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듀사>, 별이 아닌 직업인 택한 김수현

 

이 사람이 <별에서 온 그대>의 그 도민준이 맞나? KBS의 새로운 예능 드라마’ <프로듀사>의 백승찬으로 돌아온 김수현에게서 초능력자 도민준은 없었다. 대신 멋지고 폼 날 것 같지만 실상은 잘 나가는 연예인의 갑질에 밀리고, 시청률표에 의해 목줄이 간당간당한 생활인에 가깝게 살아가는 예능국에 갓 들어온 어리버리한 신입PD만 있었다.

 

'프로듀사(사진출처:KBS)'

죄송합니다라고 말하면 PD로서의 자존감이 없다고 뭐라 하고, 그래서 가만히 있으면 뭐라도 얘길 해보라고 다그치는 선배 앞에서 백승찬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쩔쩔 매는 모습이었다. 그냥 학교 동아리 여선배 가까이 있고 싶다는 사심으로 들어온 방송사 예능국이니 특별한 포부가 있을 리 없다.

 

게다가 선배들이라고 다르지 않다. <12> 시즌4를 만들고 있는 라준모 PD(차태현)는 시청률이 떨어지자 출연자들을 모두 교체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회식을 하기로 한 자리가 쫑파티가 될 상황. 심각해질 수밖에 없는 라준모 PD 앞에서 그러나 이를 지시한 윗선의 고민은 회식할 음식점의 코스 요리 단가나 그 집에 맛있다는 잣죽 이야기가 고작이다.

 

신입 PD들의 교육을 맡게 되어 그들 앞에 위신을 세우려 하지만 신디(아이유)라는 잘 나가는 아이돌 앞에서 사실은 사정 사정을 해야 하는 처지가 탁예진(공효진)이라는 예능 PD의 실제 삶이다. PD가 갑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기획사들이 더 힘을 가진 갑인 게 현실. 이런 현실 속에서 예능 PD들은 아침에 차문을 열다 긁은 옆 차에 하루 종일 신경을 쓸 정도로 소심한 삶을 살아간다.

 

백승찬이라는 신입 예능 PD의 어리버리한 모습은 그래서 그의 집안에서 그를 바라보는 시선과 대비를 이룸으로써 웃음을 만든다. 아버지가 예능 PD가 된 백승찬을 검사, 의사처럼 자 직업이라며 프로듀사라 부르는 장면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PD라는 직업에 대한 편견을 깨준다. 폼생폼사 같지만 사실은 한없이 투명에 가까워지는 존재감이라니.

 

<프로듀사>는 사람들에게 웃음과 행복을 주기 위해 일하는 예능 PD라는 존재들이 실상은 얼마나 현실적인 삶을 살아가는 직업인들인가를 보여준다. 거기에 마치 도민준처럼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능력자는 없다. 김수현의 완벽한 변신이 주는 기대감은 그래서 이 <프로듀사>의 많은 이야기들을 담아내고 있다. 그들의 치열한 삶과 사랑의 이야기.

 

예능 드라마라는 기치에 걸맞게 <프로듀사>는 어깨에 힘을 많이 뺀 드라마다. 어찌 보면 예능적인 시트콤을 닮은 구석도 있다. 드라마 초반분에 <다큐3>의 카메라를 통해 예능국 전반의 일들을 하나하나 설명하는 장면들은 이 드라마에 꼭 필요한 밑그림이지만 어찌 보면 드라마 같지 않은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첫 회 후반부에서 느껴지는 관계의 서곡들은 박지은 작가표 로맨틱 코미디가 이 직업적 특성 위에 녹아날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한다.

 

그 중심에는 역시 김수현이 있다. 그가 도민준이라는 캐릭터를 내려놓고 한없이 가벼워지려 작정한 듯한 모습은 이 드라마가 가진 어깨에 힘을 뺀모습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그는 어쩌면 도민준이라는 조금은 무거워진 옷을 벗어내고픈 듯 보인다. 그런데 이 가벼워 보이는 접근방식 속에서도 진중한 메시지를 담아내는 방식이 바로 예능이라는 형식이 가진 특징이다. 예능 PD라는 겉보기엔 멋있어 보이지만 실상은 찌질하게 여겨지는 그 모습이 주는 가벼운 웃음의 잔 펀치들을 조금씩 맞다보면 어느 순간 진중한 울림 같은 것을 주지 않을까.

 

김수현은 더 이상 별에서 온 그대가 아니라 여기 이 땅에서 지지고 볶으며 살아가는 보통 사람이 되기를 원했다. 그런 작품으로서 <프로듀사>는 그에게는 맞춤이다. 예능 PD라는 직업에 대해 갖기 마련인 화려함이, 실상은 생활인의 땀이었다는 걸 보여주는 이 작품은 그래서 마치 모든 걸 갖고 태어난 듯 보이는 김수현이라는 별이 사실은 직업인의 한 사람으로서 치열한 노력을 하는 배우라는 걸 드러내주는 것처럼 보인다.

 

오랜만에 최강 라인업 세운 KBS

 

최근 KBS의 행보가 심상찮다. 한때 베끼기가 늘상 해오던 관행처럼 여겨지기도 했던 KBS이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번 금요일 밤의 라인업은 한 마디로 승부수라고 해도 될 만큼 공격적이다. <프로듀사><오렌지 마말레이드> 1,2회를 잇따라 연속 편성한 것이 그것이다.

 

'프로듀사(사진출처:KBS)'

이 두 프로그램은 과연 KBS의 프로그램이 맞는가가 의심될 정도로 새롭고 파격적이다. <프로듀사>는 예능 드라마라는 새로운 콘셉트로 접근해 만들어진 드라마다. 서수민 CP<별에서 온 그대>의 박지은 작가 그리고 표민수 PD가 힘을 합쳤고, 그 위에 김수현, 공효진, 차태현, 아이유라는 어벤져스급 캐스팅이 이뤄졌다.

 

예능 드라마라는 기치를 내세운 만큼 예능적인 웃음이 중심이 되면서도 예능 PD들의 리얼한 이야기들이 드라마틱하게 전개될 것이라고 한다. 최근 방송의 중심으로 점점 서고 있는 예능 PD들의 이야기는 다른 한편으로 보면 지금 현재 우리가 사는 세상의 변화를 에둘러 담아내는 것이기도 하다. 예능과 드라마, 그리고 재미와 의미가 결합하는 괜찮은 퓨전의 예감이 벌써부터 물씬 풍겨난다.

 

<오렌지 마말레이드>는 이미 웹툰 팬들에게는 그 제목만으로도 기대감을 만드는 드라마다. 워낙 큰 인기를 끈 원작 웹툰이 가진 존재감을 드라마로 풀어낸다는 것이 부담이 되기는 하지만, 여진구 같은 든든한 연기자가 서 있어 어떤 면에서는 <미생>처럼 웹툰 그 이상의 반응을 만들어낼 드라마가 될 것이라는 조심스런 예상도 나오고 있다.

 

뱀파이어와 사람이 공존하는 세상에서의 차별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낼 것이라는 이 드라마 역시 다양한 이질적 요소들을 결합해낸 퓨전 콘텐츠다. 당연히 판타지가 들어갈 수밖에 없고 그 위에 애절하면서도 달달한 사랑이야기가 얹어질 것으로 보인다. 시대적 배경도 조선에서부터 현재까지를 아우르고 있어 사극과 현대극을 넘나드는 다이내믹한 전개를 보일 것이라고 한다.

 

무엇보다 이 시간대에 이런 파격적인 승부수를 던질 수 있게 된 것은 KBS가 편성을 새롭게 꾸미면서 금요일 밤에 마련해 놓은 이른바 돌연변이존이 있었기 때문이다. 드라마든 예능이든 교양이든 그 때 그 때 맞춰 자유롭게 들어가게 만들어놓은 이 시간대가 있어 <오렌지 마말레이드> 같은 드라마가 금요일 밤에 연달아 세워질 수 있었던 것. 여기에 <프로듀사>는 예능과 드라마를 넘나드는 장르적 혼용을 갖고 있어 자연스럽게 그 앞 시간에 배치될 수 있었다.

 

이것은 최근 몇 년 동안 보기 힘든 KBS의 승부수가 아닐 수 없다. 금요일 밤 타 지상파와 케이블에 치이며 존재감을 좀체 보이지 못했던 KBS의 이런 행보는 지금까지와의 흐름과는 사뭇 이례적이라 주목된다. 과연 이 승부수는 좋은 결과를 맺을 수 있을까. 만일 이것이 괜찮은 성과로 이어진다면 그것은 KBS의 앞으로 전개될 행보에 꽤 괜찮은 영향을 미칠 수도 있을 것이다.

 

책 한 권으로도 제대로 놀 줄 아는 <1>

 

이젠 계획이 틀어져도, 책 한 권만 있어도 충분히 재밌을 수 있다? <12> 제주도편이 보여준 건 오히려 계획에서 틀어질 때 이 여행 버라이어티는 훨씬 더 재밌어진다는 것이었다. <12>은 본래 우리나라 최남단인 마라도가 최종 목적지였지만 풍랑 때문에 배를 탈 수 없게 되자 마라도가 멀리 보이는 하모 해수욕장에서 복불복을 했다.

 

'1박2일(사진출처:KBS)'

작년 갑작스런 기상악화로 섬에 들어가지 못했을 때 출연자들로부터 플랜 B가 없다고 비난받았던 제작진들은 나름 준비한 해녀복을 챙겨 입고 이른바 해녀 올림픽 3종 경기를 했다. 바람이 쌩쌩 부는 해수욕장에서 해녀복을 입은 출연자들은 코끼리코를 하고 달리기, 멀리 뛰기 그리고 바닷물에 살짝 앉아 손뼉으로 상대방 넘어뜨리기를 했다. 지극히 단순한 복불복이지만 해녀복을 챙겨 입은 출연자들은 그 모습만으로도 웃음을 주기에 충분했고, 바람 부는 해수욕장은 훌륭한 배경이 되어주었다.

 

이 날의 압권은 점심식사가 끝난 후 저녁 숙소를 놓고 벌인 낚시잡지로 하는 낚시(?) 복불복이었다. 어린 시절 누구나 한 번쯤은 해봤을 책 페이지를 넘겨 거기 나온 물고기수로 승패를 확인하는 이 복불복은 물고기 한 마리당 숙박비 5천 원을 두고 벌어졌다. 어찌 보면 어린 아이 장난 같은 이 복불복 게임은 그러나 의외의 팽팽한 긴장감과 반전으로 큰 웃음을 주었다.

 

차태현이 펼친 페이지에 구름처럼 몰려드는 자리돔떼가 나오자 낭패한 유호진 PD는 깜짝 놀라 쓰러졌고, 오히려 출연자들에게 봐달라며 가격을 흥정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책 페이지를 열어 확인하는 단순한 복불복은 실제 낚시보다 더 흥미진진해졌다. 특히 압권은 마지막 주자로 나선 정준영이 유호진 PD를 상대로 일종의 속임수 기술(?)을 쓴 것. 마치 엄청난 물고기떼 페이지를 연 것처럼 꾸며 5만 원을 받아냈지만 사실 페이지에는 물고기가 한 마리도 없었다.

 

낚시는 예능 프로그램의 금기 중 하나다. 그냥 생각하기에는 낚시만큼 드라마틱한 소재가 없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한없이 기다리는 게 대부분일 수밖에 없어 지루해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과거 <12>에서도 낚시를 소재로 한 적이 있었지만 정작 물고기를 잡는 것으로 재미를 만들지는 못했다. 낚시가 재밌을 수 있는 건 낚시TV 같은 곳에서 꽤 긴 시간을 할애해 전문가들이 투입됐을 때 이야기다. 버라이어티처럼 호흡이 짧은 형식에서는 그리 좋은 소재가 아니라는 것.

 

하지만 복불복으로 실내에서 펼쳐진 <12>의 잡지책 낚시는 그 어떤 낚시 소재의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발견하기 힘든 재미들이 쏟아졌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이 복불복이 낚시 그 자체에 집중하기보다는 출연자들과 제작진 사이의 밀고 당기는 게임에 더 집중했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힘든 숙소를 제공하려는 제작진과 어떻게든 좋은 숙소를 얻으려는 출연자들 사이의 팽팽한 대결구도가 만든 흥미진진함.

 

이제는 책 한 권으로도 충분히 재밌어지는 <12>은 그래서 지난 1년 간 얼마나 제자리를 잡았는가를 가늠할 수 있게 해준다. <12>은 물론 여행이 주요소재지만 재미의 백미는 출연자와 제작진 사이의 복불복 대결이다. 강하게 밀어붙이면서도 어딘지 정감이 가는 유호진 PD는 이제 출연자들과의 밀고 당기기를 해낼 수 있을 만큼 제대로 자신만의 캐릭터를 잡아가고 있다. 시즌3에 새롭게 투입된 김주혁, 정준영, 김준호도 마찬가지. <12>은 이제 계획에서 벗어나도 또 어떤 소소한 복불복을 해도 충분히 재미를 줄 수 있는 프로그램이 되었다.

 

입소문이 대세라면, <슬로우비디오>는 만만찮다

 

요즘 과도한 홍보는 오히려 독이 될 때가 많다. 과도한 홍보가 만들어낸 잔뜩 커진 기대감을 작품이 만족시켜주지 못할 때 그 실망감은 더 커지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차태현이 동체시력(남들은 볼 수 없는 찰나의 순간까지 보는 능력)을 가진 존재로 등장하는 <슬로우비디오>는 그 첫발을 잘 디딘 작품이라고 여겨진다.

 

사진출처:영화 <슬로우비디오>

MBC <라디오스타>에 출연한 차태현이 <슬로우비디오>의 김영탁 감독에게 천만 영화 죽어도 안 나올 거다라고 일종의 셀프 디스를 한 것은 어쩌면 대단히 적절했다고 여겨진다. <슬로우비디오>는 그의 말대로 대단히 빠른 속도로 이어지는 현란한 영화가 아니다. <라디오스타>에 차태현과 함께 나온 김영탁 감독이 자신은 돈 벌면 지루한 영화를 찍을 것이라는 얘기는 틀린 말이 아니다. <슬로우비디오>는 블록버스터들의 틈바구니에서 보면 지루한 영화처럼 보일 수도 있으니까.

 

물론 이 영화가 지루하다는 얘기는 아니다. <슬로우비디오>는 재미있다. 이것은 김영탁 감독이 말하는 지루한 영화라는 뜻이 진짜 지루하다는 것이 아니라, 익숙한 자극의 방정식 같은 영화에서 벗어난 새로운 재미를 추구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슬로우비디오>는 독특한 영화이고, 그러면서도 그 안에 충분히 대중적인 재미를 느낄 수 있는데다 나아가 사회적인 의미에서부터 감동까지 느낄 수 있는 영화다.

 

지나친 설레발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차태현이 출연해 입소문으로 대박을 터트렸던 <과속스캔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슬로우비디오>도 만일 그 입소문이 작용한다면 충분히 대중들에게 사랑받을 영화다.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로맨틱 코미디가 바탕으로 깔려 있고, 그 위에 휴먼드라마의 따스함이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좋은 것은 이것은 그저 사적인 로맨틱 코미디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의미와 삶의 본질까지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영화는 차태현의 시선을 따라 남상미와의 멜로 구도를 차근차근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편안한 로맨틱 코미디의 바탕 위에 감독이 가진 세상과 삶을 바라보는 시선을 덧칠해 놓았다.

 

CCTV라는 관찰 카메라의 시대에 차태현이 그려 넣는 동네와 사람들의 그림들은 영화 연출적으로도 참신하고, 그 자체로도 괜찮은 메시지를 던져준다. 주인공의 동체시력이라는 설정과 CCTV, 그리고 그림은 이 영화가 전체적으로 모든 곳을 카메라가 들여다보는 시대에 본다는 건 어떤 의미를 갖는가하는 꽤 중대한 질문을 던진다.

 

모든 것이 카메라를 통해서만 비춰지고, 그렇게 비춰진 것에 의해서만 의미를 갖는 전시가치의 시대에, 카메라 바깥으로 탈주하고 차츰 직접적인 관계를 통해 온기를 느끼게 되는 인물들의 이야기는 유쾌하면서도 따뜻함을 선사한다. 그 따뜻함은 거창한 것이 아닌 소소한 사람들의 마음과 마음이 움직이는데서 드러난다는 점에서 <슬로우비디오>의 세계가 얼마나 디테일의 감동을 포착하려 애쓰고 있는 지를 느낄 수 있다. 차태현의 동체시력은 어쩌면 그렇게 우리가 지나쳐버리는 세상의 기적 같은 순간들을 포착해내는 영화적 장치처럼 보이기도 한다.

 

차태현의 전작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슬로우비디오>는 그렇게 요란하지 않다. 마치 모든 영화가 천만영화가 되어야 할 것처럼 만들어지고 홍보되지만 <슬로우비디오>는 언감생심 천만을 외치지 않는다. 오히려 조용히 이 작지만 훈훈한 감동이 전해지는 느린 세계를 들여다보라고 속삭인다. <슬로우비디오>는 그 요란하지 않음이, 또 그 속삭임이 더 잔잔하면서도 먹먹함을 느끼게 해주는 그런 영화다. 이런 영화들이 더 많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천만영화같은 거창한 영화들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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