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뢰한>, 표현을 안 해 더 절박해진 사랑이라니

 

<무뢰한>은 독특한 멜로다. 사실 멜로라고 하기도 애매하지만 이게 실제로는 멜로의 실체라는 생각도 든다. 어딘지 달달하기만 한 멜로는 너무 관습적이기도 하고 그것이 실제 현실을 담아낸 듯한 느낌은 거의 주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은 본래 그렇게 비현실적인 거라고? 맞는 얘기지만 그 비현실이 달달함으로만 구성되는 건 아니다. 오히려 비현실적인 결정들을 내리는 아픈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도 사랑은 그 진면목을 드러내는 법이니 말이다.

 

사진출처: 영화 <무뢰한>

강력계 형사와 범죄자의 여자. 이 둘의 조합은 너무 뻔한 장르물의 한 틀을 떠올리게 한다. 결국 이 영화의 이야기 구조는 뻔해서 스포일러라고 하기도 애매할 정도로 단순하다. 형사가 범죄자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그 범죄자의 여자에게 감정을 느끼는 것. 하지만 이런 단순한 한 줄의 해설은 이 영화가 전해주는 기묘한 감정과 정서들을 전혀 담아낼 수 없다. 그것은 영화 속에 한 번 푹 담가져야 이해할 수 있는 감정들이다.

 

사람의 감정은 복합적이다. 누군가를 죽이고 싶은 감정은 때로는 그를 너무나 사랑한다는 엉뚱한 표현이기도 하다. <무뢰한>이 그렇다. 여기 등장하는 형사 재곤(김남길)과 범죄자의 여자 혜경(전도연)은 마치 마음의 문을 누군가 들어올까 무섭다는 듯 꼭꼭 닫아 잠근 채 살아가는 이들이다. 그들의 삶은 그래서 사적인 감정들은 사라지고 오로지 직업적인 모습들로만 표현되는 삶이다. 재곤은 그 지긋지긋해보이는 형사질로서만 자신을 드러내고, 혜경은 범죄자의 여자로서 때론 퇴폐적이고 때론 아련해 보이는 단란주점 마담으로서만 존재를 보인다.

 

그런데 이런 남녀가 만나 지금까지와는 다른 사적 감정을 느끼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진짜 속내는 저 밑으로 꾹꾹 눌러놓고 괜스레 주변만 빙빙 돌며 서성대는 재곤은 그래서 그것이 사랑의 설렘 때문인지 아니면 형사로서 그녀를 예의주시하는 직업적 태도 때문인지를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대사도 거의 없거나 몇 마디 툭툭 던지는 것으로 끝내는 이 인물은 그래서 영화의 끝까지 진심을 들여다보기가 어렵다.

 

이것은 혜경도 마찬가지다. 고통 속에 살아가면서도 그것을 내면화하고 절대 드러내지 않으려 하는 인물이 바로 그녀다. 그녀에게는 심지어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가 낯설다. 그런 그녀에게 재곤이 불쑥 들어온다. 그런데 그것이 사랑인지 일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사랑처럼 보였던 것이 금세 그걸 뒤집어버리는 재곤의 허허로운 거짓말로 가려지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녀 역시 드러냈던 진실을 숨겨버리고 본래 가면의 그녀로 돌아가버린다.

 

그래서 이들의 만남과 사랑은 전혀 지금까지 우리가 멜로에서 봐왔던 그런 장면들을 보여주지 않는다. <무뢰한>이 한 편의 하드 보일드한 스릴러나 형사물처럼 여겨지는 건 그래서다. 하지만 이 영화가 이처럼 형사물의 태도를 취하고 있는 건 저 두 남녀가 사랑에 대해 취하고 있는 태도 때문이다. 그들은 그렇게 표현하지 않고, 어떤 면에서는 표현할 수 없는 삶 속에 갇혀 있다.

 

이것은 <무뢰한>이란 영화가 식상한 멜로로 흐르지 않고 어떤 여운을 남기는 이유다. 이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결국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들이 보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처한 극한 상황이 아닐 뿐, 우리 역시 철저히 일을 위한 가면을 쓴 채 일터로 나간다. 그리고 지금 현재 우리가 처한 일터란 칼과 주먹만 안 들었을 뿐 저 <무뢰한>들의 세상과 그리 다르지 않다. 그 곳은 살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곳이란 점에서 비슷하다.

 

어쩌면 그래서 <무뢰한>은 더 이 시대에 현실적인 사랑처럼 다가온다. 그것은 허공으로 몇 센티씩 붕붕 떠오르는 그런 사랑이 아니라 저 밑으로 자꾸만 내동댕이처지는 바닥의 사랑이다. 그들이 감정을 잔뜩 숨긴 채 아무렇지도 않은 듯 고통을 참아내려는 얼굴들이 못내 마음을 쿡쿡 찌른다. 그리고 그 끝에는 어떤 공감과 각성이 생겨난다. 우리 역시 <무뢰한>들의 세상에 살고 있다.

 

장그래와 장백기, 스펙과는 상관없는 사회생활

 

<미생>에서 장그래(임시완)라는 인물은 하나의 판타지처럼 보인다. 현실적으로 스펙 없는 그가 원 인터내셔널 같은 대기업에 입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얘기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회사 내에서의 자잘한 일들 속에서도 그 누구보다 잘 적응하고 또 위기상황을 넘기는 기지를 발휘한다.

 

'미생(사진출처:tvN)'

새롭게 온 박과장(김희원)의 비리를 파헤치는데 결정적인 한 방을 날리는 장그래의 행동은 일개 사원으로서 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사회생활을 경험하지 못한 신입사원이라면 그런 핍박받는 상황에서 장백기(강하늘)처럼 행동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드라마 속에서 스펙 좋은 장백기는 바로 그 점 때문에 자신의 자존심을 꺾지 못한다. 당장의 것들만 눈에 보이고 좀 더 큰 그림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장그래는 다르다. 그는 이 박과장 같은 상식 이하의 선임의 명령을 반발 없이 수행하며 집으로 돌아와 자기가 바둑공부를 할 때 적어뒀던 내용을 펼쳐든다. ‘위험한 곳을 과감하게 뛰어드는 것만이 용기가 아니다. 뛰어들고 싶은 유혹이 강렬한 곳을 외면하고 묵묵히 나의 길을 가는 것도 용기다. 순류에 역류를 일으킬 때 즉각 반응하는 것은 어리석다. 상대가 역류를 일으켰을 때 나의 순류를 유지하는 것은 상대의 처지에서 보면 역류가 된다. 그러니 나의 흐름을 흔들림 없이 견지하는 자세야말로 최고의 방어수단이자 공격수단이 되는 것이다.’

 

웬만큼 회사생활을 경험한 사람도, 또 스펙이 아무리 좋은 사람도 결코 생각해내기 어려운 삶의 지혜다. 바로 이 지점은 왜 <미생>이 굳이 주인공 장그래를 스펙 없는 청춘으로 그리는 대신, 그에게 유년시절을 온통 바둑이라는 세계 속에서 살게 했는가가 잘 드러나는 지점이다. <미생>은 그저 직장생활의 애환을 다루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또한 그 애환 속에서도 어떻게 버텨내는가에 대한 노하우도 담겨져 있다.

 

<미생>에서 그것은 바둑의 세계로 제시된다. 장그래라는 인물이 비현실적이지만 그래도 수긍이 가는 이유는 그가 스펙은 없어도 바로 이 바둑을 이해하고 있다는 설정 때문이다. 겉으로 보면 평범 이하처럼 보이지만 그는 비범한 인물이다. 그런데 여기서 궁금해지는 점이 있다. 왜 하필 바둑을 세상살이의 지침으로 삼았을까. 바둑의 어떤 점이 그토록 힘겨운 상황 속에서도 장그래 같은 인물조차 회사생활을 잘 할 수 있게 하는 걸까.

 

이것은 바둑이라는 세계가 가진 현실을 내려다볼 수 있는 특징 때문이다. 바둑판이 하나의 현실이라면 그 위에 바둑돌 하나씩을 얹어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를 끊임없이 확인할 수 있는 세계가 바로 바둑의 세계다. 그러니 이러한 관조적 자세는 바둑이 세상 현실을 한 발 뒤로 물러나 바라볼 수 있게 하는 힘을 만들어준다.

 

바로 이 한 발 뒤로 물러난다는 것은 아마도 세상살이에서 가장 중요한 일인지도 모른다. 시스템이라는 괴물과 싸우고 있는 우리네 샐러리맨들은 그 시스템 안에 있기 때문에 괴물의 정체를 발견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장그래처럼 바둑 같은 자신만의 축소판을 갖고 있는 이들에게는 한 발 물러나 그 시스템을 확인하고 대처할 수 있는 식견을 가질 수 있다.

 

이것은 현재 스펙사회에 대해 <미생>이라는 작품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일 것이다. 영어, 수학 점수 좀 더 많이 나온다고 사회생활을 더 잘하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그보다는 세상을 보는 눈을 가져야 한다는 것. <미생>은 바둑을 예로 들고 있지만, 그것은 여행 같은 세상 경험일 수 있고, 인문학 서적 같은 세상 공부일 수도 있다. 장백기가 보여주는 것처럼 스펙은 어쩌면 자신의 발목을 오히려 잡는 족쇄가 되기도 한다. 이것이 <미생>이라는 작품을 통해 장그래라는 판타지적인 인물이 현실에 던지는 질문이 결코 비현실적이지 않은 이유다.

 

<왔다 장보리>, 막장인 듯 막장 아닌 막장 같은 정체

 

MBC <왔다 장보리>는 주말드라마의 판세를 뒤집은 드라마다. KBS 주말드라마가 늘 전체 시청률 1위를 기록해왔었지만 <왔다 장보리>는 그걸 단숨에 뛰어넘어 최근 들어 마의 시청률이 되고 있는 30%대를 훌쩍 넘겼다.

 

'왔다 장보리(사진출처:MBC)'

역시 막장드라마의 힘이 세다는 얘기가 나온다. <아내의 유혹>으로 일일 막장, 막장 마니아 시대를 연 김순옥 작가의 작품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항간에는 이 드라마를 그저 막장드라마라고 치부하기 어렵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김순옥 작가는 현실에선 더 기가 막힐 일들이 벌어지기 때문에 되려 선악 구분이 분명한 드라마의 권선징악 결말을 통해 시청자들은 통쾌감을 느낀다.”고 말한 바 있다. 이 말은 마치 막장드라마의 변명처럼 들리지만 한편으로는 맞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현실은 더 막장이다. 그런데 현실의 막장과 드라마의 막장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적어도 드라마의 막장에서는 선이 이기고 악이 응징당하지만 현실은 정반대의 경우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실로 <왔다 장보리>에서 가장 중요한 코드는 권선징악이다. 장보리(오연서)라는 절대 선의 인물과 그 인물을 둘러싼 화기애애한 가족적인 분위기가 있다면 연민정(이유리)으로 대변되는 절대 악, 나아가 뜻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감정마저 제 맘대로 조종하는 소시오패스와 그녀를 둘러싼 범죄적인 분위기가 있다. 드라마는 이 양 극단을 왔다 갔다 하면서 패악적인 연민정에게서 분통을 터뜨리게 만들고, 착하디착한 장보리가 그래도 잘 살아나가는 모습에서 위안을 갖게 만든다.

 

막장 그 이상의 막장을 보여주는 현실은 그래서 <왔다 장보리>라는 비현실적이고 극도로 자극적이며 그래서 막장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개연성 없는 드라마를 자꾸만 보게 만든다. 만일 이 드라마를 처음부터 본 시청자가 아니고 그래 도대체 어떤 드라마인지 한번 보자고 마음먹고 본 시청자라면 처음 이 황당무계한 전개의 드라마 앞에서 경악했을 지도 모른다. 장보리와 연민정의 극단적인 대립구도 안에 깊게 들어와 있다면 그 간절한 권선징악의 욕구 때문에 이들의 행동들이 그리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부모가 심지어 자식을 버리고 이용하며 거짓말을 일삼고 그것이 들통날까봐 전전긍긍하는 모습들은 아무리 정상참작을 하더라도 병적이다.

 

막장드라마의 전형적인 코드로 등장하는 누가 누구의 엄마이고 자식이냐출생의 비밀코드는 이제 그 사실이 드러나는 신파에 머무르지 않고 그 사실을 폭로함으로서 상대방을 공격하는 무기가 된다. 연민정은 장보리의 출생의 비밀을 갖고 협박을 일삼지만, 연민정 자신도 자신의 숨겨진 딸(장보리가 키우는)에 대한 출생의 비밀을 갖고 있다. 이 얽히고설킨 출생의 비밀공격은 드라마를 극단적인 신파와 치고받는 싸움구경으로 만들어낸다.

 

김순옥 작가의 특징은 <왔다 장보리>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시작부터 거두절미하고 숨 가쁘게 전개되는 이야기의 속도감은 <아내의 유혹>부터 지금까지 일관되게 흘러온 김순옥 작가표 전매특허다. 또한 드라마는 끝없는 인물들 간의 싸움을 보여준다. 그것은 그저 심리적 갈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진짜 동네 드잡이 싸움을 보는 듯한 장면들이 계속 쏟아져 나오기 때문에 드라마를 전혀 보지 않은 시청자라도 우연히 채널을 돌리다 이 장면을 보게 되면 잠시 멈춰 설 수밖에 없다. ‘도대체 뭔 일이 벌어진 거야하고 시선이 갈 수밖에 없는 것.

 

그 정신없는 김순옥표 드라마의 롤러코스터에 동승하는 것이 꺼려지기는 하지만 일단 올라타기만 하면 이 드라마는 기막히게 달콤하고 답답증을 일으키다가도 통쾌함을 선사하기도 하는 드라마게임의 쾌감을 선사한다. 그것이 비현실적이고, 또 개연성도 없는 세계지만 빠른 속도감이 그런 이성적인 판단을 마비시키고 대신 권선징악의 세계의 쾌감만을 추구하게 만들어버린다.

 

봉준호 감독의 <괴물>이 보여줬던 것처럼 괴물의 탄생은 누군가 흘려보낸 폐수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 사회의 비정상적인 시스템이 만들어낸다. 괴물보다 더 괴물 같은 건 그래서 그 현실의 시스템이다. 김순옥 작가가 만들어낸 <왔다 장보리>는 바로 그 괴물을 닮았다. 어느 날 갑자기 현실로 뛰쳐나와 평온한 강변의 한 때를 보내는 사람들을 향해 달려들며 그 공포를 통해 당신이 사는 세계는 그리 안온하지 않다는 것을 이 드라마는 불온하게 보여준다.

 

<왔다 장보리>라는 막장드라마를 막장으로 보지 않게 만드는 힘은 그래서 김순옥 작가 스스로 얘기한 것처럼 이 드라마를 말도 안 되는 이야기로 무시하지 않게 만드는 더 막장 같은 현실에서 나온다. 더 이상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장보리 같은 인물의 성공담이나, 소시오패스처럼 살아가는 연민정 같은 인물의 패배는 <왔다 장보리>라는 괴물을 탄생시킨 근원적인 힘이다.

 

우리 사회는 지금 겉으론 멀쩡해 보이지만 수면 아래서 점점 커져가는 병을 숨기고 있다. 마치 출생의 비밀처럼 언제 튀어나와 평온한 삶을 난도질할지 알 수 없는(어쩌면 그런 난도질을 기대하게까지 만드는) 그런 공포와 기대를 갖게 하는 병. <왔다 장보리>를 보다보면 그 숨겨진 병증이 눈앞에 드디어 정체를 드러내고 있는 듯한 공포감과 쾌감을 동시에 느끼게 만든다.

 

<야왕>, 이건 복수극이 아니라 게임이다

 

우리는 <야왕>의 시작과 끝을 이미 알고 있다. 이미 첫 회에 영부인이 된 주다해(수애)를 찾아온 하류(권상우)가 서로 안은 채 피를 흘리는 것으로 그 끝이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누가 죽음을 맞이할 지는 알 수 없지만 결국은 파국이다. 주다해의 끝을 모르는 욕망이 만들어낸 비극. 착하기만 하던 하류의 복수극. 그런데 참 희한한 일이다. 이 뻔한 복수극에 끌리는 것은.

 

'야왕'(사진출처:SBS)

더 희한한 것은 이 뻔한 복수극의 얼개 역시 대단히 느슨하다는 점이다. 아마도 하류가 애초에 복수를 하겠다 마음먹었다면 그저 과거 행적이 드러나는 사진 몇 장을 언론에 뿌려버리면 그만일 일이다. 스스로 자기도 죽을 결심까지 섰다면 같이 죽는 극단적인 선택을 해도 충분한 복수가 될 것이다. 잃을 게 없는 하류와 모든 걸 잃어야 하는 주다해가 맞는 죽음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야왕>의 하류는 그런 손쉬운 복수를 하지 않는다. 하류의 말을 빌면 “그건 너무 쉬운 복수”이기 때문이다. 하류는 주다해의 피를 바짝바짝 말려 주는 그런 복수를 하겠다고 한다. 그래서 주다해의 재단 이사장 취임식 날, 과거 딸과 자신이 그녀와 함께 찍은 사진을 기자들에게 퍼뜨리겠다고 협박을 해서 그녀를 이리 뛰고 저리 뛰게 만들고는 그녀 스스로 이사장직을 포기하겠다는 얘기를 하게 만든다. 역시 그녀의 치부가 드러나는 녹음된 말을 취임식에 틀어버리겠다는 협박을 통해서다.

 

그런 하류에게 고분고분해질 주다해가 아니라는 점은 <야왕>의 복수극을 이상한 방향으로 틀어버린다. 주다해는 심지어 하류의 아버지까지 죽음의 위기로 몰아넣으며 하류를 협박한다. 자신을 자극하면 주변사람들까지 다 다칠 수 있다는 경고다. 격분한 하류가 주다해를 끌고 외딴 창고로 가서 따귀를 올려 부치지만 주다해는 두려움에 떨기는커녕 하류의 따귀를 맞받아친다. 죽음까지 내몰리는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도 하류와 주다해는 두려움이 없다. 다만 어떻게 하면 상대방의 마음을 긁어놓을 지에만 혈안이 된 사람들 같다.

 

그래서 이미 결론이 나와 있고 결정적인 한 방을 주저하고 있는 하류를 보면 마치 이 뻔한 복수극이 ‘시간 끌기’를 하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끝까지 시청자들의 마음을 갖고 이른바 마인드 게임을 하고 있는 느낌. 그런데 이상하게도 바로 이 지점이 시청자들의 눈길을 끄는 이 드라마만의 묘한 매력을 만들어낸다.

 

현실성에 벗어난 전개, 결정적인 한 방이 있으면서도 오히려 조금씩 파국을 향해 접근하는 방식. 이건 복수극이라기보다는 한 판의 게임에 가깝다. 하류가 한 방을 때리면 주다해가 맞받아 때리는 따귀처럼 <야왕>은 이 복수와 분노와 통쾌함을 주고받으며 굴러가는 한 편의 게임이다. 결과는 알고 있지만 그 끝까지 가는 과정을 즐기는.

 

이것은 아마도 <야왕>의 원작이 만화라는 점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만화란 훨씬 더 현실을 벗어나 그 자체의 게임적인 면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야왕>은 초반부에 상당히 전형적인 드라마적 리얼리티를 유지하려 노력했다. 빈부의 문제와 자본 하에서 가난한 자들이 성공하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 같은 것들을 깔아두었다. 하지만 이런 현실적인 바탕은 중반을 넘어가면서 이제 사라진 지 오래다. 오로지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인물들 간의 치열한 마인드 게임이 지금 <야왕>을 움직이는 추동력이 되었다.

 

물론 아쉬운 점은 많다. 이러한 치고받는 마인드 게임 아래 충분한 현실적인 공감대를 유지했다면 <야왕>은 훨씬 더 폭발력 있는 드라마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야왕>은 그 태생적인 설정의 비현실성 때문에 그런 드라마로 완성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번 준 <야왕>에 대한 눈길을 뗄 수 없는 건 그 뻔한 복수극 속에 존재하는 게임적인 재미 때문이다. 이번엔 누가 한 방을 먹일 것인가. 또 그 반격은? <야왕>을 보는 관전 포인트는 그래서 여느 복수극과는 다른 지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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