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빙’, 얼었던 것이 녹으면 진실은 과연 드러날까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봄이 생각보다 일찍 오면서 예년보다 한강물이 일찍 해빙되었다는 소식이 깔리며 카메라는 이전에는 어떤 집들이 있었을 지도 모를 공지에 아파트가 건설되고 있는 장면을 보여준다. 그리고 길을 따라 가다가 어느 한강변에서 불쑥 솟아오른 시체를 보여준다. 얼굴과 팔다리가 잘려져 몸통만 둥둥 떠오른 시체는 그것이 본래 사람의 육신이었는지가 애매할 정도로 하나의 덩어리처럼 보인다. 영화 <해빙>의 오프닝은 얼었던 것이 녹아 시체가 떠오른다는 그 사건이 던져주는 이미지와 그 의미들로부터 시작한다. 

사진출처:영화<해빙>

승훈(조진웅)은 이혼 후 미제사건으로 유명한 경기도의 신도시에 있는 선배의 병원에서 일하며 살아간다. 그런데 그가 지내고 있는 건물의 집주인인 정육점을 운영하는 성근(김대명)이 의심스럽다. 성근의 아버지인 정노인(신구)이 자신에게 내시경을 받으며 가수면 상태에서 내뱉은 토막살인을 의심케 하는 이야기가 그 의심을 촉발시킨다. 그는 필리핀에서 왔다가 집을 나가버렸다는 성근의 전 부인이 과연 가출한 것인지 아니면 그들에 의해 도륙당한 것인지를 의심한다. 승훈은 정육점에서 머리카락처럼 보이는 것이 비죽 뛰어나와 있는 비닐에 쌓여진 어떤 물건을 본 후 그것이 머리라고 생각한다. 그는 목 잘린 여인을 정노인과 성근 부자가 토막내는 악몽에 시달린다. 

<해빙>은 이 낯선 곳으로 이주해와 살아가고 있는 승훈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래서 영화의 중반 이후까지 관객들은 승훈의 관점에서 이 살벌한 살육이 벌어지고 있는 신도시, 정육점의 사건들이 공포영화 같은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여기에 히스테리를 갖고 있는 이혼한 승훈의 전 부인과 아들이 끼어들면서 긴장감은 한층 더 커지고, 병원에서 일하는 간호사 미연(이청아)이 프로포폴을 빼돌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사건은 더 복잡해진다. 게다가 승훈에게 자꾸만 나타나는 전직형사 조경환(송영창)은 자신이 과거부터 이 마을에서 벌어진 미제사건을 지금껏 추적하고 있다고 말한다. 승훈의 시점에서 관객들에게 사건은 명백해 보인다. 분명 성근과 정노인이 연쇄살인을 벌인 범인들이라는 것. 

하지만 영화는 이렇게 승훈의 시점으로 나가다가 그가 경찰서 취조실로 들어가는 순간부터 시점을 바꿔놓는다. 즉 승훈이라는 사람을 다시금 바라보는 형사의 시점으로 바뀌는 것. 그런데 이 형사의 시점으로 보면 승훈은 일종의 정시착란을 겪고 있는 정신질환자다. 조경환이 사실은 형사가 아니고 자신이 탐독했던 추리소설 작가의 이름이며, 실제로는 자신의 선배이자 정신질환 담당의였던 남인수였던 것. 결국 그 많은 공포스런 사건들은 사실상 승훈의 망상이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그는 자신이 사실 아내를 죽였고 미연마저 죽이려 했었다는 증언들이 모두 거짓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렇게 주장하면서도 혹시 자신이 망상 속에서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빠진다. 

영화 <해빙>은 한 가지 일관된 시점을 유지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관객들에게는 당혹감과 불편함을 줄 수밖에 없다. 믿었던 것이 깨지는 그 순간은 극중 주인공인 승훈이 겪는 “아닐 거야”라는 그 부정을 똑같이 관객들도 공유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시점은 맨 마지막에 가면 또 다시 뒤집어진다. 결국 이 모든 것이 승훈의 망상일 뿐이었다고 사건은 일단락되는 듯 보이지만, 차량용 블랙박스에 찍혀진 영상으로 승훈의 아내를 살해하는 정노인이 포착되고 그것이 익숙한 듯 그 노인에게 항변하다 결국 시체와 블랙박스를 치워버리는 성근의 모습이 포착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진실은 무엇인가. <해빙>이 주는 당혹감은 그 진실을 그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점이다. 누가 진짜 살인자이고 누가 진짜 피해자인지 알 수 없고 심지어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승훈마저 어쩌면 내가 저지른 일인지도 모른다는 의심과 죄의식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왜 이렇게 시점의 변화를 통해 모호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 

그 단서는 시작에 담겨져 있고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 오히려 숨겨져 있다. 왜 굳이 ‘해빙’이라는 모티브를 가져왔고 ‘덮여진 진실’이 드러난다며 사실은 드러난 것이 없고 오히려 더 모호해지는 상황을 보여줬을까. 영화가 맨 처음 보여준 지금은 말끔하게 밀어내져 버린 공지는 어쩌면 누군가의 삶의 터전이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멀쩡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그 곳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그 곳이 그런 곳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직접적인 가해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밀려난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가해자가 아니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여러 차례 밀어내지고 덮이고 다시 세우고 하는 것들을 반복하다보면 무엇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것인지를 찾아내기 어려워지는 지점에 이르고 만다. 그것이 강물이 녹아 시체가 떠오른다고 해도 그 아무런 단서가 남아있지 않아 진범이 누구인지를 찾아내기 어려운 상황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그런데 분명한 건 시체가 있다는 사실이고, 공지가 밀어낸 자리에 아파트들이 세워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최악의 국정농단 사태 속에서 그 사태를 만든 이들이 아마도 이런 상태가 아닐까. “도대체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데...” 라고 그들은 생각할 지도 모른다. 수없이 여러 사람들이 개입하고 그들의 행위들이 중첩되고 겹쳐지면서 그것이 자신이 저지른 일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고, 어쩌면 자신이 저질렀지만 그것을 까무룩 스스로 지워버리는 망상 속으로 숨어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태는 그들 가해자들에게만 생기는 증상이 아니다. 그건 피해자들 역시 나도 모르게 공모한 건 아닌가 하는 죄의식을 만들어낸다. 

<해빙>은 그래서 마치 얼음이 녹으면 진실이 드러날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풀어지면서 더 복잡해지는 사건의 양상들을 여러 시점의 교차와 변화를 통해 보여준다. 영화는 당연히 불편할 수밖에 없다. 해결된 것이 하나도 없고 오히려 더 복잡해지니 말이다. 하지만 이 복잡하고 불편한 이야기가 우리네 현실에 건드리고 있는 지점은 예사롭지 않다. 모든 게 명쾌해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도 명쾌한 것이 없게 되어버린 현실을 <해빙>은 공포에 가까운 시점변화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봄이 온다고 물이 녹는다고 진실이 모두 드러나기에는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현실의 문제가 너무나 복잡하게 얽혀있지 않은가. 물론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진실을 밝히는 노력을 멈추면 안되겠지만.

<안투라지>, 그래서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걸까

 

tvN <안투라지>가 드디어 첫 회를 방영했다. 사실 방영 전부터 이 작품에 대한 기대와 관심은 반반으로 나뉘었다. 즉 미드 원작인 <안투라지>의 리메이크가 그 원작이 가진 높은 수위를 어떻게 우리 정서에 맞출 것인가 하는 점이 우려를 만들었지만, 그래도 화려한 연예계의 이면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는 점은 시선을 잡아끌 기대요소로 지목되었다. 그렇다면 첫 회는 어땠을까. 호불호가 갈리던 지점에서 보다는 불호가 더 많다. 어째서 이런 반응이 나오게 됐을까.

 

'안투라지(사진출처:tvN)'

원작보다 자극을 낮췄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자극적이다. 스타인 차영빈(서강준)을 중심으로 그의 사촌형인 차준(이광수)과 친구면서 매니저인 이호진(박정민) 그리고 거의 백수에 가깝게 영빈과 함께 다니며 노는 데만 혈안인 거북(이동휘)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벌이는 해프닝들 속에는 목욕탕 알몸 노출은 기본이고 함께 영화 작업을 했던 여배우와 차안에서 벌이는 애정행각, 그리고 어딘지 은밀해 보이는 연예계 스타들의 관계들이 가감 없이 보여졌다.

 

게다가 연예계 이야기를 담고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진짜 연예인들의 화려한 카메오가 줄을 이었다. 하정우는 물론이고 박찬욱 감독과 배우 김태리, 마마무, 아이오아이 등등이 카메오 출연해 드라마를 빛내주었다. 하지만 이렇게 화려한 연예계의 이면을 드러내는데 초점을 맞추다보니 정작 이 드라마가 어떤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고, 왜 시청자들이 이 드라마를 봐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설득은 제대로 하지 못한 결과가 되었다.

 

물론 첫 회에 이야기가 없었던 건 아니다. 영빈을 키워낸 매니지먼트 회사 대표 김은갑(조진웅)과 친구인 영빈 사이에 끼어 애매한 입장이 되어버린 호진의 상황이 그 첫 회의 이야기다. 결국 호진은 영빈에게 정식 계약을 요구했지만 영빈은 친구관계가 더 좋다며 거절했고, 결국 호진은 그만두겠다고 얘기했다. 그러자 다시 영빈이 호진에게 와 정식계약을 맺자는 이야기를 건네며 변함없는 우정을 드러내는 장면은, 이 연예계라는 정글에서 이들 4인방의 우정이 향후 어떤 힘을 발휘하며 그들 개개인을 성장시킬까 하는 기대감을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너무 많은 연예계의 떡밥들, 이를테면 외부에서 보는 화려함 못지않게 어딘지 찌질하게도 보이는 보통 사람으로서의 스타들을 폭로해내는(?) 장면들이 전면에 깔리게 되면서 이런 <안투라지>가 앞으로 해나갈 진짜 이야기들의 기대감은 상당 부분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래서 첫 회가 주는 느낌은 자극적이긴 하지만 왜 봐야겠는지는 모르겠는’, 그런 정도에 머물렀다.

 

연예계 이면의 이야기는 물론 대중들의 흥밋거리다. 그래서 그 많은 가십성 이야기들이 연예계에서 끊임없이 나오는 것일 게다. 하지만 그걸 드라마로 본다는 건 다른 의미다. 연예계 이야기가 제 아무리 자극적이라고 해도, 드라마는 결국 그 드라마만의 본연의 스토리나 메시지가 담기지 않으면 굳이 채널을 고정시킬 이유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요즘처럼 현실의 이야기들이 더 드라마 같아지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하루가 멀다 하고 연예계의 믿기지 않는 이야기들이 실제로 뉴스를 통해 터져 나오는 세상이다. 그러니 드라마가 그걸 밀착해서 보여준다고 해도 결국 가상의 스토리일 수밖에 없는 그 특성 속에서 현실만큼 자극적일 수는 없다. 마침 터져버린 최순실 게이트 같은 사안들은 그 엄청난 일들이 문화계까지 뻗쳐 있다는 걸 암시하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이런 현실에 연예계의 가십성 이슈가 주목받기는 어렵다.

 

<안투라지>는 그 화려한 겉면을 떼어내고 네 사람의 우정이 만들어내는 이 드라마의 진짜 이야기를 빨리 전면에 내세워야 한다. 물론 첫 회에 배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요즘처럼 드라마들이 쏟아져 나오고, 갖가지 대중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이슈들이 터져 나오는 시점에 초반 관심과 기대감을 확실히 심지 못한다는 건 그대로 묻혀버릴 위험을 예고한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것인지, 그래서 왜 지금 시청자들이 그걸 봐야하는지를 설득해내는 것이 절실한 시점이다.

이야기가 산으로 간 <사냥>, 그럼에도 돋보인 안성기

 

그 산에 오르지 말았어야 했다영화 <사냥>의 포스터에 적혀 있는 이 문구는 엉뚱하게도 이 영화의 뒤늦은 후회처럼 들린다. <사냥>의 이야기가 엉뚱하다는 의미로 산으로 갔기때문이다. 이 영화가 하려는 이야기는 명백하다. 말 그대로 사냥에 비유한 이야기다. 인간의 사냥과 동물의 사냥 그 차이를.

 

사진출처:영화<사냥>

갱도가 무너져 죽을 위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하고 살아남은 문노인(안성기)은 산에서 우연히 금맥을 발견하고 그걸 캐러 들어온 엽사들과 비교된다. 그 질문은 단 한 가지다. 사냥은 무엇을 위해 하는가. 동물의 사냥은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선택이지만, 인간의 사냥은 생존과 무관한 욕망 때문이다.

 

문노인과 엽사들의 대결은 그래서 이 두 가지 차원의 사냥이 중첩된다. 문노인의 사냥은 지켜야할 목숨들을 위한 것이지만, 엽사들의 사냥은 금을 차지하기 위한 것이다. 어찌 보면 단순명쾌할 수 있는 대결구도지만 영화는 어찌 된 일인지 자꾸만 곁가지를 덧붙인다. 무너진 갱도에서 벌어진 일들까지야 이야기의 전제로서 기능하기에 충분하지만, 그 이전의 가족관계 이야기까지 괜스레 파고들어 본격 스릴러와 추격전이 갖는 밀도를 떨어뜨린다.

 

물론 문노인에게 숨겨진 비밀스런 설정 역시 인간과 동물의 사냥을 형상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장르적 특성으로 보면 문노인의 이러한 비밀은 너무나 과한 느낌이다. 그것이 그려내는 상징적인 의도는 알겠지만 그 의도로 인해 장르가 어떤 기대감을 채워주기보다는 널뛰는 느낌을 만든 건 감독의 지나친 의욕의 결과다.

 

훨씬 더 단순화했어야 했다. 산이 있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쫓고 쫓기는 추격전에 더 집중했다면 저 <최종병기 활>이 보여줬던 긴박한 재미들을 충분히 만들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사냥이라는 의미 부여를 과도하게 하려던 결과, 본연의 스릴러 장르의 재미들은 상쇄될 수밖에 없었다.

 

이 영화가 보이는 가족코드 또한 아쉬움을 남기는 대목이다. 가족 코드를 가져와 문노인의 절박함을 더하려는 의도 역시 나쁘다 할 수는 없지만,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굳이 출생의 비밀같은 틀에 박힌 설정까지 갈 필요가 있었을까 싶다. 그렇게 아귀를 맞추기보다는 차라리 조금 열어놓고 추격전의 디테일한 상상력을 끝까지 밀어붙였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최근 <시그널>로 주목받은 조진웅 같은 배우를 데려다놓고 굳이 쌍둥이 설정까지 했지만, 그것이 왜 필요한지도 의문이다. 그렇게 쌍둥이라면 그 설정이 주는 특별한 재미요소들이 있어야 했지만 <사냥>에서는 그걸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결국 이렇게 연기 잘하는 조진웅의 연기 역시 영화는 잘 이끌어내지 못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결함들이 오히려 도드라지게 만든 건 안성기의 독보적인 연기력이다. 65세의 나이에 람보 영감이라고 불릴 정도로 산을 뛰어다니며 액션 연기를 선보이고, 한없이 흩어질 수 있는 이야기들의 결함을 섬세한 표정 연기로 일관되게 채워 넣는 그 저력은 역시 명불허전이다. 마치 <사냥>이라는 요령부득의 연기 미션 속에서 홀로 그걸 수행해내는 듯한 모습이라니

'아가씨' 김민희와 김태리, 그녀들을 지지할 수밖에 없다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박찬욱 감독의 신작 영화 <아가씨>의 배경은 일제강점기 어느 곳에 지어진 대저택이다. 하필 박찬욱 감독이 이 영화의 시대적 배경을 일제강점기로 삼은 이유는 명백하다. 그건 이 시대를 다룬 무수한 영화들이 많이 보여주던 민족주의적인 관점과는 무관하다. 다만 그 시기가 가진 혼종적 성격, 즉 문을 지나고 나서도 한참을 차를 타고 들어가 세워져 있는 대저택이 일본식과 영국식 그리고 우리식으로 한 공간에 지어져 있는 모양새와 무관하지 않다. 공간이 그러하듯이 그 공간에 살아가는 이들도 혼종적 성격을 띤다. 일본어를 쓰는 조선인이 있고 조선어를 쓰는 일본인이 있다.

 

사진출처: 영화 <아가씨>

영화가 담는 시공간이 이처럼 혼종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건 <아가씨>에서는 중요한 모티브가 된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무수한 경계와 구분들이 이 혼종적 시공간에서는 어딘지 느슨해지기 때문이다. 그 느슨함은 관계에서도 드러난다. 대저택에 거의 감금되듯이 살아온 아가씨 히데코(김민희)는 부모를 잃고 막대한 유산을 받았지만 그 후견인인 이모부 코우즈키(조진웅)의 손아귀에서 자라난다. 그런데 이 코우즈키와 히데코의 관계가 애매하다. 친인척 관계지만 코우즈키는 히데코에 대한 변태적인 애정을 갖고 있다. 외부에는 그것이 코우즈키가 히데코의 재산을 노리기 위함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그것이 아니라는 건 영화의 말미에 가면 명확하게 드러난다.

 

영화는 아가씨 히데코의 재산을 노리고 접근하려는 가짜 백작(하정우)이 그녀에게 좀 더 쉽게 접근하기 위해 숙희(김태리)를 하녀로 넣는 일종의 작전으로 시작한다. 따라서 이들은 모두 연기를 한다. 혼종적 공간에서의 연기는 이들이 도대체 그 진심이 무엇이고 실체는 무엇인지를 더욱 오리무중으로 만들어버린다. 3부로 나뉘어 구성된 영화는 그래서 그 시점이 매 부마다 달라지면서 완전히 다른 이야기로의 반전을 보여준다. 연기를 하는 줄 알았지만 사실은 연기가 아니었고, 진짜인 줄 알았는데 그것이 연기였다는 것이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다. 한 장면에 대한 서로 다른 이야기의 변주만으로도 <아가씨>는 꽤 흥미롭다.

 

하지만 영화가 지향하는 점은 그간 박찬욱 감독의 영화들이 보여줬던 모호함이 아니라 훨씬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것은 폭력적인 남성성의 세계로부터 두 여성이 유쾌한 탈주극을 벌이는 것이다. <아가씨>에 두 명의 여성이 등장하고 그들이 모두 두 명의 남성에 포획된 존재들이라는 설정은 그래서 이 영화가 가진 상징성을 보다 명쾌하게 보여준다. 가짜 백작에 의해 작전에 투입된 숙희가 그렇고, 코우즈키에 의해 대저택에 감금된 채, 신사차림으로 가장한 남자들 앞에서 더럽고 도착적인 소설 강독을 하며 살아가는 히데코가 그렇다.

 

아가씨와 하녀라는 관계 설정은 아마도 남성성을 드러내는 무수한 성애 영화가 보여주곤 했던 기묘한 상상을 자극할 지도 모른다. 그래서 직접 보기 전에는 <아가씨>라는 영화가 일종의 동성애 영화가 아니냐는 편견을 갖게 되는 건 이 영화가 주는 반전에는 오히려 더 효과적인 면이 있다. 남자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묻는 아가씨의 질문에 하녀가 그 속살을 만지고 성 행위를 하는 장면은 그래서 1부에서는 말 그대로 남성성의 시각을 그대로 재연하는 듯 보이지만, 2, 3부에서 다시 보는 그 장면은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그것은 마치 코르셋처럼 남성성에 의해 짓밟히고 옥죄던 육체들이 아가씨와 하녀라는 서열 구조까지 한껏 벗어던진 채 서로를 온몸으로 위무하는 듯한 장면으로 치환된다. 두 여성이 첫 설렘을 갖게 되는, 골무로 날카로운 이빨을 갈아주는 장면 역시 다시 보게 되면 여성들의 연대 같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게다가 이 대저택 지하실로 상정되는 남성성의 세계는 점점 더 도착적인 느낌을 준다.

 

섹스는 이 관점에서 바라보면 그저 성행위가 아니다. 여기 등장하는 남성들은 이상하게 삐뚤어진 성의식을 갖고 있다. 마치 여성들을 위압적으로 짓눌러야 여성들이 더 좋아할 거라는 사고방식. 그런 폭력적인 생각들은 지하실 가득한 무수한 성애 소설들의 판타지로 남겨져 여성들을 그 폭력의 대상이 되게 만든다. 뒤늦게 이 지하실에 가득 채워진 성애 소설들을 발견하고 그 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깨닫게 된 숙희는 그래서 히데코와 함께 그 집으로부터 탈주하며 소설들을 발기발기 찢어버린다. 그리고 마치 발기된 성기처럼 세워져 위압적으로 그녀들을 억압하던 상징물 뱀 대가리를 잘라버린다.

 

그렇게 여성들이 탈주해버린 대저택에서 남겨진 남성들은 그 폭력적인 성의식 속에서 스스로를 파멸의 길로 이끈다. 대신 탈주한 여성들은 블라디보스톡행 배를 타고 자유의 항해를 한다. 그간 남성성의 억압을 상징하던 옷들을 남김없이 벗어버리고 폭력적인 성행위가 아닌 행복한 성을 보여주는 마지막 장면은 그래서 인상적이다. 어린 시절 코우즈키가 히데코를 훈육시키기 위해 사용했던 구슬은 온전한 쾌락의 도구로 바뀐다.

 

사실 이렇게 선명하게 메시지를 담아내면서도 매번 반전에 반전을 이어가고 그리고 박찬욱 감독 특유의 탐미적인 영상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아가씨>는 놀라운 성취를 가졌다고 말할 수 있다. 한 장면을 바라보던 카메라가 갑자기 느릿느릿 뒷걸음질을 치면서 그 장면의 진짜 이야기를 보여주는 듯한 영상 연출은 그래서 이 영화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든다. 다음에 벌어질 상황들이 못내 궁금하고, 그러면서 스스로 갖고 있던 편견들이 여지없이 박살나는 그 장면에서는 어떤 쾌감마저 느껴진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혼종적 성격을 띠던 영화의 모호함은 보다 선명해진다. 가짜는 가짜임이 판명되고 진짜는 진짜임이 드러난다. 그래서 모두가 연기를 하는 듯 보였던 영화는 후반부에 이르면 그 연기의 끝장을 보여준다. 누군가의 폭압적인 상상력과 기획으로 강요되던 연기들이 벗겨지고 대신 진실 된 알몸이 드러날 때의 카타르시스는 그 어떤 섹스보다 강렬하다. 남성성이 내포하고 있는 폭력적인 양태들이 무너져 내리고 저 편 들판을 향해 달려 나가는 두 여성의 자유를 지지하게 될 때, 영화는 한없이 유쾌해진다. 성 의식에 대한 논제들이 그 어느 때보다 쏟아져 나오는 시기여서 일까. <아가씨>는 특히 더 흥미로운 동지의식을 갖게 만드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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