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고 있어도 눈물이 나는 그들의 두 가지 얼굴

‘일지매’로 새로 돌아온 이준기가 선택한 것은 이번에도 ‘두 얼굴을 가진 존재’였다. 어떤 충격적인 사건으로 기억을 잃고 과거와 현재, 그 두 존재 사이에서 갈등하고 방황하는 역할은 ‘개와 늑대의 시간’에 이어 ‘일지매’로 이어진다. 이준기가 ‘개와 늑대의 시간’에서 이수현과 케이 사이에 서 있었다면, ‘일지매’에서는 겸이와 용이 사이에 서 있다. 이런 야누스의 얼굴은 베테랑 연기자들마저 해내기 어려운 것이지만 이제 그것은 이준기에게는 하나의 이미지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이준기의 두 가지 얼굴
한 드라마 속에서의 배역뿐만이 아니라 이준기 개인이 연기자로서 걸어온 길 또한 변신의 연속이었다. ‘마이걸’에서 곱상한 외모와 털털한 이미지를 동시에 선보이던 이준기는 ‘왕의 남자’를 통해 여성적인 이미지로 변신한다. 그 이미지로 이준기는 각종 CF를 통해서 그루밍족의 표상처럼 구획된다. 문제는 ‘왕의 남자’를 통해 일약 1천만 관객의 스타가 된 이준기가 그 굳어진 이미지를 어떻게 벗어버리느냐는 데 있었다. 하지만 ‘개와 늑대의 시간’을 통해 이준기는 연기자로서의 본연의 모습을 찾아냈다. 그것은 예쁜 남자와 거친 남자의 두 얼굴을 동시에 보이는 것이었다.

‘일지매’의 일지매 캐릭터가 갖는 야누스적인 성격, 정체성의 문제 같은 것은 역시 ‘개와 늑대의 시간’을 빼 닮았다. 하지만 ‘일지매’의 두 얼굴이 갖는 의미는 ‘개와 늑대의 시간’의 그것과는 다르다. ‘개와 늑대의 시간’이 정체성의 혼동을 통한 관계의 역전을 이수현이란 캐릭터의 끝없는 변화과정을 통해 포착하고 있다면, ‘일지매’의 두 얼굴은 혼동의 시간 속에서 자기 존재를 찾고 가치를 알아가는 과정을 잡아내기 위함이다.

일지매의 두 가지 얼굴
첫 회에서 멋진 갑의를 걸치고 지붕 위를 날아다니는 일지매는 저 스스로 말하듯 ‘못할 게 없는 존재’다. 하지만 이 못할 게 없는 일지매가 어떤 기억의 자각 이전으로 돌아가면 거기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는 청년, 용이(이준기)가 서 있다. 충격적인 아버지의 살해장면을 목격한 겸이가 기억을 지우고 용이가 되었을 때 그 앞에 던져진 삶은 쇠돌(이문식)의 자식으로서의 천한 삶이다. 천하다는 이유로 양반자제들에게 갖은 모욕과 수모를 당하면서도 기억하지 못하는 자로서의 용이는 거기에 대해 아무런 항변을 하지 못한다. 그저 “살려주십쇼”하고 애걸할 뿐이다.

하지만 용이가 기억을 되살려내고 천한 존재로 치부되었던 자신이 귀한 존재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일지매가 탄생한다. 하지만 이 일지매라는 존재는 단순히 겸이로의 회귀를 뜻하지 않는다. 일지매는 자신이 귀한 존재라는 것을 알 듯이 저 저잣거리에서 자신 때문에 기꺼이 이빨 하나 정도는 빼주고 바보처럼 웃어주는 쇠돌 같은 민초들이 더 이상 천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따라서 일지매 속에는 겸이와 용이 이 두 인물이 교차한다.

천함과 귀함 사이에서 이 두 인물이 한 몸 속에서 갈등하는 이 부조리한 상황이 저 세상의 잘못된 선 가르기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게된 일지매가 하는 것은 그 선을 넘는 일이다. 그가 서는 자리는 양반과 서민들 사이에서, 도적과 의적 사이에 서서 자신처럼 갈라진 정체성을 가진 부조리한 세상을 바꿔보고자 함이다.

이 시대 청춘들의 두 가지 얼굴
이 일지매의 이중적인 의식(귀한 존재지만 천덕꾸리기 취급을 받는)은 이 사극이 왜 지금 존재해야 하는가를 말해주기도 한다. 이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서자 의식을 일깨운다. 386이 80년대 민주화를 통해 역사의 주역이 되었다면, 지금의 젊은 세대들은 영문도 모른 채 이 깊은 경제 불황의 나락 속에서 ‘88만원 세대’로 전락했다. 역사에서도 빗겨나 있고 현실에서도 주역이 되지 못하는 이들이 처한 상황은 일지매의 ‘기억을 잃고 부유하는 용이의 상황’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이 드라마가 꿈꾸는 세상은 용이도 아니고 겸이도 아닌 일지매이다. 즉 과거도 아니고 현재도 아닌 미래라는 뜻이다. 이 지점이 바로 이준기라는 연기자가 일지매를 통해 만나는 자신의 얼굴이다. 여성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속에 강렬한 피를 끓게 하는 남성적 이미지를 공유한 이준기는, 이제 이미지를 넘어서 이 시대의 청춘들이 공유한 두 가지 의식, 즉 청춘으로서의 쾌활함과 그 쾌활함 이면에 현실로서의 어두움을 공유한 존재로 자신의 정체성을 세우고 있다. 이것은 실제로 연기자로서의 활동과 함께 현실참여에 적극적인 이준기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일지매의 이중적인 캐릭터와, 이준기의 이중적인 이미지, 그리고 이 시대 청춘들이 갖는 이중적인 얼굴은 모두 닮았다. 그래서 일지매가 웃고 있거나, 배우이자 한 청년으로서의 이준기가 웃고 있거나, 혹은 이 시대 청춘들이 웃는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 한 구석이 짠해지는 것은 바로 그 아래 숨겨진 슬픔이나 분노 같은 것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역사 자체를 전복하고 새로운 저들만의 역사를 허구 속에서라도 그려내고픈 ‘일지매’라는 파격적인 사극이 존재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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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지매’라는 테크노 영웅의 탄생, 그 의미

원작의 ‘일지매’는 천으로 된 복면을 썼다. 하지만 2008년 찾아온 ‘일지매’는 금속과 가죽 느낌의 재질로 만들어진 가면을 쓴다. 갑옷도 화려해졌고 무기도 다채로워졌다. 제작사측은 이 갑옷을 만드는 데만 500만원 가까운 비용이 들었다고 한다. 사극의 의복으로서는 파격적일 뿐만 아니라, 비용도 만만찮은 이 갑옷에 ‘일지매’는 왜 그만한 돈을 투여했을까.

‘일지매’, 새로운 테크노 영웅의 탄생
이것은 다분히 현 세대들의 기호를 반영한 결과다. 갑옷은 게임에 익숙한 현 세대들에게는 하나의 아이템에 해당한다. 이 아이템을 입고 작렬하는 음악과 함께 지붕 위를 날아다니는 화려한 가면의 영웅은, 이 시대의 청춘들의 감성이 반영되어 있는 테크노 영웅이다. 그리고 이 지금까지의 사극에서와는 전혀 다른 영웅은 이미 빨간 색안경을 끼고 산발한 머리를 한 ‘쾌도 홍길동’이 등장했을 때부터 예고된 존재다.

‘쾌도 홍길동’은 이미 사극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파격적인 의상은 물론이고, 영상연출에 있어서도 도발적인 시도를 했다. 밸리 댄스를 추는 기녀들, 자가용으로 묘사되는 가마, 골프를 치는 상류층 양반이 그 속에서는 존재한다. 즉 과거라는 시점을 갖고 있지만 그 속에 현대가 공존하는 것이다. 이것은 코믹 퓨전 사극이라는 기치를 내걸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만화의 기법에 영향을 받은 바가 더 크다.

이처럼 자유로운 표현이 가능해진 것은 이 사극들이 역사적 사실, 즉 사료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이다. ‘쾌도 홍길동’이나 ‘일지매’같은 사극은 사실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허구이다. 따라서 허구를 변용하는 것은 역사 왜곡 논란에 휘말리지 않을뿐더러, 사실상 무한대로 상상력을 확장시키게 해준다. 그 안에서는 사람이 날아다니는 것은 물론이고, 일개 도적이 왕의 권위를 앞지를 수도 있다.

역사가 되려 했던 ‘장길산’, 역사에서 탈주하는 ‘일지매’
그리고 이러한 도발적인 표현은 이 시대 청춘들이 가질만한 기성문법에 대한 반항으로 읽혀질 수 있다. 그것은 역사라는 권위를 뒤집어쓴 정통사극에 대한 반항이기도 하고, 기득권 세력들만을 위한 역사에 대한 반항이기도 하다. ‘쾌도 홍길동’과 ‘일지매’의 영웅들이 모두 도적이라는 사실은 음미해볼 문제다. 도적은 하나의 풍자이면서, 민초들 혹은 소외된 자들의 대응논리이기 때문이다. 즉 진짜 도적(탐관오리, 부패한 신료들 혹은 왕으로 대변되는 기득권층)은 따로 있다는 것이며, 그들은 그 도적들을 터는 도적, 즉 의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처럼 표현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선택한 허구들은 그 체제 반항적이라는 면에서 청춘들이 가진 감성들과 맞닥뜨린다. 역사란 본래 기득권자들이 만들어놓은 것이며, 따라서 약자들은 허구 속에서라도 그 갇혔던 울분을 터뜨리면서 저들만의 역사를 세우는 모반을 꿈꾸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홍명희와 황석영의 원작 소설을 각각 드라마화한 과거의 ‘임꺽정’이나 ‘장길산’도(이들도 모두 도적이다) 이 범주에 속한다고 할 수 있으나 이 사극들은 최근의 사극들과는 역사를 대하는 방식에서 차이가 난다.

‘임꺽정’이나 ‘장길산’이 민중의 역사를 새로이 쓰겠다는 의지를 품은 것이라면, ‘쾌도 홍길동’이나 ‘일지매’는 그런 거창한 의지가 없다. 오히려 역사 자체에서 자유로워지려 한다. 따라서 그 영웅의 양상들에서도 차이가 있는데, 전자가 민중의 영웅을 그리려 했다면 후자는 대중의 영웅을 그린다. 이 새로운 영웅들이 대중의 문화적 코드를 사극 속으로 고스란히 끌어들이고 그 안에서 마음껏 향유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포스트모던 사극, ‘일지매’
사극을 하나의 진화의 과정으로 볼 수 있다면 민중의 영웅을 그린 ‘임꺽정’이나 ‘장길산’이 리얼리즘에 입각해 있다면, 역사와 허구, 그리고 왕과 민초의 중간쯤에 서 있던 ‘대장금’같은 퓨전사극은 이 양쪽 사이에 낀 모던한 사극이라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온갖 것들이 해체되고 재결합되어 나타나는 최근에 등장한 ‘쾌도 홍길동’이나 ‘일지매’는 실로 포스트모던하다. 여기에는 시공을 뛰어넘은 문화적 충돌이 곳곳에서 무리 없이 그려진다.

점점 젊어지는 사극 속에는 이 시대 청춘들의 성향들이 녹아있다. 그들은 이념보다는 문화에, 사실이 가진 권위보다는 자유로운 상상력에, 굳어져버린 형식보다는 파괴되더라도 새로운 형식에 더 열광한다. 이들이 이처럼 도발적인 형식으로 기득권을 부정하고 저들만의 영웅을 그리려 한데는, IMF에서부터 현재의 88만원 세대까지 자신들은 원치도 않았고 잘못한 것도 없지만 끊임없이 제기된 불합리한 도전들에서 비롯된 바가 클 것이다. ‘일지매’의 현대와 퓨전된 화려해지고 견고해진 갑옷은 역사에서 벗어나 저들만의 역사를 마음껏 그리고픈 이 땅의 청춘들의 꿈들이 더 간절해졌다는 반증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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