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화되는 요리는 과연 나쁜 건가

 

요리사가 단순히 재미만을 위해 방송에 출연하면 요리사는 다 저렇게 소금만 뿌리면 웃겨주는 사람이 될 것이다.” “한국에서 서양음식을 공부하면 자신이 커갈 수 없다는 걸 알고 자꾸 옆으로 튄다. 분자 요리에 도전하기도 하고” “평범한 김치찌개 같은 요리를 왜 TV로 넋 놓고 봐야 하는지.”

 


'강레오(사진출처:MBC)'

채널예스와 자신이 낸 책에 대한 인터뷰를 하면서 강레오가 한 말들은 최근 쿡방에 열광하는 대중들에게 찬물을 끼얹었다. 그 발언 속에는 요리사가 방송에서 쇼를 하는 것에 대한 날선 비판이 들어 있었고, 쿡방에 나오는 요리사들을 떠올리게 하는 이야기도 들어 있었다. 쿡방을 통해 요리사들의 매력에 푹 빠져있는 대중들로서는 강레오의 의도치 않았다는 디스는 날카로운 칼끝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저렇게 소금만 뿌리면 웃겨주는 사람에서 최현석을 떠올리게 됐고, “평범한 김치찌개 같은 요리를 하는 사람에서 백종원을 떠올리게 했다. 구체적으로 이름을 지목하지는 않았지만 분명 그 표현 속에는 지금 현재 쿡방에 소비되는 요리사들에 대한 비판의식이 담겨 있었다.

 

요리사로서 자신의 생각을 얘기한 것이니 그것 자체가 잘못됐다고 말할 수는 없다. 사람마다 저마다의 생각은 다를 수 있는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얘기하는 강레오가 다른 사람의 요리에 대한 생각이나 입장을 배려했다고 볼 수 있을까. 내 생각이 다르다고 나만 옳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이 잘못됐다고 말하는 건 자칫 독선에 빠질 수 있는 일이다.

 

즉 강레오의 발언이 그 분들은 그렇게 생각하시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고 말했다면 달랐을 거라는 것이다. 그 인터뷰 내용을 보면 강레오는 요리가 대중적으로 소비되는 것에 대한 혐오를 가진 인물처럼 보인다. 즉 요리는 전문가들의 영역이고 그러니 그만한 교육과정을 거쳐야만 가능한 것이라는 것. 그저 쇼를 보여주거나 평범한 요리를 선보이는 쿡방들은 요리의 세계를 제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강레오의 생각이 그럴 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대중들은 다른 생각을 할 것이다. 왜 요리사는 방송에 나와 쇼를 하면 안 되고 누구나 할 수 있는 평범한 요리를 선보이면 안 되는 것일까. 그런 걸 하면 요리사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기라도 하는 것일까. 요리사에 대한 권위적인 생각은 요리라는 분야를 왜곡시킨다. 요리는 요리사들이 제일 잘하는 걸로 착각하지만 사실은 집에서 삼시세끼 밥 챙겨주시는 엄마들이 최고의 요리사들이다. 가끔 잘 못 만들어도 아이들을 위해 요리 쇼를 해주는 아빠들도 최고의 요리사들이다.

 

이런 요리에 대한 어떤 격을 나누고 전문과 비전문을 나누는 건 그 자체로는 잘못된 것이 없다. 그건 전문화의 영역에서는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다. 하지만 그 바깥으로 나와 대중들과 맞서게 됐을 때도 꼭 그럴 필요가 있을까. 대중들 앞에서 좀 더 편안하고 푸근하며 때로는 재미있게 요리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한식을 보존하는 일(전문화)과 한식을 세계화시키는 일(대중화)은 어느 한쪽으로 선택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둘 다 함께 해야 하는 일이다.

 

자신이 어느 한쪽으로 선택했다고 다른 쪽을 비난할 일은 아니다. 강레오는 심지어 그런 위치에 있을 사람도 아니다. 그 스스로도 여러 방송을 통해 얼굴을 비췄고 때로는 얼굴에 짜장면을 범벅하며 웃음을 주기도 했었다. 그게 나쁜 일인가. 요리는 종합예술 같은 대단한 분야지만, 그렇다고 스스로 대단하다고 강변할 일은 아니다. 만일 그런 생각을 갖는다면 그건 오만일 것이다강레오 소속사 대표가 최현석에게 사과했지만 그 방식과 방송출연을 앞둔 시점 등을 감안할 때 그다지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 게 사실이다. 강레오에 대한 비난이 사과에도 불구하고 증폭되고 있는 건 그의 주장 자체 때문이 아니다. 그의 말에서 묻어나는 태도 때문이다.



백선생을 보면 지금의 방송 트렌드가 보인다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에 푸근한 인상. 백종원은 셰프라는 지칭보다는 친근한 아저씨의 느낌이 더 강하다. 그래서일까. 별명도 참 많다. MBC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서 백주부로 등장한 그는 설탕을 자주 쓰는 모습이 등장하면서 슈가보이라는 별칭이 붙었고, 카메라를 고정시키기 위해 고추를 사용하면서 칠리보이라는 애칭이 생겼으며, 네티즌들의 실시간 댓글과 지적에 대해 일일이 반응하며 사과하는 모습을 보여 애플보이라는 별명도 붙었다.

 

'집밥 백선생(사진출처:tvN)'

tvN <집밥 백선생>은 백종원의 이 캐릭터에 백선생이라는 새로운 캐릭터를 덧붙였다. 물론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서도 네티즌들에게 요리 꿀팁을 알려주는 요리 선생의 면모를 과시했지만, <집밥 백선생>은 아예 형식 자체가 요리 수업이다. 그런데 이 요리 수업, 어딘지 우리가 방송에서 많이 봐왔던 요리 프로그램들과는 사뭇 다르다.

 

선생이라 불리니 제자가 있는 건 당연하다. 그런데 이 제자들은 영 요리하고는 담을 쌓고 살아가는 이들이다. 요리보다는 사먹는 일이 더 많다는 윤상이나 요리를 해본 일이 거의 없는 김구라, 그리고 <삼시세끼>에서 차승원이 요리하는 걸 귀동냥으로 들은 게 거의 전부인 것처럼 보이는 손호준과 어쩐지 요리 좀 할 것 같은 인상이지만 사실은 허당인 박정철이 그들. 이런 그들이니 이들의 요리는 요리가 아니라 하나의 모험이다.

 

하지만 이런 요리 무식자들은 시청자들로서는 더 쉽게 프로그램에 몰입되는 이유가 된다. 아무 것도 모르니 사소한 것들도 하나의 꿀팁이 되는 출연자들의 입장이나 시청자들의 입장이나 별반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백종원은 선생님이 아니라 선생이다. 무언가를 가르쳐주고는 있지만 가르친다는 느낌은 별로 없어 보이는 그런 인물. 김구라가 요즘 방송의 포인트가 바로 이 전문가 같지 않은 전문가라고 얘기한 건 그저 농담이 아니다.

 

<집밥 백선생>은 이처럼 화려하고 특별한 요리를 선보이려 하지도 않고 또 그럴 수도 없는 입장이다. 하지만 우리가 아주 일상적으로 해먹는 요리들, 이를테면 김치전이나 김치찌개 같은 것들을 특별한 요리로 만들어내는 마법을 선보인다. 이상하게도 이 프로그램을 보고나면 우리가 별거 아닌 것처럼 봐왔던 김치찌개가 그리 어렵지는 않지만 굉장히 맛있는 음식처럼 여겨진다. 그래서 나도 한 번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그 지점에서 이 프로그램의 진짜 힘이 나온다.

 

이렇게 보면 <집밥 백선생>이라는 제목에는 지금 현재의 방송 트렌드가 모두 들어가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즉 요리를 다루면서 이 프로그램이 하려는 건 특별한 일품요리라기보다는 집밥같은 일상의 요리를 소재로 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최근 방송이 점점 더 일상 소재 속으로 들어오는 트렌드를 반영한다.

 

게다가 이런 정보를 주는 프로그램이 가르치는 느낌이 들지 않게 하는 것이 요즘 방송의 또 하나의 트렌드다. 시사 문제를 예능의 틀 안에서 풀어내는 <썰전>이나, 글로벌한 문화의 시각을 웃음으로 풀어내는 <비정상회담> 같은 프로그램들이 그렇다. 최근 쿡방과 함께 셰프들이 주목받게 된 건 그들이 가르치려는 태도를 보이기보다는 즐거움을 주려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백종원은 이 트렌드에 최적의 요소들을 다 갖추고 있다. 자기만의 전문 분야인 요리에 정통한데다, 일상에서 써먹을 수 있는 꿀팁들도 화수분처럼 갖고 있다. 게다가 이를 전해주는 소통 방식도 우리끼리 사기지만..”이란 표현처럼 너무나 은근하고 친근하다. 이러니 백선생 백선생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 수가 없다. 그는 지금 현재의 방송 트렌드에 최적인 인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중의 시대로 접어든 음악, 이제 주인은 대중이다

 

“방송사의 프로그램 인지도를 앞세워 음원시장을 잠식해 나가는 것은 대기업의 문어발식 경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는 국내 음원시장의 독과점을 발생시켜 제작자들의 의욕을 상실하게 하고 내수시장의 붕괴를 가져올 수 있으며 장르의 다양성을 해치는 결과를 가져와 한류의 잠재적 성장 발전에도 악영향을 끼칠 우려가 크다.”

 

'무한도전'(사진출처:MBC)

사단법인 한국연예제작자협회(이하 연제협)가 최근 음원차트를 장악하고 있는 <무한도전> 음원에 대해 내놓은 성명이다. 언뜻 보면 그럴 듯한 논리다. 방송사가 프로그램을 활용해 음원을 내놓으면 그것이 기존 음반 제작자들이 내놓는 음원들과 비교해 압도적인 경쟁 우위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 그것이 제작자들의 의욕을 떨어뜨리고 내수시장을 교란하게 되며 또 방송 스토리텔링과 연관된 특정 장르의 음원들만 쏟아져 나와 다양성을 해치게 되고 결과적으로 한류의 성장에도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 논리에는 한 가지 맹점이 있다. 이 논리가 정당하려면 지금껏 기획사들은 방송의 힘을 빌어 자신들의 음원을 홍보하거나 소속 가수들을 방송 프로그램에 내보내지 않고 순수하게 음악 활동만 해왔어야 한다. 하지만 상황은 정반대다. 그들 역시 방송의 힘을 활용해 음원 수익을 극대화하려 노력해오지 않았나. 지금껏 우리네 음원시장이란 몇몇 기획사들과 방송사 간의 담합에 가까운 관계 속에서 그들만의 리그를 유지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국내 음원시장의 독과점은 이미 몇몇 대형 기획사들과 방송사의 밀월관계 속에서 유지되어 왔던 것이나 마찬가지다. 장르의 다양성? 당연히 있을 수가 없었다. 연말특집으로 기획된 쇼 프로그램에서 몇몇 아이돌 그룹들이 타 그룹의 노래를 콜라보레이션하며 불렀는데 그다지 차이를 느낄 수 없었다는 웃지 못할 뼈있는 농담이 있듯이, 늘 비슷비슷한 코드와 춤의 반복이 있었을 뿐이다. 결국 연제협의 이 얘기는 무언가 대단한 대의를 갖고 얘기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밥그릇 싸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대중들이 연제협의 논리에 쉽게 공감하지 못하는 것은 그 비판이 <무한도전>을 비판하는 듯한 뉘앙스를 품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연제협의 논리 속에 ‘대중’을 느끼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국 대중음악이 아닌가. 그것이 어떤 것이든 대중들의 선택은 그 자체로 옳을 수밖에 없다. 음악의 퀄리티를 얘기하지만 퀄리티가 높다고 해서 대중들이 반드시 선택하는 것도 아니고 그럴 필요도 없다. 이것은 전문가들의 오만이다. 도대체 음악의 퀄리티를 순위 매길 수 있는 기준이란 것이 어떻게 존재한단 말인가.

 

방송사가 늘 비슷비슷한 음악만 음원차트에 올라오던 것을 교란(?)한 것은 분명하다. 예를 들어 방송사가 각종 오디션 프로그램으로 내놓는 음원들이 그렇다. <나는 가수다>가 그랬고, <슈퍼스타K>가 그랬으며, 지금도 <K팝스타>나 <위대한 탄생>은 계속해서 새로운 음원들을 차트에 내놓고 있다. 그렇다면 이들 음원들은 과연 ‘교란’이라는 표현을 쓸 만큼 기존 가요계에 악영향을 미쳤던 것일까.

 

그렇지 않다. 대중들이 이들 오디션 프로그램에 열광했던 것은 매번 판에 박은 듯이 찍혀져 나오는 기획사 음악들에 지치고 식상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가수다>는 상대적으로 대중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엄청난 가창력의 가수들을 복원해냈고 ‘듣는 음악’을 되살려냈다. <슈퍼스타K>나 <K팝스타>는 기획사들의 손길이 닿지 않은 아직은 미완의 보석들을 대중들과 함께 찾아냄으로써 진정한 ‘대중가수’의 탄생을 가능케 했고 음악의 다양성이란 측면에서도 큰 기여를 했다. 버스커버스커 같은 밴드를 어떻게 기존 기획사가 발굴해낼 수 있을 것인가. 발굴했다 해도 기존 트렌드에 맞춰내느라 본래 색깔을 다 지워버릴 지도 모를 일이다.

 

따라서 음악의 다양성 운운하거나, 음악의 퀄리티를 운운하기 전에 가슴에 먼저 손을 얹을 일이다. 다양성과 퀄리티를 떨어뜨린 것은 오히려 기존 기획사들일 가능성이 더 높으니까. 이렇게 얘기하면 한류와 K팝을 만든 장본인들이 누구냐는 식의 질문을 던질 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다시 그 질문을 되돌려보자. 과연 한류와 K팝을 만든 장본인들은 진정으로 몇몇 기획사들과 거기 소속된 가수들일까. 아니다. 그들 이전에 대중이 있었다. 우리의 한류를 만든 것은 그것을 소비해주고 때로는 꼼꼼한 비판과 애정어린 시선으로 꾸준히 관심을 가져준 대중들이다.

 

그리고 바야흐로 그 대중들이 생산된 것을 그저 소비하던 시대에서 이제는 스스로 생산하는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누구나 카메라로 찍고 편집하고 올릴 수 있는 미디어 변화가 영상의 대중화 시대를 만들었듯이, 이제는 누구나 프로그램 몇 개를 받아 간단하게 작곡을 할 수 있는 음악의 대중화 시대가 도래 하고 있다. 이제 음악을 즐기는데 있어서 전문가와 일반인의 경계는 그만큼 얇아졌다. 문화의 일상화 경향은 대중의 시대가 보여주는 가장 특징적인 현상이다. 당연히 연제협 같은 기득권을 누리던 전문가 집단은 불안할 수밖에 없다. 이번 박명수가 만든 일련의 곡들은 전문가가 같이 하지 않았던 순수 초보 작품이라는 점에서 그 불안감을 더 증폭시킨 것이 사실이다.

 

전문가들의 시대는 수직적 사회 체계 속에서 그 정점을 찍었다. 그들은 전문가라는 이름으로 대중들에게 일종의 필터링을 한 것이다. 하지만 예술이나 문화에 있어서 순위란 무의미하다. 그럼에도 과거 1등 짜리 곡이 음악적 성취도에 있어서도 1등이라고(사실 이런 순위 자체가 어렵다)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저 수직적 사회 체계에 대한 대중들의 수용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누구나 작곡을 하고 싶으면 간단한 프로그램을 다운받아 약간의 교육을 받으면 컴퓨터만 갖고도(심지어 스마트폰으로도) 곡 하나쯤은 뚝딱 만들 수 있는 시대다. 그러니 순위 같은 수직적 개념은 무의미해진다. 다만 모든 것이 수평적으로 나열되고 그것이 다양성의 가치로 평가받는 시대가 열리고 있다.

 

이번 <무한도전> 음원이 음원차트 상위에 랭크되면서 생겨난 논란과 잡음은 이미 접어든 음악의 대중화 시대로 인해 수직적 차트의 개념이 무의미해져 가는 시대의 징후처럼 보인다. 이미 많은 대중들은 음원차트 1위를 그 곡의 가치 순위로 바라보진 않는다. 100위의 곡이 나열되어 있다면 그저 다양한 100곡이 있을 뿐이다. 그 중에 일 년에 한두 번 올라오는 <무한도전>의 음원이 있은들 무슨 큰 문제일까. 제발 이른바 전문가라고 하는 분들은, 대중들의 음악을 바라보는 달라진 시선을 이번 기회에 다시 보길 바란다. 대중음악은 결국 대중들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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