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완벽한 비서’의 이준혁이 자극하는 판타지

나의 완벽한 비서

‘살림’이나 ‘비서’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우리는 저도 모르게 여성을 떠올리는 경향이 있다. 가부장적 시대를 거치며 오래도록 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을 우리도 모르게 갖게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이러한 성 역할 고정관념은 깨지고 있다. 드라마만 봐도 그렇다. ‘소년심판’ 같은 드라마에 등장하는 여성 판사가 그렇고, ‘낭만닥터 김사부’에 등장하는 남성 간호사처럼 한때 판사하면 남성을 간호사 하면 여성을 떠올리던 고정관념을 깨는 인물들이 최근에는 일상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나의 완벽한 비서’는 이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드라마다. 제목에 등장하는 ‘비서’는 다름 아닌 이준혁이 역할을 맡은 유은호라는 남성이니 말이다. 

 

그런데 이 유은호가 강지윤(한지민)이라는 피플즈라는 헤드헌터 회사 대표의 비서로 스카웃되는 이유가 흥미롭다. 그건 싱글대디로 딸을 홀로 키우며 너무나 깔끔하게 육아와 가사를 하고 있는 그가 눈에 띠었기 때문이다. 완벽하게 정리정돈되어 있는 집안 구석구석과 꼼꼼하게 그 날 해야할 일들이 적혀 붙여져 있는 스케줄표를 본 강지윤의 친구이자 피플즈의 이사인 서미애(이상희)가 유은호가 비서로서 적임자라 판단하는 것. ‘살림’이라는 집안일을 잘하는 그 능력이 ‘비서’라는 직장 내의 능력이 되는 판타지를 이 작품은 건드린다. 아마도 육아 때문에 경력단절을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여성들이라면 유은호의 재취업(?)을 보며 어떤 통쾌함을 느끼지 않았을까. 이 인물이 일과 가정을 모두 쟁취하고픈 여성들에게 판타지를 주는 이유다. 

 

그런데 이준혁을 보면 일에 있어서도 또 살림에 있어서도 뭐든 척척 잘 해내는 유은호를 닮았다. 어떤 역할도 잘 살려내는 배우라는 점에서다. ‘나의 완벽한 비서’에서만 봐도 그렇다. 유은호는 회사에서 잘 나가는 능력있는 직장인이었지만 홀로지내며 마음에 빈 자리가 늘어가는 딸을 위해 육아휴직을 선택하는 인물이다. 그래서 가사일도 척척해내는 살림꾼이 된다. 능력있는 직장인과 살림 잘하는 살림꾼의 역할이 마치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생각해온 고정관념의 틀에서는 이 두 가지가 조화를 이루는 게 어려울 것처럼 보이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준혁은 자상함과 배려심이 일터의 능력으로도 발휘될 수 있다는 걸 이 두 역할을 하나로 묶어냄으로써 보여준다. 게다가 이 인물은 이제 강지윤이라는 회사 대표와의 사적 멜로로 나아갈 것으로 보인다. 회사에서 대표와 비서라는 위계 관계로 구분되지만, 그걸 뛰어넘는 사적 관계 또한 그려낼 거라는 것이다. ‘나의 완벽한 비서’에서 그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주는 것처럼 이준혁이라는 배우는 어떤 위치에 어떤 역할로 던져 놓아도 마치 그것이 진짜 그 사람의 모습인 것처럼 연기해내는 인물이다. 이른바 ‘연기 살림꾼’이라고나 할까. 

 

이준혁의 이러한 다재다능한 면이 도드라졌던 작품은 다름 아닌 ‘비밀의 숲’이었다. 여기서 그가 맡은 서동재라는 검사는 돈 밝히는 ‘스폰 검사’로서 사실상 악역이었다. 하지만 시청자들은 욕망에 이끌리며 왔다 갔다 하는 이 서동재라는 인물에 점점 애정을 갖게 됐다. 선과 악으로 단순히 나뉠 수 없는 ‘인간적인 매력’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이처럼 악역조차 애정을 갖게 만든 것이 가능해진 건 역시 이 복합적인 인물을 설득력 있게 연기해낸 이준혁의 공이 컸다. 그래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서동재라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는 스핀오프 ‘좋거나 나쁜 동재’라는 작품이 제작된 것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인물은 선과 악을 오가는 매력을 드러낸다. 그러면서 궁극적으로는 사건을 해결해가는 과정을 그리지만, 동시에 지극히 현실적인 욕망을 추구하는 그 모습 또한 끝까지 유지해 나간다. 어찌 쉬운 역할이라 할 수 있을까. 

 

이준혁의 다재다능함과 선과 악을 넘나드는 입체적인 이미지는 그가 걸어온 필모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를 본격적으로 시청자들에게 알린 건 가족드라마를 통해서였다. 문영남 작가의 ‘조강지처클럽’에서 한선수 역할을 연기했고, 또 ‘수상한 삼형제’에서는 김이상이라는 인물을 연기했다. 두 작품 모두 당대의 드라마 트렌드였던 가족드라마였다. 하지만 이준혁은 이러한 가족드라마 속 평범한 인물 연기에 머무르지 않고 ‘적도의 남자’의 이장일 같은 강렬한 악역에 도전하기도 했다. 또 ‘맨몸의 소방관’ 같은 전형적인 영웅 서사의 인물을 연기하기도 했고, ‘60일, 지정생존자’ 같은 작품에서는 선인지 악인지 알 수 없는 미스테리한 위치에 서 있는 인물을 특유의 선악을 넘나드는 이미지로 소화해내기도 했다. 가족드라마 같은 생활연기로 시작했지만 ‘비밀의 숲’을 넘어 ‘비질란테’, ‘다크홀’ 같은 장르물의 다소 판타지를 자극하는 연기까지 자신의 영역을 넓혀왔다. 또 ‘범죄도시3’에서는 메인 빌런인 주성철 역할을 맡아 20킬로에 가까운 벌크업으로 완전히 다른 이미지를 그려낸 바 있다.  

 

대중들은 이준혁을 진중함과 비열함 그리고 다정함을 오가는 배우라고 일컫는다. 입을 꾹 다물고 있을 때는 특유의 그 진중함이 묻어나지만, 때론 경박하게까지 보이는 수다쟁이가 되기도 하고 때론 그 표정 뒤에 숨겨진 모습으로 비열함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러면서 눈빛을 부드럽게 만들면 금세 한없이 다정한 연인의 얼굴로 변신한다. ‘나의 완벽한 비서’는 바로 그 다정함을 무기로 보는 이들을 무장해제하게 만드는 그의 얼굴을 드러낸다. 

 

‘살림’은 본래 불교용어에서 나온 말이지만 ‘집안의 경제나 생활 등을 맡아 운영, 관리하는 일’이라는 뜻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살린다’는 의미 또한 부가되어 있다. 사실 우리의 일상은 내버려두면 망가지거나 어지럽혀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너무 일상적이어서 잘 보이지 않지만 누군가의 살림이야말로 우리의 일상을 살리는 일이 된다. 이건 연기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아주 슬쩍 지나가는 역할이라도 이를 살려내기 위한 노력들이 뭉쳐질 때, 연기의 하모니가 힘을 발휘하고 이건 작품의 성공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살림’은 이제 고정된 성 역할의 의미에서 벗어나 누구나 추구해야할 가치가 아닐까 싶다. 어떤 역할이든 살려내는 연기 살림꾼 이준혁처럼. (글:국방일보, 사진:SBS)

웰컴투 삼달리

 

“내가 가장 나다워질 수 있는 이곳. 나의 고향. 나의 사람들. 내 사람들을 들여다 보는 것. 그 안에 내가 있고 내가 살아가야할 길이 있다.” 종영한 드라마 JTBC ‘웰컴투 삼달리’ 마지막회에서 조삼달(신혜선)이 내레이션으로 하는 이 말은 마치 배우 신혜선의 다짐 같다. 그는 드라마 종영 후 가진 인터뷰를 통해 이 작품이 “심신이 지쳐있던 나에게 주는 선물” 같았다고 했고, 결국 자신에게 “숨을 고를 수 있게 해준 작품”으로 남았다고 했다. 

 

실제로 ‘웰컴투 삼달리’는 스타 사진작가로 떠올랐지만 후배의 거짓 갑질 폭로로 하루 아침에 나락을 가버린 조삼달이 도망치듯 고향 제주도 삼달리로 와 상처를 회복하고 잃었던 자신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그렸다. 제주 해녀들의 ‘숨피소리’는 그래서 이 드라마의 주제의식이 담겼다. “해녀들을 교육할 때 가장 강조하는 말이 있다. 오늘 하루도 욕심내지 말고 딱 너의 숨만큼만 있다 오라고. 평온해 보이지만 위험천만한 바다 속에서 당신의 숨만큼만 버티라고. 그리고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땐 시작했던 물 위로 올라와 숨을 고르라고.” 경쟁적이고 각박한 삶에 지친 도시인들에게는 울림을 줄 수밖에 없는 이야기이면서, 이 작품이 쉼 없이 달려온 배우 신혜선에게도 특별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다. 

 

‘웰컴투 삼달리’에서 조삼달이 어려서부터 제주를 개천으로 생각하고 자신은 그 곳을 떠나 용이 되겠다는 큰 뜻을 가졌던 것처럼, 신혜선 역시 어려서부터 연기자의 꿈을 꿨다고 한다. 하지만 꿈을 꾸는 것과 이루는 것은 다른 이야기였다. 그의 데뷔작인 ‘학교 2013’을 보면 첫 작품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자연스러운 연기를 보여주는데, 그가 이미 연기에 남다른 재능을 갖고 있었다는 걸 말해준다. 하지만 이런 재능을 갖고 있는 인물이 24살에 이르러 데뷔를 했다는 사실은 그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는 걸 말해준다. 그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늘 서류에서 떨어져 오디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고 당시를 회고한 바 있다. 

 

하지만 ‘학교 2013’ 이후 ‘고교처세왕(2014)’을 통해 양희승, 조성희 작가를 만나게 되면서 그의 재능은 조금씩 피어올랐다. 이듬해 양희승 작가가 쓴 ‘오 나의 귀신님(2015)’에서 발레리나가 꿈이었지만 사고로 두다리를 잃고 장애인이 된 강은희 역할로 대중들에게 확고한 눈도장을 찍은 신혜선은 그 후로 ‘그녀는 예뻤다(2015)’, ‘아이가 다섯(2016)’, ‘푸른바다의 전설(2017)’을 거쳐 드디어 ‘비밀의 숲(2017)’으로 확실한 존재감을 갖는 배우로 성장한다. 때론 절절한 눈물샘을 자극하는 인물에서부터 때론 코믹하고 때론 시원시원하게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인물까지 다양한 역할들을 소화해낸 신혜선의 배우로서 가진 가장 큰 장점은 ‘들뜨지 않는 연기’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고교처세왕’에서의 인연으로 ‘그녀는 예뻤다’에서도 신혜선을 감독에게 추천한 조성희 작가는 그가 보여주는 ‘힘을 빼고 담백하게 하는 연기’가 너무 좋다고 말한 바 있다. 특유의 차분한 목소리가 주는 신뢰감에, 때론 ‘또라이’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로 웃음을 주거나 혹은 카타르시스를 주기 위해 당돌하게 자신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면모로 변신을 거듭하면서도 무엇 하나 겉도는 느낌일 주지 않는다는 것이 신혜선의 장점이다. ‘비밀의 숲’은 그래서 그에게 ‘영또(영은수+또라이)’라는 별칭이 붙었는데, 그건 극중 그가 연기한 영은수라는 인물의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는 캐릭터를 그가 찰떡 같인 소화해서 생긴 일이었다. 

 

‘비밀의 숲’을 연기한 이듬해에 KBS 주말드라마 ‘황금빛 내 인생(2018)’의 주인공 서지안 역할을 연기함으로써 신혜선은 미니시리즈든 장편주말극이든, 장르물이든 가족드라마든 상관없이 넘나들 수 있는 전천후 배우라는 평가를 받았다. 또 ‘단, 하나의 사랑(2019)’에서는 발레리나 역할을 소화하기 위해 하루 평균 7시간 발레 연습을 하며 몸을 만들어냄으로써 연기력만이 아닌 노력파라는 걸 입증해냈다. ‘신혜선이 개연성’이라는 말도 생겨났다. 영화 ‘결백(2020)’은 이 말이 허명이 아니라는 걸 입증한 작품이다. 살인용의자로 지목된 엄마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나선 변호사 딸 역할을 연기한 신혜선은 냉정한 얼굴에서 차츰 엄마를 이해하게 되면서 감정이 폭발하는 그 변화를 섬세한 연기로 표현해냈다. 또 드라마 <철인왕후(2021)>에서는 조선시대 왕후의 몸으로 영혼이 깃들게 된 현재의 허세남 역할로, 남성과 여성, 현대극과 사극, 정극과 코미디를 넘나드는 연기를 소화했고, 심지어 ‘이번 생도 잘 부탁해(2023)’에서는 전생을 기억하며 19회차 다양한 인생을 살아가는 판타지적 인물을 연기해내기도 했다. ‘결백’ 같은 작품이 말해주는 것처럼 영화에서도 신혜선은 주어진 역할에 따른 자유자재의 변신을 보여줬는데, ‘타겟(2023)’에서는 중고거래를 하다 살인자의 타겟이 되어버린 피해자 역할을 소화한 반면, ‘용감한 시민(2023)’에서는 평범한 기간제 교사로 살아왔지만 불의를 보고는 본색을 드러내는 복면 히어로의 시원시원한 액션을 선보였다. 이처럼 신혜선은 이제 개천을 벗어나 어떤 모습으로도 변신이 가능한 한 마리의 용으로 승천한 배우가 됐다. 

 

하지만 신혜선이라는 배우가 가진 진짜 저력은 용처럼 떠오른 배우이면서도 ‘들뜨지 않는 한 결 같은’ 모습에 있다. 그건 조성희 작가가 말했던 것처럼 그의 연기가 가진 힘의 원천이기도 한데, 판타지로 가든 사극이든 남자의 영혼이 깃들든 천년의 전생 기억을 가지고 있든 차분하게 제 안으로 소화시켜내는 저력이 거기서 나온다. 이제 겨우 10년 차 배우로서 그 짧은 기간을 쉬지 않고 도전해온 결과 이제는 뭐라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다양한 역할들을 충분히 해낼 수 있는 배우로 성장했지만 그럼에도 변함없는 차분한 자세는 그의 타고난 천성일까 아니면 노력의 소산일까.  

 

조삼달이 삼달리에서 작은 공간을 빌어 연 첫 사진전시회의 제목은 ‘人: 내 사람, 그리고 날씨’다. 본래 서울에서 스타사진작가로 성공해 열려 했지만 논란에 휘말려 무산됐던 전시회 제목이었던 ‘人: 내 사람’에 ‘날씨’가 더해졌다. 서울에서 하려던 전시에는 그간 자신을 스타로 만들었던 연예인 사진들로 채워질 것이었지만, 삼달리에서 한 전시에는 대신 제주도 삼달리 사람들로 채워졌다. 제 아무리 멀리 새로운 환경 속에 놓이더라도 제 본분을 늘 잊지 않고 현재의 자신을 만들어준 사람들을 잊지 않는 자세. 현재의 신혜선을 만들어준 그 삶의 자세는 우리 모두에게도 곱씹어볼만한 일이다.(글:국방일보, 사진:JTBC)

‘자백’이 이은 ‘비밀의 숲’ 이후 달라진 장르물

 

16부가 마치 한 편의 영화 같다. tvN 주말드라마 <자백>의 종영에 이르러 돌아보면 이 드라마의 밀도와 완성도에 새삼 놀라게 된다. 곁가지 사건들처럼 여겨졌던 것들이 하나하나 연결고리를 드러내고, 그 속에서 무관해 보였던 인물들이 과거사로 얽혀 있는 게 조금씩 드러난다. 그리고 결국 이 모든 사건이 어느 요정에서 벌어졌던 국방비리로 인해 비롯된 총성으로 귀결된다. 거대한 한 게이트를 열기 위해 조금씩 사건을 파헤치고 어렵고 더뎌도 진실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는 과정. <자백>은 그 과정을 놀랍게도 한 호흡으로 담아냈다.

 

보통의 장르물의 경우 여러 사건들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영화라면 한 사건을 다뤄도 되겠지만, 드라마는 적어도 16부를 이어가야 하기 때문에 한 사건으로 그걸 채우는 건 실로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러 사건들이 등장했을 때 생기는 문제는 이야기가 몇 회를 기점으로 뚝뚝 끊긴다는 점이다. 물론 주인공이 확실한 캐릭터를 세우고 그렇게 끊어진 이야기를 이어붙이는 역할을 해준다.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병렬적인 사건의 나열은 작품의 밀도를 떨어뜨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자백>은 하나의 사건과 그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벌어졌던 또 다른 사건들을 연결함으로써 이런 문제를 해결했다. 블랙베어라는 차세대 헬기 도입에 대해 그 문제를 담은 문건을 작성한 차승후 중령이 대통령의 조카인 박시강(김영훈) 의원에게 우발적으로 총에 맞아 죽게 되고, 그 사건을 덮기 위해 그 자리에 있었던 추명근(문성근)과 오택진(송영창) 회장이 그 자리에 있던 최필수(최광일)에게 아들 최도현(준호)의 심장이식 수술을 대가로 살인범이 되도록 회유했던 것. 그 상황을 목격한 김선희는 이를 빌미로 추명근에게 돈을 요구하다 청부살해 당하고 당시 사건을 추적하던 진여사(남기애)의 아들 노선후 검사와 하유리(신현빈)의 아버지 또한 살해당한다.

 

즉 <자백>은 거대한 게이트와 그것을 감추기 위해 벌어진 또 다른 사건들이 존재했기 때문에 이 모든 이야기들을 하나로 묶어낼 수 있었다. 그래서 초반 드라마는 저들이 감추기 위해 저지른 ‘연쇄살인’처럼 위장된 청부살인을 추적하는 과정으로 시작하지만, 드라마가 중반을 넘어가면서 이 사건들이 단순한 살인이 아니라 무언가 더 큰 사건으로 이어진다는 걸 드러낸다. 사건 해결에 집중하던 시청자들이 ‘진상 규명’에 더 관심을 갖게 되고 끝까지 갈증을 느끼며 드라마를 들여다보게 만든 힘이 여기서 생겨났다.

 

법정물의 묘미와 사건을 추적해가는 과정을 담는 추리와 스릴러의 맛에 ‘비선실세’라는 그 단어만 들어도 실감하게 되는 현실인식과 공감을 넣어 <자백>은 재미와 의미를 모두 갖춘 완성도 높은 드라마를 선사했다. 꽤 단단한 연기를 보여준 이준호, 유재명, 신현빈, 남기애 같은 주인공들은 물론이고 역시 명불허전의 문성근, 송영창 게다가 류경수, 윤경호 같은 악역들까지 빈틈없는 배우들의 호연이 있었고, 이제는 믿고 보는 김철규 PD의 촘촘하고 섬세한 연출에 신예라고는 믿기지 않는 임희철 작가의 놀라운 대본이 삼박자를 이루며 <자백>이라는 명작을 탄생케 했다.

 

넓게 보면 <비밀의 숲> 이후 장르물들은 변화하고 있다. 과거처럼 캐릭터를 중심으로 여러 사건을 풀어나가는 장르물에서, 이제는 하나의 사건을 다각도로 풀어나가는 밀도 높은 장르물로 바뀌고 있는 것. <자백>은 이런 완성도 높은 시도가 충분히 가능하고, 또 그것이 복잡해 보여도 시청자들의 호응을 얻을 수 있다는 걸 증명했다. 앞으로도 이런 완성도, 밀도를 가진 장르물들이 더 많아지길 기대하게 만든 작품이 아닐 수 없다.(사진:tvN)

‘라이프’ 보고 나면 다른 드라마들 너무 느슨하게 느껴진다는 건

JTBC 월화드라마 <라이프>는 여러 모로 드라마 시장에 만만찮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이미 <비밀의 숲>을 통해서도 입증된 바지만, 이수연 작가의 작품은 그 압축적인 밀도와 입체적인 접근이 기존 드라마들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걸 확인시킨 바 있다. 생각해보면 단 한 사람이 살해되는 <비밀의 숲>이 무려 16회 동안 긴장감을 잃지 않고 몰입감을 주었다는 사실은 놀랍기까지 하다. 

<라이프>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 밀도와 입체감을 선사하고 있다. 늘 봐오던 의학드라마가 아닌 자본주의가 침투한 우리 사회의 구조적 시스템을 병원이라는 공간을 통해 담아내고 있는 <라이프>는 이제 겨우 6회가 방영됐을 뿐이지만, 그 이야기 전개의 촘촘함이 시청자들로 하여금 잠시도 한눈을 팔지 못하게 하고 있다. 잠깐 장면 몇 개를 놓치게 되면 그 이야기가 갖는 뉘앙스를 따라가지 못해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밀도의 드라마다. 

밀도도 밀도지만 사건을 다루는 입체감 또한 남다르다. 단순히 구승효(조승우)라는 총괄사장이 부임하면서 이에 반발하는 예진우(이동욱)로 대변되는 의사집단의 반발을 선악구도로 그리는 줄 알았던 시청자들은, 어느 순간 구승효가 꼬집는 의사들도 별 수 없는 사적 욕망의 치부를 보며 사건이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걸 실감하게 된다. 이는 실제 현실에서 우리가 맞닥뜨리는 사안들이 바로 그런 복잡성을 띄고 있어 단순한 선악으로는 판단하기 어렵다는 걸 작가가 드라마를 통해 말하고 있다는 증거다.

절대적인 악인 줄 알았던 구승효가 어느 순간에는 선한 얼굴처럼 보이다가, 다시금 그것이 고도의 계산된 수읽기에 따른 것이라는 게 또 드러난다. 갑자기 병원에 적자를 내는 3과를 지방 전출 보내려던 걸 말 한 마디로 뒤집어 버리는 그는, 실제 원하던 것이 그것이 아니라 병원 내의 적과 아군을 판별하고 그 틈새를 찾아 이익이 날 수 있는 곳에 자기 식의 경영을 하려는 심산이었다는 걸 드러낸다. 

물론 시청자들로서는 이만큼 촘촘한 밀도가 다소 따라가기 힘겹기도 하고, 종잡을 수 없이 속내를 숨긴 채 자신들의 욕망을 추구하는 입체적인 인물들의 얽히고설킨 이야기가 복잡하게 다가올 수 있다. 구분선이 명쾌하지 않고 마치 미로에 들어간 것처럼 중첩되어 있는 사안들과 인물들 때문에 혼돈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라이프>라는 작품은 여타의 많은 드라마들이 쉽게 그려내곤 했던 이른바 ‘현실’이라는 걸 보다 정밀하게 담는 작품이 된다. 다소 시청률이 빠지더라도 이 작품이 갖는 남다른 가치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흥미로운 건 일단 이 복잡한 미로 같은 <라이프>의 세계에 조금씩 빠져들기 시작하면 다른 드라마들이 너무 느슨하게 느껴진다는 점이다. 심지어 몇 편이면 끝날 이야기를 장황하게 멜로를 엮어 길게 늘이곤 하는 우리네 드라마들이 새삼 지루하게 여겨진다는 것. 이미 미드 같은 해외의 드라마들이 추구하는 그 밀도와 입체감은 이제 우리네 드라마에도 조금씩 요구되고 있다. 그래서 <라이프>가 만들어놓은 밀도와 입체감은 향후 우리네 드라마가 조금 더 깊은 완성도로 나아가는 길에 좋은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사진:JTBC)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