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예능에 가득한 경합, 그것이 말해주는 것

‘식객’의 초반부 긴장감을 탄탄히 만들어주고 있는 것은 단연 운암정 후계자 자리를 놓고 벌이는 성찬(김래원)과 봉주(권오중)의 요리 경합이다. ‘스포트라이트’에서는 이미 앵커 자리를 놓고 한 차례 경합을 벌였던 서우진(손예진)과 채명은(조윤희)이 이제 심층리포트의 진행자 자리를 놓고 또 경합을 벌이고 있다. ‘대왕 세종’에서도 드라마 초반에는 충녕대군과 양녕대군이 국본의 자리를 놓고 치열한 정치적 경합을 벌이며 시청자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드라마 속의 경합, 공정하지 못한 사회
드라마들이 이렇듯 한 자리를 놓고 치열한 경합을 벌이는 이야기를 활용하는 것은 당연하다. 드라마는 갈등을 기본으로 하고 있는데, 바로 이 대결구도를 가장 쉽게 가시화시킬 수 있는 방법이 경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합의 양상들을 좀더 들여다보면 그렇게 간단하지도 않다. 거기에는 사회가 가진 서열 구조와 그것을 뛰어넘으려는 욕구들이 드라마 속에 환타지의 형태로 드러난다.

성찬과 봉주의 경합에서 봉주가 상처를 받는 것은 그가 적자의식을 갖고 있어서다. 그는 운암정 최고권위자인 오숙수(최불암)의 아들이니 당연히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우진과 채명은의 경합에 있어서도 이 적자와 서자의식은 똑같이 드러난다. 선배인 채명은은 서열상 자신이 적자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대왕 세종’같은 사극 속에서의 장남이거나 적자인 이들은 당연히 자신에게 권력과 부가 승계될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드라마들은 대부분 이 적자들의 바람을 들어주지 않는다. 지금 사회는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적자나 서자의식이 통용되는 사회가 아니라 능력 위주의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당당히 실력을 갖춘 이가 적자의식에만 가득한 인물을 무너뜨리고 제 자리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은 경합뿐이다. 이것은 점점 능력 중심으로 변해가는 사회를 반영하는 것일까. 거꾸로 여전히 실력보다는 서열이나 관계에 의해 움직이는 사회의 불합리함을 드라마에서나마 위안을 얻으려는 환타지일까.

그것은 아마도 후자일 가능성이 높다. 능력 위주의 사회는 바람일 뿐, 우리 사회는 심지어 그 탄생에서부터 미래가 결정되는 경향이 있다. 부잣집에서 태어난 이들이 고등교육을 받을 확률이 훨씬 높다는 것은 이제 상식에 속한다. 갖춘 자들의 적자의식은 시대가 흘렀지만 여전하다. 드라마 속에 이렇듯 빈번하게 경합이 활용되는 것은 그만큼 치열해진 경쟁사회이면서도, 그 경쟁 자체는 그다지 공정하지 않은 우리네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예능 속의 경합, 경쟁 사회에 대한 희화화
한편 경합에 빠진 건 드라마뿐만이 아니다. 예능 프로그램들은 거의 모든 것들이 바로 이 경합의 틀을 갖고 있다. ‘1박2일’의 잠자리나 식사 한 끼를 두고 벌이는 복불복 게임이 그렇고, ‘무한도전’의 끝없는 과제 속에서의 이기적인 출연진들의 대결이 그러하며, ‘해피투게더’의 사우나 안에서 벌어지는 도전 암기송이나, ‘패밀리가 떴다’의 유재석이 툭하면 제안하는 게임이 그렇다.

이 예능 프로그램들 속에서의 경합은 얼토당토않은 목표를 갖고 있다. 바로 이 얼토당토않다는 부분에서, 우리가 스포츠경기 같은 것을 통해 느끼게 되는 진지한 긴장감 같은 것은 사라진다. 만일 진지한 목표가 설정된다면 긴장감은 생기겠지만 웃음은 좀체 나오지 않을 것이다. 복불복 게임은 말 그대로 게임일 뿐 현실 사회가 보여주는 진짜 경쟁과는 다르다. 경쟁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에 목숨을 걸고 경쟁을 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이들 예능 프로그램들은 웃음을 유발한다. 이것은 경쟁 사회에 대한 희화화다.

직장생활 같은 경쟁적 삶 속에서 살다가 빠져나온 경험이 있는 분들이라면 때론 왜 그렇게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며 살았을까 하고 생각하기도 한다. 예능 프로그램 속에서의 경합은 따라서 사회 풍자적인 요소가 있다. 그 얼토당토않은 경합을 보면서 웃음이 터져 나오는 순간, 이미 우스꽝스런 경쟁적 삶에 대한 긴장감이 풀어지게 된다.

드라마나 예능이 점점 이 경합이라는 코드를 보편적으로 활용하고, 거기서 충분한 효과를 얻어내는 것은 여러모로 지금 우리 사회가 가진 불공정한 구조와 그 속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살아야 하는 현대인들의 피곤함과 관련이 있다. 드라마는 이 경쟁의 피곤함을 환타지의 형태로 해결하려는 것이며, 예능은 경쟁 자체를 비웃음으로써 그것에서 벗어나려는 것이다. 그 무엇도 실제적인 해결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어떠랴. 그 경합의 재미 속에서 현실의 경쟁적 삶을 잊어버리는 것은. 잠시만이라도 말이다.


드라마, 퀴즈쇼, 시사, 정보까지 삼켜버린 버라이어티, 그 이유

식사 버라이어티를 주창하는 ‘해피선데이’의 ‘이 맛에 산다’에서 출연자들은 음식을 먹기 위해 퀴즈를 풀어야 한다. 캐스터, 해설자가 낸 퀴즈를 연속으로 5문제를 맞추거나 한 문제를 출연자 전원이 맞추면 퀴즈는 종료되고 눈앞에서 눈과 귀와 입을 자극하는 요리를 맛볼 수 있게 된다. 어찌 보면 단순해 보이지만 이 하나의 버라이어티쇼에는 꽤 많은 장르들이 복합적으로 얽혀있다. 그것은 퀴즈쇼와 토크쇼, 정보 프로그램, 스포츠 쇼가 버라이어티쇼라는 이름으로 한데 묶여 있는 것이다.

버라이어티쇼 앞으로 모두 정렬!
결혼 버라이어티쇼, ‘우리 결혼했어요’는 더 복잡하다. 여기에는 기본적으로 드라마가 있고, 토크쇼가 있으며, 음악이 있고, 연애 혹은 결혼생활에 대한 정보도 있다. 보는 눈에 따라서 이 프로그램은 로맨틱 코미디로 볼 수도 있고, 가수의 일상을 따라가는 새로운 형식의 리얼리티 음악 프로그램으로 볼 수도 있으며, 연애 심리에 대한 토크쇼로 볼 수도 있다. 여행 버라이어티를 내세운 ‘1박2일’ 역시 마찬가지다. 거기에는 여섯 명의 유사가족을 형성한 남자들의 로드무비가 있고, 가수들의 리얼리티 라이브쇼가 있으며, 여행지에 대한 정보가 있다.

태클 버라이어티를 표방한 ‘명랑히어로’는 시사정보 프로그램과 토크쇼를 결합하면서 버라이어티의 외연을 넓혔다. 뉴스보도 프로그램의 딱딱하고 무거움을 가벼운 토크쇼로 끌어들여 엉뚱하지만 속시원한 그들만의 식견을 끄집어내게 한 것이 성공 포인트였다. 한편 최근 시작한 ‘패밀리가 떴다’는 ‘1박2일’이 가진 여행 요소에, 가족 드라마적인 요소, 그리고 ‘X맨’이 가졌던 연예인 게임쇼의 요소들이 융복합된 프로그램이다. 시골에 거주하는 어르신들에게 여행 기회를 제공하고 그 집을 지킨다는 점에서 일정부분 도네이션 프로그램 또한 결합된 형태다.

버라이어티, 그 큰 그릇의 형식
이처럼 버라이어티쇼는 이제 TV가 가진 거의 대부분의 프로그램 형식들을 그 안으로 끌어들이면서 예능의 대세로 자리잡고 있다. 버라이어티쇼란 본래 그 이름처럼 다양한(variety) 형식들, 예를 들면 음악이나 토크쇼, 코미디가 결합된 장르로 어찌 보면 이 복잡한 형식들을 한군데 끌어 모아 지칭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용어다. 따라서 이렇게 다양한 버라이어티쇼가 등장하는 데는 그 그릇이 상당히 넓은 버라이어티 본연의 형식에서 비롯된 바가 크다.

과거의 버라이어티쇼가 그 그릇에 주로 음악을 담았다면(‘쇼쇼쇼’같은), 그 후에는 토크쇼와 콩트가 엮어진 형태로(‘일요일 일요일 밤에’ 같은) 바뀌었고, 최근에는 리얼리티쇼 형식과 엮어지면서 다양한 리얼 버라이어티쇼 전성시대를 구가하게 되었다. 이렇게 된 데는 물론 최근의 탈장르화되고 융복합되는 프로그램 경향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리얼리티쇼가 가진 영향력이다. 버라이어티쇼가 과거 무대나 세트에서 진행되던 것을, 야외로 끌어낸 것은 바로 이 리얼리티쇼의 현장성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생활 속으로 들어온 카메라, 형식을 넘어서다
‘쇼쇼쇼’나 ‘일요일 일요일 밤에’가 무대 위에서의 짜여진 쇼를 보여주었다면, 최근의 버라이어티쇼는 짜여지지 않은 돌발적인 상황을 찾아 무대라는 공간을 벗어나게 되었다. 이렇게 카메라가 무대라는 가상공간이 아닌, 현실 속으로 들어오면서 음악프로그램이나 토크쇼, 코미디 같은 형식은 그 틀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어졌다. 무대 위의 쇼는 현실을 모사한 가상의 보여짐(Show)으로 어떤 익숙한 형식을 요구하지만, 현실 속으로 들어온 쇼는 생활 자체가 보여짐의 핵심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생활 속으로 들어온 카메라는 우리가 흔히 그러하듯이 때로는 음악 프로그램처럼 노래방에 가서 노래를 부르다가, 토크쇼처럼 친구들과 만나 수다를 떨기도 하고, 때론 드라마 같은 이벤트에 감동을 연출하기도 한다. 맛있는 음식을 찾아 즐거운 한 때를 보낼 수도 있고, 일상을 벗어나 여행을 떠날 수도 있으며, 때론 의미 있는 일을 할 수도 있다. 최근의 리얼 버라이어티쇼가 모든 장르를 삼켜버리는 것은 카메라가 이제는 무대 위가 아니라 거의 모든 형식을 가능하게 하는 생활에 더 주목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리얼 버라이어티쇼가 결혼이나 여행, 시사나 정보 같은 점점 더 생활 밀착형으로 되어 가는 것은 그 때문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