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옛글들/드라마 곱씹기

‘추노’, 걸작의 길 범작의 길

728x90

‘추노’는 어느 길을 가게 될까

사극이 과거를 이야기하던 시대는 지났다. 사극은 이제 과거를 가지고 현재를 이야기한다. 사극 ‘추노’가 그렇다. 이 사극에서 역사는 한 발짝 저 뒤로 물러나 있고 대신 그 역사적 시점 위에 현재적 의미를 지닌 인물들이 등장한다. 양반이었으나 추노꾼으로 전락한 이대길(장혁), 한 때 타고난 무사로 소현세자와 함께 꿈을 꾸었으나 도망노비로 전락한 송태하(오지호), 한 때 태하와 동문수학하던 사이였으나 이제는 그를 누명에 빠뜨리고 스스로 암살자가 되어버린 황철웅(이종혁). 이들은 모두 ‘전락한 인물’들이다.

이대길은 송태하를 추격하고, 송태하는 소현세자의 막내아들인 석견을 제거하려는 황철웅을 추격하며, 황철웅은 송태하와 맞서며 석견을 추격하는데, 그들은 모두 자신을 위해 그 일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바로 이 지점, 목숨을 걸고 행하는 일이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위한 일이어야 하는 상황에 이들의 비극이 있다. 그 이면에는 이경식(김응수)이라는, 이 시스템을 쥐고 있는 희대의 권력자가 자리한다. 그는 대길을 시켜 태하를 추노하게 하고, 철웅을 시켜 석견을 제거하려 한다. 태하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대의를 위해서’ 석견을 지키는 일에 목숨을 건다.

이 자신이 소외되어 있는 상황은 바로 이 사극이 그리려는 노비의 상징적인 의미를 캐릭터를 통해 그려낸다. 드라마가 어떤 캐릭터가 가진 문제를 해결하려는 속성을 지닌다고 볼 때, 이 사극은 자신이 소외된 노비적인 상황 속에 갇힌 캐릭터들이 그것을 뚫고 나오는 지점에서 해결의 실마리가 열린다고 볼 수 있다. 즉 대길이 누군가의 지시에 의해 추노를 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을 위해 누군가를 찾게 될 때, 태하가 대의라는 명분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게 될 때, 철웅이 누군가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의 위치에서 성장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하게 될 때, 이들 캐릭터들의 문제는 해결된다.

이것은 결국 이 정교한 시스템 속에 있어 그 시스템을 보지 못하는 이 인물들이 바깥에서 그것을 통찰할 때 가능한 일이다. 그렇게 밖에서 보면 대길이나 태하나 철웅은 결국 같은 위치에 서 있는 자라는 것을 알게 된다. 권력을 쥔 자가 아니라 권력에 휘둘려 비극적 운명에 던져진 자. 결국 시스템의 꼭대기에 있는 이경식이라는 인물이 자신들의 엇갈린 운명을 조종하는 자라는 것을 알고 그를 향해 동시에 칼을 겨누게 될 때 이 ‘추노’가 현재에 던지는 결코 작지 않은 질문은 해결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주제의식은 이미 ‘양반을 죽이고 상놈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꿈꾸는 당’과 그 속에 들어가는 업복이(공형진)라는 캐릭터로 극단화되어 있다.

권력을 쥔 자와 권력에 휘둘리는 자들과 그 권력에 반기를 드는 이 세 축의 힘은 결국 말미에서 하나로 부딪치면서 해결책을 모색할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드라마의 영상미학이라고 불리는 이 사극이 소재나 주제의식에 있어서도 충분히 걸작이 될 수 있는 자질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시스템에 대한 이야기와 그 시스템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기 위해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 지도 모르게 살아가는 이 땅의 민초들에게 이 사극은 충분히 시사점을 제공한다.

하지만 어쩌면 이 걸작이 될 수 있는 ‘추노’에 드리워진, ‘범작으로의 후퇴’도 예상될 수 있는 일이다. 그것은 결국 이 드라마의 또 한 축이라고 할 수 있는 멜로에서 벌어질 가능성이 높다. 대길의 문제가 시스템 속에서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엇갈린 사랑이 가져온 비극이라고 그려질 때, 태하의 대의명분 속에서 희생된 개인의 행복이 섣불리 길에서 만난 혜원(이다해)과의 사랑으로 채워질 때, 이 사극은 걸작의 길에서 범작의 길로 내려서게 될 위험이 있다. 과연 ‘추노’는 어느 길을 걸어가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