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와’의 성공, 영국친구들을 보면 그 답은 출연자다

어쩌면 이토록 훈훈할 수 있을까. MBC 에브리원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의 영국친구들이 한국여행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건 ‘배려’와 세대차가 전혀 없는 격의 없는 우정이다. 제임스의 친구로 초대된 이들은 데이비드, 앤드류 그리고 사이먼. 흥미로운 건 데이비드의 나이가 65세라는 점이다. 아무래도 체력적으로 차이가 날 수밖에 없고, 나이가 있으니 생각에도 차이가 있을 수 있을 게다. 

하지만 이들의 여행을 보면 전혀 나이 차를 느낄 수 없을 만큼 하나로 어우러지는 모습들이 자연스럽게 묻어난다. 영하 10도 밑으로 떨어지는 날씨에 겨울산행을 하기 위해 북한산을 찾은 이들은 보통 사람들도 쉽지 않은 산행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정상에 오르는 모습을 보여줬다. 물론 데이비드는 중간 중간 숨을 고르기 위해 멈춰 섰고 가끔 미끄러지기도 했다. 하지만 전혀 걱정이 없었던 건 앤드류가 바로 뒤에 딱 달라붙어 혹여나 미끄러지면 받쳐주려 대비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결국 정상까지 오른 후 내려온 데이비드는 이런 산행은 처음이라며 만족스러워했다. 건강 상에 문제가 있다고 스스로 밝힌 바 있지만 데이비드는 그래도 모험을 계속하기를 원했다. 그러니 앤드류와 사이먼이 있어 든든하게 한국의 산행을 마친 것이 얼마나 보람 있게 느껴졌을까. 

산행 후 잠시 몸에 이상을 느끼자, 앤드류와 사이먼은 제 일처럼 데이비드를 걱정했다. 일단 일정을 접어두고 숙소에 데이비드가 잠시 쉬게 해준 뒤, 그들은 남은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강남의 VR체험을 했다. 그 때 마침 받은 사이먼의 장교시험 합격 소식은 깨어나 다시 그들과 합류한 데이비드도 자기 일처럼 기쁘게 만들었다. 데이비드는 축하주를 건배하며 사이먼에게 축하한다는 말과 함께, 사이먼 같은 인재를 영입한 영국군도 축하한다는 말을 남겼다. 

다음 날 이어진 제임스 투어에서 이들은 인제로 모험여행을 떠났다. 격의 없이 어린 아이들처럼 서로를 놀려먹으며 즐거워하는 제임스는 앤드류에게 처음 번지점프를 경험하게 해줬고, 인제에서 나오는 최고의 한우를 친구들에게 맛보게 해줬다. 그리고 이어진 야간스키. 처음 스키를 탄다는 앤드류는 의외로 빠른 습득력을 보였지만 중급 코스에서는 자주 넘어졌다. 그러자 스키 경험이 있는 데이비드가 나서 앤드류에게 조언을 해주었다. 마치 아버지가 아들에게 걸음마를 가르치는 듯한 그 훈훈한 장면은 고스란히 산행에서 데이비드의 뒤에서 늘 대비하고 있던 앤드류를 떠올리게 했다.

서로가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과 배려심, 그리고 나이 차가 얼마나 나든 격의 없이 농담을 던지고 함께 즐거운 추억을 만들어가는 영국친구들의 모습은 우리에게는 특별한 장면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연배가 있어도 아이처럼 자신을 낮춰 그들과 어우러지는 친구가 되어준 데이비드나, 그와 아무런 거리낌 없이 농담을 주고받으면서도 또한 그의 나이를 배려해 사려 깊게 행동하는 앤드류와 사이먼. 이들의 풍경이 이토록 훈훈하게 다가오는 건 아무래도 우리의 풍경과는 너무나 달라서가 아니었을까.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 영화 <킹스맨>의 대사를 던지며 우리에게 처음 소개됐던 영국친구들은 무엇이 진짜 ‘젠틀맨’인가를 이번 여행을 통해 보여줬다. 배려와 예의 그리고 스스럼없이 어우러지는 모습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번 영국친구들은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의 인기가 어디서 비롯되는가를 확인시켜주기도 했다. 그건 한국여행과 리액션만이 아니라, 그 여행을 하는 이들의 ‘인간적인 매력’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사진:MBC에브리원)

싸이의 고심, ‘나팔바지’와 ‘대디’ 사이에서 찾은 초심이란

 

싸이 만큼 고민이 많을 가수가 있을까. ‘강남스타일의 국제적 성공은 그에게 기적 같은 일로 다가왔지만 또한 그만큼의 고민들로 되돌아왔다. 후속곡이었던 젠틀맨은 그 고민이 이른바 싸이스러움에는 그리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잘 보여줬다. 물론 싸이라는 이름으로 발표된 곡이어서 해외의 관심은 지대했지만 강남스타일의 뒤를 이어주지는 못했다. 싸이는 더 큰 고민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사진출처:싸이의 '나팔바지' 뮤직비디오

그런 그가 정규7칠집싸이다로 돌아왔다. 타이틀곡이 하나가 아니라 둘이다. ‘나팔바지대디’. 싸이가 이 두 곡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시점을 정확히 밝힌 데는 두 곡이 가진 다른 느낌을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나팔바지는 고민에 고민을 하던 싸이가 올 초 대학축제 무대에 서서 제정신을 차리고쓴 곡이라고 한다. 그래서일까. 이 곡은 강남스타일이전부터 줄곧 지속되어왔던 싸이스러움이 더욱 잘 묻어난다.

 

나팔과 나팔바지를 이미지로 엮어내고 여기에 붙은 나팔바지(에헤라디야) 나팔나팔나팔이라는 중독성 강한 후렴구는 그것이 시각적으로도(나풀거리는 듯한) 청각적으로도(나팔나팔나팔) 선명하게 기억에 각인시키는 효과를 낸다. 빼놓을 수 없는 건 역시 뮤직비디오다. 나팔바지가 갖고 있는 복고적 느낌을 제대로 살려낸 뮤직비디오에서 싸이는 저 강남스타일이 그랬듯 허슬 춤을 촌스러운 몸에 멋지게 소화해내는 것으로 흥겹고 즐겁고 웃긴 장면들을 연출해낸다. 싸이가 아니라면 도무지 흉내 내기 어려운 작업이 아닐 수 없다.

 

제정신을 차리고쓴 곡이라 그런지 나팔바지는 훨씬 더 우리들의 귀에 쏙쏙 박힌다. 뮤직비디오도 그 춤동작이 쉽게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는다. 하지만 대디는 느낌이 다르다. 스스로 밝힌 것처럼 국제용으로 만들어진곡이란 느낌이 강하다. 어쨌든 국제용이라는 말에 걸맞게 유튜브 조회 수는 대디에 대한 반응이 훨씬 폭발적이지만 우리에게 훨씬 귀에 익고 싸이 답게 여겨지는 곡은 아무래도 나팔바지가 아닐까 싶다.

 

지난 젠틀맨이 나오고 나서 많은 이들이 초심을 얘기했다.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지당한 얘기였다. 왜냐하면 싸이의 곡이 점점 국제용으로 기획되는 듯한 인상이 강했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춤과 중독성 강한 후렴구 그리고 우스꽝스러운 뮤직비디오에 음악을 오히려 맞춘 듯한 느낌. 하지만 그런 해외시장을 겨냥한 듯한 기획 작품으로는 강남스타일처럼 자연스럽게 싸이의 느낌이 묻어나고 그러면서 음악적으로 그만의 색깔을 드러내는 것이 요원하다는 반성이 초심에 대한 요구로 이어졌던 것이다.

 

하지만 도대체 초심이란 무엇인가가 싸이는 또한 고민이었다고 한다. 사실 싸이 답다는 표현 속에는 대중들이 요구하는 초심이라는 것이 명확하게 들어있을 것이다. 하지만 싸이 스스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 한 가지의 모습만을 일관되게 보여주는 것이 초심은 아닐 테니 말이다. 사람은 어쨌든 상황을 겪으며 변화하고 성장하기 마련이다. 이미 상황이 달라져있는데 억지로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과연 초심일까. 그것이 초심일 순 있지만 거기에는 진심이 묻어나지 않을 수 있다. 결국 진정한 초심이란 새롭게 생겨난 것들 속에서 그것이 자신의 모습으로 소화될 때 비로소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나팔바지대디사이에는 그래서 싸이의 이 초심에 대한 고심이 묻어난다. ‘나팔바지가 우리에게 친숙한 그 싸이다움을 담고 있다면, ‘대디는 국제가수가 된 그가 해외에서의 활동을 통해 얻게 된 새로운 싸이다움이 담겨있다. 그는 자신이 어렵게 찾은 초심을 하고 싶은 걸 하고 싶어서 딴따라가 된 ’”라고 표현했다. 그에게는 나팔바지대디하고 싶은 것즉 초심일 것이다.

 

이런 면들은 칠집싸이다의 다른 곡들에서도 고스란히 느껴진다. 즉 타이틀곡은 나팔바지대디로서 마치 싸이를 표상하는 것처럼 내세워져 있지만 이 앨범에 담긴 다른 곡들도 저마다의 매력이 넘친다는 사실이다. 전인권이 피처링한 좋은 날이 올거야JYJ 시아준수가 피처링한 ‘Dream’ 같은 곡은 해외는 모르겠지만 국내 팬들에게는 분명 매력적인 곡일 것이다. 국제 활동에 대한 욕망도 느껴지지만 국내 활동에 대한 애착도 느껴지는 칠집싸이다’. 싸이는 그렇게 자신의 초심을 찾았다.



행오버’, 변함없는 싸이의 성공 키워드 집적물

 

싸이의 신곡 행오버는 여러모로 지금껏 쌓여진 그의 성공 노하우가 집적된 작품이다. B급 정서 가득한 뮤직비디오, 한국의 문화와 서구의 유머 코드를 접목시키는 코미디적 요소, 명곡이기보다는 중독성 있는 음악, 유튜브라는 새로운 디지털 유통 채널을 통한 국제적인 규모에 초스피드로 전개되는 유포과정, 따라서 엄청난 속도로 퍼져나가는 조회수 기록만으로도 화제를 만드는 마케팅 등등.

 

'싸이의 행오버(사진출처:YG엔터테인먼트)'

물론 이러다보니 싸이의 신곡에 대한 반응 역시 과거 젠틀맨이 나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극과 극으로 양분된다. 정통 힙합이 낯선 이들에게 행오버이게 음악이냐는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킨다. 하지만 스눕독 같은 세계적인 힙합 아티스트의 면면을 인지하는 힙합 팬들에게는 이 곡이 젠틀맨에서 확실히 진일보했다고 평가된다.

 

싸이의 B급 정서에 공감대와 나아가 통쾌함까지 느끼는 이들에게 행오버의 뮤직비디오는 여전히 신선하게 다가온다. 이 뮤직비디오는 폭탄주로 대변되는 한국 특유의 음주문화가 가진 어두움을 풍자하면서 동시에 한바탕 놀아보자는 싸이 특유의 디오니소스적 끼를 덧붙이고 있다. 즉 이 뮤직비디오가 보여주는 한국의 음주문화는 부정성과 긍정성을 동시에 갖고 있다.

 

그러니 이에 대한 평가도 양분될 수밖에 없다. 폭탄주를 제조하고, 러브샷을 하고, 마치 이소룡이 대결하듯 술 대결을 벌이는 장면들은 우리가 늘상 술판에서 보던 풍경들이다. 그것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이들이라면 왜 싸이가 한국 문화의 어두운 면들을 자꾸만 들춰내나 싶을 수 있다. ‘강남스타일이 강남의 허위의식을 끄집어냈다면, ‘젠틀맨은 동방예의지국의 이면을 끌어냈고 이제 행오버는 우리네 극단적인 술 문화의 일단을 끌어내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술 문화는 긍정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때로는 한국인들이 외국인들에게 과시하듯 보여주는 어떤 면이기도 하다. 거기에는 잔치와 축제가 가진 특성, 즉 모든 걸 잊어버리고 한 바탕 놀아보자는 한국인 특유의 흥이 자리 잡고 있다. ‘행오버에서 간간이 들어가는 받으시오-”라는 싸이의 목소리는 그래서 은근하게 우리의 욕망을 건드린다. 단단한 사회의 억압된 틀 속에서 술이라는 뮤즈를 통해 잠시나마 꿈꾸는 일탈을.

 

한국적인 문화의 이면을 끌어오는 싸이 특유의 뮤직비디오는 우리에게는 공감대를 서구인들에게는 신기함을 느끼게 만드는 요소다. 이것은 한류 콘텐츠들이라면 공통적인 요소로 꼽히는 특수성과 보편성의 적절한 결합이다. 우리 것이 바탕이지만 또한 그것을 바라보는 세계인들의 공통적인 공감대도 끌어안으려는 노력. 싸이의 유머코드가 한국적이면서 동시에 서구적일 수 있었던 건, B급 정서를 바탕으로 우리네 문화의 이면을 보여주는 특유의 시선 덕분이다.

 

물론 싸이의 신곡 행오버를 명곡이라 말하긴 어렵다. 하지만 이 곡이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의 팬들에게 어느 정도 즐길 거리를 마련해주는 곡이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사실 명곡이라는 잣대는 싸이에게는 어울리지도 않지만 또한 그가 추구하는 것도 아니다. 싸이는 오히려 그 명곡이라는 권위적 틀을 해체하고 그 허위를 폭로할 때 비로소 자기 존재를 드러내는 가수다. 이 음악을 듣고 나면 그래서 아름다운 멜로디가 기억 남기보다는 끝없이 반복되는 행오버라는 후렴구의 중독성이 저도 모르게 입가를 씰룩이게 만든다.

 

스눕독이라는 힙합의 거장이 함께 출연하고 있어서인지 싸이의 음악적 분량이 적다고 느껴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뮤직비디오와 음악은 싸이라는 국제가수의 색채와 존재감이 아니라면 도무지 가능한 것 같지가 않다. 싸이와 함께 한국의 음주문화를 즐기는 스눕독 역시 그 그림 속에 들어온 한 부분처럼 여겨질 정도다.

 

유튜브를 통한 엄청난 전파 속도와 조회 수는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싸이는 이미 강남스타일에서부터 유튜브라는 새로운 매체의 힘을 알리는 스타로서 아이콘화된 인물이다. 그래서 공개 하루만에 1200만 뷰를 돌파했다는 식의 기사들은 숫자에 민감한 우리 정서를 건드리면서 동시에 외국의 반응까지 이끌어내는 마케팅적인 효과를 만들어낸다. ‘싸이의 뮤직비디오라는 타이틀 하나만으로 일단 클릭하고픈 욕구를 전 세계적으로 만들어냈다는 건 실로 대단한 일이다.

 

신곡 행오버는 변함없는 싸이의 성공 키워드들이 집적된 산물이다. 거기에는 풍자와 일탈 양극단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싸이에 대한 역시 양극단의 반응이 쏟아져 나오고, 그 반응은 화제로 이어지며 노래는 디지털을 타고 전염병처럼 퍼져나간다. 명민한 선택이다. ‘강남스타일이 그의 존재감을 처음 알렸고 젠틀맨이 그 존재감을 어떻게든 이어가려 한 선택이었다면, ‘행오버에서는 이제 조금은 안정된 국제가수로서의 그의 면모가 느껴진다. 때로는 불편함에 지끈지끈하다가도 때로는 이성의 끈을 잠시 놓아둔 듯한 그 편안함을 그는 자신의 음악 스타일로 담아내고 있다. 마치 숙취처럼.

‘젠틀맨’이 포르노? 국위선양?

 

왜 그저 음악을 음악으로 듣고 즐길 순 없는 걸까. 심지어 ‘젠틀맨’이 ‘국위선양 포르노그래피’라는 과격한 표현까지 나왔다. 동아대 정희준 교수가 쓴 이 글의 골자는 ‘젠틀맨’이 사실은 포르노 수준의 선정적인 뮤직비디오임에도 불구하고 외국인들이 좋아하고 유튜브 클릭수가 폭발하는 등의 이른바 ‘국위선양’을 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찬양받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문화를 담고 있기 보다는 미국문화를 열심히 홍보해주는 ‘젠틀맨’은 한류가 아니라 미국문화의 첨병으로 봐야 한다는 얘기다.

 

사진출처:싸이의 '젠틀맨' 뮤직비디오

아마도 보수적인 시선으로 본 ‘젠틀맨’의 뮤직비디오가 못내 역겨웠었던 모양이다. 지나치게 편향적인 글인데다가 그 근거 역시 해외의 반응(그것도 과격하게 안 좋은!)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면 이 글 자체가 지나치게 미국 반응에 민감한 느낌마저 든다. ‘젠틀맨’이 보여주는 B급 유머는 물론 우리가 이제는 ‘SNL 코리아’ 같은 데서 토요일마다 보며 열광하는 미국식의 유머임에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거기에 한국적인 정서가 없는 건 아니다(이엉돈 피디를 어떻게 미국 SNL에서 볼 수 있겠는가!). 만일 이게 없다면 어찌 우리네 대중들이 좋아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정희준 교수의 ‘젠틀맨’이 미국문화의 첨병이라는 얘기는 싸이를 비판하는 것을 넘어서 우리네 대중들의 미국 편향을 지적하는 얘기이기도 하다. 과연 그런가.

 

사실 싸이는 글로벌하게 네트워킹된 세상이 만들어낸 문화현상이다. 그것은 이미 국가나 언어의 장벽을 초월한다. 싸이가 곡을 발표한 지 단 이틀만에 전 세계의 음원차트에 올라갈 수 있는 것은 과거 국가주의적인 시각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흔히들 모국어라고 말할 때 드러나는 국가적인 배타성이 싸이에게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오빤 강남스타일!”이라고 부를 때 저편에서는 그것을 자기네 언어로 비틀어 “Open condom style!”로 듣거나 “말이야!”라는 말을 “마리아!”로 듣는 식이다. 여기서 국가나 언어의 장벽은 오히려 창조적인 재해석의 즐거움으로 바뀐다.

 

그러니 정희준 교수의 이야기처럼 싸이의 곡을 미국문화니 한류니 하는 식으로 국적성을 드러내는 논리는 이제 구시대적 발상이 될 수밖에 없다. 이제 우리는 미국문화나 남미의 문화, 일본문화, 중국문화 나아가 유럽문화와 이슬람문화를 바로 집 안에 앉아서 자유롭게 즐기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여기에 문화적 사대주의나 국가주의의 논리를 가져오면 이 국가를 초월한 다양성 추구 시대에는 어딘지 고리타분한 이야기가 되고 만다. 아마도 정희준 교수는 ‘젠틀맨’이 가진 선정성에 대해 언론들이 관대한 것을 국가적인 망신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언론이 지나치게 ‘젠틀맨’을 국위선양 운운하며 국가주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본 것과 마찬가지로 정희준 교수의 논리 역시 그 국가주의적 시선 안에 포획되어 있다.

 

이러한 시각이 불편하게 여겨지는 것은 갑자기 촉발적으로 생겨난 싸이 현상에 국가나 정부가 뒤늦게 숟가락을 얹는 식의 모습을 보게 될 때다. 그래서 정부의 관계부처들이 싸이를 ‘한류의 첨병’이니 또 그 방식을 해석해 ‘창조경제’니 하는 식으로 이름붙이는 것은 현상은 이해되지만 의도는 불편하게 다가온다. 대중문화가 국가를 초월한 SNS 같은 네트워크를 타고 지구촌화된 전 세계로 뻗어나갈 때 거기에 ‘메이드 인 코리아’라는 딱지를 붙이는 건 너무 속보이는 일이 아닌가.

 

싸이는 자신의 음악이 그저 대중음악의 하나가 아니라 국가를 대표하는 상품으로 인식되는 상황의 불편함을 이미 드러낸 적이 있다. 그것은 그가 자신을 ‘국민가수’가 아니라 ‘국제가수’라고 이름붙인 이유이기도 하다. 왜 우리는 미국식(이 표현도 우습긴 하다)의 유머를 즐기면 안 되는가. 그걸 즐긴다고 우리의 본질이 달라지기라는 하는 걸까. 과거처럼 국가 대 국가로 폐쇄된 세계에서라면 그것은 침공이니 침략이니 하는 배타적인 표현을 당연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국가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지구촌의 시대에 여전히 국가주의적인 배타성이 과연 유효한 걸까. 싸이의 ‘젠틀맨’을 둘러싼 국가주의적인 잡음을 들을 때마다 느끼는 안타까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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