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옛글들/스토리로 떠나는 여행 (10)
주간 정덕현
대만하면 떠오르는 것. 내겐 허우 샤오시엔 감독의 '비정성시'다. 양조위의 아주 말끔한 젊은 시절을 볼 수 있는 영화. 차이밍량 감독의 '애정만세'와 함께 대만의 뉴시네마 운동의 대표적인 작품. 홍콩영화가 가진 황당함과 화려함과는 달리, 어딘지 사람이 보이는 영화들. 그런데 이런 영화들을 떠올리다 보면 거의 본능적으로 그 영화들 속 어딘가에서 봤을 식당의 풍경을 떠올리게 된다. 둥그런 식탁에 앉아 자그마한 사발에 국수나 고기 같은 걸 옮겨 담아서 젓가락으로 후루룩 후루룩 소리를 내며 먹는 그 특유의 분위기. 젊어서 호주생활을 한 경험 때문인지, 그 장면을 연상하면 동시에 그 대만 음식 특유의 향 또한 느껴진다. 진하게 뽑아낸 고기 국물에 청경채 같은 아삭한 야채가 곁들여지고 아마도 허브가 곁들여진 듯한 ..
2박3일간의 태안, 그 꿈같은 날들 태안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곳 신두리. 홍상수 감독은 '해변의 여인'을 통해 신두리를 꽤나 냉소적으로 그려냈다. 해변하면 떠오르는 백사장과 푸른 파도 대신에 시커먼 갯벌만을 잡아내고, 여인하면 떠오르는 무언가 분위기 있는 아우라를 걷어내고 좀더 현실적인(한마디로 깨는) 여성을 그 자리 위에 세운다. 홍상수 감독은 사람들이 어떤 단어에 일상적으로 떠올리는 이미지를 깨고 대신 추하고 좀스럽고 째째한 현실을 보여주려 했다. 하지만 이것은 홍상수 감독의 프레임 안에서일뿐, 신두리가 주는 진짜 즐거움과 아름다움은 아니다. 그래서 이번 여행에는 홍상수 감독이 했던 방식으로 홍상수 감독이 냉소적으로 바라봤던 태안을 다시 볼 참이었다. 이제 태안하면 사람들이 떠올리는 기름유출사고의..
베트남에 와서 처음 눈에 띈 것은 오토바이였다. 베트남 하면 시클로라지만 이제 시클로는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대신 도로를 가득 메운 오토바이는 개미집에 물을 부은 것처럼 끝없이 골목길에서 튀어나오고 사라지고를 반복했다. 가만히 그것들을 보고 있거나, 자동차를 타고 그 길에 서 있거나, 혹 그 오토바이들이 무차별로 달리는 그 도로를 건너야 할 때마다 삶은 죽음과의 사이에서 왔다 갔다 움직였다. 그래도 그 무질서 속에 질서라는 것이 있는 모양이다. 용케도 차들은 오토바이를 피해달리고, 오토바이들도 저마다 잘 가는 걸 보면... 그리고 바오밥 나무를 보았다. 뿌리가 온통 밖으로 튀어나온 것 같은 그 나무는 지나가기 어려울 정도로 가지들과 둥치가 달라붙어 있었다. 메콩강은 오지 중의 오지였다. 배를 타고 어..
옥정호, 그 속 깊은 호수는 마치 외로운 마음 같아 그걸 보는 이의 가슴 속으로 폭 파고든다. 운무의 바다, 떠오르는 해는 한 치 앞도 보기 힘든 자에게는 막연한 희망이다. 밤에 도착한 옥정호는 어둠 그 자체. 그 어둠 속에 떠오른 달 하나. 달빛이 쏟아지는 호수. 그것 뿐이었다. 새벽녘 나를 깨운 건, 운무의 속삭임이었다. 국사봉에 오르자 저 멀리 어둠 속에 운무들이 꿈틀거렸다. 그것은 마치 마음이 풀어내는 형상 같았다. 시간의 흐름과 함께 계속 변화해가는 그 모습들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란 늘 우리를 어지럽히지만 햇볕이 비추면 사라질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사진가들은 낚시광처럼 몰려들었다. 낚시대를 드리우듯 삼각대를 드리우고 그들은 시간이 만들어내는 형상들의 월척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작은..
쏠비치에서의 하룻밤, 시간은 계속 흐른다 때론 거꾸로 가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다. 한 해가 가는 요즘 같은 경우가 그런 때. 바다로 나가 알래스카까지 갔다가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양양의 연어 떼가 보고 싶어 길을 나섰다. 그리고 다다른 곳은 양양의 쏠비치 근처에 있는 작은 어촌이었다. 쏠비치 앞바다, 그 명경지수 위에 떨어지는 조명들 사이로 낯선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빛은 때론 사물 속에 숨겨진 색을 은폐한다. 밤 바다에서 잡아낸 하늘은 여전히 파란색이었다. 저 멀리 등대가 깜박였다. 바닥에는 낮 한 때를 놀았을 발자욱들이 여기저기 시간의 흔적을 남겨놓았다. 자연만 덩그라니 놓여있어도 좋을 그 곳, 한 켠에서는 괴물처럼 고개를 떨군 포크레인이 서 있었다. 나도 저 힘겨운 하루의 노동을 끝..
월정사 전나무 숲길을 걸으며 삶이 점점 이전투구(泥田鬪狗) 같은 모양새로 갈 때 문득 문득 그리워지는 곳이 있다. 가슴에 응어리 같은 울화가 치솟을 때마다 마음이 찾아가는 곳이 있다. 가끔 들러 피처럼 벌겋게 타버린 욕망의 찌꺼기들을 버려 두고 오는 곳이 있다. 가지지 못한 욕망으로 가득해 터질 것 같은 마음을 비워내고 그 곳에 자그마한 새로운 불씨를 심어 놓아주는 곳이 있다. 언제나 휠 것 같은 등허리를 어머님처럼, 친구처럼 툭툭 치며 웃어주는 그런 곳이 있다. 바로 산사(山寺)다.저무는 노을을 타고 산으로 들다 산으로 들어가는 발길이 어찌 가벼울 수 있을까. 삶의 무게가 우리들의 어깨를 짓누를 때 드디어 이 산행을 하는 뜻은 이제 더 이상은 견디기 어려운 도시의 무게를, 욕망의 두께를 비워내기 위함이..
찬바람이 살살 불어오고 낙엽이 지기 시작하면 왠지 마음도 스산해진다. 이럴 때 아련히 떠오르는 곳이 있으니 바로 ‘겨울연가’의 그곳, 남이섬이다. 나무들이 가지를 뻗어만든 아름다운 길과, 강물들, 곳곳에 아기자기한 멋을 주는 소품들, 자전거, 낭만... 이런 것들로 가득한 남이섬은 연인과 가족들의 공화국이 된다. 나미나라공화국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서울에서 차로 달려 1시간 반 거리. 가평 그 아름다운 북한강변을 낀 환상의 드라이브코스가 시작된다. 강 위로는 보트가 달리고 강변으로는 그림 같은 펜션들이 늘어서 있다. 이곳이 정녕 우리나라인가, 하는 생각이 들 즈음, 어느덧 나미나라(남이섬의 애칭)에 도착한다. 나미나라여권발급(표파는 곳에서 표를 사고)을 받고, 입국심사대(배타는 곳 입구)를 거치면 나미나..
연천 전곡리선사육적지 깊어 가는 가을 날, 한적하게 그 가을의 색을 느끼고 싶다면 연천으로 가라. 교과서 속에서만 보았던 그 현장을 직접 발로 디뎌보고 몸으로 느끼면서 또한 가을의 향을 만끽해보자. 그리고 신북 열두개울에서 가을의 풍류를 느껴보자. 선사의 땅, 전곡리 선선한 바람이 머리를 시원하게 하고, 파란 하늘이 눈을 시원하게 하는 가을날,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마음에 무작정 연천으로 달린다. 그곳에 있다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구석기 유적지인 전곡리를 아이들에게 보여주고픈 마음 때문이다. 물론 연천을 찾는 이유는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이 유적지에 펼쳐져 있을 파란 잔디밭이 눈에 아른거리기 때문이다. 그 넓은 잔디밭은 사람도 별로 없으니 오롯이 우리 가족 차지가 될 게 뻔하기 때문이다. 잔디 위를 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