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주지훈은 왜 생령이 되어 산을 떠돌게 됐을까

지리산

tvN 토일드라마 <지리산>에 드리워져 있던 안개가 조금씩 걷혀가고 있다. 2018년 지리산 국립공원 최고의 레인저였던 서이강(전지현)과 신입 강현조(주지훈)가 파트너가 되어 함께 활동했던 시절부터 2019년 12월까지 이들에게는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 <지리산>은 2020년 현재 그 때 벌어졌던 사건 때문에 떠났던 서이강이 휠체어를 타고 지리산 국립공원 해동분소로 돌아오고, 강현조 역시 코마 상태가 되어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을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그들은 과거 그들까지 그렇게 만들어버린 사건들을 해결하지 못했다. 하지만 포기한 건 아니었다. 서이강이 다시 이 분소로 돌아온 건 그 사건을 해결하려 함이다. 그런데 서이강이 그런 결정을 하게 된 데는 조난자 사고 사진들 속에서 일련의 빨치산 표식을 발견하게 되면서다. 그 표식은 서이강과 강현조만이 아는 것이었다. 서이강은 왜 돌아왔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누군가 저 산 위에서 내게 신호를 보내고 있어요. 그 사람이 누군지 알고 싶어서 그래서 돌아왔어요.”

 

서이강의 부탁으로 망바위 뒤쪽 오래된 주목나무 밑둥에 빨치산 표식(해동분소를 가리키는)을 놓으러 간 병아리 레인저 이다원(고민시) 앞에 으스스한 형상을 한 채 나타난 의문의 인물은 바로 강현조였다. 코마 상태로 누워있는 강현조가 어떻게 산에 등장했는가 하는 의문은 그가 바로 생령이었다는 사실로 풀렸다. 생령, 즉 살아있는 영혼은 오컬트 장르에 종종 등장하는 존재로 유체이탈을 하거나 식물인간 상태에서 영혼이 몸 밖으로 나온 존재를 뜻한다. 강렬한 원한이나 어떤 절실함이 만들어낸 생령은 그래서 영혼 상태로 떠돌지만 육신과 연결되어 있다. 

 

결국 강현조가 생령이 되어 지리산을 떠돌고 있다는 사실은, 서이강에게 계속 신호를 보내온 존재가 바로 그라는 걸 말해준다. 그런데 강현조는 왜 코마 상태가 되어서까지 생령이 되어 지리산을 떠돌고 서이강을 불렀던 것일까. 그 이유는 3회에서 밝혀진다. 강현조는 과거 육군 대위로 지리산 행군 훈련을 하면서 부하를 잃은 후, 조난자들이 보이는 환영을 보는 능력(?)을 갖게 됐는데, 그것 때문에 레인저가 되어 지리산 해동분소로 자원한다.

 

그리고 2018년 어느 날의 사건으로 강현조는 과거 부하를 잃은 것이 사고가 아니라 누군가 저지른 살인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 출입이 금지된 백토골에 들어간 할머니를 서이강과 함께 찾아 나섰다가 환영 속에서 봤던 빈 요구르트 병을 발견한 것. 검은 장갑을 낀 누군가가 놓고 간 그 요구르트를 마신 할머니는 환각을 보고 결국 사망한 채 발견된다. 

 

마침 그 곳에서 훈련 중이던 군인들 중 한 명이 실종되고, 그 역시 요구르트를 마신 후 환각 속에서 헤매다 절벽 끝에서 구조되면서 강현조는 깨닫게 된다. 자신이 본 환영이 현재가 아닌 과거 1년 전 부하가 사망했던 때를 본 것이고 그곳에도 빈 요구르트 병이 있었다는 것. 결국 그는 깨닫는다. ‘누군가 내 동료를 죽였다. 그 사람은 아직도 이 산에 있다. 이 산에서 사람들을 계속 죽이고 있다.’

 

이로써 <지리산>이 어떤 이야기를 하려는지가 분명해졌다. 지리산 안에 무슨 이유인지 지속적으로 사람들을 죽이는 살인자가 있고(마치 조난인 것처럼 꾸며), 서이강과 강현조는 이를 막으려다 한 명은 다리를 잃고 다른 한 명은 코마 상태가 되는 일을 겪은 것. 하지만 이들은 이 상황에서도 또 다른 희생자를 막기 위해 다시 산으로 돌아와 그들만의 방식으로 살인자와 대적하려 하고 있다. 

 

<지리산>의 이야기가 흥미로운 건, 흔한 산악 구조 스토리가 아니라 산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살인사건과 이를 막기 위한 레인저들의 사투를 그리고 있다는 점이고, 서이강과 강현조가 모두 산을 탈 수 없는 육체적 조건(하반신을 못 쓰거나 코마 상태인)으로 빨치산 표식을 통해 서로 연락하며 다른 레인저들과의 공조를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해가야 하는 상황이라는 점이다. 

 

특히 지리산이라는 특정한 공간을 배경으로 인물들의 절실하고 강렬한 갈망을 부여해 다소 비현실적일 수 있는 설정과 상황들을 설득해내는 점은 <지리산>의 탁월한 지점이다. 예를 들어 살인자가 왜 하필 산 속에서 연쇄살인을 벌이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나, 결국 사망한 할머니가 본 환각이 다름 아닌 빨치산 토벌이라는 명목으로 당했던 양민학살의 끔찍한 광경이라는 점, 그리고 심지어 생령이 되어서까지 조난자를 구하고 살인자를 막으려는 강현조의 이야기는 그들 각자가 가진 절실한 욕망으로 인해 그 비현실성 또한 공감하게 만든다. 

 

즉 강현조는 자신 때문에 부하가 죽었다 생각했지만 살인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래서 더 이상 피해자가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던 그 욕망이 코마가 되어서도 생령이 되어 지리산을 떠돌게 만든 이유가 된다. 할머니가 죽기 직전까지 보게 된 양민학살의 비극은 여전히 남아있는 역사의 깊은 상처와 트라우마를 보여주고 있고, 현재까지 끔찍한 살인을 벌이고 있는 살인자 역시 분명 이러한 역사의 비극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서이강과 강현조의 특별한 공조로 산 속에서 벌어지는 연쇄살인범과의 사투는 그래서 단지 범죄스릴러에서 끝나지 않고 지리산이라는 공간에 담겨진 역사적 비극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골로 간다. 골로 보내버린다. 그런 말 많이 들어봤죠? 골짜기로 갔다. 이 백토골로 들어오면 아무도 살아나가지 못한다는 말에서 유래된 거예요. 이 곳은 지리산 중에서도 유독 음기가 센 곳이에요. 동학혁명, 일제 강점기, 6.25 빨치산 전투까지 오랫동안 여기서 사람들이 죽었거든요. 아직도 땅을 파면 인골이 나와요. 그리고 백토골 곳곳에 십자가가 놓여있거나 돌탑이 쌓인 곳들이 많아요. 무덤도 남기지 못하고 여기서 죽은 사람들을 추모하는 거죠. 만약에 진짜 귀신이 있다면 다른 어느 곳보다 어울리는 곳이에요.” 지리산국립공원 자원보전과 직원인 김솔(이가섭)의 대사를 통해 읽을 수 있듯이, <지리산>은 이 비극의 공간에서 무덤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져간 이들을 위한 헌사를 김은희 작가 특유의 미스테리 스릴러를 통해 담아내려 하고 있다. (사진:tvN)

‘엽기적인 그녀’, 주원은 이 난관마저 이겨낼 수 있을까

아마도 사극이어서 “이게 뭐지” 했을 시청자분들도 많지 않았을까. SBS 월화드라마 <엽기적인 그녀>는 우리에게는 레전드가 되어버린 영화 <엽기적인 그녀>를 원작으로 가져왔다. 하지만 영화가 현대극으로서 대학생들의 청춘 로맨스였다면, 드라마는 아예 사극으로 시대적 배경 자체를 바꿔놓았다. 

'엽기적인 그녀(사진출처:SBS)'

이런 선택을 했다는 것은 얼마나 드라마 <엽기적인 그녀>가 원작의 무게감을 덜어내려 안간힘을 썼는가를 잘 보여준다. 레전드가 된 작품과 비교되기 시작하면 리메이크된 작품의 운명이란 그 결과가 뻔해질 수밖에 없다. 원작에 대한 향수가 있는 시청자들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러니 드라마는 아예 사극이라는 틀을 가져와 새로운 작품으로서의 <엽기적인 그녀>를 구상하게 됐을 게다. 

물론 사극이라고 해도 그 안의 이야기 설정은 원작 영화가 가진 것에서 많이 따왔다는 것을 첫 회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견우(주원)가 혜명공주(오연서)를 처음 만나 인연을 만드는 그 장면에서 술에 취한 그녀가 견우에게 토를 하는 대목이 그렇다. 영화에서는 지하철에서 그녀(전지현)가 견우(차태현)에게 토를 하는 장면이 나오고, 어쩔 수 없이 모텔에 그녀를 데려간 견우가 토 냄새를 지우기 위해 샤워를 하다 오해를 받는 장면이 이어진다. 이 이야기 모티브는 사극으로 리메이크된 드라마 속에서도 그대로 사용된다. 

사극으로 재해석되었다고 해도 이처럼 <엽기적인 그녀>는 원작의 그림자를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특히 원작을 통해 스타덤에 올랐던 전지현과 차태현의 그림자는 너무 짙다. 이런 한계를 갖고 있는 작품이지만 이렇게 드라마화되는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건 중국이라는 시장을 빼놓을 수 없다. 중국에서 <엽기적인 그녀>에 대한 팬덤은 여전히 뜨거운데, 최근 전지현이 <별에서 온 그대>로 화제가 된 후 다시 이 작품까지 주목받았다. 그러니 이런 분위기에서 <엽기적인 그녀>의 리메이크는 꽤 괜찮은 기획으로 다가왔을 게다. 

물론 사드 배치로 인해 생겨난 한한령으로 <엽기적인 그녀>는 그 애초의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이끄는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중국의 한한령은 조금 수그러드는 양상이지만 그 여파는 여전하다. 그렇다고 이미 만들어놓은 작품을 방치할 수도 없는 일, <엽기적인 그녀>는 그런 우여곡절 끝에 방영되게 됐다. 

원작이 드리우는 그림자의 부담감과 중국과의 관계변화에 의해 영향을 받은 콘텐츠라는 한계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엽기적인 그녀>에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다. 그 가능성은 다름 아닌 주원이라는 배우에게서 나온다. <제빵왕 김탁구>부터 시작해, <각시탈>로 우뚝 서고, 쉽지 않을 거라는 <7급공무원>, <굿닥터> 그리고 모두가 실패를 예견하기도 했던 일드 리메이크작 <내일도 칸타빌레>까지 주원은 드라마 불패를 써온 배우다. 그러니 <엽기적인 그녀> 역시 이 난관들을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이 그저 운이라는 뜻은 아니다. 주원은 캐릭터를 200% 살려내는 남다른 연기력을 통해 드라마의 성공까지 거뒀던 배우다. 이번 <엽기적인 그녀>에서도 상대 역할을 연기하는 오연서의 액션을 코믹하게 받아내는 주원의 리액션이 코미디의 상황을 더 빵빵 터트리게 만들어주고 있다. 물론 액면은 난관과 한계가 다분하지만 ‘그래도 주원이라면...’ 하는 생각이 드는 건 그래서다.

‘푸른 바다’, 멜로와 현실은 어떻게 공명했을까

잊지 말아야 될 기억은 어떻게 보존될 수 있을까. SBS 수목드라마 <푸른 바다의 전설>은 허준재(이민호)의 기억을 지우고 바다로 돌아간 인어 심청(전지현)이 다시 돌아와 사랑을 이어가는 것으로 해피엔딩을 그렸다. 허준재는 청이 자신의 기억을 지웠지만 자신의 심장에 새겨진 사랑은 지울 수 없었다며 그녀를 기억하고 기다려왔다는 사실을 털어놨다. 

'푸른바다의 전설(사진출처:SBS)'

그런데 여기서 허준재가 지웠졌던 기억을 다시 복원하는 그 방식이 흥미롭다. 그는 훨씬 이전부터 이런 일이 있을 거라는 걸 예감이라도 한 듯, 청이와의 일들을 일기로 기록해놨다고 했다. 결국 청이가 그의 기억을 지웠어도 그는 다시금 그 일기를 통해 그녀와의 추억들을 되새길 수 있었다. 

이건 전형적인 멜로물의 해피엔딩처럼 보이지만, 그간 기억에 대한 문제를 지속적으로 다뤄왔던 <푸른 바다의 전설>에서는 조금 달리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기는 엔딩이다. 물론 멜로물로서 바다와 육지로 각각 태어난 서로 다른 존재가 헤어질 수밖에 없는 운명을 맞지만 다시금 돌아와 둘 사이에 생명을 잉태하고 그 존재가 바다와 육지 사이의 소통자 역할을 한다는 이야기는 로맨스 판타지물의 이야기로도 충분히 완결성이 있는 엔딩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작금의 우리네 현실과 마주하면 또 다른 해석이 가능해진다. 바다와 기억으로 환기되는 세월호 참사의 이미지들은 이 엔딩이 ‘진실을 담은 아픈 기억’에 대한 메시지로 다가오게 하기 때문이다. 바다에서 조난당했다 살아 돌아온 이들의 소식이 들릴 때마다 그것이 인어 심청의 도움이라고 생각하며 바다를 찾았던 허준재의 그 마음은 어쩌면 여전히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희생자들의 가족들이나 그들을 위해 기도해온 많은 대중들의 바람과 똑같은 것이 아닐까. 

그래서 희미해지는 기억을 아파도 애써 기억해내려는 허준재의 사랑 또한 남다르게 느껴지고, 그것을 ‘기록’으로 남겨 절대 잊지 않으려는 노력은 우리가 ‘역사’라고 부르는 ‘기억의 기록’이 갖는 무게감을 새삼 떠올리게 한다. 그렇게 사랑의 기억 같은 진실을 잊지 않고 보존한다면 그 애끓는 사랑은 영원할 수 있다고 마치 이 드라마는 말하고 있는 듯하다. 

그 기록으로 영원히 남을 기억은 차츰 그 아픈 상처들이 의미하는 바가 바로 사랑이라는 걸 말해준다. 드라마 속 지나가는 듯한 에피소드의 대사로 등장했던 “아파도 사랑할 수 있으니까” 기억하겠다던 한 엄마의 절규처럼, 아픔은 사랑의 증명이나 마찬가지다. 반면 영원한 벌로서의 기억 또한 존재한다. 계모 강서희(황신혜)의 기억에 잊혀지지 않을 아들의 자살이 그것이다. 강서희의 기억은 사랑이 아니라 죄의 기억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다르다. 우리에게 기록으로 남는 기억이란 이처럼 어떤 것은 바람직한 사랑으로, 어떤 것은 또 다시 벌어져서는 안될 반면교사로서의 죄로 남겨진다.

허준재는 전생에서 바닷가 마을에 지방관으로 부임했던 담령으로 인어를 만났던 그 때의 기억 그대로 이생에서의 심청과의 미래를 준비한다. 육지와 바다의 경계에 있는 바닷가 마을에 함께 살 집을 마련하고, 검사가 되어 지방검찰청에서 일하며 심청과 ‘소소한 삶’을 꿈꾼다. 사실 우리네 삶이 꿈꾸는 것들은 그리 대단한 것들이 아니다. 그저 사랑하는 사람과 소박하고 소소하지만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것. 그런 기억들을 많이 남기는 것일 테니. 그것조차 하지 못하는 현실은 그래서 더더욱 아픔으로 다가오지만.

<푸른바다>가 갖고 있는 흥미로운 심청전의 재해석

 

심하게 멍청해서 심청이다? SBS <푸른바다의 전설>에서 인간세상으로 나온 인어에게 허준재(이민호)는 그렇게 반 농담을 섞어 심청이란 이름을 붙여준다. 사실 바다와 관련 있는 심청이란 고전소설의 인물이 인어의 이름으로 떡하니 붙여진다는 건 흥미로운 접근방식이다.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공양미 삼백 석에 팔려 바다로 뛰어든 효녀. 하지만 용왕에 의해 죽지 않고 살아 돌아온 인물. 인어란 가상의 존재가 결국은 그렇게 바다로 사라져버린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수많은 그리움들이 만들어낸 것이라면, 심청 역시 그 부활의 기저에는 비슷한 맥락이 깔려 있지 않았을까.

 

'푸른바다의 전설(사진출처:SBS)'

그저 코미디의 하나로 농담 반 진담 반 심청이란 이름이 붙여진 것이 아니라는 게 명확해진 건 그녀가 사랑하는 허준재의 아버지 허일중(최정우)이 처한 위기가 하필이면 눈이 멀어가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희대의 악녀인 강서희(황신혜)가 바꿔치기한 약으로 인해 서서히 눈이 멀어간다. 허일중이 심봉사의 재해석이라면, 강서희는 뺑덕어멈의 재해석이다.

 

<푸른바다의 전설>은 그래서 어우야담에 등장하는 담령과 얽힌 인어이야기로부터 시작하지만, 후반부에 이르러 심청전의 모티브들을 상당 부분 끌어와 재해석한다. 허일중과 그 가족이 처한 위기가 인어 심청(전지현)이 처한 위기보다 더 긴박하게 전개된다. 허일중과 허준재 그리고 모유란(나영희)의 단란했던 집안을 갈기갈기 찢어놓은 건 강서희와 그의 아들 허치현(이지훈)이다. 강서희는 상습적으로 남편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그 유산을 가로채는 꽃뱀에 가까운 인물. 친구였던 모유란과 그 아들까지 몰아내고 대신 그 자리에 자신과 자신의 아들 허치현을 세웠다.

 

<푸른바다의 전설>이 보여주는 건 그래서 허준재의 진짜 가족이 다시금 회복되어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는가의 문제다. 그건 아들 행세를 하고 아내 행세를 하며 사실은 허일중이 가진 것들을 빼앗아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려는 가짜 가족을 몰아내야 하는 일이다. 흥미로운 건 마대영(성동일)이라는 인물이 강서희, 허치현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초반 이 연결고리는 의문스럽기 그지없었으나 차츰 그들이 또 하나의 가족이 아닐까하는 심증이 점점 확증이 되어가고 있다.

 

결과적으로 이 대결구도를 보면 허일중-허준재-모유란이라는 진짜 가족과, 마대영-허치현-강서희라는 또 하나의 가족이 드러난다. 허준재의 가족이 사랑으로 얽혀있다면 허치현의 가족은 욕망으로 얽혀있다. 허준재의 가족이 각각 뿔뿔이 흩어져 있으면서도 서로에 대한 그리움을 늘 가슴에 품고 살아간다면, 허치현의 가족은 그 연결고리들이 욕망으로만 이어져 있다.

 

<푸른바다의 전설>이 심청전에서 모티브를 가져와 가족 대 가족의 대결을 그리게 된 건 이 드라마가 메시지로 제시하고 있는 진정한 인연의 문제와도 무관하지 않다. 전생의 좋은 인연은 현생의 좋은 인연으로 또 이어진다. 하지만 전생의 악연은 현생에서도 또 다른 악연으로 반복된다. 좋은 인연과 악연을 가르는 건 그 관계가 무엇에 의해 형성되었는가에 의해서다. 단순한 구도지만 <푸른바다의 전설>이 내세우는 그 두 개의 관계 축은 사랑과 욕망이다.

 

인어와 사랑의 관계를 맺은 허준재가 있는 반면, 인어를 물욕의 대상으로 관계를 맺은 마대영이 있다. 그리고 이런 구도는 역시 심청전에서 심청의 효와 공양미 삼백 석이라는 물질이 등가를 이루는 그 이야기 속에도 그대로 등장한다. 인어가 어떤 순수한 사랑의 결정체라면, 우리 식으로 그런 사랑을 스스로 바다에 몸을 던져 보여준 인물이 심청이 아닌가.

 

그래서 <푸른바다의 전설>은 서구의 인어공주 이야기를 어유야담의 담령과 인어의 이야기로 재해석하고는 이제 심청의 이야기로 결말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과연 심청의 자기희생적인 도움으로(허준재를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뭍으로 나온 그녀의 자기희생은 눈 먼 아비를 위해 바다로 뛰어든 심청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허준재는 잃었던 자신의 가족을 회복할 수 있을까. 결국 이 전설이 담고 있는 건 그 어떤 욕망보다 더 간절한 진짜 가족의 회복인 셈이다. 어쩌면 우리 시대에 점점 희미해져가고 있어 더 간절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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