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의 셰프’, 셰프 임윤아, 폭군 이채민도 시청자도 사로잡았다

폭군의 셰프

‘이 식감 이 맛은 생전 처음 느껴보는 맛.’ ‘고기가 씹히는 게 아니라 녹네..’ ‘입안 가득 담기는 육즙과 이 양념 맛은 대체 뭐란 말인가.’ 먹어보지도 않고 고기 몇 점 올라온 소반의 음식을 보고 대접이 소홀하다는 둥 일부러 트집을 잡는 채홍사 부자 임송재(오의식)와 임서홍(남경읍)은 일단 먹어보고 평가해달라는 연지영(임윤아)의 제안을 받아들여 한 점 고기를 입에 넣고는 그 맛에 절로 눈이 커진다. 

 

<대장금> 같은 사극 배경에 쿡방과 먹방이 결합한 전형적인 요리 드라마의 한 장면 같지만, 이 요리를 만든 연지영이 그들의 반응을 보며 속으로 쾌재를 부르는 말들은 어딘가 사극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표고버섯의 구아닐산, 멸치의 이노신산, 그리고 새우젓의 글루탐산, 각기 다른 계열의 아미노산 성분을 특정한 비율로 배합하면 감칠맛이 수십 배까지 증폭된다. 이른바 감칠맛 폭탄. MSG. 현대의 합성조미료와 같다.’ 

 

사극 배경에 들어간 이 현대적인 어투의 대사는 tvN 토일드라마 <폭군의 셰프>가 타임리프 판타지라는 걸 보여준다. 연지영은 프랑스에서 열린 요리대회에서 1등을 수상한 후 귀국하던 차에 ‘망운록’이라는 신비스런 고서를 열고 조선시대로 타임리프 됐다. 어쩌다 폭군 이헌(이채민)과 악연으로 연결되고, 살아남아 다시 현재로 돌아가려 안간힘을 쓰는 연지영은 그 곳에서는 집도 절도 없고 신분도 미약한 무력한 존재지만 요리 실력 하나로 생존해 나간다. 

 

판타지 설정이지만 그럴 듯해 보이는 건, 현대 요리 과학의 정수를 꿰뚫고 있는 연지영이 그 실력으로 조선의 입맛을 좌지우지하는 게 어찌 보면 당연해 보여서다. MSG 개념의 감칠맛을 만들어낼 줄 아는 요리사라면 조선에서 그 누구의 입맛을 사로잡지 못할까. 그런데 하필이면 연지영이 붙잡은 자가 이헌이라는 왕이고, 그가 역사에 잘 알려진 폭군 중의 폭군이라는 사실이다. 연지영은 폭군의 입맛을 사로잡고 그 마음까지 돌려 자신을 구원할 수 있을까. 

 

최근 들어 이른바 ‘혐관 로맨스’가 트렌드라면 <폭군의 셰프>는 거기 딱 맞는 판타지 사극 버전의 혐관 로맨스가 아닐 수 없다. 어머니의 처참한 죽음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는 이헌은 그 죽음의 진실을 파헤치고 거기 연루된 이들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폭군 행세를 한다. 일부러 전국의 여자들을 붙잡아가는 채홍사를 파견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어머니를 죽인 자들에게 똑같은 고통을 선사하려 한다. 

 

폭주하는 이헌의 이 불타는 복수심은 과연 잠재워질 수 있을까. <폭군의 셰프>는 연지영의 요리로 그의 마음을 되돌리려 한다. 어쩌다 연지영이 만들어준 고추장 버터 비빔밥을 맛본 이헌은 어머니 폐비 연씨가 어려서 밥을 입에 넣어주던 때를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린다. 수비드로 부드럽게 만든 소고기와 감칠맛이 나는 조미료를 더한 음식을 맛본 이헌은 “어쩐지 그리운 맛이 나는 게 참으로 오랜만에 음식맛이 만족스러웠다.”고 말한다. 그 그리움이란 도대체 뭘까. 그건 결국 무참하게 죽은 어머니에 대한 기억들이 아닐까. 

 

<폭군의 셰프>는 그래서 타임리프 판타지와 요리를 만들고 먹는 장면들로 문을 열지만, 결국 이를 통해 이헌이라는 폭군의 마음을 여는 연지영의 이야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그건 또한 폭주하던 그 마음을 음식으로 사로잡음으로써 폭정을 바꿔 제대로 된 정치로 되돌리는 그런 이야기가 아닐까. 심플한 기획이면서도 보는 이들의 마음을 초반부터 꽉 쥐어버리는 이 작품만의 강력한 매력이 아닐 수 없다. 

 

이 현대에서 조선으로 날아간 셰프 역할을 맡은 임윤아는 그간 필모를 통해 차곡차곡 쌓아왔던 코미디 연기가 제대로 물이 오른 모습이다. 영화 <엑시트>로 조정석과 함께 940만 관객을 동원하며 코미디 연기를 제대로 경험한 임윤아는 그 후 <킹더랜드>에서는 이준호와 합을 맞춰 달달하면서도 빵빵 터지는 로맨틱 코미디의 정수를 보여줬다. 최근 개봉한 영화 <악마가 이사왔다>에서는 새벽이 되면 악마로 변신하는 1인2역 역할을 선보이기도 했다. 이제 <폭군의 셰프>는 사극 버전의 판타지 로맨틱 코미디도 이제 척척 해내는 임윤아표 코미디의 안정감이 느껴진다. 

 

<홍천기>에서 <밤에 피는 꽃>을 거쳐 <폭군의 셰프>로 돌아온 장태유 감독의 연출도 이 작품이 2회만에 6.6%(닐슨 코리아)를 기록하며 경쟁작인 KBS <트웰브(5.9%)>를 따라잡는데 일조했다. 코믹하게 처리해 판타지를 납득가게 하면서 이헌과 연지영의 혐관로맨스를 적절한 긴장과 이완으로 풀어나가는 장인의 모습이 느껴진다. 마동석에 박형식, 서인국, 성동일 등등 쟁쟁한 출연진으로 무장한 <트웰브>를 2회만에 압도해버린 <폭군의 셰프>. 벌써부터 심상찮은 모습이다. (사진:tvN)

‘협상의 기술’로 전설의 협상가가 되어 돌아온 이제훈

협상의 기술

배우의 자질 중 목소리가 가진 지분은 얼마나 될까. 대부분 보여지는 게 직업인 배우인지라 비주얼이 가장 중요할 거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배우는 보여지는 것만으로는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한다. 보는 이들을 그 역할에 몰입하게 만들어야 하고 그가 하는 말과 행동에 설득되게 해야 한다. 여기서 진짜 중요해지는 건 목소리다. 중저음의 차분하고 진중한 목소리가 주는 신뢰감은 똑같은 대사도 달리 들리게 만든다. 그런 점에서 이제훈은 바로 그 차분하고 진중한 목소리가 매력적인 배우가 아닐 수 없다. 그의 목소리를 듣다보면 뭐든 설득될 것 같은 신뢰감이 느껴진다. 

 

최근 드라마 ‘협상의 기술’은 그래서 이제훈이라는 배우가 가진 이 신뢰감이 제대로 힘을 발휘하는 작품이 아닐 수 없다. M&A 전문가로서 전설의 협상가로 불리는 윤주노라는 인물이 그가 맡은 역할이다. 그는 위기에 처한 산인그룹을 회생시키기 위해 돌아온 M&A 팀장으로 ‘백사’라 불린다. 하얀 머리 때문에 붙은 이름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행동하기 전에 ‘백 번 생각한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별명이다. 그는 과거 함께 일했던 오순영(김대명) 변호사와 탁월한 암산 능력을 가진 곽민정(안현호) 그리고 신입 인턴이지만 학창시절 주식 투자 동아리 회장까지 했을 정도로 나름의 능력을 갖춘 최진수(차강윤)로 팀을 꾸려 본격적인 M&A에 들어간다.

 

협상가의 첫 번째 덕목은 어떤 상황에서도 속내를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인지 윤주노는 거의 표정이 없고 말하는 톤도 거의 변화가 없다. 협상이 마무리되어 계약을 하는 당일에 갑자기 틀어진 계약 취소 상황에서도 그는 감정을 좀체 드러내지 않을 정도로 차분하다. 문제가 생기면 일단 그 문제의 원인을 들여다보고 곰곰이 그 해결책부터 차근차근 찾아나가는 스타일이다. 그래서 일견 망한 것 같은 협상에서도 그는 막판에 상황을 뒤집는 놀라운 결과들을 만들어낸다. 협상가의 두 번째 덕목은 냉철하면서도 담대한 대응이다. 제 아무리 아픈 제 살이라고 해도 결과를 도출해내기 위해서는 과감하게 도려내는 차분하고도 대담한 선택이 요구된다. 그는 산인그룹의 중심이 건설업이라는 걸 알면서도, 바로 그 건설을 먼저 M&A 하겠다고 선언한다. 파는 물건은 사는 이들도 그 가치를 인정해야 제값을 받을 수 있다는 걸 냉정하게 판단한 결과다. 그리고 이 윤주노가 보여주는 협상가의 세 번째 덕목은 비즈니스 그 이면에 사람을 본다는 점이다. 윤주노는 이커머스에 진출하기 위해 택배왕을 만든 차차게임즈라는 게임회사를 인수하는 과정에서 이 자질을 발휘한다. 모두가 비즈니스에 집중할 때 그는 그 게임 개발자가 왜 그런 게임을 만들게 되었는가 하는 그 마음을 들여다봄으로써 끝끝내 그 회사를 인수하는 결과를 도출해낸다. 

 

이제훈은 이 윤주노라는 협상가의 캐릭터를 구축해내기 위해 이 세 가지 덕목을 드러내는 연기요소들을 보여준다. 어떤 상황에서도 바위처럼 흔들리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하는 모습과, 모두가 반대하는 상황 속에서도 과감하게 나서서 그들을 하나하나 설득해가는 모습 그리고 차가운 모습 이면에 슬쩍 슬쩍 드러나는 따뜻한 인간미가 그것이다. 이런 요소들은 이제훈이 지금껏 해왔던 연기 필모를 들여다 보면 그 다양한 얼굴들 속에 이미 들어 있었던 것들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이를 테면 영화 ‘건축학 개론’의 그 순하고 순수한 청년의 미소나, 드라마 ‘시그널’에서의 절박한 모습, 영화 ‘박열’의 무정부주의자가 보여주는 자유로움, ‘아이캔스피크’의 공무원 역할로 보여준 반듯함, 그리고 드라마 ‘모범택시’의 장르화된 액션 히어로의 모습과 ‘무브 투 헤븐’의 따뜻한 인간애, 게다가 ‘수사반장 1958’에서의 활극 히어로 같은 다채로운 역할들 속의 얼굴들이 그것이다. 앳된 얼굴이지만 벌써 마흔의 나이에 연기경력만 20년에 육박하는 이 배우는 그간 참 다양한 역할들을 통해 성장해오면서 이제는 여러 면들을 자유자재로 꺼내 쓸 수 있는 위치에 올랐다. 

 

그런데 이런 다양한 면모들을 하나로 꿰어주는 데는 앞서 말했던 이제훈의 차분하고도 진중한 목소리가 중요한 몫을 했다. 물론 거기에는 매 역할을 분석하고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한 연습과 노력이 전제된 것이지만, 이제훈의 목소리는 그 노력들을 보다 효과적으로 만드는 힘을 발휘했다. 예를 들어 ‘시그널’처럼 무전기를 통해 과거와 현재가 연결되는 판타지 설정이 들어있는데, 이제훈의 진실된 느낌의 목소리는 어찌 보면 믿기 힘들어지는 이 판타지조차 믿게 만드는 힘이 되기도 했다. 또 ‘모범택시’처럼 판타지적 인물을 장르적으로 해석한 캐릭터에 특유의 현실감이 부여된 것 역시 그의 진중한 목소리가 주는 신뢰감이 큰 역할을 했다. 

 

‘협상의 기술’은 냉정함과 따뜻함의 양면을 담은 드라마다. 즉 냉정함이란 협상으로 대변되는 비즈니스의 세계를 말한다. 실로 ‘협상의 기술’에서는 같은 회사의 동료들마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배신을 저지르는 정치싸움 같은 것들이 펼쳐지는 냉정 그 이상의 비정한 세계를 그리고 있다. 하지만 진짜 협상에 이르는 힘은 그 속내를 먼저 들키면 안되는 냉정한 세계 속에서도 상대의 마음을 애써 읽어내려는 따뜻함에서 나온다는 걸 이 작품은 보여준다. 무표정한 얼굴 사이사이로 조금씩 드러나는 마음들은 그의 협상력이 어디서 나오는가를 말해준다. 

 

연기도 일종의 협상이지 않을까 싶다. 믿고 싶어하지 않는 관객과 시청자들을 앞에 두고 믿고 싶게 만드는 협상의 과정이 그것이다. 무표정할 때는 일견 차갑게 보이는 이제훈의 얼굴은 그 무표정을 거두고 살짝 미소 지을 때 보는 이들을 설레게 만들고, 숨겼던 감정을 드러낼 때 더 강력한 폭발력을 갖는다. 특히 차분하고 진중한 목소리로 이야기할 때 그 역할이 무엇이든 우리는 이 배우에게 설득된다. 이것이 이제 20년에 다다른 연기 경력을 통해 이제훈이 갖게 된 연기 협상력이다. (글:국방일보, 사진:JTBC)

트리거

가짜뉴스가 판치는 세상이다. 일단 정보가 너무 많아졌고, 비슷한 정보들을 똑같이 복제해 쏟아내는 매체들도 많아졌다. 그러니 뭐가 실체적 진실인지 알 수가 없다. 슬쩍 가짜뉴스를 띄워 자신들의 배를 채우려는 이들이 많아질 수 있는 환경이다. 대중들은 혼란스럽다. 명백한 진실조차도 믿어지지 않고, 그럴듯한 거짓에 휘둘리는 현실. 뉴스의 공신력은 갈수록 떨어진다. 믿고 싶은 것만 믿고, 듣던 것만 듣다 보니 이를 이용하는 이들도 많아진다. 답답한 속을 뻥 뚫어주는 ‘진실 보도’에 대한 갈증은 그만큼 더 커질 수밖에 없다. 

 

디즈니+ 드라마 <트리거>는 바로 그 갈증을 정곡으로 찌르는 작품이다. 탐사보도팀 ‘트리거’를 이끄는 오소룡(김혜수) 팀장이 바로 그 시원한 사이다 역할이다. 진실 추적을 위해서는 패러글라이드를 타고 잠입할 정도로 열정적이고, 보도하면 죽인다며 총구를 들이 밀어도 물러서지 않는 패기를 가진 PD. 심지어 사장이라고 해도 진실보도를 가로막으려 하며 맞서 싸운다. 다소 과장되게 그려지긴 했지만, 실제로 이런 인물이나 탐사보도 프로그램이 현실에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과거 MBC <PD수첩>이 이런 역할을 했던 적이 있었고, SBS <그것이 알고 싶다>도 마찬가지였다. 탐사보도가 가진 뾰족함에 방송사가 곤혹스러워지기도 하고, 그래서 아예 대표를 갈아치워 보도국 사람들을 좌천시키는 드라마 같은 일이 실제로 벌어지기도 했다. 과잉 취재로 몰려 세상의 지탄을 받게 된 오소룡이, 팀에서 좌천되어 아이스링크 관리하게 되는 장면이 그저 웃고 넘길 농담 같은 느낌을 주지 않는 건 그래서다. 한때 방송장악을 하기 위해 교양 PD들을 아이스링크 관리로 보냈던 MBC 사태가 떠올라서다. 트리거팀이 창고 같은 곳에서 일하는 광경 또한 그 시절에는 실제 현실이 아니었던가. 이런 장면들은 결코 우리네 언론에 있어서는 드라마 속 이야기만이 아니다. 

 

오소룡 같은 돈키호테에 대한 갈증은 바로 이런 현실에서 생겨난다. 하지만 진실을 가리려는 권력자들과 돈키호테 한 명만으로는 대적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트리거>는 여기에 조직과 스스로 선을 그어 왕따를 당하는 한도(정성일)와, 계약직이라 더 절실하게 취재에 임하며 그런 그를 챙겨주는 오소룡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강기호(주종혁)를 팀으로 꾸려 놓는다. 자발적 왕따거나 타의적 왕따이기 때문에 오히려 조직의 논리와는 다른 언론으로서의 소신을 다할 수 있다는 건 의미심장한 이야기다. 방송사가 가진 경영적 선택과 공영적 선택 사이에서 언론이 가진 딜레마가 그 안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팀원으로서 베테랑 작가 홍나희(장혜진)는 프리랜서 작가라는 점에서 한도나 강기호와 비슷한 위치에 서있다. 

 

하지만 이들이 모두 조직에서 밀려난 위치에 서 있다는 점은 이들의 인간적 한계이자 약점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계약직을 정규직으로 바꿔주겠다는 윗선의 청탁 앞에 중요한 인터뷰 내용을 고의로 누락시키는 강기호의 모습은 PD로서는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인간적으로는 이해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또 탐사보도 베테랑 작가가 드라마 작가가 되기 위해 대본을 쓰는 일은 실제로도 자주 있는 일이 아닌가. 프리랜서인 작가들은 아마도 이런 선택을 통해 실제 탐사보도에서는 채워지지 않았던 갈망들을 드라마를 통해 풀어냈을게다. <트리거>는 이같은 개개인의 약점들이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팀이기 때문에 가능한 소신과 자존심이 진실 보도라는 대의를 향해 나갈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돈키호테처럼 혼자 돌진하는 오소룡을 붙잡아주는 것도 바로 이 팀이 가진 힘이다. 

 

<트리거>는 극 초반까지만 해도 ‘활극’적인 요소들이 많았다. 오소룡과 트리거팀의 활약을 극적으로 보여주면서 시청자들에게 시원한 사이다를 안겨주는 이 캐릭터들을 매력적으로 그려내기 위함이다. 그래서 사건들은 무거웠지만 이를 풀어가는 과정은 경쾌했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드라마는 점점 무거워진다. 활극적인 판타지 보다 현실적인 어려움들을 채워넣는다. 트리거팀의 맹활약은 이를 저지하려는 세력에 의해 ‘무리한 취재 방식’이라는 빌미가 되기도 한다. 활극에서 현실로 돌아오는 이러한 극 구성은 아무래도 가짜뉴스가 판치는 세상에서 진실 보도라는 언론의 문제가 그저 가벼운 판타지로만 다룰 수는 없다는 걸 말해주는 것일게다. 현실의 갈증이 빚어낸 드라마지만, 드라마는 이를 통해 현실의 변화를 촉구하고 있다. (글:일간스포츠, 사진:디즈니+)

‘선재 업고 튀어’, 타입슬립의 기막힌 변주, 본격 입덕 드라마

선재 업고 튀어

이 정도면 본격 입덕 드라마라 할만하다. tvN 월화드라마 ‘선재 업고 튀어’의 시청률이 4.4%(닐슨 코리아)를 찍었다. 자체 최고 시청률이다. 그간 이 드라마의 팬들은 왜 이렇게 재밌는데 시청률은 오르지 않는가를 못내 아쉬워했다. 마치 팬심을 경험한 이들만이 과몰입하는 마니아 드라마가 되는 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었다. 하지만 입소문이 조금씩 퍼지면서 ‘선재 업고 튀어’는 드디어 시청률도 반등하며 마니아 드라마가 아닌 보편적인 공감과 호응을 얻는 드라마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했다. 

 

그 변곡점은 7회부터다. 류선재(변우석)와 임솔(김혜윤)이 서로의 운명을 바꿔 새로운 현재를 만들어낸 시점이다. 과거 교통사고로 하반신 마비의 장애를 갖게 됐던 임솔은 그것이 사고가 아니라 누군가 저지른 범죄였다는 걸 알게 됐다. 하지만 끝내 도망치다 차에 치여 물에 빠진 임솔을 구해낸 류선재가 병원에서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등장했고, 마치 그런 일이 벌어질 거라는 걸 알게 된 듯 류선재가 임솔을 절체절명의 순간에 구해내는 장면이 반복됐다. 

 

똑같은 사건이 다른 결말로 이어지는 두 장면이 반복된 건, 누군가 과거를 바꿨다는 이야기다. 그 두 장면이 반복되는 기점에 류선재가 임솔이 갖고 있던 시계를 손에 쥐고 있는 장면은 그 변화된 사건의 전말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다. 애초 시간을 되돌려 과거로 가게 해주는 시계는 임솔이 타임슬립을 해 현재 사망한 류선재의 운명을 바꾸려는 장치로 등장했다. 하지만 이제 그 시계는 거꾸로 임솔이 사고(사건이지만)를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 류선재가 과거를 바꾸려는 장치로 활용된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선재 업고 튀어’는 팬심의 아이콘처럼 여겨졌던 임솔이 최애인 류선재를 구하는 판타지에서 이제 류선재 역시 임솔을 구하는 ‘쌍방 구원 판타지’로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그렇게 바꿔진 과거에 의해 달라진 미래를 맞이한 34살의 임솔과 류선재의 현재 이야기가 이어졌다. 임솔은 사고를 당하지 않아 두 다리가 멀쩡한 영화사 직원이 됐고, 류선재 역시 죽지 않고 살아있었다. 단지 스타가 된 류선재와 임솔 사이의 절절했던 관계는 끊겨 있는 듯 보였지만 임솔은 류선재가 살아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뻐했다. 

 

이로써 모든 위기 국면들이 끝난 것처럼 보였지만, ‘선재 업고 튀어’는 그래도 다가오는 운명 앞에 또다시 위기 상황을 그려냈다. 그건 류선재가 사망했던 당시 상황이 다시금 반복되는 것이었다. 콘서트 당일 일기예보에도 없던 함박눈이 내리고 한강 다리에서 오지 않기를 바랐던 선재가 나타나자 임솔은 반가워하면서도 두려운 마음이 생겼다. 그렇게 만난 후 돌아간 류선재가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 같은 예감 때문이다. 

 

어찌 보면 과거를 바꿔 현재의 운명 또한 바꾼다는 설정으로 임솔이 겪을 사건을 해결했지만, 또다시 류선재의 위기가 등장한 상황이다. 타임슬립 설정이 과거에 벌어진 하나의 사건을 되돌림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의 판타지로 그려졌다면, ‘선재 업고 튀어’는 그것이 계속 변주되는 방식으로 그려지는 셈이다. 이 이야기 구조 안에서 보면 류선재는 자신이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처럼 알려졌지만 그것 역시 누군가 저지른 사건이 아닐까 싶은 예감을 갖게 만든다. 임솔이 겪은 일들이 사고가 아니라 사건이었던 것처럼. 

 

34살로 돌아온 임솔과 류선재의 이야기는 그래서 타임슬립 판타지를 다채롭게 변주함으로써 팬심과 더불어 멜로적 서사를 더 강력하게 이끌어내고 있다. 쉽게 예측할 수 있는 판타지의 결말이 아니라 어느 방향으로 튈지 알 수 없는 이야기로 전개되고 있다고 할까. 입소문을 타고 시청률도 튀어 오르고 있는 ‘선재 업고 튀어’가 심상찮은 반응을 얻고 있는 이유다. (사진:tvN)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