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들의 개과천선, 서민들에게는 판타지

 

우리네 드라마나 영화에서 변호사가 서민들을 위해 변호하는 장면은 얼마나 될까. 아니 실제 현실에서는? 서민들이 변호사를 쓴다는 일은 그렇게 일상적인 일이 아니다. 적지 않은 돈이 들기 때문이다. 결국 변호사들의 일이란 돈 많은 이들을 의뢰인으로 삼았을 때 직업적인 성공을 거둘 수 있다. 물론 인권변호사 같은 특별한 존재들이 있지만.

 

'개과천선(사진출처:MBC)'

변호사의 개과천선이 주는 깊은 감동을 가장 잘 보여준 건 영화 <변호인>이다. 송우석 변호사(송강호)는 세법 변호사로 돈을 버는 지극히 평범한 속물 변호사에서 자신과 인연이 있는 국밥집 아들이 인권을 유린당하는 과정을 보면서 인권 변호사로 거듭난다. 서민들에게 자신들을 대변해주는 변호사가 일종의 슈퍼히어로처럼 여겨지는 건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가 법에 의해 움직이고 그 법은 돈에 의해 움직이기 때문이다. 돈이 아닌 억울한 서민들의 편에 서는 변호사는 그래서 서민들의 판타지이기도 하다.

 

MBC 수목드라마 <개과천선>의 김석주(김명민) 변호사는 최고의 로펌인 차영우펌의 에이스. 피도 눈물도 없는 그는 오로지 회사에 돈을 주는 재벌 의뢰인들의 편에 서서 그들에게 이득이 되는 변호를 해온 인물이다. 그런 인물이 어느 날 사고를 당하고 기억상실을 겪게 되면서 그 때까지와는 전혀 다른 인물로 개과천선한다는 이야기가 이 드라마의 핵심 테마다.

 

엄청난 법 지식과 노련한 경험을 갖춘 이 변호사 슈퍼히어로는 사고 후 깨어난 병원에서부터 아무렇지도 않게 서민들의 일들을 척척 해결해낸다. 옆 병상에 있는 자동차 사고를 겪은 이가 보험회사 직원과 벌이는 실랑이를 지나가는 말처럼 툭툭 몇 마디 던지는 걸로 김석주 변호사는 문제를 해결한다. 카시트는 대물배상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보험회사 직원의 말에 대해 그는 만 8세 이하 아이들은 카시트에 태우는 게 의무화되어 있기 때문에 카시트가 고객 개인의 편의나 취향에 따라 장착된 설비가 아니라는 점을 들어 당연히 보험회사에서 대물배상 범위에 포함된다고 말했다.

 

또 병상에서 떨어져 다친 환자에게 병원측이 그건 환자의 부주의에 의해 발생한 2차 사고라며 병원비나 간병비 모두 환자가 부담해야 한다고 하자, 김석주 변호사는 병원 내에서 충분한 보호장치를 하지 않았고, 병원 지배구역 내에서 일어난 일이며, 간호 수칙과 간호 매뉴얼을 100% 수행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병원측이 병원비, 간병비를 보상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사실 법 조항과 적용에 대해 잘 모르는 서민들의 입장에서는 모르면 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그런데 이 김석주 변호사는 뭐 대단한 일도 아니라는 듯 심드렁한 표정으로 몇 마디 던지는 것만으로 일을 척척 해결해낸다. 이것은 <개과천선>이라는 드라마가 대중들에게 기대감을 주는 가장 큰 이유다. 그 대단한 실력과 능력을 가진 자들을 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 갖지 못한 서민들을 위해 쓴다는 것.

 

김석주 변호사의 옆자리에 위치해 그와 점점 가까워질 존재로서 이지윤 인턴(박민영)의 역할 또한 작지 않다. 그녀는 김석주 변호사의 변화를 가까이서 목도하는 인물이고, 그것이 어떤 의미인가를 곱씹게 해주는 역할이다. 물론 두 사람 사이에 벌어질 멜로는 그 인간적인 변화가 가져오는 달콤함 결과물이 될 수 있다.

 

왜 현실에서는 개과천선한 변호사를 만나기 힘들까. 그것은 그 직업적 선택이 결국은 자본에 귀속될 수밖에 없는 구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법이 정의를 구현하기는 쉽지 않은 일일 게다. 그래서일 것이다. 더더욱 <변호인>의 송우석 변호사나 <개과천선>의 김석주 변호사 같은 이들의 변신을 기대하게 되는 것은. 마치 사회적 부조리가 터져 나올 때마다 거꾸로 정의에 대한 욕구가 커지는 것처럼.

<마의>에서 허각이 떠오르는 이유

 

"나 인의라는 것 해보고 싶습니다. 그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얼마나 잘난 일인지 정말 나 같은 놈은 꿈도 꿀 수 없는 건지. 나 그거 한 번 해볼 겁니다." 여기서 ‘나 같은 놈’이란 마의인 백광현(조승우)의 신분을 뜻한다. 요즘 사회를 태생부터 미래가 결정되는 스펙사회라고 하지만 조선시대 만큼일까. <마의>가 현재에 던지는 판타지는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마의'(사진출처:MBC)

사극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를 그린다고 했던가. 사람을 살리고도 마의라는 신분 때문에 장 30대를 맞는 <마의>가 그리는 세상은 작금의 스펙사회를 떠올리게 한다. 그 손이 그 손일진대 “짐승이나 만지는 천한 손으로 사람의 몸에 침을 놓는 건 맞아죽어도 싼 죄”로 치부되는 곳이 바로 <마의>의 세상이다.

 

백광현은 다름 아닌 성장의 사다리가 끊겨버린 청춘이다. 그런데 그런 그를 신분이 아닌 하나의 사람으로 바라봐주는 인물들이 있다. 그가 의과시험을 치르게 도와주는 강지녕(이요원)이 그렇고, “자네가 실력만 있으면 되지 출신성분이 뭔 상관인가”라고 말하는 고주만(이순재)이 그렇다. 숙휘공주(김소은)가 저도 모르게 백광현의 매력에 끌려 볼에 입맞춤을 하는 장면도 그렇다. 그녀는 강지녕의 말대로 백광현의 “신분이 아닌 사람을 본 것”이다.

 

<마의>가 절묘한 지점은 바로 조선시대라고 하더라도 이 신분이 무화되는 공간들을 찾아냈다는 점이다. 드라마 초반에 등장했던 이타촌(외국인들이 사는 마을)이 그렇고, 무교탕반이라는 왕에서부터 서민들까지 누구나 와서 먹을 수 있는 음식점이 그렇다. 고주만 영감이 의과시험을 누구나 실력이 있으면 응시할 수 있는 시험으로 만드는 것도 그렇다. 바로 그 공간이 있어 백광현은 낮은 신분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실력으로 1차 시험을 통과할 수 있었던 것. 백광현은 저 <슈퍼스타K2>의 허각이 만들어낸 신드롬을 사극으로 재현하는 인물이다.

 

그가 응시하는 의과시험의 풍경들은 며칠 전 끝난 수능시험을 떠올리게 한다. 시험 전날 자꾸 까먹는 자신을 한탄하며 스스로 머리를 쥐어박고 있을 때 강지녕이 건네주는 요약본은 지금으로 치면 ‘족집게 과외’ 같은 것. 백광현은 그 요약본에서 절반 이상이 시험에 나왔다며 기뻐한다. 우리네 스펙사회에서 그 첫 발이 대학입시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마의>의 백광현이 첫 발을 내딛는 의과시험은 꽤 의미심장해진다.

 

하지만 무엇보다 <마의>가 현재적 의미를 드러내는 건 동물의 병을 돌보고 고치는 마의라는 존재 자체일 것이다. 생명을 고치는 손에 마의가 따로 있고 인의가 따로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중요한 건 생명을 살린다는 것 그 자체가 아닌가. 조선이라는 신분 사회 속에서도 결국 하나의 인간으로 공유되는 지점은 결국 의술이 다루는 몸이다. 양반이건 노비건 몸은 똑같이 병들고 죽게 마련이니까.

 

<마의>를 보면서 그것이 저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현재의 이야기로 느꼈다면 그것은 이 사극이 얼마나 현재의 대중들의 정서를 들여다보고 있는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래서 신분과 빈부의 경계를 무화시키는 공간과 상황들 속에서 그렇게 백광현이 성장하는 모습은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강력한 판타지를 제공한다. 사극은 그렇게 과거를 다루지만 과거가 아닌 현재를 이야기하는 장르다.

엄태웅, 실력보다 매력이 얼마나 중요한가 보여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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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박2일'(사진출처:KBS)

리얼 버라이어티쇼에서 실력만큼 중요한 건? 매력이다. '1박2일'의 새 멤버로 첫 여행을 보낸 엄태웅이 보여준 것이 바로 이것이다. 강호동은 엄태웅이 "특별한 재능은 없어 보이지만 다행스러운 건 승부욕이 있다"며 "열심히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 '1박2일'과 가장 잘 어울린다고 말했다. 허당 이승기는 엄태웅에게 '무(無)당'이라는 캐릭터를 부여하며, '예능백지상태'인 그에게 오히려 기대감을 표현했다. 이수근은 엄태웅이 "뭔가 잘 하는 게 있을 텐데, 우리가 아직 '발견'을 못했다"고 말했다. 예능 첫 출연을 한 엄태웅에게서 예능감을 발견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 아무 것도 써지지 않아 오히려 빛나는 백지의 가능성을 그만의 독특한 매력으로 채워 넣었다.

첫 여행으로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콘셉트로 치러진 미션에서 강원도 양양 낙산해수욕장으로 가는 길, 낙오 미션으로 히치하이킹을 하려 손을 들지만 그냥 지나치는 차를 보며 엄태웅은 허허 하고 사람 좋은 미소를 짓는다. 우연히 만난 대학생들의 차를 탄 그는 그들에게 "팬티 바람으로 끌려나왔다"며 첫 날의 인상을 전한다. 대학생들은 오히려 엄태웅을 걱정하며 조언을 해주기 시작한다. 자신은 "가만히 있겠다"는 말에 "가만히 있으면 안돼죠. 콘셉트를 잡아야죠." 대학생이 그렇게 말하자 엄태웅은 진지하게 귀를 쫑긋 세운다. 그는 지나는 사람의 이야기에도 귀 기울일 줄 아는 사람이다.

그의 캐릭터에 대해서 그 대학생이 "김C씨 마냥 박식한 콘셉트는..."하고 입을 떼자, 그는 한 마디로 "박식은 안돼."하고 잘라 말하는데 거기서 그의 솔직함과 소탈함이 엿보인다. "원래 예능은 잘 안 나오시잖아요."하고 묻자, 재차 "못나갔지"하며 말의 뉘앙스를 바꾼다. "새로운 멤버가 오기를 기대하고 있었다"는 말에 반색하고, 5명으로는 편을 나눌 수 없어 뭔가 아쉬웠다는 말에는 "전문가네"하며 감탄을 한다. "첫날이 다 그런 거죠 뭐."하는 위로의 말에 엄태웅은 놀라며 "너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하고 묻는다.

오히려 히치하이킹으로 만난 대학생을 통해 함께 따라다니는 VJ와 인사를 나누고, 미션시간이 한 시간밖에 안 남았다는 다급함에 "안전속도를 유지해야 되는데 조금 더 밟아도 될 것 같은데..."라고 하고, 대학생이 "제한속도는 지켜야죠. KBS는 그런 방송이니까..."라고 말하자 와 하고 놀란다. 사실 이 대학생들과의 짧은 만남은 '1박2일'에서 엄태웅의 기대감을 한껏 높여놓았다. 어디서든 "1박!"하고 외치면 누구나 "2일!"하고 붙여주는 요즘, '1박2일'은 어쩌면 대중들이 더 많이 아는 프로그램이 된 지도 모른다. 그러니 오히려 예능 좀 안다고 하는 인물보다는, 아예 몰라서 일반 대중들의 조언에도 감탄하며 얘기를 들어주는 엄태웅의 캐릭터가 훨씬 매력적이다.

누구보다 열심히 하고, 체력도 남다르지만, 아무리 급해도 신호등 앞에서 파란불이 켜질 때까지 기다리고, 미션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행선지를 끝까지 밝히지 않는 엄태웅은 자막으로 나온 것처럼 '순둥이'다. 아침 미션에서 개울 너머 있는 깃발을 전부 가져가다 나눠줄 정도로 의리도 있고, 복불복으로 게임을 할 때는 나름 '즐기는' 면모도 보여준다. 이수근의 말처럼 그가 잘하는 것은 아직은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바로 그 '발견'되지 않은 점이 바로 엄태웅의 매력이자 그가 가진 힘이다.

'1박2일'에 예능 능력자들은 넘쳐난다. 하지만 그냥 서 있는 것만으로 자꾸만 보고 싶게 만드는 그런 인물은 귀하다. 이미 오랫동안 출연하면서 대중들과 스스럼없이 가까워진 탓이다. 엄태웅은 특별히 뭔가를 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빛이 난다. 히치하이킹을 하는데 서지 않는 차를 보며 쑥스럽게 웃을 때, 차를 태워준 아주머니가 "TV에서 봤던 그대로다."라고 하자, "그럼 그 사람이 그 사람이죠 뭐."하며 머쓱하게 웃을 때, 그의 존재감은 빛난다. 그에게 마치 '1박2일' 전문가처럼 조언을 해주고, 그가 차에서 내릴 때 "잘 하세요"라고 격려해주는 대중들을 만들어내는 그 자리가 바로 '1박2일'에서 엄태웅이 설 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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