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 명쾌한 고구마도 사이다도 드러내지 않는 이유

이 드라마는 마치 <그것이 알고 싶다> 같다. 민영화 되면서 돈벌이가 되어가는 의료계의 어두운 그림자를 다차원적인 각도로 파고 들어가는 이야기. <라이프>가 그 전면에 내세운 인물은 구승효(조승우) 사장과 예진우(이동욱) 응급의료센터 전문의다. 

왜 하필 사장과 응급실 전문의를 대립시켰는가 하는 점은 그것이 병원을 바라보는 갈라진 두 관점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사장은 병원도 기업체나 다름없다 여기며 수익을 내기 위해 경영을 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필요하다면 수익을 낼 수 없는 응급실을 빈껍데기로만 남겨놓더라도. 반면 응급실 전문의는 갑자기 실려 온 환자들을 보며 만일 응급실이 사라진다면 그들은 어떻게 될까를 질문한다. 다른 병원으로 이송하는 과정에서 위급한 상황을 맞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구승효 사장은 지역 병원을 돕는다는 명분을 내세워 적자에 시달리고 있는 상국대학병원의 응급실, 산부인과, 소아과를 그 곳으로 파견근무 보내려 한다. 의사들이 전부 반발하고 나서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응급실이 사라지는 것에 대해 이상엽(엄효섭) 암 센터장은 내심 기꺼운 마음이 있다. 그건 응급실에서 올라오는 ‘가망 없는 환자들’을 받는 일이 그들에게도 부담으로 작용해왔기 때문이다. 반면 장민기(최광일) 장기이식센터장은 정반대다. 응급실이 없다면 뇌사자를 받아 장기 이식을 할 수 있는 기회가 그만큼 줄어들기 때문이다. 

즉 자본주의 논리로 병원의 경영을 정상화하자는 사장과 맞서 ‘의사’로서의 자존심과 본분을 지킨다는 대의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 각자의 입장에 따른 이해득실을 고민하는 중이다. 선우창(태인호) 장기 이식 코디네이터는 아예 사장의 편에서 일한다. 해당 3과가 모여 파업 논의를 할 때 그는 그 회의내용을 전화로 사장이 들을 수 있게 해준다. 

김태상 부원장(문성근)은 그 속내를 알 수 없는 인물이다. 어딘가 이보훈(천호진) 병원장의 죽음과 연관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인물은 의사들끼리의 회의에서는 파업을 내세우더니, 사장에게는 어쩔 수 없이 파업이 결정된 것처럼 말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갈 것이라 말하며 은근히 자신의 존재감을 내세우려 한다.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하려 함이다. 그 회의내용을 다 들은 사장은 그 속내마저 꿰고 있지만.

물론 <라이프>에도 죽은 이보훈 병원장과 가까웠던 예진우와 주경문(유재명) 흉부외과 센터장 같은 대의를 따르는 인물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구승효 사장이라는 외부의 충격에 의해 저마다의 욕망에 따라 꿈틀대기 시작하는 이 병원의 여러 인간군상의 모습이 사실은 이 드라마가 보여주려는 이야기처럼 보인다. 대의와 현실의 싸움이지만, 그 사이에 끼어 있는 많은 인물들의 선택들이 이 싸움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 오리무중으로 만들어 이야기를 더 흥미진진하게 만든다. 

그런데 이 병원에서 벌어지는 대립과 그 사이의 많은 선택들로 인해 만들어지는 결과들은 마치 우리네 사회가 굴러가는 그 구조들을 입체적으로 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사회의 현상들을 극단적인 생각들이 부딪치고 그래서 어느 한쪽이 이기고 지는 것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은 그 중간 어디쯤을 선택하는 많은 보이지 않는 다수들의 욕망이 움직이면서 그 많은 결과들이 나온다는 이야기다. 

<라이프>의 이야기는 명쾌한 고구마나 사이다만을 던져주지 않는다. 그것은 판타지 드라마에서나 가능한 일이니 말이다. 현실은 훨씬 더 복잡하다. 그 복잡한 양상들을 단순화하지 않고 입체적으로 보여준다는 것. 그래서 <라이프>는 지금 우리네 드라마들이 늘 명쾌하게만 접근했던 그 틀에 박힌 방식을 깨나가고 있다. 그걸 깨야 비로소 판타지가 아닌 현실이 보이기 때문이다. 마치 <그것이 알고 싶다>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사진:JTBC)

자존감과 배려를 더한 ‘김비서’의 신데렐라 판타지

엔딩까지 완벽한 판타지다. 그 흔한 결혼 반대하는 재벌가 엄마도 없다. 또 재벌가와의 화려한 결혼에 대한 노골적인 신데렐라도 없다. 하지만 시청자들이 본 것은 재벌가의 아들이지만 가진 것을 권력 삼지 않고, 서민들과도 잘 어우러지며, 무엇보다 배려심이 많은 새로운 왕자님이었고, 남자를 누구보다 잘 챙겨주고 예쁘고 귀여우면서도 똑부러지게 자기주장은 하는 새로운 신데렐라다. 현실에는 존재할 수 없을 것 같은 새로운 왕자님과 신데렐라의 로맨틱 코미디. 도대체 뻔하고 위험해보이기까지 했던 tvN 수목드라마 <김비서가 왜 그럴까>의 무엇이 이토록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걸까.

이영준 부회장(박서준)의 엄마인 최여사(김혜옥)는 저 JTBC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의 결혼 반대하던 속물 엄마 김미연(길혜연)과 너무나 비교된다. 좀 더 나은 집안과 결혼시키기 위해 모진 짓까지 서슴지 않던 속물 엄마. 너무 지나쳐서 세상에 저런 엄마들이 요즘 어디 있냐는 비판까지 나왔던 캐릭터지만, 아마도 현실의 엄마들을 상당부분 반영한 부분이 있을 게다. 그 엄마와 비교하면 최여사와 그 재벌집안 사람들은 놀라울 정도로 김미소(박민영)네 가족들을 챙기고 배려한다. 

그것은 현실에서는 일어나기 어려운 판타지지만 서민들 입장에서는 보고픈 판타지이기도 하다. 그런데 세간에서부터 혼수까지 모두를 최여사가 하겠다고 하자 김미소는 갑자기 “이런 식으로는 결혼 못하겠다”고 말한다. 지나친 배려와 선물이 부담이 된다는 것. 그러자 최여사는 오히려 김미소에게 사과한다. 자신이 김미소를 아끼는 마음이 커 마음이 앞서갔다는 것. 혼수까지 다 챙겨주는 시어머니와 그럼에도 자존심을 챙기는 며느리. 물질적 욕망은 물론 정신적 자존감까지 채워주는 판타지다.

최여사가 김미소와 옷을 사러가는 장면에서도 이런 물질적 욕망과 정신적 자존감을 동시에 채워주는 판타지가 등장한다. 옷과 신발과 가방을 사주겠다며 고르라는 재벌가 시어머니가 거기 있는 걸 다 싸달라고 말하는 대목은 물질적 욕망에 대한 판타지를 담고 있고, 그것이 못내 부담스러워 하나만 있으면 된다고 말하는 김미소에게서는 자존감에 대한 판타지가 들어 있다. 결국 <김비서가 왜 그럴까>가 그토록 선전한 건, 단순한 물질적 욕망만을 담은 신데렐라 이야기가 아니라, 정신적 자존감까지 채워 당당한 모습으로 사랑까지 쟁취하는 지금의 대중들이 가진 판타지를 건드렸기 때문이다. 

이것이 가능해진 건 어찌 보면 불가능할 것 같은 그 두 욕망을 채워줄 수 있는 이영준이라는 캐릭터가 있어서다. 그는 재벌가의 부회장으로서 일에 있어서 완벽한 일처리를 보여주는 사업가지만, 연애에 있어서는 오랜 시간동안 김미소만을 바라보며 살아왔던 숙맥 순애보의 주인공이다. 게다가 어린 시절부터 남다른 배려심을 가진 인물이기도 했다. 그래서 완벽한 자신에 빠지는 자아도취적인 모습을 보여주지만 그게 위화감을 주기보다는 우습게 다가온다. 웹툰에서나 나올 법한 캐릭터지만, 시청자들이 막연히 상상하고픈 그런 인물. 배려심 깊은 왕자님.

또한 김미소라는 캐릭터도 마찬가지다. 비서로서 부회장을 완벽하게 보필하며 일적으로 성취를 이루면서도 동시에 부회장과의 로맨스까지 쟁취하는 인물이다. 자존감 강한 신데렐라. <김비서가 왜 그럴까>는 그래서 단순한 로맨틱 코미디를 가져와 전형적인 신데렐라와 왕자님의 이야기를 담았지만 그러면서도 지키고 싶은 자존감과 타인에 대한 배려심을 더했다. 현실에 부재하기 때문에 오히려 커진 그 완벽한 판타지는 그래서 시청자들의 마음을 잡아끌 수밖에 없었다. 권위와 추종이 쏙 빠진 새로운 신데렐라 판타지다.(사진:tvN)

‘미스 함무라비’의 고구마와 ‘무법변호사’의 사이다

대중들은 <무법변호사>를 꿈꾸지만 현실은 <미스 함무라비>다? 두 드라마 모두 법 정의를 다루고 있지만 다루는 방식은 너무나 다르다. JTBC <미스 함무라비>가 그리는 세계는 너무나 현실적이라 답답하고 암담할 정도다. 반면 tvN <무법변호사>는 저런 일이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판타지에 가깝지만 시청자들은 통쾌함을 느낀다. 

<미스 함무라비>의 박차오름(고아라)은 바로 그 법 현실의 절망감을 잘 드러내는 캐릭터다. 정의를 꿈꾸며 판사가 되었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다. 법원 내에서 부정한 청탁을 받은 부장을 지적한 문제는 그를 ‘내부고발자’로 찍히게 만들어 사실상 왕따를 당하게 만든다. 판사라면 피해자를 구제하고 가해자를 심판하는 게 당연할 줄 알았지만 법 현실은 오히려 거꾸로 적용되기도 한다. 회사 내 성추행 사건으로 부당해고 당한 피해자가 낸 소송에서 회사 측의 잘못이 명백히 보여도 법의 차원에서 피해자를 도울 수 없다는 걸 확인한 박차오름은 분노와 자괴감에 눈물을 흘린다.

물론 <미스 함무라비> 역시 이렇게 답답한 법 현실을 뒤집고픈 욕망을 담고 있다. 그것은 이 드라마의 제목이 <미스 함무라비>인 이유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대변되는 함무라비 법전의 정의 구현 방식을 꿈꾸는 것. 박차오름이라는 다소 비현실적인 캐릭터를 만들어 놓은 건 그래서다. 하지만 그 역시 이 갑갑한 현실을 마주하고는 절망한다. 정의를 꿈꾸었지만 법은 결국 가진 자들에 의해 이용되는 현실을 보면서, 차라리 복수가 나을 것 같은 심정을 갖게 된다. 

‘미스 함무라비’로서의 박차오름이라는 판타지 캐릭터를 세우면서도 드라마가 현실을 벗어나는 이야기를 할 수 없게 된 건 작가가 현직 판사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게다. 너무나 깊게 법 현실의 문제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섣부른 판타지를 담는 것이 얼마나 허황된 일인가를 이 드라마의 작가인 문유석 판사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미스 함무라비>는 어떤 시원한 결말을 보여주기보다는 사회가 함께 고민해야할 질문을 던진다. 이를테면 본드를 하는 청소년들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해결해주지는 못하지만 그들이 왜 그렇게 하게 되었는가를 파고 들어가 그들을 위해 우리가 어떤 노력을 할 수 있는가를 질문하는 식이다. 

반면 <무법변호사>는 <미스 함무라비>와는 완전히 다른 판타지를 그린다. 공간 자체도 기성시라는 가상도시이고, 그 곳에서 법을 쥐고 흔드는 차문숙(이혜영)이라는 적폐 권력을 하나씩 무너뜨려가는 과정을 담았다. 이야기는 <무법변호사>가 아니라 <무협변호사>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전형적인 복수극에 액션 장르로 그려진다. 현실성을 찾기가 쉽지 않고, 이야기도 촘촘하지 않아 개연성이 흔들리는 면이 있지만, 그래도 시원함을 안겨주는 단순한 재미는 분명히 존재한다. 워낙 악당들이 제대로 서 있기 때문에 그들을 무너뜨릴 봉상필(이준기)의 활약이 기대되고, 실제로 그 기대는 이뤄질 것이기 때문이다. 

똑같이 법 현실을 다루고 있지만, 암담한 현실을 보여주며 문제제기를 하는 <미스 함무라비>와 비현실을 통해서라도 시원한 판타지를 담아내려 하는 <무법변호사>. 시청자들은 어느 쪽에 손을 들어주고 있을까. 시청률로만 판단할 수는 없겠지만 <미스 함무라비>가 3%(닐슨 코리아)대 시청률로 떨어진 반면, <무법변호사>가 7%를 돌파하게 된 건 두 드라마가 법 현실을 다루는 방식의 차이에서 비롯된 영향이 있다고 보인다. 현실과 판타지 사이에서 판타지에 더 이끌리고 있다는 것.

하지만 이건 시청률의 차원일 뿐이다. 완성도로 보면 <미스 함무라비>만큼 현실을 실감나게 담아낸 드라마가 있을까. 일시적인 카타르시스를 주는 사이다보다는, 두고두고 생각할 여지를 남기는 고구마가 때론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대목이다.(사진:JTBC)

‘김비서’의 갑을 뒤집기, 뻔해 보이지만 확실히 다르다

tvN 수목드라마 <김비서가 왜 그럴까>의 상승세가 예사롭지 않다. 사실 조금은 뻔한 드라마처럼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다. 비서와 부회장 사이의 로맨스는 어찌 보면 전형적인 신데렐라 코드를 그대로 가져온 것처럼 보이니 말이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니 이 드라마가 이토록 상승세를 타고 있는 이유들이 보인다. 그건 뻔해 보이는 구도를 완전히 뒤틀어 놓은 바로 그 발랄한 판타지에 있다. 보통의 신데렐라 코드라면 비서인 김미소(박민영)가 부회장인 이영준(박서준)의 밀당에 휘둘리기 마련이지만, 이 드라마는 거꾸로 되어 있다. 부나 지위에 있어 권력을 쥐고 있는 이영준이지만, ‘연애고자’인 그는 오히려 김미소 앞에서 어쩔 줄을 몰라 한다. 

갑자기 비서직을 그만두겠다고 선언하는 순간부터 이영준 부회장과 김미소 비서 사이의 권력 구도가 깨져버렸다는 사실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회사 내 상하 관계 속에서 시키면 할 수밖에 없는 게 회사원들이 처지지만, 사표를 던진다는 건 그 관계를 무화시킨다는 의미다. 그래서 샐러리맨들은 늘 안주머니에 사직서를 넣고 다닌다고 하지 않던가. 

직장 내 상하관계에 균열을 낸 순간부터 시작되는 건 ‘사적인 관계’다. 그래서 이영준이 앞장 서 걸으면 김미소가 뒤 따라 걷던 그 걸음걸이가, 사적인 관계가 틈입하면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는 장면이 들어가는 건 우연이 아니다. 수직적 관계에서 수평적 관계로, 또 직장 내 관계에서 사적인 관계로의 변화 속에서 벌어지는 갑을 뒤집기는 그래서 흥미진진해진다. 

그런데 영원히 부회장으로의 삶만을 살아왔을 것 같은 이영준은 ‘사적인 관계’에서 무능력자나 마찬가지다. 하다못해 넥타이 하나를 제 스스로 매본 적이 별로 없는 그가 아닌가. 맛집을 찾아가 알콩달콩 시간을 보내는 일 따위는 해본 적이 없다. 그래서 고작 한다는 수작(?)이 통째로 놀이공원을 빌리고 레스토랑을 빌리는 따위의 자기도취적 행동들이다. 

외국에서 돌아온 그의 형 이성연(이태환)이 김미소에게 접근하는 것처럼 보이자 그를 밀어내고 김미소에게 화를 내는 이영준의 모습은 확실히 연애 경험 없는 아이 같은 행동들이다. 그렇게 해놓고 냉담해진 김미소 앞에 어쩔 줄 몰라 하며 어떻게 하면 사과할 수 있는가를 친구 박유식(강기영)에게 묻는 대목은 그래서 묘한 카타르시스를 만들어낸다. 

늘 비서로서 김미소가 해왔던 레스토랑 예약을 이영준 부회장이 직접 하거나, 엘리베이터 안에서 뒤쪽에 서 있는 김미소와 나란히 서기 위해 한 발 뒤로 물러나거나, 무엇보다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미안했다”고 다른 이도 아닌 김미소에게 사과를 하는 모습은 그래서 상하관계가 깨지고 두 사람이 그저 사적인 존재인 남녀로서 연인관계로 발전하는 과정을 담는다. 

김비서보다는 ‘김미소’로 살고 싶다는 그 메시지는 그래서 사랑에 있어서도 비서와 부회장이라는 상하관계를 깨는 신데렐라 판타지가 아니라, 작아도 온전한 자신으로서의 행복을 추구하려는 이 드라마의 욕망을 담아낸다. 그깟 돈과 지위 따위가 진짜 나 자신의 행복을 채워주지는 않는다는 김미소의 당당함은 아마도 과거의 신데렐라 판타지와는 다른 지금의 대중들이 갖게 되는 새로운 판타지가 아닐까. <김비서가 왜 그럴까>라는 드라마의 멜로 판타지가 다르게 느껴지는 이유다.(사진: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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