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극을 통해 '무도'가 보여준 바른 언어의 어려움

'무한도전'(사진출처:MBC)

'무한도전'의 언어와 자막에 대해 방통위가 내린 경고조치는 '무한도전' 스스로도 고민이 될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방통위의 결정대로 바른 말을 사용하려니 '무한도전' 멤버들만의 캐릭터가 나타나기 어렵고, 무엇보다 리얼 버라이어티쇼로서 마치 대본을 읽는 듯한 어색함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 결정을 무시할 수도 없는 일이다. 다른 프로그램도 아니고 '무한도전' 아닌가. 이만큼 방송을 통해 우리네 언어생활에 영향을 줄 수 있는 프로그램도 없는 게 사실이다.

그래서 선택한 것은 그 고민스러운 상황 자체를 프로그램으로 녹여서 하나의 공론의 장을 만들자는 것이다. 역시 '무한도전'다운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가 생길 때, 그것을 덮어두거나 무시하기보다는 그 자체마저도 방송으로 끌어들이는 역발상. 이렇게 함으로써 문제 자체에서 소외되지 않고(가만 놔두면 방송이 아닌 다른 곳에서 문제는 저 스스로 커지기 마련이다) 주도적으로 문제를 바라보겠다는 '무한도전'다운 대처방식.

'무한도전 상사'라는 상황극 속에 이른바 '바른 말 쓰기 특강'을 집어넣고, '무한도전'은 스스로의 언어와 자막, 행동을 하나의 논제로 올려놓았다. 배현진 아나운서가 아나운서로서 '잘못된 언어 표현'을 집어낼 때, '무한도전' 멤버들도 저마다 자신들의 반론을 제기하는 방식이 이어졌다. '에×이, ×씨'같은 표현에 대해 박명수가 "하루에도 한 4백 번씩은 합니다"라고 말하자, 배현진 아나운서가 "거칠다는 느낌 안드세요?"하고 반문하고 박명수가 "아니요."라고 주고받는 식으로 이어진 이 난상토론(?)은 과연 '무한도전' 같은 리얼 버라이어티쇼에서 교양 프로그램에 걸맞는 바른 언어 사용이 가능한 것인가를 질문하게 만들었다.

박명수는 "리얼 버라이어티쇼에서 정말 리얼하게 어떤 상황이 생길지 모르는데 거기서 에잇, 에×이를 준비해서 할 수는 없다"고 했고, 길은 "예능은 순발력"이라고 했다. 그만큼 바른 언어 준비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피력한 것이다. 거기에 대해 배현진 아나운서는 "표현이 부드러워진다고 해서 웃기지 않은 건 아니다"고 하며 "이런 걸 조금만 노력을 해주시면 말을 예쁘게 하되 더 재밌는 방송 되지 않을까 생각을 해봤습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박명수는 현장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한번 웃기기가 얼마나 힘든데 말씀을 그렇게 편안하게 하세요. 데스크에만 계시지 마시고 현장에서 보세요. 좀."

물론 이런 문제제기에 대해 서로 수긍하는 입장도 보였다. 유재석은 자신들의 입장이 어렵다는 걸 공감하면서도, 배현진 아나운서의 입장을 반박하기보다는 수긍하는 편이었고, 배현진 아나운서 역시 이들의 반박에 공감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무한도전'의 영향력이 그만큼 크다는 것과 그렇기 때문에 "조금만 더 신경 써 달라"는 주문을 빼놓지 않았다.

사실 어떤 언어는 그것이 거친 표현이라고 하더라도 순화해서 표현하면 예능의 맛을 낼 수 없는 게 현실이다. 하하가 '뻥'이라고 표현한 것을 배현진 아나운서가 제안한 것처럼 '거짓말'이나 '허풍'으로 바꾸는 것으로는 그 말이 주는 어감의 맛을 제대로 표현하기 어렵다. 하하가 소리를 지르는 장면 역시 마찬가지다. 그것은 하하의 캐릭터 하나를 없애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또 어떤 표현은 엄밀한 바른 말이 친근감 있는 속어보다 더 상대방을 기분 나쁘게 만들기도 한다. 길이 '빠박이' 보다 '대머리'가 더 기분 나쁘다고 한 것은 그 단적인 사례다.

또 하하가 박명수의 머리를 예의 없이 잡아당긴 것은 '슬랩스틱'의 고전에 해당한다. 이것을 가지고 '무한도전'에 대해서만 유독 "어린학생들이 따라한다"고 문제시하는 것은 형평성이 잘 맞지 않는다. '멍×아'라는 표현은 물론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표현"이지만, 리얼 버라이어티쇼에서 늘 배려있는 행동을 기대하는 건 예능을 이해하지 못하는 처사다. 대결구도와 말싸움이 하나의 웃음의 코드가 되는 것은 이미 고전적인 마당극에서조차 허용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무한도전'이 이 상황극을 통해 보여준 것은 리얼 버라이어티쇼 같은 예능에서 바른 말을 사용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하는 점이다. 바른 말이 갖는 형식적인(Formal) 특징은 리얼 예능이 가질 수밖에 없는 형식을 따지지 않는(Informal) 특징과는 애초부터 배치되는 면이 있다. 이것은 '무한도전' 뿐만 아니라 '개그콘서트'는 물론이고 과거 코미디의 고전이라 할 수 있는 '웃으면 복이 와요'나 그 이전의 판소리들, 마당극, 남사당패의 말놀이에도 모두 해당되는 것이다.

물론 '무한도전'만큼의 프로그램이 가진 영향력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래서 어느 정도 순화될 필요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리얼한 예능이 바른 언어라는 틀에 의해 조련되는 것 역시 어딘지 건강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상황극이 제시한 것처럼 이 자체를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능의 언어와 일상의 언어는 어쩌면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 맥락을 이해하는 선에서는 욕도 때로는 정감가게 느껴질 수 있다. 많은 문학작품이 그러하듯이.


거리를 둘수록 더 커지는 '무한도전'의 감동, 왜?

'무한도전'(사진출처:MBC)

최근 들어 ‘감동’은 TV 콘텐츠의 한 트렌드가 되었다. 과거 이 용어는 드라마에 주로 등장했었지만 이제는 다큐멘터리, 예능까지 그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예능이 웃음을 넘어서 감동을 추구하는 경향은 특히 두드러진다. 웃음을 전하기 위해 슬픔이나 고통조차 숨기고 있는 그들이 어느 순간 갑자기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과거라면 용납되지 않는 장면이다. 심지어 부친상을 당한 사실을 알면서도 광대 분장을 한 채 무대에 섰던 코미디언들의 일화는 지금도 전설처럼 내려오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차라리 눈물을 흘리거나 상황을 토로하거나 아니면 아예 양해를 구하고 무대에 서지 않는 게 상식적인 게 되어 있다. 이른바 ‘리얼’을 추구하는 예능은 이제 눈물 또한 숨길 이유가 없게 된 것(어쩌면 숨기면 안 되는 것)이다.

예능 프로그램의 감동이나 눈물은 물론 나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리얼한 것이다. 하지만 이 지점에는 위험한 함정도 도사리고 있다. 즉 어떤 감동은 때론 지나치게 교조적이며 계몽적으로 흘러갈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흔히 이것을 '억지 감동'이라고 표현한다. 때론 '병맛'이라고도 하고 '오글거린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억지 감동'. 감동이라는 단어가 붙어 있어서 그런지 그게 무슨 큰 문제일까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실체를 들여다보면 이 '억지 감동'이 가져오는 재미의 반감은 실로 작지 않다. 왜 그럴까. 그것이 특정한 목적을 갖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경관을 화면으로 보여주면서 '아름답다!'고 자막을 붙이는 것이 무슨 차이일까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장면을 그냥 내보내는 것과 자막이 붙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그것은 경관 자체를 보는 이들이 저마다의 감흥으로 받아들이게 하느냐와 굳이 한 방향으로 감상하게 하느냐의 차이다.

'1박2일'이 주는 감동과 '무한도전'이 주는 감동의 차이는 근본적으로 이 지점에서 발견된다. '1박2일'은 조연특집의 마무리에 계속해서 후기를 달아놓는다. 그들이 다시 자신들의 일상으로 돌아간 모습을 조명하면서 그들의 삶을 상찬한다. '명품조연'이 갖는 의미는 물론 상찬할만한 일이다. 하지만 거기에 끝없이 자막을 달아가면서 그 의미를 풀어내는 일은 때론 과잉처럼 여겨진다. 반면 '무한도전'의 자막은 대부분(물론 어떤 경우에는 '무한도전' 역시 과잉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대상과의 거리감을 유지한다. 특히 게스트가 출연했을 때 그 거리감은 더 철저히 지켜진다. '서해안 고속도로 가요제'에서 그 많은 게스트들이 등장하면서도 그들을 상찬하는 자막이나 연출을 발견하기 어려운 것은 그 때문이다.

물론 '1박2일'의 자막을 통해 드러나는 일종의 과잉은 TV라는 대중매체를 타는 프로그램이 갖는 어쩔 수 없는 한계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TV 프로그램은 시청률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시청률은 특수성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보편성에서 나오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 지나치게 친절한 자막은 바로 그 보편성에 대한 강박인 셈이다. '우리는 이렇게 감동했다. 그러니 여러분도 그 감동을 느끼시라.' '1박2일'은 그렇게 프로그램을 통해 말하고 있다.

'1박2일'이 시청률이 높은 것은 바로 이 점 때문이다. 이 프로그램은 보편성을 추구한다. 대중들의 마음을 따라간다. 자신들이 느낀 감동을 고스란히 대중들이 느끼기를 바라며, 또 그 전달에 있어서 능숙하다. 하지만 '무한도전'은 다르다. '무한도전'은 보편성이 아니라, 그 특정한 한 지점을 그대로 뚝 떼어내서 되도록 그 자체로 보여주려 애쓴다. 물론 자막은 여기서 다른 기능을 담당한다. 자신들이 느낀 감동을 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리를 두고 객관화시키려는 의도가 더 짙다.

'무한도전'이 마니아 예능 같은 느낌을 주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 뭔가 설명이 없기 때문에 대중들은 좀 더 적극적으로 프로그램에 참여해 자신들만의 해석을 달아야 한다. 일반적인 TV 시청자들에게는 수고스럽기 그지없는 일이다. 그래서 '무한도전'이 주는 감동은 주어진다기보다는 스스로 발견하는 것이다. 자막을 통해 어떤 의미도 전하지 않았지만 시청자들이 그 조각들을 맞춰서 저마다의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침묵할수록 더 커지는 의미와 감동. 그 역설을 보여주는 게 바로 '무한도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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