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에 이어 <육룡>에서도, 어른들과 맞서는 유아인의 청춘

 

욕심이요? 왜 제가 가진 꿈만 욕심이라고 하십니까? 왕이 된 것은 아바마마의 꿈이 아니었습니다. 의안대군 역시 꿈을 꾼 적이 없을 것이나 세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전 그런 꿈을 꾸어왔습니다. 헌데 왜 제 꿈만 욕심입니까?” SBS <육룡이 나르샤>에서 이방원(유아인)은 세자가 되려는 욕심을 버리라는 아버지 이성계(천호진)에게 그렇게 울분을 토로한다.

 


'육룡이 나르샤(사진출처:SBS)'

역사적 사실만 두고 보면 이성계가 그 왕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도, 또 정도전(김명민)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지 않고 조선을 건국해 모든 권력을 틀어쥔 채 새나라라는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있게 된 것도 모두 이방원이 정몽주(김의성)의 폭주를 막아서다. 이성계도 정도전도 정몽주를 끌어안기 위해 그들이 죽을 위기에 처하고 패업마저 수포로 돌아갈 상황에 이르렀을 때조차 그저 손을 놓고 있었다.

 

그 때 이방원만은 이념이 아니라 실행으로써 이 신조선의 꿈이 가능하다는 걸 간파하고는 정몽주를 선죽교 위에서 죽였다. 물론 그 행위를 잘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그 기반 위에 새로운 조선을 세워놓고는 아들이자 제자이면서 사실상 새 나라를 세우는데 일등공신이랄 수 있는 이방원을 희생양으로 내모는 이성계와 정도전의 행위 또한 정당하다 말하긴 어려울 것이다. 모든 건 이 젊은 청춘의 행동으로 이뤄졌지만 어른들은 그를 희생해 실리와 명분 모두를 가져가려 한다. 이 얼마나 잔혹한 일인가.

 

조선 건국이라는 패업을 달성하는 과정을 그리는 <육룡이 나르샤>가 막상 그걸 이룬 후 어떻게 이 육룡의 사분오열을 그려낼 것인가는 우려와 기대가 섞이는 대목이었다. 즉 육룡이 한 데 힘을 모아 구악을 밀어내고 꿈을 이뤄가는 그 과정은 가슴 설레는 이야기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후에 벌어지는 권력 투쟁의 이야기는 육룡 간의 대결 구도를 만들면서 자칫 구심점을 잃을 위험성도 있었다. 물론 조선 건국까지는 육룡이 저 마다 등가의 위치를 확보해왔다면 이제부터는 그 여섯 용들 중 이야기의 흐름을 위해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육룡이 나르샤>가 선택한 건 이방원이다.

 

여러 차례 여말 선초의 이야기들이 사극으로 다뤄지면서 그 주인공으로 이성계를 선택하기도 하고 또 정도전을 선택하기도 했다. 물론 이방원을 선택한 경우도 있다. 하지만 특히 <육룡이 나르샤>가 젊은 이방원을 선택한 건 왜일까. 거기에는 다분히 이 사극이 현재와 조우하는 면들이 드러난다. 결국 이 사극은 고려라는 구악을 물리치고 조선을 세우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 중심에 청춘으로서의 이방원이 서 있다.

 

그는 아버지 이성계, 스승 정도전이라는 어른들과 함께 패업을 꿈꾸고 실행해오지만 그 결과로 돌아온 건 그 욕심을 접으라는 얘기뿐이다. 심지어 그들은 이방원을 죽을 자리가 될 지도 모르는 명나라의 사신으로 보내버린다. 이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그려진 이야기의 구도는 다분히 현재의 우리네 현실과 무관할 수 없다. 지금 우리 시대에 희생양은 다름 아닌 청춘들이 아닌가.

 

이미 영화 <사도>에서 유아인은 아버지 영조(송강호)와 맞서다 뒤주에 갇혀 죽음을 맞이하는 비운의 사도세자 역할을 한 바 있다. 그 사도세자가 꿈꾸던 건 단지 떳떳하게살고 싶다는 것뿐이었다. 그 좌절된 청춘의 이야기를 유아인은 <육룡이 나르샤>의 이방원을 통해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방원은 그 꿈을 포기하지 않고 밀어붙여 실행에 옮긴 인물이다.

 

이방원이 아버지 이성계를 향해 던지는 그 질문, “헌데 왜 제 꿈만 욕심이냐고 묻는 그 질문은 그래서 더욱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어째서 이 부조리한 시스템은 지금의 청춘들의 꿈을 번번이 좌절시키고, 심지어 그것이 욕심이라고까지 느끼게 만드는 것일까. 과연 이래도 되는 걸까. 이래서 그 사회의 더 좋은 미래는 가능한 일일까.

<육룡이 나르샤>에서 가장 변화무쌍한 유아인의 이방원

 

SBS <육룡이 나르샤>에서 가장 변화가 많은 인물을 꼽으라면 누가 될까. 단연 이방원(유아인)이다. 아버지 이성계(천호진)가 이인겸(최종원) 앞에 무릎을 꿇는 장면을 본 후, 대의에는 그것을 실행할 힘이 있어야 한다는 걸 뼈저리게 깨달은 이방원은 그렇게 절망적인 성장기를 거친 후 정도전(김명민)의 동굴에서 가슴 떨리는 희망을 찾아낸다. 신조선을 세우려는 그 웅지. 이 시기 이방원의 모습은 비로소 꿈을 찾아낸 자의 설렘으로 가득 했다.

 


'육룡이 나르샤(사진출처:SBS)'

생각을 깊이 하기 보다는 행동이 앞서는 그는 아버지 이성계가 머뭇거리는 일을 저질러버리는 과감한 성격을 보여준다. 어딘지 불안한 청년기의 그는 그러나 홍인방(전노민)에게 붙잡혀 고신을 당할 때는 아버지를 떠올리며 결코 꺾어지지 않겠다고 버텨냄으로써 또 한 차례의 성장을 하게 된다. 그리고 정도전을 스승으로 모시며 뜻을 함께 할 때 그는 탁월한 전략가이자 행동가가 된다.

 

그러던 그가 홀로 서게 되는 것은 정몽주(김의성)를 선죽교에서 살해하면서다. 이 사건으로 육룡은 비로소 조선 건국에 박차를 가하게 되지만 이방원은 아버지 이성계에게도 또 정도전에게도 버림받는 존재가 된다. 사실상 그의 결행에 의해 비롯된 조선 건국에서 그의 자리가 없다는 점은 그가 분노하게 되는 이유다.

 

육룡 중 가장 뛰어난 인물이었던 그가 고립되게 되자 그는 이제 스승이었던 정도전과 대립하게 되고 심지어 아버지 이성계와도 대결하는 인물이 된다. 그 명석했던 인물이 이른바 킬방원으로까지 변모하는 이 일련의 과정이 이토록 드라마틱할 수가 없다. 본래 이방원이라는 역사적 인물이 가진 삶 자체가 그렇다고 해도 그 공은 유아인이라는 배우에게 있을 것이다. 이 변화무쌍한 삶을 제대로 연기로 소화해내지 못했다면 이방원이라는 인물에 이토록 시청자들이 공감할 수 있을까.

 

사실 정몽주를 때려죽이고 나아가 아버지를 거스르며 정도전은 물론이고 형제들까지 모두 죽인 후 비로소 권좌에 오르는 인물이 이방원이다. 결코 시청자들에게 그 공감대를 주기가 쉽지 않은 인물이라는 것. 하지만 드라마의 대본이 그만큼 촘촘히 잘 설계되어 있는 면도 있지만 이를 소화해내는 유아인의 자연스러운 연기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변화해가는 이방원에 대한 공감을 넘어서 심지어 어떤 심리적인 지지까지 하게 만드는 면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

 

이미 <베테랑>이나 <사도> 같은 작품을 통해 한층 성장한 유아인의 연기를 발견했지만 그가 이토록 호흡이 긴 <육룡이 나르샤> 같은 사극에서도 그 드라마의 힘을 계속 추동시킬 만큼 괜찮은 연기자라는 걸 새삼스럽게 확인하게 된다. 그저 동안의 미소년처럼 보이던 그가 어느 순간 분노의 칼을 뽑아 들 때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잔혹해지는 얼굴로 돌변하고 그러면서 또 눈물을 쏟아낼 때면 그 안에 숨겨진 가녀린 속내에 마음 한 구석이 측은해진다.

 

고집스럽게 이타적인 영웅 이성계나 오로지 백성을 위한 조선 건국의 목표에만 매진하는 정도전과 비교해보면 이방원은 1인 다역의 역할이나 마찬가지다. 그 쉽지 않은 연기를 이렇게 잘 소화해내는 유아인에게서 연기자로서의 또 한 번의 성장 또한 읽어내게 된다. 참 괜찮은 배우의 기분좋은 성장이다

<장영실>, 어째서 이 좋은 소재가 이렇게 그려질까

 

KBS 주말사극 <장영실>은 충분히 이 시대에도 의미가 있는 소재다. 장영실(송일국)이란 청춘이 가진 처지가 현실과 맞닿아 있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 천출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특별한 재능이 있어도 출사하지 못하는 처지가 그렇다. 결국 조선을 떠나겠다고까지 마음먹었던 장영실이 아니던가.

 


'장영실(사진출처:KBS)'

그런데 초반 <장영실>의 이런 흥미로운 설정은 어찌 된 일인지 점점 매력이 떨어져간다. 그 흙수저로 태어난 장영실에 대한 공감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던 그를 알아봐주는 세종(김상경)이나 마치 형처럼 그를 허물없이 대해주고 밀어주는 이천(김도현) 같은 인물들이 일찌감치 그를 일으켜 세워주기 때문이다.

 

게다가 심지어 소현옹주(박선영)와 장영실은 신분을 뛰어넘어 연정을 가진 관계로까지 그려진다. 이건 역사에도 나와 있는 이야기가 아니고 현실적으로도 가능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런데도 굳이 이런 멜로 설정까지 집어넣는 건 흙수저로 태어나 가진 게 없었던 장영실을 사실상 모든 걸 다 가진 인물로 느껴지게 만든다.

 

장영실에 대한 찬양에 가까운 이야기는 그가 명나라에 가서 주태강(임동진)의 집에 있는 전설의 물시계 수운의상대를 재현하는 데에도 등장한다. 그는 얘기만 들었지 한 번도 실제 본적이 없는 수운의상대를 척척 재현해낸다. 그런 장영실을 주태강은 경이로운 눈길로 바라본다. 장영실이 조선으로 돌아올 때 주태강은 심지어 조선의 과학이 명나라를 앞지르고 있다는 얘기까지 꺼내놓는다. 제 아무리 드라마라고 해도 이런 식의 극단적인 찬양은 <장영실>이라는 사극에 마치 군대에서 만드는 정훈 영상물 같은 느낌을 덧씌운다. <장영실>은 왜 이 특별한 인물에 대한 현재적인 재해석은 보이지 않고 찬양만 가득할까.

 

이와 상반된 느낌을 주는 작품은 SBS <육룡이 나르샤>. <육룡이 나르샤>에서 정몽주(김의성)와 이방원(유아인)의 이야기는 우리가 역사책에서 배워왔던 것과는 사뭇 다르다. 이 드라마는 이 인물들을 현재의 관점으로 재해석해 놓았다. 정몽주가 그래도 고려를 지키려는 시대에 역행하는 인물처럼 그려진다면 이방원은 신조선이라는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해 모두가 못하는 것들을 실행해 옮기는 인물로 그려진다. 물론 이방원을 완벽한 인물로 그리는 건 아니지만 확연히 현재의 관점이 투영되어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사극이 과거가 아닌 현재를 다룬다는 건 이제 누구나 알고 있는 일이다. 즉 과거의 역사를 소재로 하지만 그 역사를 굳이 지금 현재 들춰본다는 건 그 관점이 현재에 맞춰져 있다는 걸 말해준다. 그렇다면 <장영실>은 어떨까. 장영실이라는 인물을 이 사극은 모든 걸 다 갖춘 과학자로 그려낸다. 그는 천문의 이치를 꿰뚫어보는 인물이면서 동시에 뭐든 척척 만들어내는 기술자이기도 하다. 그에게는 천출이라고 해도 청춘의 그림자가 그리 느껴지지 않는다. 왜 이토록 현재와 호응하지 못하는 걸까.

 

<장영실>이라는 사극이 그 좋은 소재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창조 경제같은 구호로 느껴지는 건 바로 이런 점들 때문이다. <장영실>은 어째서 <육룡이 나르샤>의 이방원 같은 신선한 해석을 하지 못하는 것일까. 심지어 옹주와 사랑하는 비현실적인 이야기까지 집어넣어 도대체 무슨 얘기가 하고 싶은 것일까. 장영실처럼 노력하면 지금의 청춘들도 출사해 성공할 수 있다고? 글쎄. 거기에 호응하는 현재의 청춘들이 몇이나 될까.

<육룡이 나르샤>, 무명이 추구하는 건 결국 자본주의?

 

그것이 우리의 신념입니다. 헌데 새 나라는 이에 대한 인간의 위대한 욕망을 부정합니다.” 지금껏 SBS <육룡이 나르샤>에서 봤던 그 어떤 대결이 이만큼 첨예할까. 정도전(김명민)과 무명의 수장인 연향(전미선)이 벌이는 설전은 이들이 가진 서로 다른 신념의 갈등을 보여줬다.

 


'육룡이 나르샤(사진출처:SBS)'

무명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이 조직이 추구하는 것이 무엇이가는 이 사극의 가장 큰 궁금증이 되었다. 이미 조선 건국의 역사적 사실이야 누구나 다 아는 일일 게다. 그러니 <육룡이 나르샤>만의 새로운 동력이란 바로 이 무명과 육룡이 부딪치는 그 지점에서 나오게 된다. 정도전과 연향의 설전은 이 두 세력이 추구하는 바를 명확하게 보여줬다.

 

연향은 인간의 욕망이 위대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정도전은 그 욕망이란 것이 고려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다고 말한다. ‘인간의 욕망을 바라보는 두 시각은 정전제에 대한 다른 관점을 만들어낸다. 연향은 사전혁파가 더 많은 땅을 갖고 싶은 인간의 욕망을 근원적으로 봉쇄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정전제란 사람 숫자대로 땅을 나누어가지고 주어진 땅에서 한 뼘도 넓힐 수 없게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정도전은 누구도 자신의 땅을 한 뼘도 넓힐 수 없기에 그 누구도 한 뼘의 자기 땅도 빼앗기지 않게 되는 것이라고 반박한다.

 

여기서 무명이 어떤 조직인가가 분명히 드러난다. ‘사유재산을 인정함으로써 자본의 축적을 통한 성공과 성장을 추구하는 조직. 지금으로 보면 자본주의 사회에 대해 지지하는 조직이다. 결국 사회를 성장시키는 것은 바로 그 욕망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땅이란 당연히 왕의 것이요 나라의 것이란 것이 당연하던 몇 백년 전 황무지를 개간하며 그 땅은 개인의 소유로 하는 정책을 실시하도록 만들었다고 밝혔다. 그 결과 사람들은 자기 땅을 갖고 싶은 욕망에 미친 듯이 황무지로 달려 나가 땅을 팠고 따라서 농토는 비약적으로 증가했고 삼한 땅은 전에 비할 수 없이 풍요로워졌다고 했다. 욕망이 길을 만들고 풍요를 이룬 것이라는 것.

 

하지만 이 인간의 욕망과 사유재산을 인정하는 자본주의에 대한 논리에 정도전은 반발한다. “그 풍요가 어찌 되었소. 누가 풍요로워졌습니까. 결국 전 국토의 7할 이상을 권문세족들과 사찰들이 차지했고 백성들은 송곳하나 꽂을 땅이 없어 저들의 터전에서 쫓겨나 객지에서 굶어 죽거나 개 돼지 같은 노비가 되어 천천히 죽어나가고 있었소. 헌데 위대합니까? 이를 쫓는 욕망이란 것이?” 정도전이 추구하는 건 결국 국가가 나서서 그 독을 만들어내는 인간의 욕망을 통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그것을 성리학적 이상으로 달성하려 한다.

 

이것은 지금도 여전히 결론이 나지 않은 자본주의 논쟁이다. 자본주의가 빈익빈부익부를 만들고 양극화를 부추긴다는 것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자본주의 비판의 근원적인 요소다. 하지만 이상을 추구해 국가가 모든 걸 통제하려 했던 사회주의 국가들이 결국은 무너져버린 현대사를 떠올려 보면 정도전의 논리 또한 너무나 이상적일 수 있다는 걸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즉 그의 군자적인 논리는 틀린 데가 없으나 모두가 그 같은 군자가 되기는 쉽지 않은 이상이라는 것이다.

 

무명이라는 가상의 조직이 실체를 드러내면서 <육룡이 나르샤>의 흥미로운 이야기 전재가 눈에 띈다. 조선 건국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육룡이 나르샤>는 결국 이 자본주의에 맞닿아 있는 인간의 욕망을 어떻게 봐야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건네고 있기 때문이다. 정도전이 추구하는 이상은 우리가 이미 역사를 통해 알고 있듯이 절반의 성공으로 끝이 난다. 즉 조선의 시스템은 구축하지만 본인이 생각했던 이상사회는 실현되지 않는 것.

 

그것이 좌절되어가는 이야기를 무명이라는 조직을 통해 그려내면서 흥미롭게도 <육룡이 나르샤>는 차츰 이방원(유아인)의 존재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인간의 욕망을 화두로 봤을 때 이방원은 결국 이 정도전과 무명이 대립하는 두 관점의 교차점이라고 볼 수 있다. 정도전은 그를 품으려 하지만 이방원은 결국 폭두가 된다. 이미 홍인방(전노민)이 예견했던 그 가슴 속의 벌레 한 마리는 새로운 조선에 자신의 설 자리가 없다는 걸 알게 되면서 이방원을 폭주하게 하는 것. 그렇다면 이방원의 뒤편에서 어른거리는 건 역시 이 무명이라는 조직이 된다.

 

이 얼마나 기발한 해석인가. 여말선초의 조선 건국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고, 제목이 내세우듯 육룡이라는 영웅서사를 그리고 있지만 그 이야기는 지금 현재 우리가 고민하고 있는 자본주의 논쟁과 맞닿아 있다. 정도전과 이방원을 이런 식으로 재해석한다는 건 웬만한 철학적 관점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만일 이 김영현 박상연 작가가 <뿌리 깊은 나무>에 이어 <육룡이 나르샤>와 함께 연작 시리즈를 낸다면 이 무명이라는 조직의 역사 개입으로 계속 흥미로운 역사의 재해석이 가능하지 않을까. 작가들로서는 놀라운 야심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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