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웨이 아웃’의 출구 없는 몰입감 부르는 배우들의 호연

노 웨이 아웃

“이 사회에는 법이란 게 있잖아요. 법원에서 법에 따라 판결을 했고 난 그 판결에 따라서 13년을 뺑이 치고 나왔고. 하라는 대로 다 했잖아. 내가 뭘 잘못한 겁니까?” 상습적으로 성폭행을 저지르고 살인 유기까지 했다. 그런데 형기를 마치고 심지어 ‘모범수’로 출소하는 희대의 흉악범 김국호(유재명)에게서는 아무런 죄책감이나 반성의 기미가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법에 따라 처벌을 받고 나왔으니 이제 자신의 죄도 다 씻어진 거라는 듯 말한다. 

 

그 말에 그를 보호해 집까지 이송해줘야 하는 형사 백중식(조진웅)은 피가 끓는다. 심지어 ‘자유’와 ‘권리’ 운운하는 그에게 분노하지만, 형사라는 그의 직업은 원하든 원치않든 이 희대의 살인범이 들끓는 민심에 의해 혹여나 벌어질 수 있는 누군가의 공격으로부터 지켜야 하는 위치에 서 있다. 디즈니+의 새 드라마 ‘노 웨이 아웃 : 더 룰렛(이하 노 웨이 아웃)’은 이 기막힌 딜레마 상황으로 문을 연다. 천하의 죽일 놈을 지켜야 하는 형사의 딜레마. 

 

흉악범의 집 앞을 가득 메운 인파와, 마음 놓고 아이들 학교도 못보내겠다며 그 흉악범과 함께 살 수 없다고 외치는 사람들. 익숙한 광경이다. 아동 강간범으로 12년형을 선고받아 복역후 출소한 조두순은 대표적이다. 당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의 출소 반대에 대한 목소리를 냈던가. 하지만 결국 그는 출소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는 아마도 그를 어쩔 수 없이 보호해야 하는 이들도 있었을 게다. 백중식 같은. 

 

‘노 웨이 아웃’은 이런 현실의 법 정의가 갖는 딜레마에 사적복수라는 판타지적 설정을 더해 넣었다. 가면남이라 불리는 한 미스테리한 인물이 룰렛방송을 통해 바로 그 김국호의 살인을 전국민들을 대상으로 의뢰한 것. 룰렛을 돌리면 이름과 액수 그리고 미션이 하나씩 결정되는데 그대로 미션을 수행하면 나온 액수의 돈을 지급하겠다는 것이다. 이 룰렛을 통해 가면남은 김국호를 살해하면 200억을 주겠다는 미션을 내건다. 

 

김국호를 죽이려고 달려드는 사람들은 그래서 그 목적이 불분명해진다. 겉으로는 정의를 지켜야 한다며 그 흉악범에 대한 분노를 터트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또 한 차원에는 200억이라는 물질적 욕망이 자리한다. 가면남이 룰렛방송을 통해 만들어내는 건 정의에 대한 명분과 돈이라는 현실 사이의 딜레마다. 

 

그 딜레마를 온 몸으로 겪는 이는 다름 아닌 백중식이다. 그는 형사지만 잘못 투자했다가 돈을 홀랑 날려버려 이제 가족 모두가 길바닥에 앉게 될 위기에 처했다. 그런 그에게 유혹적인 사건이 벌어진다. 귀가 잘린 채 발견된 도축업자 윤창재(이광수)를 수사하다가 그를 병원에 데려다놓고 간 임지홍(현봉식)의 차적 조회를 통해 그 집을 찾아갔던 백중식은 거기서 10억이 든 돈가방을 발견한다. 마침 집으로 돌아온 임지홍이 백중식을 보고 무조건 도망치다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사망하자, 백중식은 그 돈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자신이 챙긴다. 

 

결국 이 선택은 백중식을 곤경에 빠뜨리는 계기가 된다. 룰렛에 지목되어 귀를 잘리면 10억을 얻을 수 있다는 가면남의 미션 때문에 임지홍에 의해 귀가 잘렸지만 돈을 나누겠다는 약속을 믿고 찾아온 윤창재는 임지홍이 사망하고 돈가방을 백중식이 가져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그 돈을 찾기 위해 나선다. 결국 백중식과 어떤 식으로든 대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사실 ‘노 웨이 아웃’이 그리는 흉악범과 사적 복수에 대한 서사는 그리 새롭다고 보긴 어렵다. ‘모범택시’부터 ‘비질란테’에 이르기까지 사적 복수라는 소재는 범죄스릴러에서 자주 등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 웨이 아웃’은 여기에 가면남, 룰렛방송 같은 설정을 더해 지독할 정도로 현실적인 딜레마를 그려내면서도 동시에 판타지적 요소들을 가미했다. 

 

특히 딜레마 상황을 더할 나위 없이 리얼하게 소화해내고 있는 조진웅은 물론이고 극한의 악역들을 소화해냄으로써 안재홍 이후 또 다른 ‘은퇴설’을 예고하는 유재명, 이광수 같은 배우들의 호연은 이 리얼과 판타지를 오가는 작품에 깊은 실감을 선사할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앞으로 등장할 염정아, 김무열 그리고 ‘상견니’로 국내에서도 팬덤을 가진 허광한까지, 캐스팅이 주는 기대감도 적지 않다. 과연 ‘노 웨이 아웃’은 제목처럼 출구없는 몰입감으로 시청자들을 사로잡을 수 있을까. (사진:디즈니+)

‘대외비’, 희망 따윈 없는 조진웅과 이성민의 정치판 ‘파우스트’

대외비

“본래 세상은 더럽고 인생은 서러운 기다.” 영화 <대외비>에서 정치판의 비선 실세 순태(이성민)가 공천이 취소되어 억울해하는 해웅(조진웅)에게 던지는 그 말은 이 작품이 보는 정치에 대한 시선이 담겨있다. 그 시선은 지독하게 냉소적이다. 이 판에 발을 딛는 순간, 국민과 대중을 향한 최소한의 소신도 무너지고 결국은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는 것. 

 

번번이 선거에서 떨어졌지만 이제 부산 해운대에서 공천이 내정된 국회의원 후보 해웅은 이 작품이 그리는 ‘문제적 인물’이다. 그는 소신과 대의를 갖고 있는 인물이지만 동시에 부산은 물론이고 전국 정치판을 쥐고 흔드는 비선실세 순태를 보좌하며 머슴 역할을 자임해온 지극히 현실적인 욕망을 가진 인물이기도 하다. 

 

그렇게 선하기만 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악하다고 보기도 어려운 이 인물이 변하기 시작하는 건 공천이 취소되면서다. 총선에 이어질 대선 비자금 마련을 위해 해운대 재개발 계획이 은밀히 이뤄지고, 이를 진행하게 된 순태는 지역 주민들을 위해 재개발 반대를 외치는 해웅의 공천을 취소한다. 순태에게 토사구팽 당한 해웅은 소신과 대의 대신 어떻게든 권력을 쥐겠다는 욕망 속으로 빠져든다. 재개발 계획이 담긴 대외비 문서를 입수한 해웅은 재개발 반대의 소신도 접고 그 이권을 미끼로 조폭과도 손을 잡고 선거자금을 조달해 무소속으로 선거에 나선다.  

 

결국 <대외비>는 정치판과 또 거기 연결된 이권을 두고 해웅과 순태가 치고 받는 대결의 과정을 흥미진진하게 담는다. 의외로 해웅이 선전을 하기도 하지만 이를 다시 순태가 뒤집고 그러면 다시 해웅이 나서서 순태의 뒷덜미를 잡는 식이다. 이 과정 속으로 들어가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정치의 대의나 민주주의 같은 이야기들은 공염불이 되어버린다. 대신 치열한 이전투구의 장이 정치이고, 그것은 심지어 무고한 민초들의 삶조차 권력을 위해 빼앗는 ‘악마와의 거래’라는 게 그 과정이 담고 있는 것들이다. 

 

‘The Devil’s Deal’이라는 영문 제목에 담겨 있듯이 <대외비>가 그리고 있는 건 정치라는 외피를 쓰고 있는 ‘악마와의 거래’다. 그것은 순태의 대사로도 나오는 데, 정치라는 게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일”이라는 대목이 그것이다. 그래서 이원태 감독이 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 이야기했듯, 이 작품 속 순태와 해웅은 마치 <파우스트>의 메피소토펠레스와 파우스트를 연상케 한다.

 

순태와 해웅이 극한의 대결구도 속에서 한 허름한 주점에서 마주한 채 서로를 향해 패를 꺼내드는 장면은 진짜 <파우스트>의 한 장면처럼 연출되었다. 한 명이 교차 편집되어 클로즈업 된 얼굴만으로도 이 악마와의 거래가 실감되기 때문이다. 순태는 악마의 눈빛으로 해웅을 죽음의 공포 속으로 밀어 넣고는 패를 내밀고, 해웅은 극도의 긴장감에 땀을 줄줄 흘려가며 떨면서도 자신의 패를 내민다. 사실 이 한 장면이 이 영화의 모든 걸 담았다고 할 정도로 인상적인 대목이다. 

 

그리고 그렇게 패를 나눈 후의 결과는 충격적이다. 정치판은 어떤 식으로든 타협을 하거나 협상을 했을 테지만 이원택 감독은 이 영화에 대해 그럴 생각이 전혀 없다고 그 엔딩은 말해준다. 흔히들 빌런들이 등장하는 이런 영화 속에서 권선징악, 사필귀정을 꿈꾸지만, 이 영화는 애초 이상적인 정의나 정치라는 것이 순진한 이야기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영화가 굳이 1992년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는 건 의미심장하다. 작품 속에도 등장하지만 당대는 87년 민주화운동에 이은 6.29 선언으로 직선제에 의해 노태우 전 대통령이 집권한 후 시간이 흘러 차기 대선이 벌어지던 시기다. 선거에 있어 불법과 부정을 근절하겠다고 정부가 나섰지만 여전히 금권선거와 부정선거가 횡행했던 시기라는 것. 

 

그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 당대를 추억하게 만드는 레트로적 감성이 시선을 잡아끄는 면이 분명히 존재하지만, 영화가 그 때를 소환해낸 건 그런 정치가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현재는 달라졌는가를 오히려 질문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싶다. 지금의 정치판을 보라. 여야를 막론하고 선거 당시 그토록 쏟아져 나왔던 ‘민생’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는다. 대신 정치는 끝없는 권력 대결과 이전투구의 장이 되어 있다. 

 

영화는 끝내 희망을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악마와의 거래를 통해 권력을 쟁취한 이들이 그 거래로 인해 끝없이 저들과 손잡아야 하고, 거기에 더 이상 순수한 정치나 민주주의의 이상 같은 것들은 존재할 수 없어지는 절망을 보여준다. 그 절망에서 현재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정치판이 겹쳐지는 건 지나친 해석일까. 

 

어둡고 그래서 비밀로 감춰져 있지만 이 <대외비>를 끝내 마주해야만 하는 이유는 그래서 충분하다. 그 비밀이 비밀로 남겨져 있는 한 거래는 계속 일어날 것이고, 그만큼 세상은 더러워지고 민초들의 삶은 서러워질 것이며, 그럴수록 희망은 찾을 수 없을 테니.(사진:영화'대외비')

‘독전’, 마약 범죄 느와르에 숨겨놓은 우리네 삶의 풍경들

영화 <독전>은 제목처럼 독하다. 이야기가 독하고 폭력적인 장면들이 독하며 그걸 연기해내는 배우들은 더더욱 독해 보인다. 한 마디로 미친 존재감을 보여준 배우들, 조진웅, 故 김주혁, 류준열, 차승원, 김성령, 박해준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진서연까지 모두가 소름끼치는 연기 몰입을 보여준다. 관객으로서는 그들의 연기가 만들어내는 긴장감에 어떻게 두 시간이 훌쩍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래서일까. 마약을 두고 벌어지는 느와르 영화의 전형처럼 강렬한 장면들이 관객의 시선을 온통 집중시키는 바람에 이해영 감독이 이 느와르를 통해 담아놓은 많은 종교적 뉘앙스들이 슬쩍슬쩍 뒤로 숨겨진다. 이건 <독전>이라는 영화 제목의 영문명이 조금은 엉뚱하다 싶은 ‘Believer’라는 데서도 찾아질 수 있다. 겉면은 ‘독한 전쟁’이지만 그 내면에는 ‘믿는 자’들을 내세운 삶에 대한 종교적 통찰을 숨겨놓은 듯한.

워낙 맹렬하고 독한 범죄 현장의 팽팽한 긴장감이 가득 채워져 있는지라, 영화의 시작점과 끝점에 등장하는 눈이 하얗게 쌓인 풍광 속을 달려가는 원호(조진웅)의 모습은 어찌 보면 이 느와르를 표방한 영화에는 사족 같은 느낌을 준다. 하지만 그 시작점과 끝점은 영화를 다 보고나면 사족이 아니라 사실은 이 느와르 영화를 훨씬 더 확장해서 볼 수 있는 열쇠라는 걸 알게 된다. 마치 자신이 믿는 바를 끝까지 확인하기 위해 세상의 끝에 다다른 듯한 원호의 모습은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한 단면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독전>이라는 느와르 영화에서 이런 종교적 뉘앙스를 느끼게 되는 이유는 이 영화 전편에 깔려 있는 ‘이선생’이라는 이름은 있지만 실체는 보이지 않는 존재가 세워져 있어서다. 영화 속 인물들은 저마다의 목적에 따라 이선생을 만나려 하거나 그를 사칭하거나 그를 잡으려 한다. 물론 느와르 영화라는 장르적 특성 속에서 이선생은 거대 마약 조직을 배후에서 움직이는 ‘거물’이고 그래서 그를 만나려는 자들은 그와 거래를 하려 하거나, 그의 명성을 이용하려 하거나 혹은 그를 검거하려 한다. 

하지만 영화는 마지막에 이를 때까지 이선생의 존재를 숨겨 놓는다. 그래서 그 가상의 존재를 두고 벌어지는 인물들의 지옥 같은 전쟁이 벌어진다. 아무도 믿지 않는 자나 그를 사칭해 권력을 쥐려는 자는 그래서 그 지옥 속에서 최후를 맞이하고, 그를 잡으려 하는 자는 결국 허상만은 잡게 된다. 그나마 끝까지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 원호만이 이선생의 실체 앞에 다가간다. 

하지만 엉뚱하게도 그 이선생 앞에 선 원호는 그렇게 이선생을 좇으며 살아온 삶이 허망하다는 걸 느낀다. 그는 문득 이선생에게 묻는다. 그렇게 “살면서 행복했던 적이 있었냐”고. 마치 이선생을 잡으면 자신의 삶이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이라 여겼던 것이지만, 막상 그 앞에 서게 되면서 그는 문득 깨닫게 된다. 무엇 때문에 그리도 고집스럽게 그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 그 세상의 끝에까지 오게 됐던 것인지. 

<독전>은 제목이 말해주는 대로 그 ‘독한 전쟁’을 느와르를 즐기듯 봐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작품이다. 특히 그 느와르의 질감을 독한 핏빛으로 만들어낸 배우들의 열연은 소름끼치도록 흥미진진하다. 하지만 느와르를 통해 종교적인 구원과 믿음에 대한 이야기를 건네고 있는 이해영 감독의 속삭임을 들여다보는 재미 또한 빼놓을 순 없다. 영화 앞과 끝을 이어주는 그 황량하고 추운 동토 속을 구도하듯 차를 몰고 나가는 원호의 모습이 오래도록 기억 속에 아른거리는 그 여운이 주는 재미를.(사진:영화'독전')

'터널', '시그널'과 비교되는 지점들

OCN 주말드라마 <터널>에서 시청자들이 여러 작품들의 잔상들을 느끼는 건 어쩔 수 없다. 30년 전 1980년대의 정경이 환기시키는 영화 <살인의 추억>과 드라마 <시그널>. 특히 <시그널>은 이러한 과거의 정경과 함께 현재와 연결된다는 점에서 <터널>이 떠올리게 하는 작품일 수밖에 없다. <시그널>에서는 과거와 현재를 잇는 무전기가 등장하지만, <터널>은 과거에서 현재로 통과하는 터널이 등장한다. 

'터널(사진출처:OCN)'

우연인 건지 의도한 것인지 <터널>의 남자주인공 박광호(최진혁)의 아내 역할로 나온 이시아는 <시그널>에서도 이재한(조진웅)의 첫 사랑으로 등장한다. 하드보일드한 형사지만 아내 혹은 연인에 대한 사랑을 가진 존재라는 특징은 이 두 주인공들이 가진 공통점이다. 이들은 그만큼 사람 냄새가 나는 형사라는 캐릭터로 시청자들 앞에 서 있다. 

이처럼 유사한 느낌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터널>의 이야기가 새로운 면이 없는 건 아니다. 그건 이 작품이 타임슬립 장르를 덧붙여 박광호가 3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현재로 온다는 설정이 있기 때문이다. 박광호가 현재에 맞닥뜨릴 형사는 그와는 정반대의 느낌을 주는 김선재(윤현민)다. 그는 사람수사에는 관심이 없고 대신 스마트폰, SNS, 이메일, CCTV, 내비게이션 등 디지털 증거를 뒤져 수사 단서를 잡는다. 

박광호를 타임슬립시켜 김선재 같은 형사와 붙여 놓는 이유는 명백하다. 사람 냄새 풀풀 나는 아날로그 형사와 인간미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디지털(?) 형사를 대비시키려 함이다. 몸으로 현장에서 부딪치며 뛰는 수사가 여러 형사물에서 과학수사와 대비되며 한때 과거의 유물로 그려졌던 것과 비교해보면 <터널>의 선택은 정반대다. <터널>은 오히려 차갑디 차가운 과학수사라는 틀을 쓴 채 사람의 생명이 과학적 수치로만 보이는 그런 현재를 아날로그 형사를 데려와 꼬집는다. 

그래서 결국 <터널>에서 가장 중요한 건 박광호라는 아날로그 캐릭터 그 자체다. 30년 전 연쇄살인을 목도하며 그 피해자와 유족들의 고통에 깊이 공감했던 그는 “어떻게든 잡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힌다. 그는 이미 범인을 눈앞에서 봤지만 안타깝게도 놓치고 만다. 그 열망은 그래서 그가 시간을 뛰어넘는 터널을 통과하는 중요한 이유가 될 것으로 보인다. 

타임슬립이라는 판타지 설정이나, 다른 작품을 떠올리게 하는 요소들이 갖는 유사성의 한계를 과연 <터널>은 뛰어넘을 수 있을까. 그것은 이 작품이 굳이 그런 설정들과 요소들을 가져온 이유가 납득되는 지점에서 그 성패가 갈릴 것으로 보인다. 즉 사람 냄새 나는 형사가 온몸으로 보여주는 현재에 대한 어떤 비판적 성찰 같은 것이 성공적으로 그려져야 이 모든 한계들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것. 

일단 첫 회를 통해 박광호라는 형사의 인간미는 충분히 세워졌다고 볼 수 있다. 범인을 잡고픈 열망과 아내에 대한 사랑,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과 생명에 대한 인간적인 연민 같은 걸 제대로 드러내줬기 때문이다. 여러모로 <시그널>을 연상시킬 수밖에 없는 작품이지만 그것과는 또 다른 매력을 줄 수 있는 작품이 될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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