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덕여왕'의 고현정, '드림'의 박상원, '스타일'의 김혜수

'선덕여왕'의 미실(고현정)은 주역은 아니지만 이 사극의 중추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 이 사극은 바로 이 미실이라는 악역 캐릭터에서부터 그 드라마가 만들어졌고, 그 힘으로 굴러가며 주역은 물론이고 주변인물들까지 이 캐릭터에 의해 창출되고 움직여진다. 이 사극이 가진 미션의 목적 자체가 바로 이 절대 권력의 소유자인 미실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따라서 미실을 연기하는 고현정은 어쩌면 이 사극의 가장 중요하고도 힘겨운 역할을 맡고 있는 셈이다. 그녀가 굳건히 버티고 있어야 극은 흥미진진하게 흘러갈 수 있다.

이것은 '드림'의 강경탁(박상원)이란 캐릭터도 마찬가지다. '드림'이 스포츠 에이전트를 소재로 다룬 드라마로서 그 핵심적인 틀이 복수극에 있다면, 그 틀을 쥐고 있는 인물은 강경탁이다. 비정하고 철두철미한 이 악역은 청춘을 온전히 바쳐 개처럼 일해 부와 명예를 쌓아온 남제일(주진모)을 저 바닥까지 내치는 인물이다. 이로써 남제일은 이 드라마 속에서의 미션을 부여받는다. 그는 아무 것도 없는 상황에서 저 스스로 스포츠 에이전트로서 성공해 강경탁을 무릎 꿇려야 한다. 따라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강경탁을 연기하는 박상원은 이 드라마의 키를 쥐고 있는 셈이다.

주말 드라마, '스타일'의 박기자(김혜수)는 이 드라마 속에서 도무지 넘어서기가 어려울 것처럼 보이는 악역이다. 직장상사의 표상처럼 과장되게 그려지는 이 박기자는 이서정(이지아)이라는 말단 직원의 캐릭터를 구축해주는 인물이다. 박기자로부터 갖은 핍박을 받는 이서정은 이로써 그녀를 뛰어넘으려는 욕망을 갖게 된다. 이서정의 성장 드라마로도 볼 수 있는 이 '스타일'에서 박기자는 그 성장의 동기를 제공한다. 박기자 역할의 김혜수가 그 어떤 주역들보다 돋보이고 중심축에 서 있는 느낌을 받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처럼 고현정이나 박상원, 김혜수 같은 이제는 중견이 된 연기자들이 매력적인 악역으로 돌아오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누구나 알다시피 악역이란 드라마의 척추 같은 역할을 한다. 극을 만들어내고 극을 움직이게 하며 심지어 거꾸로 주역을 이끌어가기도 하는 악역이 주역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하지만 가장 어려운 역할을 맡으면서도 악역이라는 이유로 자칫 꺼려할 수 있는 이 배역을 기꺼이 끌어안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이들은 여전히 주역을 맡아도 빛날만한 자신들만의 아우라를 가진 연기자들이 아닌가.

연기자들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차 스타라는 허울보다는 연기자라는 실재에 더 몰입하는 것은 실로 중요하다. 이것은 중견 연기자라는 칭호를 받는 그들에게도 그렇지만, 우리네 드라마 전체의 성장을 위해서도 그렇다. 한때 청춘스타들로 빛나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어느 순간 사라져버리는 연기자들은 어찌 보면 우리 드라마의 큰 손실이기도 하다. 그들이 기꺼이 스타의 스포트라이트보다 드라마의 척추 역할로 돌아오는 것은 이처럼 중요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몇몇 한류스타라는 빛 속에 여전히 서서 그 언저리를 배회하는 연기자들이 외면당하는 것은 이처럼 큰 틀 속에서 자신이 해야할 역할보다는 여전히 하고 싶은 역할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대중들의 드라마를 보는 시각은 그만큼 성숙해졌다. 그들은 이미 드라마 속에서 악역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고, 심지어 그 악역 속에서 어떤 매력을 발견해내 기꺼이 박수를 쳐준다. 드라마의 성패가 그 드라마를 움직이는 매력적인 악역의 발굴에 있다고 볼 때, 어쩌면 이런 선택을 하는 중견 연기자들의 어깨 위에 우리네 드라마의 향방이 달려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매력적인 악역의 중견들, 그 의미있는 귀환은 주목받고, 박수받을 만한 일이다.

'찬란한 유산'의 후속작, '스타일'이 갖지 못한 것

꿈의 시청률 47%를 기록하고 종영한 '찬란한 유산'의 후속으로 들어온 '스타일'은 첫 회부터 17%의 시청률을 냈다. 아무리 대단한 작품이라고 해도 이런 수치는 이례적이다. 그런 면에서 '찬란한 유산'은 후속 작품에도 찬란한 유산을 남긴 셈이다. 하지만 정작 '스타일'은 '찬란한 유산'의 뒤를 잇는 작품으로서는 확연히 다른 스타일을 갖고 있다.

'스타일'은 먼저 외관이 화려하다. 칙릿을 추구하는 이 작품에는 무수한 명품의 이미지들이 꿈틀댄다. 명품 백과 옷들이 마치 광고로 도배된 패션잡지의 그것처럼 화면 전체를 도배하고 있고, 주인공들은 패션쇼를 하듯 연거푸 옷을 갈아입고는 마치 무대처럼 화려한 세트와, 화보의 배경처럼 판타지를 자극하는 장소에 서 있다. 어디 그것뿐인가. 그 화려한 패션쇼를 연출하는 당사자들의 조각 같은 몸들은 이 화보 같은 드라마 속에서 계속 전시된다.

그저 멍하니 쳐다보고 있으면 그 눈을 휘둥그레하게 만드는 '엣지'나는 상품들에 눈을 멀게된다. 박기자(김혜수)의 까칠함과 이서정(이지아)의 지질함이 주는 대비효과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런 구도는 이미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를 본 분이라면 심지어 식상하다 여겨질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럼에도 마음을 빼앗기는 이유는 똑같은 설정에도 그 인물들이 입고 있는 옷이 다르고, 그 인물들이 서 있는 화보(?)의 배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그 영화의 내용보다도 시골출신 촌뜨기 주인공 앤드리아가 이것 저것 명품들을 입어보는 그 행위에 더 빠져드는 것과 같다. '스타일'은 확실히 이 칙릿의 대표격인 '악마가 프라다를 입는다'의 판타지 요소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가 어떤 매력적인 스토리텔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사회생활 속에서 여성들이 겪는 고통과 판타지가 인물들을 통해 공감할 수 있게 하는 스토리텔링이 있었다.

'스타일'의 스토리텔링 역시 마찬가지로 이 사회생활 속의 여성의 욕망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스토리텔링이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처럼 잘 드러나지가 않는다. 이것은 아마도 좀 더 압축적인 영화의 옷과 다를 수밖에 없는 드라마의 옷 때문이기도 하지만, 공감하기 어려운 캐릭터에서 비롯되는 바가 더 크다. 이 드라마에서 인물들은 지나치게 오버하고 있다. 박기자는 '엣지'를 남발하면서 확실히 어떤 카리스마를 보여주고는 있지만 그 안에서 자신만의 매력적인 캐릭터를 구축하지는 못하고 있다. 박기자가 가진 긍정적인 면들, 예를 들면 실력 같은 것이 구체적으로 제시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이서정 캐릭터에서 발견된다. 명품에 빠져 있지만, 배신한 남자친구에 대해서는 신파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주는 그녀는, 명품이 주는 쿨한 이미지와 신파가 주는 지질한 이미지의 충돌을 겪고 있다. 시청자들은 명품에 혹하는 그녀의 캐릭터에 감정이입되다가도, 남자친구 앞에서 구질구질하게 구는 그녀에게서 몰입을 방해받는다. 무엇보다 이 캐릭터는 안정되어 있지가 않고, 허공에 붕 떠 있는 듯한 설정 속에 서 있다. 이서정 캐릭터가 이런 상태에 머물게 되면, '스타일'의 스토리텔링은 부각되기가 어렵다. 그 스토리텔링이 특별한 것도 아닌 이미 나와 있는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따라서 현재 2회가 지난 '스타일'은 드라마 스토리텔링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주인공의 문제(혹은 욕망)를 제시해주지 못하고 있다. 아직까지 이서정이 좌충우돌하는 그 장면들을 마음 속으로 공감하며 따라가기 어렵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남게 되는 것은 말 그대로 드라마의 스타일뿐이다. 뭔지 몰라도 화려하고 감각적인 그 스타일.

극중에서 서우진(류시원)은 '광고로 도배한 패션잡지'라는 이유로 박기자의 인터뷰를 거절한다. 그는 어떤 요리로서의 진정성에 도달하려고 하는 인물이지만, 드라마는 그 캐릭터의 진정성을 잘 포착해내지 못하고 있다. 그저 준비된 듯한 인터뷰 멘트와 역시 화보 같은 배경 속에 서 있는 그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스타일'이 서우진의 목소리로 비판했던 그 '광고로 도배한 패션잡지' 같은 상품 전시장의 드라마가 되지 않으려면, 우선 드라마가 전하려는 스토리텔링의 중심을 먼저 드러내야 한다. 그리고 그 중심의 키는 이서정이 쥐고 있다. 드라마에 있어서 스타일은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스타일만으로 드라마가 되는 것은 아니다. '찬란한 유산'은 '스타일'과는 정반대의 입장에서 스타일이 아닌 스토리텔링의 중요성을 말해주었던 드라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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