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섬’의 박형식, 매운맛 드라마에 더한 설득력

보물섬

청춘은 밝고 경쾌하다. 그래서 보는 이들을 풋풋한 그 시절로 소환하는 힘이 있다. 박형식은 그런 이미지를 타고난 배우다. 보는 이들을 설레게 만들고, 한없이 밝고 맑으며 가벼웠던 청춘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그런 배우. 그런데 이런 이미지는 나이 들어가면서 무게감을 요구하는 역할들로 영역을 넓혀야 하는 배우에게는 정반대로 장애요소가 되기도 한다. 발랄함의 가벼움을 넘어 인생의 무게감을 짊어지고 그 그늘을 매력으로 끄집어내야 하는 느와르 장르나 밑바닥까지 떨어졌다가 돌아와 분노를 뿜어내는 처절한 복수극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런 점에서 보면 박형식이 최근 출연한 드라마 ‘보물섬’은 그에게는 보물 같은 경험을 하게 해주고 있다고 보인다. 이 작품을 통해 그간 밝고 경쾌하게만 보였던 청춘의 아이콘은 사뭇 무겁고 깊이감까지 갖춘 ‘남자’의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으니 말이다. 

 

‘보물섬’에서 박형식이 맡은 서동주라는 인물은 등장부터 선한 청춘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다크한 어른의 면모를 드러낸다. 대산그룹 차강천 회장(우현)이 총애하는 비서로 회사에 불리한 증언들이 청문회에서 나오기 시작하자 대뜸 돈다발을 들고 의원을 찾아가 회유하고 협박하는 인물이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금품을 제공하기도 하고 때론 주먹질도 하며 몰래카메라로 찍은 영상으로 협박하기도 하는 그런 인물. 그간 박형식이 해온 풋풋한 청춘과는 등장부터가 다르다. 

 

우리에게 박형식의 이미지는 그의 전작이었던 <닥터 슬럼프>에서의 여정우 역할에 가깝다. 그는 늘 밝았고, 심지어 모든 걸 잃고 밑바닥으로 추락한 후에도 여전히 밝았다. 잘 나가던 성형외과의사이자 인플루언서였던 여정우는 한 순간의 누명으로 모든 걸 잃는다. 그런데 이 청춘은 자신의 만만찮은 상처에도 불구하고 선배의사들에게 이용만 당하다 결국 우울증을 갖고 쫓겨나게 된 남하늘(박신혜)을 위로해준다. 생존경쟁과 각자도생의 삶을 살아오다 그 지경에 이른 남하늘이 “잘못 산 것 같다”고 말할 때 “네 잘못 아니야”라고 얘기해준다. 박형식 특유의 건강한 에너지는 그래서 남하늘은 물론이고 자신까지도 다시금 회복할 수 있는 힘을 부여하는 여정우라는 캐릭터에 제대로 맞아 떨어졌다. 

 

박형식이라는 청춘의 이미지가 보여주는 이러한 ‘회복력’은 그가 사극에 도전했던 ‘청춘월담’에서도 힘을 발휘한 바 있다. ‘청춘월담’은 저마다 저주와 누명을 뒤집어쓴 청춘들이 그들을 가둬놓았던 담을 뛰어넘는 이야기다. 이환(박형식)은 형을 죽이고 왕세자 자리에 올랐다는 누명을 쓴 채 혹독한 저주를 받은 인물이고, 민재이(전소니)는 사랑하는 부모와 오라버니를 독살한 살인자라는 누명을 쓴 채 도망자가 된 인물이다. 왕세자와 도망자의 처지이지만 그들은 둘다 누명을 쓴 청춘이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어 조금씩 서로를 이해하게 되고 그래서 함께 그 어둠의 터널을 통과해 진실을 향해 나간다. 어두운 곳에 놓여져도 오히려 빛나는 밝은 이미지를 드러내는 박형식인지라, 그는 속박된 틀을 벗어나 훨훨 담을 넘어가는 ‘청춘월담’의 서사와 시너지를 만들어낸다.

 

박형식의 밝은 이미지는 심지어 좀비 장르에서도 설렘을 주는 면모를 발휘한다. 좀비들이 창궐하는 아포칼립스 상황 속에서도 한효주와 달달한 멜로 구도를 그려냈던 ‘해피니스’에서의 박형식이 그렇다. 어찌 보면 좀비가 창궐하는 아포칼립스의 암울한 상황과 이러한 발랄함은 어울리지 않아 보이지만, 오히려 ‘해피니스’는 이런 팬데믹 분위기와는 상반된 발랄한 극의 분위기가 특징인 작품이다. 팬데믹 이후의 달라진 인식 기반 위에 세워진 이 드라마는 좀비 장르를 통해 팬데믹 상황을 은유하긴 했지만 너무 어둡지 않은 전망을 담으려 했다. 그래서 어두운 현실 속에서도 어둡지만은 않은 작품을 그리려 했고, 그래서 멜로 같은 달달한 분위기를 살리려 했다. 밝은 미소가 더 어울리는 박형식과 한효주가 작품의 중심에 서게 된 이유다. 

 

하지만 앞서도 말했듯 배우에게 있어서 고정된 밝은 이미지는 성장에는 족쇄가 되기 마련이다. 박형식은 제국의 아이들의 아이돌로 시작했지만 2012년부터 배우로 데뷔해 지금껏 10여년이 넘게 연기의 길을 걸어왔다. 이제 나이도 30대에 접어든 그가 계속해서 청춘의 아이콘으로만 머물러서는 여러모로 한계를 드러낼 수 있는 상황이다. 그가 ‘보물섬’ 같은 욕망과 좌절 그리고 분노와 복수가 이어지는 느와르에 가까운 작품으로 돌아온 건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보인다. 그에게 필요한 것이 이러한 이미지 변신이니 말이다.

 

실제로 예고편이 등장한 후 대중들은 박형식의 다른 면모에 적이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훨씬 굵어진 선이 강조되는 이미지에, 강렬한 눈빛과 다크해진 모습들이 그렇다. 물론 등장은 사랑에 진심인 순정남으로서의 면모로 시작한다. 사랑을 위해 야망까지 접고 여은남(홍화연)이라는 여인을 사랑하는 모습이다. 하지만 이러한 순정남의 면모는 첫 회만에 깨져버린다. 여은남이 차강천 회장의 외손녀였고, 비선실세로서 최강빌런인 염장선(허준호)의 조카와 정략결혼을 하게 되면서다. 서동주는 이로써 사랑을 배신당하고, 나아가 대산그룹에서 성공하려던 그 야망 또한 저지당할 위기에 처하게 된다. 2조원의 비자금을 만든 후 팽 당할 위기에 서게 되는 서동주의 선택은 우리 모두가 기대하듯이 처절한 복수다. 

 

사실 어찌보면 ‘보물섬’은 돈과 권력의 세상 속에서 저마다의 ‘보물’을 찾아가는 이야기지만, 그 구성이나 소재는 막장드라마에 가깝다. 그런데 이러한 막장의 요소들이 박형식이라는 배우가 가진 진중함과 만나 중화되는 화학작용을 일으킨다. 지금껏 신뢰를 주던 박형식이기에 믿고 보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밝은 이미지로만 채워져 있던 박형식에게도 변화의 기회를 제공한다. 그간 청춘의 아이콘으로만 그려져오며 상대적으로 적게 느껴졌던 깊이감의 부여랄까. 이것은 아마도 박형식이 이 작품을 통해 얻게 된 진짜 보물이 아닐까 싶다. (글:국방일보, 사진:SBS)

밴드음악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말해주는 것

최근 데이식스나 QWER, 실리카겔, 쏜애플 같은 밴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코로나19 시기 움츠러들었던 콘서트 열기가 더해져 밴드 기반의 아티스트에 대한 팬덤도 커지고 있는데, 이런 변화는 무얼 말해주는 걸까. 

데이식스

최근 주목되는 데이식스와 QWER

지난 10월22일 멜론차트를 보면 로제와 브로노마스가 함께 한 ‘APT.’와 에스파의 ‘UP’ 그리고 제니의 ‘Mantra’ 같은 K팝 아이돌의 음악들이 맨 꼭대기에 위치해 있지만, 그보다 더 눈에 띠는 건 데이식스다. 데이식스는 멜론 탑100 차트 20위 권에만 최근 발매한 ‘Fourever’ 앨범 수록곡들인 ‘Happy’, ‘Welcome to the Show’는 물론이고 예전에 냈던 곡들인 ‘한 페이지가 될 수 있게’, ‘녹아내려요’, ‘예뻤어’까지 순위에 올랐다. 물론 아이돌 같은 외모에 남다른 밴드 실력을 갖춘 팀인데다, 확고한 팬덤까지 갖추고 있어 이런 차트 상위권 기록이 새로운 일은 아니지만 이처럼 여러 곡이 동시에 채워지고 있는 건 놀라운 일이다. 늘 아이돌로 대변되는 K팝(이것이 K팝 전체를 지칭하는 건 아니지만 이른바 아이돌 음악이 K팝을 지칭하는 것만 같은 건 실제 현실이다)이 차트를 채우고 있던 풍경과 비교해보면 이런 차트의 변화는 흥미롭게 느껴진다. 그건 마치 밴드음악에 대한 대중적 저변이 만들어지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예감을 불러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같은 날 차트 20위권에 오른 QWER의 ‘내 이름 맑음’과 ‘고민중독’이나, 버추얼 아티스트 플레이브의 ‘Pump up the volume!’과 ‘Way 4 LUV’, 나아가 ‘선재 업고 튀어’의 ost로 극중 이클립스 밴드의 보컬 역할을 한 변우석이 부른 ‘소나기’가 의미심장하게 보인다. 이들 곡들은 물론 색깔이 조금씩 다르지만, 밴드음악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실제로 올해 가요계에는 ‘밴드 붐’이 현실화되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일찍이 전국민적인 사랑을 받았던 잔나비는 물론이고 최근 인기가 급상승해 차트를 올킬하고 있는 데이식스, 남다른 음악 스타일로 현재의 밴드 붐을 견인했다고 평가받는 실리카겔, 저마다의 스토리를 가진 인물들의 밴드 결성 과정 자체가 주목받으며 그 위에 실력까지 겸비하면서 밴드 음악의 대중화에 한 몫을 했다 평가받는 QWER 등등 다양한 밴드들이 등장해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다. 또한 코로나 시국에 억눌려 있던 콘서트에 대한 갈망이 밴드 음악을 통해 폭발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올해 인천펜타포트 락 페스티벌‘은 역대 최고 관객수를 경신했고, 부산국제록페스티벌 역시 3만5천여명의 관객이 몰려 뜨거운 열기 속에 공연을 즐겼다. 특히 이번 부산국제록페스티벌에는 국내에도 팬덤을 가진 일본의 유명 락밴드 스파이에어 공연에 관객들의 관심이 집중됐는데, 이건 최근 J팝에 열광하는 Z세대들의 이면에 존재하는 밴드 음악에 대한 갈증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아이돌 바깥을 찾아보기 시작한 Z세대들

물론 방탄소년단이 군대 문제로 완전체 활동이 정지된 상태지만 솔로로 이어지는 정국이나 진, 지민의 활동에는 여전히 글로벌 팬덤이 결집된다. 또 에스파나 뉴진스, 세븐틴, 르세라핌, 아일릿, 스트레이키즈 같은 K팝 아이돌들의 글로벌 저변 또한 분명하다. 가온차트의 글로벌 K팝 차트를 보면 그 꼭대기를 차지하는 건 대부분 이들 아이돌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K팝이 아이돌 음악의 틀에서 벗어나 다양해져야 한다는 목소리는 국내외에서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비슷한 장르의 믹싱과 거기 어울리는 아이돌 특유의 춤과 노래 그리고 뮤직비디오는 이제 K팝 아이돌 음악의 공식처럼 되어 있지만 그래서 클리셰처럼 되어가는 면이 있다. 

 

이런 변화에 대한 목소리는 의외로 국내에서부터 나오고 있다. 아예 태어나서부터 K팝을 듣고 자란 Z세대들의 경우 이제 모두가 똑같아 보이는 이 음악에 대해 그다지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특히 남들과 다른 나만의 경험을 추구하는 Z세대의 특성상 모두가 듣는 차트 꼭대기의 음악은 오히려 ’개성없음‘으로 여겨지는 추세다. 그래서 이들은 새로운 나만의 음악을 찾아 아이돌 음악 바깥을 찾아보기 시작한다. 밴드 음악이 주목된 이유이고, 최근 갑자기 J팝이 국내 팬덤을 갖기 시작한 이유다. 밴드 음악은 자체적인 악기 연주와 창작을 기반으로 하고 있어 그 다양성이 거의 무한대에 가깝다. 게다가 최근 Z세대가 원하는 라이브 무대에도 최적화되어 있다. 똑같은 음악과 무대에 식상해하는 Z세대들은 라이브 무대의 일회성과 그 대체불가한 시간을 함께하는 것에 열광한다.

 

물론 아이돌 음악이 가진 잠재성과 가능성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아이돌 음악이 지속가능하기 위해서라도 기반이 되어줄 수 있는 밴드 음악 같은 저변들이 폭넓어져야 한다. 밴드를 기반으로 하는 다양한 장르의 음악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아이돌 음악의 색다른 양분이 되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K팝, 이제는 애프터 K팝을 생각해야 할 때

특히 오래된 지적으로서 여전히 ’아이돌‘이라는 틀에 가둬 놓는 방식이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가하는 의구심을 가져볼 필요가 있다. 아이돌은 본래 10대 혹은 20대를 대상으로 높은 인기를 얻는 연예인 특히 가수를 가리키는 용어였지만, 언젠가부터 나이의 제한을 받는 용어가 되었다. 보아가 일찍이 어린 나이부터 연습생 과정을 거치게 된 건 바로 그 때문이었다. 20대만 되도 아이돌로서 나설 수 없는 나이처럼 여겨지던 당시 아티스트들의 데뷔는 더 일찍부터 시작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론 지금은 아이돌의 범주가 30대 이전의 20대까지를 아우를 정도로 넓어진 건 사실이다. 하지만 여전히 이 아이돌이라는 개념의 틀은 연습생은 물론이고 데뷔한 그룹의 멤버들조차 이 틀은 그들을 옥죄는 족쇄가 되고 있다. 아이돌 데뷔에 있어서 나이의 제한이 있다는 압박감이 연습생들에게는 초조와 불안을 만들어내고, 데뷔한 후에도 끝나는 시효가 있다는 사실이 아이돌 그룹에도 향후의 나아갈 방향을 흔들리게 만든다. 그래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팀이 해체되는 건 당연한 일처럼 여겨지고, 저마다의 솔로 활동을 하거나 잊혀지는 과정이 반복된다. 적어도 이 틀을 깨는 것만으로도 훨씬 더 롱런할 수 있는 아티스트들이 가능해질 수 있지 않을까. 

 

나아가 K팝이 아이돌 음악을 통해 갑자기 글로벌 무대에 등장함으로써 저마다 그것이 하나의 유일한 방향성처럼 치부되는 건 그 자체로 K팝의 발목을 잡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미 서구에서는 K팝의 획일성을 지적하며 그 대안으로서 J팝이나 V팝 같은 새로운 지역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심지어 국내의 젊은 세대들은 저마다의 다양한 취향을 담보할 수 있는 장르의 다양한 아티스트들을 찾아 개인적인 플레이리스트를 꾸미는 중이다. 그래서 이제 ’K’로 지칭되듯, 마치 모두가 다 좋아할 것 같은 음악에는 오히려 시큰둥해하는 모습을 보인다. 차라리 남들이 모르는 인디음악을 찾아 드는 새로운 경향이 생겨나는 것이다. 

 

글로벌하게 사업이 확장된 기획사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변화는 마이너한 일이라 여겨질 수 있다. 비즈니스적인 차원에서 봤을 때 좀더 보편적인 인기를 얻을 수 있는 곳에 투자하는 것이 더 채산성이 높기 때문이다. 하지만 음악은 그렇게 비즈니스만으로 지속 가능한 영역이 아니다. 그보다는 보다 창의적이고 독보적인 아티스트들이 다양한 음악들을 내놓을 수 있는 환경 속에서 자생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닐까. 밴드 붐이 보여주는 대중들의 갈증을 제대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이제 애프터 K팝을 생각해야 K팝의 미래가 보이는 시점에 들어와 있다. (글:시사저널, 사진:JYP엔터테인먼트)

양세종, 수지 마음 훔친 다정함과 무해함의 인간화(‘이두나’)

이두나!

“무서웠겠어요. 혼자서. 누나, 겁내도 되요. 다치는 것보단 낫잖아요. 다치지 말라고요. 누구한테든. 사랑받는 게 업이었던 사람이잖아요.”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와 함성 속에서 반짝반짝 빛났지만, 어느 날 갑자기 노래가 나오지 않아 도망치듯 무대를 떠난 이두나(수지). 혼자 사는 집에 누군가 자신을 훔쳐보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그는 사실 그게 두렵지만 마치 그런 일은 흔한 일이라는 듯 익숙한 척 한다. 하지만 그 치한을 붙잡아 다시는 그런 짓을 못하게 해준 원준(양세종)은 두나의 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 그렇게 말한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이두나!>에서 이 대사는 두나가 원준에게 마음을 열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한 밤 중 잠에서 깨 홀로 맥주를 마시고 있는 원준을 보고는 함께 술이나 마시려던 두나의 마음에 원준의 그 말은 잔잔한 파문을 던진다. 그 누구에게도 그런 다정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어서다. 두나는 괜스레 더 자야겠다며 원준의 무릎에 머리를 기대고 눕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고, 원준은 무해하게도 그런 두나를 내려다보며 이불을 덮어준다. 

 

그러자 이제 두나가 원준의 손을 포개 잡으며 말한다. “좀 잡고 있을 게. 싫으면 빼.” 그건 마치 위로받고 싶은 마음이 담긴 말이지만 동시에 원준에 대해 두나가 호감을 갖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자 원준은 두나가 포갠 손을 다른 손으로 마치 이불을 덮어주듯 덮어준다. 그 손길을 느끼고 두나 역시 손을 꼭 쥔다. 짧은 장면이지만 두나와 원준의 마음이 드디어 서로에게 닿는 장면이다. 

 

<이두나!>는 한때 화려한 아이돌이었지만 지금은 은퇴해 홀로 지내는 두나를 같은 셰어하우스에 들어오게 된 원준이 만나면서 벌어지는 멜로드라마다. 화려한 아이돌과는 사뭇 다른 현재의 두나의 모습을 드라마는 담배 피는 장면으로 반복해 보여준다. 아이돌이라고 하면 현실과는 어딘가 유리되어 보이는 그런 인물처럼 느껴지지만, 담배를 피우는 두나의 모습은 그 비현실을 현실로 끌고 들어온다. 

 

<이두나!>는 이처럼 두나라는 전직 아이돌의 캐릭터가 하나의 아우라처럼 극의 중심을 잡아줘야 하는 드라마지만, 그런 비현실적 화려함에 질식됐던 인물을 현실로 이끌어내 조금씩 회복시켜주는 원준의 매력이 도드라지는 드라마이기도 하다. 그런데 원준이라는 이 캐릭터에 저도 모르게 자꾸만 빠져드는 그 매력의 정체는 뭘까. 그건 두 단어로 정리하면 아마도 ‘다정함’과 ‘무해함’이 아닐까. 

 

원준은 함부로 다가가는 그런 인물이 아니다. 대신 한 걸음 물러나 지켜봐주고 한 마디 한 마디를 조심스럽게 꺼내놓는 섬세한 다정함이 일상에 배어있는 인물이다. 그는 아주 작은 것조차 죄책감을 느낄 정도로 선하다. 아픈 엄마와 동생을 두고 자취방으로 떠나오면서 자신이 잠깐 좋다고 느꼈던 그 해방감조차 ‘나쁜 생각’이라고 할 정도다. 그래서 성큼 성큼 다가오는 두나 앞에서 뒷걸음질 치며 조심스러워하다 어렵게 어렵게 “내가 많이 좋아해요”라고 말을 꺼낸다.

 

자신이 너무나 좋아했었지만, 그 때로부터 이미 시간이 많이 흘러 이제는 마음이 두나에게 가고 있는 걸 알고 있는 원준은 그 마음을 알면서도 끝내 고백하는 진주(하영)에게 고맙고 미안하다고 말하면서 그에게 “누구라도, 가족이라도 함부로 하게 두지 말라”고 하는 사려 깊고 배려 많은 인물이기도 하다. 또 자신이 상처받을 걸 알면서도 먼저 좋아한다고 말하며 그걸 애써 감당하려는 용기도 가진 인물이다. 이러니 누나들의 마음을 설레게 할 수 밖에. 

 

최근 들어 드라마 속에 등장하는 이상화된 남성상이 바뀌고 있다. 아주 과거에는 카리스마 있는 남성상이 자주 등장하곤 했지만 지금은 그런 인물들은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대신 다정하고 또 무해한 모습으로 상대의 마음을 깊이 이해해주고 배려하는 남성상이 급부상했다. <이두나!>에서 위태롭게 보이는 두나를 그 따뜻함으로 보듬어 다시 건강하게 만들어주는 원준이라는 캐릭터는 바로 그런 남성상이다. 

 

수지가 담배 피우는 모습 하나로도 두나라는 아이돌이었지만 지금은 한없이 흔들리는 인물을 표현해냈다면, 양세종은 흔들리는 두나 옆에서 더할 나위 없이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혀주는 원준이라는 인물을 눈빛과 목소리로 그려낸다. 수지와 양세종이 서로를 바라보는 그 장면만으로도 애틋해지는 오랜만에 보는 청춘 멜로드라마다. 깊어가는 스산한 가을에 더더욱 가슴을 따뜻하게 만들어주는.(사진:넷플릭스)

 

아이돌이 나이 들어서도 계속 음악을 할 수 있다는 건

엄마는 아이돌

“선예가 어린 나이에 결혼한다고 했을 때 사실 걱정도 많이 됐죠. 너무 어린 나이에 그것도 국민 그룹의 리더를 하다가 갑자기 가정생활, 그것도 타지에 가서 한다니까, 사실 당연히 응원해주고 하지만 걱정은 너무 많이 됐는데 사실 쉽지 않았겠죠. 저한테 말 못한 것도 많이 있었겠고. 선예는 책임감이 진짜 강해요. 그래서 자기가 내린 그 선택을 옳은 선택으로 만들고 싶었을 거예요. 삶의 모든 선택은 선택하고 나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 선택이 좋았던 선택인지 안 좋았던 선택인지 결정이 되잖아요. 자기가 선택을 해놓고 그 선택을 좋은 선택으로 만들고 싶었을 거란 말이죠. 그러니까 얘 성격에 얼마나 악착같이 그걸 잘 살아냈을까 그런 게 다 합쳐지니까...”

 

tvN <엄마는 아이돌>에서 절친 콘서트에 선예의 절친으로 깜짝 등장한 박진영이 같이 밥 먹다 울컥했던 이유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그 이야기를 듣던 이들은 마음이 따뜻해졌다. 별은 선예의 그 마음을 이해해주는 그 말에서 자신이 위로받는 것만 같았다고 했고, 그 자리에 함께 선 선미도 선예도 눈가가 촉촉해졌다. 

 

선예가 새로운 걸 그룹에 도전한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무슨 얘기를 했냐는 이찬원의 질문에 박진영은 사실상 이 프로그램의 진짜 기획의도에 딱 맞는 답변을 내놨다. “전 그 때 딱 한 마디 했어요. 지금 이 걸 보는 수많은 엄마들 혹은 자기 삶이 여기까지구나 라고 체념하셨던 많은 분들에게 다시 한 번 용기를 줄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열심히 해라 그렇게 바로 얘기했죠.” 그러면서도 그는 관중들에게 사연이 아닌 실력으로 이 새로운 도전이 다가갔으면 하는 마음도 전했다. 그게 반칙이 아닌 정당한 노력에 의한 성취일 수 있어서다. 그리고 모두가 실감했듯이 박진영은 선예가 “생각했던 것보다 잘해서 깜짝 놀랐다”는 소회를 전했다.

 

사실이었다. 선예는 <엄마는 아이돌>에서 아이돌이 나이 들어 엄마가 되어도 여전히 음악을 계속 할 수 있고, 나아가 그 나이가 갖는 경험 등에서 묻어나는 감정 표현 같은 것들이 더 깊어질 수 있다는 걸 여러 미션을 통해 보여준 바 있다. 춤은 물론이고 특히 노래는 선미가 말한 대로 예나 지금이나 레전드였다. 홀로 솔로가수를 해도 충분할 만큼. 

 

절친 콘서트로 마련된 이 무대에 선예가 과거 원더걸스로 함께 했지만 지금은 솔로로 자리를 잡은 선미와 같이 무대에 서서 ‘가시나’를 부르고, 또 과거 소속사 대표였던 박진영이 깜짝 등장해 선예와 ‘대낮에 한 이별’을 함께 부르며 이 모습을 이제 한창 활동 중인 아이돌들이 보는 광경은 그 자체로 주는 의미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아이돌은 그 지칭에 담겨 있는 것처럼 ‘나이’가 장벽이 된다. 어느 정도의 나이가 지나면 더 이상 아이돌을 할 수 없다는 강박이 실제로 현재 활동 중인 아이돌들에게도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늘 자리하게 되는 것. 또 아무리 그룹으로 잘 활동하고 있다가도 결국은 어느 순간에는 각자가 헤어져야 하는 상황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안타깝게도 잊혀지기도 한다. 

 

그런데 <엄마는 아이돌>이 마련한 절친 콘서트에 선예와 선미 그리고 박진영이 함께 서면서 보여준 건,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계속 저마다의 삶과 활동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선미는 솔로가수로 자리를 잡았고, 선예 역시 엄마로서의 자기 선택에 최선을 다하면서도 또 새로운 음악활동까지 할 수 있는 가수라는 걸 이 프로그램을 통해 입증해보였다. 무엇보다 이런 각자의 길들을 존중해주고 지지해준 박진영이라는 남다른 어른의 모습 또한 이 무대에서는 발견할 수 있었다. 

 

아마도 이 무대는 그걸 직관한 아이돌들에게 레전드로 다가오지 않을까. 그것은 압도적인 퍼포먼스와 노래의 무대라서가 아니라, 아이돌이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음악을 할 수 있고 저마다의 활동을 하며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걸 그 무대가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건 박진영이 말했듯 아이돌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 땅의 모든 엄마들 혹은 내 삶이 여기까지구나 라고 체념했던 모든 이들에게도 남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삶의 가장 밝은 순간은 과거의 한 때가 아니라 사실 우리가 매일 매일 마주하는 현재라는 걸 이 무대가 말해주고 있어서다.(사진: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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