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길들이기2>에 끌리는 몇 가지 요소들

 

이야기가 주는 메시지만을 놓고 보면 <드래곤 길들이기2>역시 전편만한 속편은 없다는 통설을 떠올릴 수 있다. 사실 이것은 <드래곤 길들이기>가 워낙 전편에서 파격적인 메시지를 던졌기 때문에 남게 된 잔상이다. 아이들이 보는 애니메이션에게 주인공이 다리가 잘리는 사고를 보여준다는 건 웬만한 파격을 즐기는 제작자로도 쉽게 선택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다.

 

'사진출처:영화 <드래곤 길들이기2>'

하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드래곤 길들이기>는 여타의 아동용 애니메이션의 틀을 훌훌 털어버릴 수 있었다. 아이도 재밌지만 어른들도 그 메시지에 공감했던 것. 이로써 <드래곤 길들이기>는 장애를 바라보는 시선을 뛰어넘었고, 또 타자와 어떻게 공존해나가는가에 대한 주제의식을 살릴 수 있었다.

 

거기에 비하면 <드래곤 길들이기2>는 메시지에 있어서 조금은 약하다고 여겨진다. 물론 주인공 히컵이 다리를 잃는 대신 투슬리스와의 우정과 공존을 얻어냈듯이 이번 속편에서도 잃는 것과 얻은 것이 등장한다. 그것 역시 파격이라면 파격일 수 있지만 그래도 전편만한 충격을 주지는 않는다.

 

그런데 블록버스터 영화는 메시지만을 보기 위해 보는 건 아니다. 압도적인 볼거리의 측면을 보면 이번 속편이 전편보다 훨씬 더 화려해졌다는 걸 알 수 있다. 히컵이 투슬리스와 함께 비상하는 장면이나 훨씬 더 스케일이 커진 전쟁신. 그리고 무엇보다 다양해진 드래곤 캐릭터들은 이 영화가 메시지면에서 약해졌다고 여겨지면서도 전체적으로 힘을 잃지 않는 이유다.

 

<드래곤 길들이기>는 제목에서 드러나듯 아이들이라면 누구나(어른들 역시 마찬가지지만) 갖게 되는 애완동물 길들이기의 욕망을 자극한다. 애완동물이 사람에게 주는 상반된 감정은 타자라는 두려움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통을 하게 될 때 느끼는 즐거움이다. <드래곤 길들이기>가 전편에서 드래곤과 인간의 공존을 그리면서 관객에게 부여한 감정이 그것이다. 귀여움과 용맹함을 겸비한 투슬리스는 그 상반된 감정을 동시에 떠올리게 하는 완벽한 캐릭터다.

 

물론 히컵 엄마의 등장은 조금은 생뚱맞은 느낌이 있지만 그래도 그녀가 등장해 히컵이 그렇게 드래곤과 교감할 수 있게 된 것에 대한 일종의 출생의 비밀을 알게 해주는 장면도 그리 나쁘지 않다. 다만 이 과정에서 오랜만에 가족이 모이는 화기애애함을 보여주면서, 이미 벌어지고 있는 전쟁의 긴박감이 상당부분 사라진 점은 아쉬운 점이다. 하지만 그래도 엄마의 등장은 이번 작품의 방점이 히컵의 성장에 놓여 있다는 것을 두고 보면 괜찮은 설정이라 여겨진다.

 

전편이 드래곤과 인간의 대결과 공존을 그렸기 때문에 무언가 새로운 이야기를 해야할 <드래곤 길들이기2>가 선택한 건 드래곤과 드래곤의 대결이다. 그 거대한 드래곤 전쟁의 볼거리는 더욱 커졌지만 이것이 전형적인 선악 구도로 단순화된 점은 아쉬운 면이다. 적어도 <드래곤 길들이기>를 보러온 관객이라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조금은 새로운 대결을 보고 싶어했을 수 있다.

 

<드래곤 길들이기2>는 확실히 전작이 남긴 메시지의 강렬함을 보여주진 않는다. 하지만 그 독특한 <드래곤 길들이기>의 세계가 가진 다양한 볼거리와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다양한 캐릭터들의 향연은 여전히 매력적이다. 만일 3D로 보게 된다면 투슬리스와 함께 하늘을 비행하는 느낌이 어떤 것인가를 조금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드래곤 길들이기2>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운 영화다.

 

<혹성탈출> 변칙 개봉 논란과 영화의 공존

 

<혹성탈출 : 반격의 서막(이하 혹성탈출)>에서 시저는 유인원 종족들을 이끌고 인간들 앞에 서서 서로의 영역에 대해 말한다. 숲은 유인원들이 사는 공간이고, 도시는 인간 생존자들이 사는 공간이라는 것. 시저는 각자의 영역에서의 공존을 이야기한다. 즉 인간과 유인원 간의 대결을 보여주는 <혹성탈출>20세기 내내 인류를 전쟁으로 내몰았던 타자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그 바탕에 깔고 있다.

 

사진출처: 영화 <혹성탈출 : 반격의 서막>

10여 년을 각각 살아가던 인간과 유인원이 어느 날 우연히 조우해 총성이 울리는 그 장면은 그래서 이 영화 전체를 압축한다. 인간은 낯선 숲에서 갑자기 마주친 비슷해 보이지만 다른유인원에게 느낀 공포로 인해 방아쇠를 당기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유인원이나 인간이나 마찬가지다. 인간에게 잡혀 갖가지 실험을 당했던 유인원 코바는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공포와 적대감에 사로잡혀 있다.

 

하지만 타자에 대한 다른 선택도 있다. 시저와 말콤이 유인원과 인간이라는 타자에 대한 공포를 뛰어넘어 신뢰와 우정으로 나아가는 선택이 그렇다. 말콤이 유인원들의 숲에 죽음을 불사하고 들어간 것은 그 두려움을 공존의 의지로 넘어서려는 노력을 보여준다. 물론 이런 공존에 대한 노력은 양자 간의 대결이 아니라 평화를 깨려는 내부의 적들에 의해 무너져 내린다.

 

블록버스터이면서도 진지한 인문학적 질문을 던지고 있는 <혹성탈출>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의 개봉에 있어서 아이러니한 문제를 남기고 있다. 즉 이 영화는 공존을 이야기 하지만 이 같은 블록버스터들이 극장가를 점령하다시피 하는 상황은 작은 영화들에게는 공존은커녕 생존을 얘기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 같은 변칙개봉 논란은 이 거대한 몸집의 영화가 개봉일 변경 하나만으로도 작은 영화들이 죽고 사는 문제가 되는 현 영화 생태계를 잘 보여준다.

 

하지만 이 논란을 단지 할리우드 vs 우리 영화로 구분해 대결구도를 갖는 건 온당치 못한 일이다. 그것은 마치 <혹성탈출>의 이야기가 인간 vs 유인원의 대결이 아니라는 것과 유사하다. 시저는 영화의 말미에 유인원이 인간과는 다르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비슷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즉 그것은 인간과 유인원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것은 할리우드와 우리 영화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미 우리네 영화는 상당 부분 할리우드를 닮아가고 있다. 우리 영화에 있어서도 끝없는 스크린 독점이야기가 나오는 건 그래서다. 블록버스터 영화 한 편이 개봉되면 작은 영화들은 소리 소문 없이 스러져 버린다. 그러니 <혹성탈출>의 변칙 개봉의 문제는 우리 영화를 포함한 블록버스터들의 독점적인 스크린 장악 시스템을 얘기하는 것일 게다. 영화는 이제 자본이 장악하고 있다. 자본 아래 국적성이란 그다지 큰 의미가 없다.

 

진정 <혹성탈출>이 주제로 보여주는 것처럼 각자의 영역에서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은 도무지 없는 것일까. 전 세계의 영화관을 거의 독점 하다시피 하고 있는 할리우드의 시스템을 욕하면서도 우리의 자본은 그 시스템을 철저히 배워 우리 시장에 적용하고 있다. 결국 <혹성탈출>이 얘기하는 것처럼 적은 외부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내부에 있다. 타자에 대한 두려움과 끝없는 욕망은 영역과 종족 구분 없이 전쟁을 발생시키는 원인이다.

 

인간의 총을 가져와 유인원들에게조차 총구를 겨누는 코바의 모습은 그래서 안타깝게도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제 저 할리우드의 습격을 민족주의적이고 국가주의적인 잣대를 내세워 욕할 자격이 더 이상 우리에게는 없다. 결국 그 총을 들여와 우리 영화계를 향해 겨눈 것은 우리네 거대자본이 아니던가.

 

시저와 말콤이 신뢰를 바탕으로 한 공존을 꿈꾸면서도, 시저의 말대로 이미 전쟁은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전쟁은 이제 더 이상 유인원과 인간의 전쟁이 아니다. 공존하겠다는 의지와 모든 걸 장악하겠다는 의지의 대결이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현재 우리네 영화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스크린 전쟁의 진면목이기도 하다. 따라서 <혹성탈출>의 변칙 개봉 논란은 할리우드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 현재 처한 문제이기도 한 셈이다.

심형래의 집착과 착각, 그리고 우려

 

현재 <디워2>를 놓고 투자 얘기가 오가고 있다. 임금 체불 금액은 감독료에서 가장 먼저 변제하고 제작에 돌입할 예정이다.” JTBC <전진배의 탐사플러스>에 출연한 심형래는 다시 <디워> 이야기를 꺼냈다. <어벤져스2> 촬영 현장을 다녀온 소회도 밝혔다. 그는 과거 LA에서 <디워>를 찍던 시절이 떠올랐다며 부럽기도 하고 감개무량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전진배의 탐사플러스(사진출처:JTBC)'

왜 또 하필 <디워>일까. 심형래는 그것이 자신의 주특기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혼자 편하게 살려면 코미디를 하면 되는 일이지만 제일 중요한 건 독자적 콘텐츠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 <아바타>의 제작비 1조 원 운운하면서 결국 하려는 이야기는 아이디어만 좋다면 승산이 있다는 것이다. 이미 80% 시나리오를 완성했다는 <디워2>. 과연 심형래의 말처럼 승산이 있을까.

 

먼저 우려되는 점은 심형래가 그토록 집착하는 <디워>라는 콘텐츠가 그다지 경쟁력이 없다는 점이다. 이무기 전설을 모티브로 한 괴수 영화는 그다지 새로운 소재가 아니다. 결국 중요한 건 소재가 아니라 이를 살려내는 감독의 능력이다. 하지만 700억을 들여 만들었다는 <디워>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심형래 감독의 블록버스터 제작 능력은 CG나 스토리, 영상 연출 그 어느 것에서도 경쟁력을 찾기가 어렵다.

 

캐릭터 애니메이션을 조금만 아는 이라면 <디워>가 그리고 있는 이무기라는 캐릭터가 그다지 어렵지 않은 소재라는 걸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결국 캐릭터 애니메이션에서 가장 어려운 건 인물 캐릭터다. 하지만 이무기 같은 실제로 본 적이 없는 가상의 캐릭터를 애니메이션 하는 건 상대적으로 쉽다. 실제와의 비교점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디워>의 애니메이션은 그토록 많은 돈을 쏟아 붓고도 그다지 경쟁력을 찾기 어려웠다.

 

스토리는 더 심각하다. 최근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보면 과거처럼 단순한 애국주의적 스토리나, 선악구도를 훌쩍 뛰어넘어 심지어 철학적인 이야기까지를 담아내는 걸 볼 수 있다. <맨 오브 스틸>이 슈퍼맨이라는 슈퍼히어로를 통해 메시아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캡틴 아메리카 : 윈터솔져>는 쉴드라는 초국적인 조직의 이야기를 통해 세계 경찰을 자임하는 미국의 이중적인 면을 드러낸다. 여기에 비해 <디워>의 스토리는 거의 아이들 애니메이션 수준에 머물러 있다. 영상 구현에 앞서 어떤 스토리를 담아낼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별로 느껴지지 않았던 영화다.

 

그럼에도 8백만의 관객을 동원했던 건 당시 애국주의 마케팅에 대한 논란을 통한 노이즈 마케팅이 힘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디워>의 관객동원은 영화적 성취라기보다는 그 영화를 좌우의 대결로 몰아간 노이즈 마케팅의 성취였다. 애국주의를 놓고 하도 시끄럽게 싸우다보니 도대체 뭔데하는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던 것. 그래서 막상 영화를 보고 나면 생각보다 떨어지는 완성도에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영화란 장르의 성격상 일단 봐야 비판이든 뭐든 할 수 있는 법이다. 만일 드라마 같은 장르였다면 난데없는 애국주의 마케팅을 내세운 <디워>는 애국가 시청률을 기록했을 가능성이 높다.

 

영구아트의 폐업, 임금 체불로 인한 피소, 그 후로 생겨난 엄청난 구설수들. 하지만 지난 1월 개인 파산신청으로 170억 원에 달하는 채무 탕감을 받고, 또 직원 43명의 임금과 퇴직금 등을 체불해 불구속 기소된 후 벌금 1500만 원을 최종 선고 받은 그의 행보는 전혀 바뀌지 않았다. 그의 말 속에는 여전히 정부의 지원이나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식의 과거 신지식인으로 지목되던 시절의 사고방식이 그대로 느껴진다. 자신의 영화가 마치 국가경쟁력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영화란 또한 많은 투자자들의 모험이 따르는 분야이고, 따라서 거대 블록버스터의 실패는 한 나라의 영화판을 왜곡시킬 만큼의 파장을 일으키는 중대한 사안이다. 단순히 접근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디워2>에 대한 집착은 그런 점에서 우려스럽다. 국가주의적인 발상이 마케팅적으로 변환되어 그만한 경쟁력을 발견하기 힘든 작품에 사람들이 몰리는 건 그것이 첫 번째였을 때나 가능했던 일이다. 이미 학습경험이 있는 대중들이 <디워2>를 선택할 가능성은 거의 희박하다. 심형래의 집착에 대한 대중들의 우려 섞인 시선.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설국열차>가 비판하는 <설국열차> 독과점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지 않으신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설국열차>가 다루고 있는 것은 저절로 작동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실체다. 하층 계급이 무임승차한 대가로 사는 열차의 맨 꼬리 부분에서 상층 계급이 살고 있는 맨 머리 부분까지 달려가는 커티스(크리스 에반스)의 여정(?)은 그래서 이 계급으로 나눠진 자본주의 시스템이 어떻게 저 스스로 작동하는 지를 절묘하게 보여준다.

 

'설국열차(사진출처:CJE&M)'

흥미로운 것은 하층 계급의 혁명가인 커티스가 일으키는 반란조차 적절한 인구수를 조절하는 이 시스템의 한 부분이라는 점이다. 하층 계급이 상층 계급으로 올라가려는 욕망은 그래서 이 열차의 통치자인 윌포드(애드 해리스)에 의해 때로는 부추겨진다. 결국 맨 머리 부분까지 올라간 커티스를 윌포드가 설복시켜 차기 통치자로 내세우려는 장면은 그래서 이 시스템의 통제방식이 하나의 반복적인 궤도를 이루고 있다는 걸 말해준다.

 

커티스가 혁명의 이름으로 맨 꼬리 부분에서 맨 머리 부분까지 달려가는 이 욕망의 시스템에 충실한 인물이라면, 남궁민수(송강호)는 이 시스템의 흐름에서 벗어나려는 인물이다. 영화에서 전면에 나선 인물이 커티스임에도 불구하고 남궁민수가 중요한 이유는 그가 결국 이 시스템을 깨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커티스의 오로지 앞으로만 나가려는 힘과 남궁민수의 자꾸만 옆길로 빠지려는 힘은 그래서 이 영화의 중요한 두 흐름과 그 부딪침을 만들어낸다.

 

크로놀 중독자처럼 보이던 남궁민수가 열차의 맨 머리 부분의 윌포드가 있는 문 앞에 서서 커티스와 나누는 설전은 그래서 대단히 흥미롭다. 남궁민수는 그 자리에서 커티스에게 “문을 열고 싶다”고 말한다. 그것은 남궁민수라는 캐릭터의 역할(각 계급의 문을 열어주는 역할)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가 열려는 문은 윌포드가 있는 곳으로 가는 문이 아니다. 열차 바깥으로 나가는 문. 여기서 크로놀은 마약이 아니라 폭탄으로 돌변한다. 시스템에 중독된 이들을 깨는 방식으로 크로놀을 사용한다는 설정에는 봉준호식의 블랙유머가 살짝 들어가 있다.

 

그렇다. <설국열차>는 단순하게 말하면 모두가 동승해야만 하고, 또 각자 부여받은 칸에서 살아야만 하며, 또 계급 상승 욕구를 갖고 있다고 해도 오로지 윗칸으로만 달려가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이 무비판적이고 세뇌적인 시스템의 옆구리에 옆으로 나갈 수 있는 구멍을 뚫는 영화다. 모두가 다 앞으로만 달려갈 때 왜 그래야 하느냐고 질문하는 남궁민수의 역할은 그래서 봉준호 감독의 메시지를 전하는 메신저에 해당한다.

 

결국 이 <설국열차>는 자본주의의 시스템이 작동하는 방식을 열차라는 상황으로 집약해 놓은 놀라운 작품이다. 마치 카프카가 만들어내는 세계가 그러하듯이 거기에는 비현실적이고 심지어 판타지적인 세계가 그려지지만 그 세계의 작동방식이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에 너무나 리얼한 공간처럼 느껴진다. 그저 시간 죽이는 블록버스터를 기대했다면 적잖이 옆길로 새는 이 영화는 다소 실망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겨진 상징이나 블랙 유머를 한 번 생각해보면 <설국열차>라는 작품이 가진 나름의 가치를 인정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설국열차>라는 영화 자체가 이 자본주의 시스템의 산물이라는데 있다. 이 영화는 CJ E&M이 무려 450억을 투자해 만들어진 영화다. 할리우드라면 소자본 영화겠지만 우리로서는 블록버스터 중에 블록버스터임에 틀림없다. 그러니 이렇게 투자된 영화에 CJ가 총력을 기울이는 건 당연한 일일 게다. CJ가 구축하고 있는 CGV 멀티플렉스는 그래서 이 <설국열차>가 움직이는 시스템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움직인다. 스크린 독과점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 된다.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에 따르면 <설국열차> 개봉 첫 주말 스크린 수는 1128개로 역대 6위라고 한다. 상영 횟수도 지난 13일만 두고 보면 1014개 스크린에서 무려 5213번 상영되었다고 한다. 이미 6백만 관객 수를 동원하고 7백만 나아가 1천만 관객을 넘어설 것으로 예측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물론 괜찮은 영화지만 가장 많은 스크린을 확보함으로써 결국은 영화관을 찾는 이들이 볼 수밖에 없는 영화가 됐다는 것은 그리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이뿐만이 아니다. 몇몇 언론에서는 아예 대놓고 관객 수 카운팅 기사를 하루에도 몇 번씩 올리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이것 역시 영화 흥행의 시스템 중 하나일 것이다. 이렇게 되면 마치 <설국열차>를 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가 만들어진다. 이 관람의 행렬에 동참하지 않으면 소외될 것 같은 기분. <설국열차>에 올라탄 승객들이 가졌을 기분이 이렇지 않았을까. 영화 속에서 ‘열차 바깥으로 나가면 우린 모두 죽어요’라고 외치는 아이들처럼.

 

<설국열차>는 좋은 영화지만 그것이 관객들에게 보여지는 과정에는 이 영화가 메시지로 던지고 있는 ‘옆길로 샐 권리’ 자체를 봉쇄하는 씁쓸함이 담겨져 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아이러니인가. 영화는 옆길로 샐 권리를 주장하고 있지만 정작 영화가 보여지는 방식은 그걸 허용하지 않고 자본주의 시스템에 굳건히 붙박여 있다는 것은. 이것은 이 영화가 대단하기 때문일까(그만큼 자본주의 시스템을 제대로 꿰뚫고 있기 때문?) 아니면 이런 메시지조차 시스템으로 묶어두는 자본주의의 힘이 대단한 것일까. 봉준호 감독은 이 시스템에서 남궁민수가 되고 싶었겠지만 그 윌포드식의 완벽한 현실의 시스템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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