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의 세계’가 연 19금 드라마의 세계, 하지만 필요한 젠더 감수성

 

JTBC 금토드라마 <부부의 세계>는 우리네 드라마에 있어 각별한 의미를 가진 작품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19금 드라마라는 새로운 세계를 열었기 때문이다. 사실 국내에서 19금 콘텐츠는 마치 금기처럼 여겨진 면이 있다. 지상파 시절 콘텐츠들은 암묵적으로 ‘보편적 시청자들’을 겨냥해야 한다는 불문율이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19금 콘텐츠를 세우면 진입장벽이 생겨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런 사정은 지금도 여전하다. KBS에서 19금으로 시도됐던 <스탠드 업!> 같은 예능 프로그램은 호평에도 불구하고 1%(닐슨 코리아)대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다. 물론 이런 저조한 시청률이 19금 때문이라고만 말하긴 어렵지만 그래도 지상파 그것도 KBS 같은 공영방송에서의 19금은 진입장벽이 더 높게 느껴지는 건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부부의 세계>가 19금으로 18% 시청률을 6회 만에 훌쩍 넘겨버린 건 드라마업계에서는 사건이나 마찬가지다. 물론 7,8회가 15세 등급으로 낮춰지며 시청률이 20%를 돌파했지만 최근 JTBC측은 9회부터 끝까지 <부부의 세계>의 시청등급을 19세로 할 거라고 공식화했다.

 

이렇게 된 건 <부부의 세계>가 최근 인기만큼 불거진 논란이 한몫을 차지했다. 지선우(김희애)의 집에 전 남편인 이태오(박해준)의 사주를 받은 박인규(이학주)가 쇠파이프를 들고 유리창을 깬 후 난입하는 장면을 그 가해자의 시점으로 연출해낸 장면이 문제가 됐고, 손제혁(김영민)에게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한 20대 여성이 접근해 가방을 사주면 애인이 되겠다고 제안하고 실제로 그 여성과 호텔이 있는 장면이 논란이 됐다.

 

두 장면 모두 충분히 논란의 소지가 있을 수밖에 없는 장면들이다. 가해자의 시점을 담은 연출은 스릴러 등에서 가학적인 자극을 담기 위해 사용되는 연출이기도 하지만, 굳이 이 작품에서까지 그렇게 연출할 필요가 있었을까 싶다. 오히려 지선우의 역공을 그려내기 위한 사전 전제로 담은 폭력 장면이었다면 오히려 피해자의 시선에서 담는 게 더 효과적일 수도 있었다.

 

또 손제혁이 또다시 벌이는 외도는 이 쇼윈도 부부의 실체를 드러내고, 비뚤어진 성의식을 가진 남성을 그려내려는 의도가 있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 과정을 굳이 가방 운운하며 돈을 주면 성을 살 수 있다는 식으로 그려낼 필요는 없었을 게다.

 

그런데 왜 <부부의 세계>는 이런 논란이 될 만한 장면들을 사전에 거르지 못했던 걸까. 많은 이들이 비판하듯 그것은 젠더 감수성의 부족에서 나온 것일 수 있지만, 또한 해외의 19금 드라마들과 우리네 드라마 사이에 놓여진 괴리감이 작용한 부분도 있다. 19금 드라마가 이제 이런 보편적인 시청률을 내고 있다는 사실은 최근 넷플릭스 같은 OTT를 통해 우리네 성인 시청자들도 해외의 19금 드라마가 익숙해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해외의 19금 드라마들은 훨씬 더 자극적인 설정들이 많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작에 있어 어떤 표현의 제한을 요구하기보다는 그 작품에 그런 불편한 요소들이 있다는 걸 사전고지하고 그래서 19금 콘텐츠라는 걸 분명히 하는 방식을 취한다. 우리에게도 어쩌면 이제 보다 분명한 19금 드라마라는 고지와 그 드라마에는 구체적으로 작품의 내용상 젠더 감수성에 비춰 불편한 장면들도 들어가 있으니 주의를 요한다는 식의 사전 고지가 필요해진 게 아닐까 싶다.

 

이제 19금 콘텐츠는 더 이상 피할 게 아니라 콘텐츠의 상상력이나 창작적인 영역 확장의 의미로서 보다 적극적으로 다뤄져야 하는 영역이 되고 있다. 중요한 건 안전장치들이다. 19금 드라마가 담는 파격과 부딪칠 수 있는 젠더 감수성을 충분히 사전고지하고, 그 문제들을 그저 수용하는 게 아니라 비판적으로 수용할 수 있게 해주는 작업들은 이제 우리네 드라마에서도 중요한 선결작업으로 대두되고 있다.(사진:JTBC)

유아인, ‘시카고 타자기’라는 현실과 판타지의 미로를 읽는 법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판타지인가. 또 무엇이 소설이고 무엇이 현실인가. tvN 금토드라마 <시카고 타자기>는 그 모호한 경계 사이에 놓여 있다. 슬럼프에 빠진 베스트셀러 작가 한세주(유아인), 어느 날 시카고에서 보게 된 미스터리한 느낌을 주는 타자기, 그 타자기를 배달하며 그와 가까워진 전설(임수정) 그리고 슬럼프에 빠진 그에게 전속출판사 대표 갈지석(조우진)이 은근히 제시한 유령작가 유진오(고경표). 이들의 이야기는 현실과 판타지 사이에 걸쳐 있어 모호한 느낌을 준다. 

'시카고 타자기(사진출처:tvN)'

슬럼프에 글이 써지지 않는 한세주가 마감 스트레스에 차를 몰고 나왔다가 사고를 당하고, 그를 마침 전설이 구해주는 이야기는 현실적인 느낌이 별로 없다. 그런 큰 사고를 당하고도 살아있는 게 놀라운 데 마침 그 시각에 하필이면 아버지 기일에 맞춰 별장을 찾은 전설이 그를 발견해 구해내는 것도 지나친 우연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그러고 보면 한세주의 첫 번째 팬이었던 전설이 그 미스터리한 타자기를 다름 아닌 한세주에게 직접 배달하게 되는 상황도 우연이다. 문을 열어주지 않는 한세주의 집 앞에서 커다란 개를 만나고 그 개로 인해 그의 집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전설의 이야기 역시 개연성이 아닌 우연적인 사건이다. 

드라마는 이런 우연적 사건들을 계속해서 터트리면서 코미디를 통해 그 우연을 봉합하려 한다. 즉 전설이 한세주의 집으로 들어가게 되는 시퀀스는 개가 소설파일이 있는 USB를 먹는 상황이 만드는 왁자지껄하고 과장된 코미디로 처리되어 있다. 또 자동차 사고를 당한 한세주를 전설이 구해내는 장면 역시 영화 <미저리>의 패러디를 덧씌워 우스운 장면들로 연출된다. 

이런 우연적 사건들의 반복은 그 비현실성 때문에 그것이 실제로 벌어진 현실인지 아니면 한세주의 판타지거나 상상 혹은 환상인지를 의심하게 만든다. 즉 한세주와 전설 사이에 계속 벌어지는 우연은 마치 오래 전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엮어진 운명처럼도 이해될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슬럼프에 빠져 정상적인 상태가 아닌 작가 한세주의 환상이나 판타지처럼도 보인다. 

유령작가 유진오의 등장 또한 마찬가지다. 사고를 당해 마감을 할 수 없었던 한세주 대신 유진오가 ‘시카고 타자기’의 첫 회 소설을 내보내지만 한세주는 그것이 자신이 쓴 것이고 자신은 잠시 단기기억상실을 겪은 것이라 합리화한다. 물론 갈지석이 유령작가 이야기를 운운한 건 맞지만 그것이 실제 유진오를 지칭하는 것인지도 모호하다. 결국 한세주는 자신이 집을 비운 사이 그 의문의 타자기로 소설을 쓰고 있는 유진오를 마주하게 된다. 그런데 그것 역시 실제인지 아니면 한세주의 환상인지가 애매하다. 

그것은 한세주가 문득 문득 보게 되는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전설과 유진오가 엮어가는 어떤 사건들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진짜 한세주와 전설 그리고 유진오가 과거부터 엮어진 어떤 운명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한세주의 환상이며 그가 지금 쓰고 있는 ‘시카고 타자기’의 소설 내용일 수도 있다. 

이런 현실과 환상 사이의 애매함은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안개처럼 시청자들의 시야를 가린다. 시청자들은 그 안개 속에서 호기심을 느끼며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상인가를 궁금해 하지만, 동시에 그 낯선 이야기의 미로 속에서 머리가 복잡해질 수도 있다. 이것은 <시카고 타자기>가 가진 신선함이면서 동시에 대중성의 한계로 지목된다. 

사실 이 안개 같은 흐릿한 미로의 끝이 어디로 갈지 전혀 종을 잡기가 어려운 드라마가 바로 <시카고 타자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애매모호한 걸음을 앞으로 나가게 하는 건 다름 아닌 한세주라는 인물과 그를 연기하는 유아인이라는 배우의 몰입 덕분이다. 사실 논리적으로 접근해 해석해보려 하면 이 드라마는 한없이 복잡한 미로를 들이밀지만, 한세주라는 캐릭터가 가진 심리적인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면 그리 어렵지 않게 이 길을 걸어 나갈 수 있다. 

그가 갖고 있는 자존심과 막막함 그리고 창작에서 오는 극심한 스트레스와 그럼에도 창작자이기에 어디서든 튀어나오는 뮤즈 같은 창작의 단초들. 그런 의식의 흐름들은 현실과 환상 사이에 걸쳐져 있지만 그래도 한세주라는 인물에게는 모든 것이 당장 눈앞에 닥친 현실일 수 있으니.

작가, 캐릭터, 독자, 작품은 누구의 것인가

 

작품은 진정 작가의 것인가. 몇 십 년 전만 해도 질문거리가 되지도 않을 질문이다. 하지만 이 질문은 지금 현재 예술의 영역에서 제기되고 있는 중요한 물음이 되고 있다. 작품은 당연히 작가가 쓰는 것이라며 저자에게 신적 지위를 주던 시대는 조금씩 저물고 있다. 작가가 써낸 작품은 어떤 의미로는 작품의 내적인 동인에 의해(개연성 같은) 움직인다. 그리고 독자들의 욕망에 영향을 받는다. 이제 독자들의 요구는 작품의 방향을 바꾸기도 한다.

 

"W(사진출처:MBC)'

또 작가가 애초에 써낸 작품도 온전히 작가의 창작이라고 말하기도 어렵게 되었다. 무수히 많은 참조들과 정보들이 거기에 전제되었기 때문이다. 최근 드라마 제작에서 점점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집단 창작으로 들어가면 저자의 개념은 애매모호해진다. 누가 어떤 아이디어를 내고 썼는가가 불투명해지기 때문이다.

 

MBC 수목드라마 <W>는 이렇게 변화해가고 있는 창작 방식을 염두에 두고 보면 대단히 흥미로운 작품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만화 속 주인공이 현실로 뛰쳐나오고, 현실의 인물이 만화 속으로 끌려 들어가는 판타지는 그 상상만으로도 흥미롭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흥미진진해지는 대목은 이 작품이 이 시대의 저자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지점이다. 오성무(김의성)는 만화 속 주인공인 강철(이종석)을 탄생시킨 저자지만, 그는 마음대로 강철을 죽이고 살릴 수가 없는 위치에 서 있다.

 

오히려 강철은 현실 속으로 걸어 나와 오성무에게 총을 들이대고 결국 쏴버린다. 물론 오성무는 죽지 않고 살아남지만 그 장면이 표징하는 건 저자의 죽음이다. 오성무는 강철에게 너는 허구일 뿐이라고 말하지만 그 허구가 그를 사경으로까지 이끌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얼마나 의미심장한가.

 

강철이 대사를 통해 자주 언급하는 단어가 맥락이다. 그는 극중 주인공으로서 그 ‘W’의 세계가 맥락 있는 개연성의 법칙에 의해 움직이기를 원한다. 즉 오성무 같은 저자가 그를 탄생시켰지만 강철은 그 세계 안에서 함부로 휘둘리기보다는 그 개연성의 법칙을 믿고 자유의지로 살아가려 한다. 그런 그에게 오성무가 자의적으로 내리려는 죽음에 그는 저항한다.

 

이것은 저자라고 해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이 캐릭터와 이야기 전개라는 걸 잘 말해준다. 흔히 말해 막장드라마에서 어느 날 갑자기 인물이 TV 개그 프로그램을 보고 웃다가 죽는다는 건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다. 그러니 그렇게 했다간 작품을 망가뜨리게 되고 나아가 시청자들의 비난에 직면할 수 있다.

 

이런 문제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부분은 엔딩이다. <지붕 뚫고 하이킥>의 엔딩 논란이 첨예화됐던 사건은 이 관점에서 보면 저자의 의도와 시청자의 욕망이 부딪친 결과로 읽어낼 수 있다. <W>에서 강철이 저자인 오성무에게 총을 쏘고 스스로 한강에서 투신하는 걸로 결말을 내는 일은 그래서 독자들의 욕망과는 어긋나는 일이다.

 

지금은 심지어 시청자(혹은 독자)의 요구에 의해 결말이 바뀌는 게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W>의 오연주(한효주)이 의미하는 게 그 장면 그대로 멈춰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 후로 결말에 맞게 진행되는 것인지에 의문을 갖는 장면은, 영향력 있는 독자의 욕망이 을 지워버리고 계속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게 된 작금의 달라진 상황을 슬그머니 말해준다. 애초에 16부작이던 드라마가 20부작이 되기도 하는 건 이제 흔한 일이 아닌가. 오연주의 욕망(독자의 욕망)은 그렇게 다시 강철을 살려냄으로써 이야기를 계속 이어간다.

 

그리고 이 오연주의 욕망은 <W> 시청자들의 욕망이기도 하다. 남자 주인공인 강철의 죽음은 더 이상 오연주와의 달콤한 로맨스도 또 과거 온 가족이 몰살당한 사건의 미스테리를 풀어나가는 즐거움도 사라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연주의 욕망을 <W> 시청자들은 기꺼이 받아들인다. 그것이 끝을 계속으로 만들고, 심지어 죽은 자를 살려내는 일이라 할지라도. 즉 이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도 웹툰에서 새드엔딩을 맞은 강철을 되살리려는 오연주와 같은 입장을 공유한다는 것이다.

 

<W>는 웹툰이라는 가상과 현실의 두 세계를 넘나드는 판타지를 담고 있지만, 그 밑바탕에는 작품에 대한 작가와 캐릭터 그리고 독자 사이에 벌어지는 첨예한 욕망의 대립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저자의 위치가 달라지고 있는 현 시대의 변화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재미 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여겨진다. 이것은 또한 이 만화 같은 이야기가 허무맹랑하지 않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이기도 하다

무수한 장르와 설정의 결합, <별그대>의 명암

 

3회 만에 20%에 육박하는 시청률. 하지만 첫 회 만에 생긴 표절 논란. <별에서 온 그대>는 놀라운 성과와 동시에 논란이 야기된 흔치 않은 결과를 갖게 됐다. 어째서 이런 상반된 결과가 동시에 벌어진 것일까.

 

'별에서 온 그대(사진출처:SBS)'

우선 인정해야 할 것은 이 작품이 분명 꽤 괜찮은 완성도와 화제성을 갖고 있다는 것일 게다. 표절 논란이 제기되는 건 대부분 그 작품이 성공작이었을 때가 많다. 상식적인 얘기지만 굳이 실패작에 표절 논란을 제기하는 작가는 흔치 않을 것이다.

 

<별에서 온 그대>의 완성도는 무수히 많은 장르와 설정들을 한 작품으로 통합하면서 그다지 어색하지 않고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드라마가 흘러간다는 점이다. 먼저 톱스타 연예인이라는 소재가 대중들의 시선을 잡아끄는데다, 여기에 외계에서 온 특별한 능력을 가진 꽃미남이 더해지니 금상첨화다.

 

물론 톱스타 연예인에 대해 지금의 대중들은 신비감을 잃은 지 오래다. 오히려 인간적이고 털털한 모습을 통해 톱스타의 매력을 재발견하는 시대가 아닌가. 그러니 이 드라마에서 천송이(전지현)는 예쁘지만 무식하고 싸가지 없는 여배우다. 대신 신비감은 외계에서 온 도민준(김수현)이 갖고 있다. 그는 천송이가 짧은 순간이었지만 굉장히 신비스러우면서도 다정한 느낌이라 말한 것처럼 초능력을 가진 신비로운 존재이고 대단히 이지적인 꽃미남이다.

 

털털한 연예인과 신비로운 외계인의 병치는 이 드라마의 독특한 힘을 만들어낸다. 무개념처럼 보이지만 가끔씩 진심을 드러내는 여배우 천송이는 전생과 현생에 모두 죽을 위기에 몰리고 그 때마다 초능력을 가진 존재, 도민준은 남몰래 그녀를 구한다. 그녀만을 위한 슈퍼히어로, 시공을 초월한 운명적인 사랑이야기. 이것이 연예인과 외계인의 전 우주적인 멜로를 강력하게 만드는 이유다.

 

하지만 이러한 연예인 소재의 로맨틱 코미디와 불사의 존재가 만들어내는 판타지와 비극적인 사랑이야기가 한 드라마로 이종결합하면서 너무 많은 장르와 유사한 설정들이 들어가게 된 것도 사실이다. 판타지와 사극과 로맨틱 코미디와 미스테리, 심지어는 범죄 스릴러 장르까지 우리는 이 드라마 한 편에서 발견할 수 있다.

 

게다가 이 특별한 이야기들의 모티브를 발견할 수 있는 많은 작품들의 흔적이 보이기도 한다. 이를테면 불사의 운명적인 사랑 이야기는 <하이랜더> 같은 작품이 떠오르고, 불로불사의 존재로서 다시 깨어나 똑같은 인연을 이어가는 이야기는 <진용> 같은 작품을 떠올리게 한다. 물론 연예인 소재의 로맨틱 코미디류는 굳이 찾아보려면 너무나 많아 하나하나 열거하기 힘들 정도다.

 

강경옥 작가는 표절의 근거로, 같은 역사적 사건 인용(광해군 일기), 불로, 외계인, (타액)로 인한 변화, 환생, 같은 얼굴의 전생의 인연 찾기, 전생의 인연이 연예인, 톱스타 같은 8가지 클리쉐가 동시에 나온다는 점을 제시했다. 아마도 위에서 열거한 각각의 클리쉐들은 말 그대로 다른 작품들에서 너무 많이 사용됐던 것들이다. 하지만 자신의 작품에서 사용됐던 그 클리쉐들이 다른 작품 속에서 비슷한 설정으로 공존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실로 표절이냐 아니냐를 판정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클리쉐는 마치 장르나 관습처럼 누구나 작품을 쓰면서 활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교롭게도 그것이 한 작품에 비슷하게 들어있다는 건 찜찜함을 남긴다. 최근 창작이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유에서 유를 창조하는 즉 이종결합과 융복합 혹은 구성에 의해 이뤄진다는 점은 앞으로 표절 논란이 콘텐츠 분야에서 얼마나 첨예해질 것인가를 짐작케 한다.

 

<별에서 온 그대>가 시청률의 성공과 표절 논란을 동시에 갖게 된 것은 이 작품이 현재의 창작방식이 가진 다양한 장르의 이종결합을 과할 정도로 잘 수행해내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것이 의도적인 표절인지 아니면 장르 이종결합의 과정에서 발생한 우연적 결과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작품이 향후 콘텐츠 창작의 애매모호한 경계 사이에서 벌어질 표절 논란의 한 징후를 보여주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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