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시세끼 light’에 엄태구가 출연하자 생겨난 일
“어떻게 보면 태구는 약간 좀 내성적인 면이 있잖아. 그런 성격인데 어떻게 연기를 할 생각을 했을까?” tvN ‘삼시세끼 light’의 마지막 게스트로 출연한 엄태구에게 유해진은 불을 피우며 조심스럽게 묻는다. 사실 그건 시청자들도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상남자 카리스마를 보이곤 하던 모습과는 너무나 상반되게 엄태구는 극내향인으로 유명하다. 이런 사실은 이미 드라마 ‘놀아주는 여자’로 큰 인기를 끌었을 때, ‘유퀴즈 온 더 블럭’에 나왔던 모습으로 더 많이 알려졌다. 목소리 데시벨 자체가 낮아서 소곤거리는 듯 말하고 또 너무 낯을 가려서 카메라 앞에 얼굴보다 정수리가 더 많이 나온 엄태구였다. 그의 앞에서 토크를 잘 이끌어내는 걸로 정평이 난 유재석조차 요령부득의 모습으로 웃음을 줬다.
‘삼시세끼 light’에 나와서도 다르지 않았다. 이미 유해진과는 ‘택시운전사’를, 차승원과는 ‘낙원의 밤’을 함께 찍은 사이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낯을 가리며 대선배들 앞에서 극도로 조심하려 하고 또 어떻게든 도움이 되려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게스트들을 편안하게 해주는 유해진, 차승원인데다, 역시 뭐 하나 강요하는 것 없는 ‘삼시세끼’에서도 그럴 정도다. 그러니 배우로서 작품에 들어가 연기를 할 때는 어떻게 할까 궁금해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유해진의 질문에 엄태구는 친한 친구들과 있을 때는 장난을 많이 치기도 하는 편이라고 답했다. 다만 자신도 안그러고 싶은데 낯을 본인이 불편할 정도로 가린다고 했다. 자연스러운 척하면 오히려 어색해진다는 엄태구에게 유해진은 억지로 그럴 필요는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이가 얼마나 되냐고 갑자기 물었는데, 엄태구가 마흔 둘이라고 하자 깜짝 놀라며 “나이 들면 변한다”고 말하려 했는데 “넌 굳어진 것 같다”며 “있는 그대로 사는 거지”라고 유해진은 말해줬다.
유해진이 있는 그대로 사는 거라고 말하긴 했지만, 배우라는 직업을 가진 엄태구는 그 상황 자체가 있는 그대로 살 수는 없다. 사람들 앞에 나서서 연기를 해야한다. 실제로 그는 그런 성격 때문에 연기를 계속 해야하나 고민을 했었다고 한다. 2007년 영화 ‘기담’으로 데뷔해 무수한 작품들에 단역, 조역, 주연을 맡았지만 그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다 2016년 상영된 ‘밀정’에서 하시모토 역할로 두각을 드러냈다. 그는 ‘유퀴즈 온 더 블럭’에 나와 당시 연기를 그만둘 생각을 하고 있던 차였는데 송강호 선배가 자신에게 “힘들지?”하며 따뜻하게 대해줘 큰 힘이 됐다고 했다. 그 때의 인연으로 송강호는 자신이 주연으로 나왔던 ‘택시운전사’에 엄태구를 추천했고, 그렇게 출연해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군인 역할로 또다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가 주로 해온 역할은 차승원과 함께 출연했던 ‘낙원의 밤’ 같은 누아르에 어울리는 강렬한 모습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그는 드라마 ‘놀아주는 여자’에서 멜로 연기를 인상적으로 보여줌으로써, 그 강렬한 모습들이 일종의 작품 속에서 굳어진 그의 이미지일뿐이라는 걸 드러냈다.
‘놀아주는 여자’에서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에 강렬한 눈빛을 가진 그가 상대역인 한선화 앞에서 순한 양처럼 돌변하는 모습은 시청자들에게도 빵터지는 웃음과 짜릿한 카타르시스를 줬다. 이 작품이 그에게 너무나 어울렸던 건, 극 중 그가 맡은 지환이라는 인물이 어두운 과거를 청산한 큰 형님 캐릭터였다는 점이다. 그래서 맨주먹으로 맞붙는 액션 연기도 등장했지만, 아이들과 놀아주는 은하(한선화) 앞에서 갈수록 달달해지는 반전 모습을 보여줬다. 배역 자체가 엄태구가 여러 작품들 속에서 굳어져 온 강렬한 카리스마의 껍질을 하나하나 벗겨내고 그 안에 담겨진 그의 순하디 순한 면모를 꺼내는 과정을 담고 있었다. 엄태구의 변신에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태구는 멜로다’라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그런데 알고 보면 그 모습이 어쩌면 엄태구의 진면목에 가깝다는 걸 시청자들은 그 후 출연한 몇몇 예능 프로그램들을 통해 알게 됐다. 지나칠 정도로 낯을 가리고, 남을 배려하느라 말 한 마디도 마구 꺼내놓지 못하는 섬세한 성격이 그였다. 그걸 알고 나니 이 배우가 지금껏 해온 연기의 길이 얼마나 도전의 연속이었을 지가 가늠이 됐다. 그저 지나치는 역할 하나도 쉬운 게 없었을 터였다.
조분조분 조용하게 말하는 엄태구에게 ‘삼시세끼 light’의 유해진과 차승원도 덩달아 비슷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저도 모르게 그렇게 된 것이지만, 거기에는 유해진과 차승원의 배려도 담겨 있었다. 차승원은 자꾸만 “태구가 너무 좋아”라고 말했고, 유해진은 특유의 너스레로 그를 편안하게 해주려 애썼다. 차승원이 만든 음식을 맛보며 과장된 리액션을 보였던 다른 게스트들과 달리, 엄태구는 낮게 “정말 맛있습니다”라고 말했지만 그건 진심이 담겨 있어 더 리얼하게 느껴졌다. 처음에는 너무 말이 없고 말을 해도 너무 데시벨이 낮아 심심하다고 여겨졌지만, 차츰 적응하다 보니 그것이 전국의 한적한 곳을 찾아가 음식을 해먹는 ‘삼시세끼’라는 프로그램의 색깔이기도 했다는 게 새삼 느껴졌다.
차승원은 자신이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지리산 등반을 나서서 했는데 그건 여러모로 엄태구를 배려한 선택처럼 보였다. 무언가를 해야 오히려 편안할 거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렇게 노고단까지 함께 오르고 내려오는 길 엄태구는 훨씬 편안해진 모습으로 차승원에게 마음을 털어놨다. “예능을 많이 안해봤는데 제가 힐링 되는 건 처음인 것 같아요. 항상 긴장만 하다가 되게... 자괴감이 많았었어요. 너무 스스로가 답답하고 일상적인 대화도 잘 못한다고 느꼈어요. 제가. 근데 그 모습을 좋아해 주시는 게 너무 신기해서 있는 그대로 더 놔둬도...” 엄태구의 그 말에 차승원은 말했다. “그런 네가 너무 좋아. 난. 뭐 변하지도 않겠지만... 그냥 변하지 마라.”
사실 타고난 내향인들이 억지로라도 친해져야만 하는 사회생활을 하는 건 그 자체로 도전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때로는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게 해주고 끝내 그 진가를 드러내게 해주는 건 몇몇 주변사람들의 말 한 마디 때문이기도 하다. “힘들지?”라고 그 속마음을 읽어주고, 있는 그대로의 네가 좋다며 “변하지 마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어 그들은 그 도전을 멈추지 않는다. 이것이 모든 게 도전이었을 극내향인 엄태구라는 페르소나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이야기다. (글:국방일보, 사진: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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