은 평가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평가가 좋지 않은데도 흥행속도가 빨라지는 이유는 뭘까? 가장 큰 것은 이 영화가 적어도 확인하고 싶은 욕구를 건드린다는 점이다. ‘민란의 시대라는 거대한 타이틀이 걸려 있는데다 포스터를 뚫고 나올 듯한 하정우의 강렬한 인상과 칼날처럼 날카로운 이미지를 보여주는 강동원을 보고 나면 왜 이렇게 평가가 안 좋지?”하는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드라마라면 계속 이어보는 것이기 때문에 낮은 평가는 다음 시청률에 반영돼 결과로 나타날 수 있다. 하지만 영화는 기본적으로 직접 확인해봐야 그 결과를 평가할 수 있는 장르다. 또 누군가 재미없다고 해도 또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재미있을 수 있는 게 영화다. 그러니 더더욱 타인의 평가가 자신의 기대치를 무너뜨리는 것에 대해 오히려 더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군도>가 이번 우리네 블록버스터의 첫 발을 끊은 것도 흥행돌풍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방학이 시작되는 시점이고 영화관으로 사람들이 발길을 모으는 블록버스터의 계절이 막 열리는 그 시기에 <군도>가 그 첫 번째 갈증을 풀어주는 영화로 개봉된 것은 마케팅적으로 대단히 유리한 상황이다. 물론 <트랜스포머3><혹성탈출2> 같은 만만찮은 경쟁작들이 이미 포진했지만 우리 영화에 대한 대중들의 기대감은 조금 더 높은 편이다.

 

<트랜스포머3>가 사실상 중국을 겨냥한 듯한 인상이 짙고, <혹성탈출2>도 작품은 좋지만 전편만 못하다는 평가도 <군도>에게는 좋은 결과로 작용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군도>에게도 앞으로 똑같이 해당되는 문제로 다가올 가능성이 높다. 즉 곧 개봉할 <명량>이 이미 만들어진 기대감 위에 관객과 평단의 좋은 평가까지 갖게 된다면 대중들의 시선은 금세 <명량>쪽으로 기울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군도>를 보고 어떤 실망감을 느낀 관객이라면 그 보상욕구로서 <명량>을 찾아볼 가능성도 높다. 올 여름 개봉을 앞둔 우리네 영화들이 블록버스터인데다가 같은 역사극이라는 점은 이런 상관관계를 만들어낸다. <군도>를 보며 액션활극의 장쾌함은 느꼈을지 몰라도 정서적인 울림을 갖지 못한 관객은 <명량>의 이순신의 대사 한 마디가 엄청난 끌림으로 다가올 수 있다.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남아있사옵니다.” 이 대사가 만들어내는 정서적 울림은 과연 <군도>의 흥행돌풍을 압도할 수 있을까. <명량>의 폭풍전야가 기대되는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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