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극의 또 다른 진화 보여준 <육룡>의 서사
SBS 월화 사극 <육룡이 나르샤>는 이제 종반을 향해 가고 있다. 이 사극은 여러모로 놀랍다. 무려 50부에 해당하는 대작이지만 한 회 한 회 느슨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것이 그렇고, 여말선초라는 이미 닳고 닳은 사극의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게 새롭게 느껴지는 이야기의 전개가 그렇다. 물론 이 많은 영웅들(제목부터가 육룡이다!)이 누구하나 묻히는 이 없이 저마다 선명하게 자신들만의 캐릭터를 드러내고 있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놀라움이다.
'육룡이 나르샤(사진출처:SBS)'
하지만 무엇보다 더 이 작품이 대단하고 여겨지는 건 이건 그저 사극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물론 역사를 소재로 하고 있기 때문에 쉽게 사극이라 부르지만 기성의 사극에서 다뤄지던 내용을 완전히 뒤집거나 새로운 이야기로 만들어내는 가상의 설정들이 눈에 띈다. 역사의 뒤안길에서 역사를 배후에서 ‘조종’하는 ‘무명’이라는 조직이 그렇고, 왕의 독주를 막기 위한 장치로서 정도전(김명민)이 만들어낸 가상의 사대부 조직 ‘밀본’이 그렇다.
‘무명’과 ‘밀본’은 <육룡이 나르샤>를 독특하게 만들어내는 이 작품만의 새로운 설정이다. 말미에 들어서 이방원(유아인)과 정도전(김명민)의 대결은 사실상 ‘무명’과 ‘밀본’의 대결양상처럼 그려지기도 한다. 물론 이들은 필요에 따라 이합집산하고 그 안에 인물들에 의해 그 조직의 성격이 변질될 수도 있다. 그래서 흥미롭다. 이 이야기의 변수들은 이미 정해져 있는 역사라는 스포일러의 한계를 뛰어넘게 해준다.
또한 <육룡이 나르샤>가 기존 사극과 다른 지점은 사극의 역사적 이야기와 동시에 무협에서나 등장할 법한 무술의 세계가 엮어져 있다는 것이다. 무휼(윤균상)이나 이방지(변요한)는 물론이고 길태미(박혁권)와 길선미 나아가 홍대홍(이준혁)이나 척사광(한예리) 같은 인물군들은 무협의 세계에 나올 법한 인물들로 <육룡이 나르샤>의 또 다른 재미요소를 만들어낸다. 이들이 서로 대결하고 무술을 배우는 그 과정 또한 이 사극의 또 다른 축이 된다는 점이다.
여기에 지금으로 치면 일종의 정보조직인 화사단과 비국사라는 집단도 흥미롭다. 이 두 조직은 이른바 지재(정보)를 사고파는 집단이다. 이 집단이 사극 속에 들어가게 된 건 여러 모로 <육룡이 나르샤>에서 벌어질 여러 사건과 대결구도들이 현재적인 뉘앙스를 갖게 하기 위함이다. 지금은 정보전의 시대다. 그러니 과거의 역사를 소재로 다루면서 정보를 사고파는 가상조직을 집어넣어줌으로써 현재적인 느낌을 주는 더 흥미진진한 대결이 가능해지는 것.
사극의 정해진 역사라는 소재가 있고, 그 역사를 배후에서 움직이는 가상의 조직들이 있으며 또한 이들이 서로 대결하는 것이 그저 정치적인 대결이 아니라 무술의 대결로서 시각화하는 무협적인 가상인물들이 등장하며 또한 정보의 흐름을 장악한 자가 승리한다는 현대전의 양상을 담아내는 비밀정보조직까지 있으니 이건 우리가 봐왔던 사극에서는 한참 더 진화된 어떤 형태라고 해도 될 법 하다.
흥미로운 건 <육룡이 나르샤>가 이미 <뿌리 깊은 나무>의 프리퀄로서 그 소재들을 상당부분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정도전이 이방원에게 “비담 같은 인물”이라고 칭하는 얘기를 통해 김영현 박상연 작가가 과거에 썼던 <선덕여왕>과의 연결고리까지 만들어내고 있다. 이 이야기는 이제 훗날 어떤 사극이 <육룡이 나르샤>가 그려냈던 이런 조직들과 설정들(이를 테면 무명이나 밀본 혹은 화사단이나 비국사 같은)을 활용해도 그리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을 만큼 매력적인 장치들을 선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하나의 장르라는 것은 이처럼 매력적인 하나의 작품을 통해 구조화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판타지 장르가 톨킨이 그려낸 ‘반지의 제왕’과 ‘호빗’에 상당부분 기대고 있는 것처럼, 하나의 잘된 작품은 그 기반 위에 새로운 이야기들을 가능하게 만들어준다. <육룡이 나르샤>가 대단하다 여겨지는 건 그 세계가 지금껏 사극들이 다뤄온 세계와는 확연히 다른 또 다른 세계를 구축해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진화를 거듭한 끝에 생겨난 하나의 장르라고 해도 무방할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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