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신들 초대해 의자뺏기 놀이? <무도>의 놀라운 자신감

 

정우성에게 이런 면이 있었던가. 그가 스튜디오에 들어서는 모습을 정준하가 과장된 표정으로 흉내 내자 정우성은 되레 정준하의 그 모습을 흉내 낸다. “본인이 잘 생겼다는 거 알고 계시죠?”하는 유재석의 질문에 거침없이 라고 답하는 정우성. 흔히들 잘생김멋짐이 폭발하는 이 배우가 어찌된 일인지 <무한도전>에서는 웃기기로 작정한 듯하다. 그는 저도 웃길 수 있어요. 웃기고 싶어요라며 의욕을 드러냈고, 그런 색다른 면면은 빵빵 터지는 웃음을 만들어냈다.

 

'무한도전(사진출처:MBC)'

사실 이번 <무한도전-신들의 전쟁>편은 영화 <아수라> 제작팀 막내들과 했던 경매쇼가 인연이 되어 이뤄진 것이다. 황정민, 정우성, 주지훈, 곽도원, 정만식, 김원해. 한 자리에 이런 배우들이 함께 모여 있다는 것만으로도 역대급이다. 이게 가능했던 건 <아수라>라는 영화에 이들이 모두 출연했고, 이 영화가 곧 개봉을 앞두고 있어 홍보시점이 잘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 홍보와는 상관없이 <무한도전>에 출연한 이 연기신들은 의외의 모습으로 큰 웃음을 주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건 이런 역대급 게스트들이 출연했음에도 불구하고 <무한도전>이 한 일련의 미션들이 너무나 소소한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영화 속 명장면들을 재연해 보여주고, 예능식의 춤 대결로 슬슬 분위기를 고조시키자 이 연기신들의 의외의 면들이 조금씩 드러났다. 정우성은 웃기기 위해 승부근성을 보였고, 황정민은 이에 질세라 춤을 추다 박명수에게 뽀뽀를 하는 무리수로 웃음을 주었다. 곽도원은 의외의 귀여움이 터지며 곽블리라는 애칭까지 갖게 됐다.

 

가장 놀라운 장면은 본 게임인 추격전에 들어가기 전에 일종의 적응훈련이라며 스튜디오에서 진행한 의자 뺏기 놀이였다. “쌀과 보리가 자란다-”를 고급진 재즈풍으로 가수가 불러주는 가운데, 의자를 가운데 놓고 돌면서 유재석의 진행에 따라 갖가지 동작들을 선보이는 장면은 그 언발란스한 모습으로 큰 웃음을 주었다. 이게 추격전에 진짜 도움이 되느냐는 의구심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진지한 모습으로 의자 뺏기 놀이를 하고 있다니.

 

추격전에서는 병정게임을 응용해 누가 왕이 되고 누가 조커가 될 것인가를 두고 한참 동안 실랑이를 벌였다. <무한도전> 팀들이 뽑기로 그냥 정하자며 뽑았다가 왕이 마음에 안들고 조커가 마음에 안든다며 무한 반복해 뽑기를 하는 모습 역시 이 추격전이 얼마나 장난스러운 것인가를 잘 보여줬다. 하지만 이 장난스러움을 이런 역대급 배우들과 진지하게 하고 있다는 것이 웃음의 포인트가 되었다.

 

사실 이 정도의 배우들을 한 자리에 모았다면 어떤 굉장한 미션을 시도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무한도전>은 정반대로 나갔다. 굉장하다기보다는 너무나 장난 같은 미션들을 제시하고 그걸 의외로 열심히 하는 배우들의 모습에서 웃음을 뽑아냈던 것. 물론 이번 특집이 역대급이 된 데에는 역시 연기도 잘하는 배우들이 예능도 열심히 함으로써 의외의 면면들을 보여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런 배우들을 데려다 소소한 게임을 시키는 <무한도전>의 놀라운 자신감 때문이기도 하다

<마담 뺑덕>, 제 아무리 정우성이 벗어도 안 되는 까닭

 

<마담 뺑덕>심청전을 현대적인 치정멜로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심학규(정우성)는 성추행 루머 때문에 지방으로 내려왔다가 거기서 덕이(이솜)를 만나 위험한 사랑에 빠진다. ‘욕망에 눈 멀다, 집착에 눈 뜨다라는 포스터 문구가 보여주듯이 심학규는 점점 욕망에 빠져들어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이고, 덕이는 집착에 눈을 떠 파괴적인 사랑을 하게 되는 여자다.

 

사진출처: 영화 <마담 뺑덕>

심학규의 설정이 소설가인데다 영화가 그의 내레이션으로 이야기를 전개해나가고 있어 영화는 다분히 문학적인 느낌을 준다. 하지만 그러한 문학적 표현이 너무 지나치게 인물의 심리 변화를 설명하고 있다는 것은 이 작품의 치명적인 오류다. 만남에서부터 갑자기 눈이 맞아 버리는 심학규와 덕이의 이야기에는 치밀한 심리 묘사가 빠져 있다. 그래서일까. 인물들은 살아서 움직인다기보다는 마치 감독이 정해놓은 길 위에서 역할 연기를 하는 것처럼 관객에게 몰입감을 주지 못한다.

 

그저 내레이션이 욕망에 빠졌다고 말하는 것으로 인물은 욕망에 빠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것이 관객으로 하여금 심학규나 덕이의 심정에 똑같이 동화되게 하지는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다 보니 영화는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마치 심청전이라는 고전이 정해놓은 길을 억지로 따라가는 듯한 느낌을 만든다. 갑자기 심학규의 아내가 죽고, 갑자기 그가 눈을 멀어가고, 갑자기 그의 딸이 팔려가는 상황들은 만일 심청전이라는 텍스트를 우리가 모른다면 지극히 인위적이라고 여겨질 수밖에 없다.

 

<마담 뺑덕>심청전이라는 텍스트를 가져오긴 했지만 완전한 재해석이라기보다는 마치 텍스트를 이용하는 듯한 결과물을 만들었다. 이것은 굳이 <마담 뺑덕>이라는 제목을 내세워 현대적인 재해석을 하고는 있지만 그 새로운 주제의식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는 것도 한 몫을 차지한다. ‘춘향전을 방자의 시선으로 재해석해낸 <방자전>을 떠올려보라. 거기에는 방자의 시선이 갖는 서민적인 시각이 현재의 관객들로 하여금 그 재해석에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반면 <마담 뺑덕>은 그저 치정극에 머물렀을 뿐, 현대적 의미를 되살리지는 못하고 있다.

 

게다가 이 영화는 전반부의 정조와 후반부의 정조가 너무나 다르다. 전반부의 학규와 덕이의 빗나간 사랑은 무언가 벌어질 듯한 기대감을 한껏 만들어내지만 후반부는 급격히 이야기를 전개시키고 미진하게 마무리한 느낌마저 준다. 그러니 영화를 보고 나온 관객들의 잔상에 남는 것은 어떤 정조나 정서가 아니라 정우성과 이솜의 벗은 몸뿐이다. 그것이 어떤 아련함이나 아픔, 강렬함으로 여운을 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한동안 <색계> 같은 작품이 성공하면서 중년 관객들을 대상으로 한 노출 수위가 높은 작품들이 자주 상영되곤 했다. 송승헌이 노출연기를 선보인 <인간중독>은 물론 그 하려는 이야기는 달라도 <색계>를 다분히 염두에 둔 작품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이들 작품이 노출 수위가 높다고 하더라도 관객들이 바로 그것 하나 때문에 영화관을 찾았던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노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중년들에게 걸맞는 사랑과 사회에 대한 작가의 수준 높은 시각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마담 뺑덕>심청전이라는 텍스트를 끌고 와 그저 노출을 위해 활용하고 있는 듯한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물론 노출만이 이 작품의 목적이라고 말하긴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그 노출 이외에 그다지 남지 않는 메시지나 여운은 이 작품의 목적이 결국 그런 자극에 있었던 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어디 관객들이 그리 단순할까. 영화가 무언가를 전해주지 못한다면 제 아무리 정우성이 벗어도 안 된다는 걸 <마담 뺑덕>은 보여주고 있다.

 

<신의 한수>가 그토록 잔인해졌던 까닭

 

<신의 한수>는 바둑을 소재로 한 영화다. 사실 바둑을 대중적인 소재로 만든 건 만화다. <데스노트>로 유명한 오바타 다케시의 <고스트 바둑왕>은 대표적이다. 우리나라 작품으로는 <이끼>를 그린 윤태호 작가의 <미생>이 있다. 바둑이라는 소재가 주로 만화에서 빛을 본 것은 이 게임이 결코 일반인들에게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너무 쉽게 다루면 바둑이 가진 그 신묘한 세계의 재미는 사라지기 마련이다.

 

사진출처: 영화 '신의 한수'

만화처럼 책의 기능을 어느 정도 갖고 있는 장르라면 바둑의 좀 더 깊은 세계로 들어갈 수도 있고, 만화의 특성상 판타지적인(우리가 흔히 만화 같다고 말하는) 요소들을 덧붙여 그 어려움과 복잡함을 상쇄시킬 수도 있다. 그렇다면 영화는 어떨까. 사실 대략난감이다. 바둑의 그 셀 수 없이 많은 수들을 일반 관객들에게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이렇게 영화를 풀어나가다가는 지독히 마니아적으로 흐르거나 아니면 재미없는 작품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신의 한수>는 다른 방법을 택했다. 바둑이 소재지만 바둑 속으로 깊이 들어가지는 않는 전략. 따라서 영화는 바둑의 한 수 한 수가 가진 의미를 짚어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한 수가 가진 긴장감과 몰입감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그것은 그 한 수로 인해 생겨나는 끔찍한 결과에 의해서다. 첫 도입부에서 태석(정우성)은 형의 목숨이 달린 도박 바둑을 두면서 부들부들 떨다가 바둑알을 떨어뜨려 악수를 두게 된다. 그런데 그게 왜 악수인지는 전혀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태석의 한 수만 물러달라는 처절한 애원이 그 수가 악수임을 얘기해줄 뿐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건 끔찍한 폭력이다. <신의 한수>는 그래서 살수(이범수)라는 강력한 폭력의 공포를 기반으로 해서 바둑이라는 낯선 소재를 끌어안는다. 이제 남는 건 바둑의 신묘한 세계가 아니라 그 대결에서 이기고 지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끔찍한 결과의 차이다. 이기면 몇 십억을 순식간에 벌 수 있고 지면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 <신의 한수>가 찌르고 자르고 때리는 그토록 폭력적인 장면들을 반복해서 심어놓은 건 낯선 바둑이라는 과정을 간단명료한 폭력의 결과로 상쇄시키려는 의도 때문이다.

 

이것은 바둑이라는 신선놀음을 일종의 복볼복 게임처럼 만들어버린다. 알다시피 복불복이란 복잡한 게임의 묘미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대신 중요한 건 그 게임의 결과로 빚어질 극과 극의 상황이다. 그 결과의 파장이 크면 클수록 단순한 복불복 게임의 몰입도는 커진다. 이렇게 되면 바둑이라는 소재는 소외될 수밖에 없다. 가위바위보 복불복에서 중요한 건 가위바위보가 아니다. 홀짝으로 복불복을 해도 그 게임의 묘미가 달라지는 건 아니니까. 낯선 바둑의 세계는 대중을 상대로 하게 되면서 대신 폭력이라는 복불복 게임으로 바뀌어버렸다.

 

하지만 과도한 폭력에의 집중은 오히려 영화를 비현실적으로 만들어놓는다. <신의 한수>는 태석이 살수에게 복수하기 위해 팀을 짜고 하나씩 그의 세계를 무너뜨리는 일종의 게임 미션 같은(바둑을 두는 수순을 형식으로 채용하고 있다) 형식을 보여 주기 때문에 비현실적인 느낌은 어쩌면 당연히 묻어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의 기본적인 현실감은 갖춰져야 하지 않았을까.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잔인하게 죽어나가는데도 불구하고 형사나 경찰 하나 등장하지 않는 건 이 영화의 결코 작지 않은 오류다.

 

바둑을 소재로 하지만 정작 바둑의 세계는 보이지 않고, 폭력과 살인이 난무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경찰과 형사 같은 공권력은 삭제되어 있는 세계. 그러니 이 비현실적 공간에 남는 것은 정우성이라는 배우의 멋진 액션 동작들뿐이다. 마치 <아저씨>의 액션을 보는 듯한 깔끔한 동작들은 특히 그것을 더 멋스럽게 만드는 정우성과 잘 어우러진다. 하지만 이런 모습이 정우성의 겉면만 살짝 보여준 것 같은 느낌은 아쉬운 부분이다.

 

물론 액션이 잘 어울리는 정우성이지만, 이 영화에서는 그의 내면이 잘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만화 같은 영화라도 형이 죽고 교도소에 들어가게 됐다면 그만한 내적 갈등이나 분노, 증오심이 묻어나야 할 것이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는 마치 게임 속 캐릭터처럼 그 상황을 그저 미션으로 받아들이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아저씨>의 액션이 힘을 발휘했던 건 그 원빈이 날리는 주먹에 내면의 감정이 깃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의 한수>의 정우성에게서는 그런 감정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이것은 어쩌면 영화가 정우성을 그저 잘 생기고 액션이 멋진 배우로만 활용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신의 한수>로 정우성을 캐스팅했다면 그 외면적인 것들은 물론이고 관객을 깜짝 놀라게 하는 그의 내면을 보여줘야 했던 건 아닐까. 물론 이것은 이 영화가 상업적인 선택을 한 결과일 것이다. 복잡한 내면보다는 보여지는 쾌감을 선택한 것. 하지만 바로 그 선택이 옳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 인물의 내면이 폭력과 액션의 근거와 쾌감을 오히려 만들어낼 수 있지 않았을까. 영화 <신의 한수>에 부족한 신의 한수가 아닐 수 없다.

'아테나', 수애와 정우성의 액션 멜로 역학관계

'아테나'는 정우성이 아니라 수애와 차승원에서부터 시작됐다. 하와이에서 윤혜인(수애)이 정보 요원의 뒤를 쫓다가 어느 건물 엘리베이터 앞에서 플라잉 니킥을 선보이는 액션은 그녀의 캐릭터를 확고하게 인지시켰다. 또 화장실 변기와 유리 등이 마구 부서져버리는 추성훈과 차승원이 화장실에서 벌이는 사투 장면을 통해 손혁(차승원)이라는 캐릭터는 확실히 부각됐다. 하지만 정우성은 달랐다. 그가 연기하는 이정우는 상대적으로 유약해 보일 정도였다. 왜 그랬을까.

상대적으로 이정우(정우성)가 1회에 약하게 그려진 것은 어느 정도는 계산된 것들이다. 어딘지 빈 구석을 만들어놓아야 혜인과의 멜로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아테나'가 가진 재미의 핵심이 이정우와 혜인이 벌이는 팽팽한 액션과 멜로의 뒤섞임이라고 볼 때, 이정우라는 캐릭터에 대한 힘 조절(?)은 필수적이다. 천진난만하게까지 보이는 이정우의 초반 캐릭터는 '아이리스'에서 김현준(이병헌)이 그랬던 것처럼 혜인과의 어떤 계기를 통해 급변할 것으로 예상된다.

'아테나'는 그저 액션을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장면의 흐름 속에 심리적인 고려를 한 흔적이 역력하다. 폭풍처럼 흘러가는 액션의 연속은 시청자들이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진행되고 때론 불친절하게까지 느껴지지만, 장면들을 효과적으로 배치해 자연스럽게 상황을 이해하게 만들려는 연출의 의도가 엿보인다. 망명한 북한의 핵물리학자를 구출하려는 권용관(유동근) 국장이 요원들을 끌어 모아 작전을 펼치는 과정에서 손혁과 혜인이 요원들을 하나하나 죽이는 장면에는 어떤 설명도 들어있지 않다. 하지만 교차 편집된 장면 연출을 통해 우리는 이들이 서로 다른 집단에 소속되어 있고 대결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만큼 연출에 있어서도 단지 그림을 찾기보다 심리적인 고려를 한다는 얘기다.

폭풍 액션이 한바탕 지나간 뒤에 이정우가 용의자(박철민)를 취조하는 우스꽝스런 장면을 배치한 것도 이런 심리적인 고려 때문이다. 한바탕 웃음으로 숨을 돌린 후에 드라마는 멜로 설정으로 들어간다. 놀이공원에서 우연히 이정우가 혜인을 만난 후, 다시 국정원에서 만나게 되는 이야기를 넣으면서, 동시에 손혁과 혜인과의 관계도 노출시킨다. 이들의 멜로적인 관계 속에 대결구도 역시 고려하는 것이다. 여기에 속을 알 수 없는 혜인이라는 미스테리한 인물을 세워둠으로써 정우와 손혁 양쪽에 걸쳐진 멜로는 이중스파이의 이야기로 연결된다.

'아이리스'가 흔들리는 카메라를 통해 '본 아이덴티티'의 영상을 끌어냈다면, 2회의 첫 도입부 20분 간을 장식한 이탈리아에서의 액션신은 007 시리즈를 오마주한 듯한 영상을 선보인다. 클래식과 록이 배경음악으로 교차되면서 우아함과 강렬함이 뒤섞이고, 긴박한 순간에도 여유를 잃지 않고 유머까지 구사하며 총을 쏠 때는 사정을 두지 않는 냉혹함을 보여주는 이정우는 숀 코네리 시절의 007을 떠올리게 한다. 전체적으로 액션이 안정감을 주는 이유는 카메라의 과도한 흔들림을 피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런 감성이 덧붙여진 액션 덕분이기도 하다. 물론 이 비현실적으로까지 보이는 이탈리아 액션 장면들이 이정우의 꿈이라는 설정 역시 의도적이다. 확실한 이정우의 액션 질감을 보여준 후, 다시 본래 목적이었던 혜인과의 멜로구도로 회귀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테나'는 전반적으로 물 흘러가듯이 자연스럽게 굴러가지만 전반의 폭풍 액션과 후반부의 멜로 구도를 병치하면서 치밀하게 구성되어 있다. 액션과 멜로의 교집합. 이것은 '아테나'라는 작품의 정체성이기도 하다. 액션이 앞에서 강렬하게 끌고 나간다면 멜로는 그 강렬함에 어떤 브레이크를 걸면서 부드러움을 집어넣는다. 정우성이 한 발 뒤로 물러난 상태에서 수애와 차승원이 확고히 자리를 잡고, 그 후에 정우성이 어떤 계기를 통해 다시 전면에 나서는 과정은, 바로 이 멜로와 액션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연결시킬 것인가를 고민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멜로와 액션의 병치는 다분히 우리네 드라마 시청 환경을 고려한 것이다. 너무 지나친 마니아적 액션들은 고른 시청층을 확보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앞으로 '아테나'의 성패는 바로 이 액션과 멜로 사이의 균형을 어떻게 이루어 나갈 것인가에 달려있다고 보여진다. 그 열쇠는 그래서 이 둘 사이에서 변화할 정우성에게 다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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