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선택받은 자야. 이제 달라져야 해.” 애니메이션 ‘쿵푸팬더4’에서 용의 전사 포에게 시푸 사부는 새로운 소명을 알려준다. 이제 용의 전사 대신 평화의 계곡의 영적 지도자가 되어야 하고, 자신을 대신할 후계자를 찾아야 한다는 것. 하지만 포는 용의 전사로서 모든 이들에게 추앙받으며 살아가는 그 익숙한 삶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다. 돈으로 행복을 살 순 없지만 만두는 많이 살 수 있다는 자족적인 삶에 머무르려 한다. 하지만 최강 빌런 ‘카멜레온’이 나타나 계곡의 평화가 깨지게 되면서 포는 모험을 떠나고 자신을 뛰어넘는 변화를 받아들이게 된다.
‘쿵푸팬더’의 성공요인은 물론 ‘쿵푸 하는 팬더’라는 독보적인 캐릭터의 힘이 가장 크지만, 팬더 자체에 대한 전 세계적인 관심과 인기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최근 중국으로 가게 된 푸바오 열풍을 통해서 새삼 확인한 것이지만, 팬더에 대한 인기는 전 세계적이다. 팬더 외교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논쟁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떠나는 팬더에 눈물을 흘린 건 푸바오의 경우만이 아니다. 프랑스의 위안멍, 일본의 샹샹이 떠날 때도 똑같은 풍경이 벌어졌다.
마침 그 빈자리를 포가 채웠다는 이야기들이 나올 정도로, ‘쿵푸팬더4’에 대한 남다른 관심은 푸바오 열풍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실제로 떠난 푸바오에 대한 아쉬움은 물론이고 새로운 터전에 잘 적응할 것인가에 대한 걱정이 커서인지, 새로운 변화를 요구받는 포의 이야기 또한 각별하게 느껴진다.
중국 도착 직후 푸바오는 앞구르기만 반복하는 모습으로 많은 우려를 낳았지만 지금은 잘 적응하고 있단다. 그 지표로서 새 사육사가 내민 손을 잡는 모습이 사진으로 소개됐다. 푸바오의 ‘할부지’ 강철원 사육사는 새 환경에서 팬더가 손을 사육사에게 내미는 건 중요한 적응의 징표라고 한 바 있다. 변화를 수용한 결과라는 것. 마침 총선을 치러서일까. 푸바오와 새 사육사의 사진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변화를 요구하는 유권자들이 내민 손을 이제 선택받은 자들이 맞잡아야 한다고.(글:동아일보, 사진:영화'쿵푸팬더4')
탈북해 중국 공안에게 쫓기다 어머니까지 사고로 잃게 된 로기완(송중기)은 홀로 낯선 땅 벨기에까지 와 그 곳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한다. 난민 지위를 얻어야 살 자격이 주어지지만 벨기에 당국에 그걸 입증하는 일은 쉽지 않다. 밥을 먹고 잠을 자고 가끔은 여행을 떠나기도 하는, 우리에게는 숨쉬듯 주어진 것들이 로기완에게는 ‘자격’이 필요한 일이다. 그런 그가 마리(유성은)라는 한 여성을 만나 사랑하게 되고 행복을 느끼게 된다. 그는 자신 때문에 어머니까지 돌아가셨던 아픈 기억을 마리에게 꺼내놓으며 말한다. “긴데 이런 내가 행복해질 자격이 있는 거가?”
김희진 감독의 영화 ‘로기완’은 이 탈북인의 이야기를 통해 자유롭게 살아갈 자격에 대해 묻는다. 탈북해 쫓기며 어느 곳에도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부유하는 삶. 마리는 그래도 우리는 지금 충만하지 않냐며 이 행복은 아무런 자격 없이 이미 주어진 거라고 위로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사적인 차원에서의 행복이란 마리의 말대로 자격이 필요없어 보이지만, 한 나라에서 살아가는 데 어찌 자격이 요구되지 않을까. 그 곳에서 태어났거나 외국인이라도 법적 요건을 갖춰 귀화했거나, 자격이 있어야 자유롭게 살 권리가 주어진다. 생계를 위한 경제활동도, 보다 나은 삶을 위한 정치적 참여도 하다못해 여행을 떠나거나 심지어 누군가를 만나 사랑하고 함께 살아갈 권리 또한 자격이 필요하다. 자격을 부여받지 못한 삶이란 뿌리 뽑혀 서서히 말라가는 로기완의 삶처럼 처절할 수밖에 없다.
당연한 권리처럼 생각하는 많은 것들이 사실은 자격을 갖추고 있어 가능하다는 것. 떳떳하게 사람답게 사는 일 또한 자격이 필요하다는 걸 우리는 종종 잊어버린다. 그래서인지 자격에 부여된 권리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을 때도 있다. 때되면 돌아오는 선거에 한 표를 행사하는 일이 얼마나 큰 권리이자 자격을 요구하는 일이란 걸 로기완이라면 얼마나 절절하게 생각했을까. 선거를 통해 자격과 권리를 부여받은 정치인들 또한 그 한 표 한 표에 담긴 막중한 무게감을 잊지 않아야 하겠다. (글:동아일보, 사진:넷플릭스)
“본래 세상은 더럽고 인생은 서러운 기다.” 영화 <대외비>에서 정치판의 비선 실세 순태(이성민)가 공천이 취소되어 억울해하는 해웅(조진웅)에게 던지는 그 말은 이 작품이 보는 정치에 대한 시선이 담겨있다. 그 시선은 지독하게 냉소적이다. 이 판에 발을 딛는 순간, 국민과 대중을 향한 최소한의 소신도 무너지고 결국은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는 것.
번번이 선거에서 떨어졌지만 이제 부산 해운대에서 공천이 내정된 국회의원 후보 해웅은 이 작품이 그리는 ‘문제적 인물’이다. 그는 소신과 대의를 갖고 있는 인물이지만 동시에 부산은 물론이고 전국 정치판을 쥐고 흔드는 비선실세 순태를 보좌하며 머슴 역할을 자임해온 지극히 현실적인 욕망을 가진 인물이기도 하다.
그렇게 선하기만 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악하다고 보기도 어려운 이 인물이 변하기 시작하는 건 공천이 취소되면서다. 총선에 이어질 대선 비자금 마련을 위해 해운대 재개발 계획이 은밀히 이뤄지고, 이를 진행하게 된 순태는 지역 주민들을 위해 재개발 반대를 외치는 해웅의 공천을 취소한다. 순태에게 토사구팽 당한 해웅은 소신과 대의 대신 어떻게든 권력을 쥐겠다는 욕망 속으로 빠져든다. 재개발 계획이 담긴 대외비 문서를 입수한 해웅은 재개발 반대의 소신도 접고 그 이권을 미끼로 조폭과도 손을 잡고 선거자금을 조달해 무소속으로 선거에 나선다.
결국 <대외비>는 정치판과 또 거기 연결된 이권을 두고 해웅과 순태가 치고 받는 대결의 과정을 흥미진진하게 담는다. 의외로 해웅이 선전을 하기도 하지만 이를 다시 순태가 뒤집고 그러면 다시 해웅이 나서서 순태의 뒷덜미를 잡는 식이다. 이 과정 속으로 들어가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정치의 대의나 민주주의 같은 이야기들은 공염불이 되어버린다. 대신 치열한 이전투구의 장이 정치이고, 그것은 심지어 무고한 민초들의 삶조차 권력을 위해 빼앗는 ‘악마와의 거래’라는 게 그 과정이 담고 있는 것들이다.
‘The Devil’s Deal’이라는 영문 제목에 담겨 있듯이 <대외비>가 그리고 있는 건 정치라는 외피를 쓰고 있는 ‘악마와의 거래’다. 그것은 순태의 대사로도 나오는 데, 정치라는 게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일”이라는 대목이 그것이다. 그래서 이원태 감독이 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 이야기했듯, 이 작품 속 순태와 해웅은 마치 <파우스트>의 메피소토펠레스와 파우스트를 연상케 한다.
순태와 해웅이 극한의 대결구도 속에서 한 허름한 주점에서 마주한 채 서로를 향해 패를 꺼내드는 장면은 진짜 <파우스트>의 한 장면처럼 연출되었다. 한 명이 교차 편집되어 클로즈업 된 얼굴만으로도 이 악마와의 거래가 실감되기 때문이다. 순태는 악마의 눈빛으로 해웅을 죽음의 공포 속으로 밀어 넣고는 패를 내밀고, 해웅은 극도의 긴장감에 땀을 줄줄 흘려가며 떨면서도 자신의 패를 내민다. 사실 이 한 장면이 이 영화의 모든 걸 담았다고 할 정도로 인상적인 대목이다.
그리고 그렇게 패를 나눈 후의 결과는 충격적이다. 정치판은 어떤 식으로든 타협을 하거나 협상을 했을 테지만 이원택 감독은 이 영화에 대해 그럴 생각이 전혀 없다고 그 엔딩은 말해준다. 흔히들 빌런들이 등장하는 이런 영화 속에서 권선징악, 사필귀정을 꿈꾸지만, 이 영화는 애초 이상적인 정의나 정치라는 것이 순진한 이야기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영화가 굳이 1992년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는 건 의미심장하다. 작품 속에도 등장하지만 당대는 87년 민주화운동에 이은 6.29 선언으로 직선제에 의해 노태우 전 대통령이 집권한 후 시간이 흘러 차기 대선이 벌어지던 시기다. 선거에 있어 불법과 부정을 근절하겠다고 정부가 나섰지만 여전히 금권선거와 부정선거가 횡행했던 시기라는 것.
그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 당대를 추억하게 만드는 레트로적 감성이 시선을 잡아끄는 면이 분명히 존재하지만, 영화가 그 때를 소환해낸 건 그런 정치가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현재는 달라졌는가를 오히려 질문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싶다. 지금의 정치판을 보라. 여야를 막론하고 선거 당시 그토록 쏟아져 나왔던 ‘민생’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는다. 대신 정치는 끝없는 권력 대결과 이전투구의 장이 되어 있다.
영화는 끝내 희망을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악마와의 거래를 통해 권력을 쟁취한 이들이 그 거래로 인해 끝없이 저들과 손잡아야 하고, 거기에 더 이상 순수한 정치나 민주주의의 이상 같은 것들은 존재할 수 없어지는 절망을 보여준다. 그 절망에서 현재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정치판이 겹쳐지는 건 지나친 해석일까.
어둡고 그래서 비밀로 감춰져 있지만 이 <대외비>를 끝내 마주해야만 하는 이유는 그래서 충분하다. 그 비밀이 비밀로 남겨져 있는 한 거래는 계속 일어날 것이고, 그만큼 세상은 더러워지고 민초들의 삶은 서러워질 것이며, 그럴수록 희망은 찾을 수 없을 테니.(사진:영화'대외비')
과연 권력 투쟁은 무얼 목적으로 하는 걸까. 종종 선거에서 우리는 공약보다 흑색선전과 비방이 난무하는 현실을 바라보곤 한다. 당선되면 국민을 위해 무얼 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보다 왜 자신이 당선되어야 하며 경쟁자가 낙선되어야 하는가를 강변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리고 선거가 끝나고 나면 애초 당선을 위해 내세워졌던 선심성 공약들이 슬그머니 사라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일단 정권을 잡아야 뭐라도 할 수 있다는 게 정치인들의 변명이지만, 권력 투쟁 속에서 이기기만을 위한 대결을 벌어다 보면 정작 이들이 왜 정권을 잡아야 하는가를 까마득히 잊어버린 건 아닌가 하는 지점에 이를 데가 적지 않다.
KBS 월화드라마 <붉은 단심>을 보다보면 정치에 대한 이런 단상들을 하게 된다. 명목상 왕이지만 힘이 없는 이태(이준)와 좌의정이지만 반정공신들과 함께 조정의 모든 권력을 쥐고 흔드는 박계원(장혁)이 벌이는 치열한 권력 투쟁 속에서 정작 그 투쟁의 목적이어야 할 민초들의 삶이 소외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박계원이 쥐고 흔드는 국정농단에 의해 어머니가 스스로 독을 마시고 자결하고, 세자빈으로 맞이하려 했던 유정(강한나)의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는 상황을 겪은 이태는 어떻게든 힘을 키워 박계원과 그 반정세력들에게 복수를 하려한다. 가까스로 이태의 도움을 받아 죽을 위기를 면해 궁에서 도망쳐 나온 유정은 죽림원 사람들의 도움으로 다시 웃음을 되찾고, 이태가 왕이라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보름에 한 번씩 그를 만난다.
이렇게 각자의 길을 가는 걸로 알았지만, 국혼으로 이들의 관계를 엇갈리기 시작한다. 이태가 만나는 유정을 이용해 권력을 잡으려는 박계원이 유정을 자신의 질녀라고 속여 중전을 만들려 하고, 이태는 병판 조원표(허성태)의 여식 연희(최리)를 중전으로 세워 그 세력을 가지려 했지만 두 사람이 궁에서 만나 서로의 편이 갈려버린 상황을 알게 되면서 뒤틀어지는 운명이다. 이태는 복수를 위해서는 연희를 선택해야 하지만 유정을 연모하는 마음을 저버릴 수 없고, 유정은 자신이 살아남고 또 박계원이 볼모로 삼은 죽림원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중전이 되어야 하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붉은 단심>은 결국 정적과 싸울 것인가 정인을 선택할 것인가의 기로에 선 이태의 갈등과 자신이 살아남고 연모하는 이태를 지켜내기 위해 어떤 선택들을 해내가는 유정 그리고 이런 사적 감정들까지 이용해 권력을 잡으려는 박계원의 치열한 권력 대결이 펼쳐지는 퓨전사극이다. 멜로에 정치대결이라는 소재가 엮어지면서 묵직하고 운명적인 사랑이야기가 비장하게 펼쳐지는 게 특징이고, 이런 감정적인 요소들을 아름다운 시각적 표현으로 그려내는 미적 연출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그런데 이토록 궁궐 안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지는 핏빛 투쟁들이 진행될수록 저들의 투쟁에서 소외되고 있는 민초들의 모습이 자꾸 눈에 밟힌다. 유정은 유일하게 이런 상황을 꼬집고 이태가 진짜 민초들을 가까이서 보게 만드는 역할을 하는 인물이다. 과거 유정이 했던 말을 떠올려, 궁궐에 농부들을 불러 화단 대신 논을 일구게 하고 그 곳을 찾아가 농부의 얼굴을 처음 마주하며 이태가 놀라는 장면은 그래서 마치 정치의 안타까운 실체를 폭로하는 것만 같은 느낌을 준다. “이렇게 생겼구나. 어찌 너희 얼굴을 처음 보는 것일까.” 농부의 갈라진 손과 주름 가득한 얼굴을 보고 나서 이태는 비로소 깨닫는다. 별 실효성도 없을 듯한 기우제를 왜하는 것이며 나아가 정치의 진짜 목표는 바로 이 백성들의 보다 나아지는 삶이어야 한다는 것을.
올해 들어 두 번의 선거를 치렀다. 누구는 승자가 됐고 누구는 패자가 됐다. 하지만 선거가 끝났고 승패가 나눴지만 이들의 대결과 권력투쟁은 끝이 없다. 진영 논리에 여전히 쌓인 채 상대를 깎아내는 말들이 정치권에는 여전히 난무한다. 이들은 과연 코로나19의 장기화로 어려워진 일상을 맞이하고 있는 대중들의 얼굴을 본 적은 있을까. 정치에서 권력 투쟁은 필요하다. 하지만 그 목적은 권력 그 자체가 아니라 그걸 통해 구현해내려는 민초들의 나아지는 삶이라는 걸 매번 되새겨야 하지 않을까.(글:PD저널,사진:KB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