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 우리는’, 말하기 전 백 번은 생각하는 듯한 세심함

그 해 우리는

이처럼 순하디 순한 남자 주인공이 오히려 더 강력하게 시청자들을 빨아들이는 이유는 뭘까. SBS 월화드라마 <그 해 우리는>의 최웅(최우식)은 특이한 캐릭터다. 그간 멜로드라마의 남성 캐릭터들과 비교해보면 차이가 분명하다. 어딘가 미숙하지만 그것이 귀엽게 느껴지고, 적극적으로 나서기보다는 일어나는 일들을 받아들이지만 그것이 소심한 귀여움과 더해져 세심하게 느껴지는 면이 있다. 

 

고등학교 시절 학교 전체 꼴등이었지만 그다지 성적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인물이었고 따라서 성적을 올리기 위해 기를 쓰고 노력하지도 않는 인물이었다. 그저 조용히 반에서 없는 듯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는 일에만 빠져 있던 소년. 그렇지만 그에게 파문을 일으키며 다가온 국연수(김다미)로 인해 그와 함께 하기 위해 공부를 하고 대학에 갔던 이력의 소유자다. 

 

한 동네가 ‘웅이네’ 가게들로 채워질 정도로 잘 사는 집안의 아들이지만, 그렇다고 금수저라는 생각도 또 그런 삶도 선택하지 않았다. 친구인 김지웅(김성철)과 집안 차이는 분명했지만 그런 것과 상관없이 마치 형제처럼 지냈고, 그의 성공 또한 집안의 후광이 아니라 저 스스로 좋아하던 일러스트로 승부해 얻은 결과였다. 

 

최웅은 국연수에 대한 애정을 빼놓고는 그다지 집착하는 것이 없다. 어쩌다 국연수가 진행하는 프로젝트에 연루되어 자신의 라이벌이었던 누아(곽동현)와 함께 이벤트를 하게 됐지만, 그런 것에 그다지 개의치 않을 정도다. 또 자신이 평소 좋아했던 엔제이(노정의)가 그에 대한 호감을 대놓고 드러내도 그는 스타와 팬의 관계 그 이상을 욕망하는 법이 없다. 

 

최웅이라는 캐릭터는 그가 항상 일러스트의 대상으로 삼는 ‘움직이지 않는 건물과 나무’를 닮았다. 늘 그 자리에 서 있고 한 번 뻗은 가지는 그 방향으로만 나아가는 그런 인물. 그래서 국연수가 그 오랜 헤어짐의 시간을 거쳐 다시 그의 집 문 앞에 서게 된 그 광경은 마치 오래 전 최웅이 기대하고 예감했던 것처럼 여겨진다.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으면 언젠가 그가 돌아와 서로의 마음에 선을 그어갈 것이라고. 

 

그가 선 하나 하나를 세심하게 그어 일러스트를 그리는 그 과정은 최웅이라는 인물이 삶을 살아가는 방식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국연수와 헤어지고 나서 그를 본격적인 일러스트레이터로 만든 건 그래서 어쩌면 그 슬픔과 그리움을 버텨내기 위해 밤새도록 선을 긋는 일에 몰입해서가 아닐까 싶을 정도다. 그러한 시간의 인내는 최웅이 무언가 한 마디를 하기 위해 꽤 오래도록 숙고하는 과정 속에서도 그의 삶의 태도로서 드러난다. 

 

겉으로만 보면 극강의 순한 맛처럼 보이는 남성 캐릭터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요동치는 감정들을 애써 꾹꾹 눌러 앉혀 놓은 극강의 강인함이 느껴진다. 최웅이라는 캐릭터가 지금의 청춘 세대들에게 주는 매력이 바로 이것이다. 외부의 조건과 상관없이 또 외부와의 경쟁이 아니라 자신만의 노력과 자신과의 싸움 속에서 단단해진 내면을 가진 존재. 물론 사랑 앞에서는 아직도 질투하고 갈등하며 흔들리지만 그래도 제 길을 찾아갈 것만 같은 인물. 시끄러운 바깥세상에서 한 발작 뒤로 물러나 자신만의 삶을 선택하고 살아가는 청춘에 대한 판타지가 바로 이 인물 속에 담겨 있다. (사진:SBS)

‘그 해 우리는’, 뭐 이토록 멍할 정도로 편안한 멜로가 있나

그 해 우리는

이 청춘 멜로는 불멍, 물멍을 하는 것만 같다.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면 잔잔히 미소가 지어지기도 하고 때론 안타깝기도 하며 때때론 가슴 두근거리는 설렘이 전해진다. 그래서 이런 조어가 가능할 듯싶다. ‘멜로멍’. 뭔가 대단한 사건들이 드라마틱하게 펼쳐지지는 않지만 멍하게 바라보며 편안하게 빠져드는 멜로. 바로 SBS 월화드라마 <그 해 우리는>의 세계다. 

 

‘캐치 미 이프 유 캔’이라는 부제를 가진 <그 해 우리는> 7회는 어떤 난감한 상황에서의 최고의 방어는 ‘도망’이라는 최웅(최우식)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는 도망이 비겁한 선택이라 보지 않는다. 그것이 순간 이성을 잃어 상당히 감정적이게 되는 상대를 피하는 것이라며, 상대를 위한 선택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그는 부딪치기보다는 피한다. 그리고 시간을 번다. 그 갈등의 감정들이 조금은 차분해질 시간을. 

 

인물들 간의 감정이 부딪치고 갈등하는 과정은 멜로드라마의 중요한 서사 구조다. 서로 오해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 미워하다가도 다시 사랑하는 그 일련의 과정들. <그 해 우리는>도 그런 과정들을 담는다. 하지만 최웅이라는 독특한 캐릭터는 그 과정들조차 잔잔하게 담아낸다. 직설적으로 부딪쳐 싸우거나 목소리를 드높이기보다는 먼저 ‘도망치고’ 조용히 그 시간들을 감내하며 감정들을 추스르려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아주 가끔씩 어떤 계기에 의해 도망치지 않고 드러내는 감정은 이 드라마에서는 더 강렬한 느낌을 준다. “그럼 내일은 네가 기억 안 나는 척 해. 꿈 아니잖아. 왜 꿈인 척 해? 왜 거짓말 해? 연수야. 연수야.. 우리 이거 맞아? 우리 지금 이러고 있는 거 맞냐고? 다른 사람 아니고 우리잖아. 그저 그런 사랑한 거 아니고 그저 그런 이별한 거 아니잖아 우리. 다시 만났으면 잘 지냈냐고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고 힘들지는 않았냐고 그동안 너무 힘들었다고 말할 수 있잖아 우리. 어떻게 지냈어? 말해봐. 어떻게 지냈어 너.”

 

어느 날 갑자기 불쑥 이별을 얘기한 연수(김다미)로 인해 너무나 힘들었던 최웅이었다. 어쩌면 그가 꼬박 며칠간을 밤을 새워 선 하나하나 그어 그림을 완성할 수 있었던 건, 그 힘들었던 시간들을 잠시라도 잊기 위함은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다. 하지만 다시 그의 앞에 연수가 나타났을 때 최웅은 늘 그러하듯 직접 부딪치고 따지기보다는 도망치고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속으로 꾹꾹 누르며. 그랬던 것이 어떤 비등점을 넘으면서 불쑥 터져 나왔을 때 연수도 자신의 마음을 알았다. 그렇게 떠난 것이 그 없이 살 수 있을 거라는 자신의 오만이었다는 걸. 

 

<그 해 우리는>에서 연수가 최웅에게 갑작스런 이별을 통보한 건, 현실적인 문제들 때문이었다. 사는 환경이 너무나 달랐던 것. 이 청춘서사에도 그래서 보이지 않는 저 편에 금수저 흙수저의 현실이 드리워져 있다. 하지만 이 청춘서사는 그것이 근본적인 장애라 얘기하지 않는다. 그 현실 때문에 이들의 사랑을 방해하는 어른들도 없다. 아니 최웅의 부모들은 김지웅(김성철)을 친 아들처럼 대하고 연수를 애틋한 마음으로 바라볼 정도로 그런 현실적 조건들과 상관없이 모든 걸 품어주는 어른들이다. 

 

대신 <그 해 우리는>은 마치 일단 도망치고 잠시 그 감정을 추스를 시간을 갖는 최웅이라는 인물처럼, 드러내놓고 부딪치고 싸우며 바로바로 풀어가기보다는 찬찬히 시간과 관계의 반복 속에서 갈등이 풀어지는 과정을 담는다. 그래서 갈등의 파고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어딘가 편안하다. 굉장히 드라마틱한 멜로가 아니지만, 그저 편안하게 다큐를 찍는 뷰파인더 창을 통해 담기는 저들의 귀엽고도 알콩달콩하며 애틋하기도 한 멜로가 아닐 수 없다. 피곤하고 힘겨운 현실 속에서 불멍, 물멍하듯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픈 마음이 드는.(사진:SBS)

이진욱과 권나라 그리고 공승연의 인연 혹은 악연(‘불가살’)

불가살

고려시대의 이야기에서 600년을 훌쩍 뛰어넘어 현대로 와서도 tvN 토일드라마 <불가살>의 긴장감은 여전히 팽팽하다. 사실 어찌 보면 다소 뻔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단활(이진욱)을 민상운(권나라)이 칼로 찌름으로써 불가살이었던 민상운이 단활의 혼을 빼앗아 죽음을 맞이하고 대신 단활이 불가살이 되었던 과거의 악연. 아내인 단솔(공승연)과 아이까지 죽인 민상운에 복수하기 위해 600년간의 세월을 인간으로 환생한 민상운을 찾아다닌 단활. 두 사람의 악연에 얽힌 복수극만으로 전개되었다면 <불가살>은 다소 앙상한 이야기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불가살>은 현대로 오면서 다양한 스토리의 변주를 가능한 장치들을 뒀다. 그건 환생, 업보 같은 인연 혹은 악연을 통해서다. 단활이 불가살이 되기 전에 그를 거둬준 아버지 단극(정진영)과 함께 모조리 잡아 죽인 귀물들은 인간으로 환생해 본능적으로 사람들을 해치는 살인마로 다시 등장한다. 그런데 이 귀물들이 단활과의 전생 악연으로 그의 혼을 빼앗아간 민상운을 죽이기 위해 하나 둘 몰려든다. 혼을 되찾고 복수를 하기 위해서라도 단활은 민상운을 귀물들의 공격으로부터 지켜내야 하는 흥미로운 상황이 만들어졌다. 제 손으로 죽이기 위해 귀물들로부터 보호해야 하는 상황. 

 

<불가살>이 가져온 인간으로 환생한 살인마 귀물들이라는 설정은 이 작품을 쓴 권소라, 서재원 작가의 <손 the guest>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동쪽바다 깊은 곳에서 찾아온 큰 귀신, 손이 어두운 마음을 가진 인간들에게 빙의되어 갖가지 엽기적인 살인을 저지르고 이를 막기 위해 영매, 사제, 형사가 목숨을 걸고 싸우는 이야기. 손에 빙의된 인간이 살인마가 된다는 설정은, <불가살>에서는 전생의 귀물이 환생해 살인마가 된 인간으로 재탄생한 느낌이다. 다만 달라진 건, <손 the guest>에서는 손에 의해 인간들이 속절없이 죽어나가는 광경이 이어지지만, <불가살>은 바로 그런 귀물들을 해치우는 불가살이라는 존재를 세워뒀다는 점이다.

 

흥미로운 건 업보에 의해 환생하는 인물들이 전생과는 다른 관계로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불가살이 된 채 600년을 살아온 단활이 드디어 민상운을 찾아냈지만 두 사람이 어딘가 그 이전에 다른 인연으로 엮여 있다는 뉘앙스를 풍기는 지점이 그렇다. 단활의 상처를 민상운이 만지자, 순간 단활은 오래 전 그 여인과의 어떤 기억 한 자락을 환시처럼 보게 된다. 그 기억 속에서 민상운은 활짝 웃고 있다. 단활과 민상운이 혼과 불가살이라는 존재로 뒤얽힌 악연은 그 이전에 있었던 어떤 인연과 그것으로 생겨난 환생의 결과는 아니었을까. 

 

그런 추론을 하게 만드는 건 민상운에게 처절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서 단활로 하여금 복수를 다짐하게 만들었던 아내 단솔이 현대로 와서는 민상운의 동생으로 환생했다는 사실이다. 복수만을 꿈꾸며, 민상운을 지하 깊은 곳에 가둬 억겁의 세월을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드는 형벌을 주겠다는 일념으로 살아온 단활로서는 혼돈스러운 상황이 아닐 수 없다. 그가 민상운을 죽인다면 그건 또다시 단솔과의 악연을 만드는 일이 된다. 

 

인연과 악연이 환생이라는 설정으로 반복되는 <불가살>의 세계관은 죽고 죽이는 치열한 싸움이 이어지지만,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모든 연을 끊어야 해탈할 수 있다는 불교의 세계관을 담고 있다. 복수 같은 욕망의 고리를 끊지 않는 한, 인연과 악연은 끝없이 이어진다. 그런 점에서 불가살이라는 죽지 않는 존재는 사실상 연의 고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모든 인간들도 마찬가지라는 걸 보여주는 것만 같다. 연의 고리 속에서 그들 역시 죽어도 다시 태어나는 불가살이나 마찬가지니 말이다. 

 

<불가살>의 독특한 세계관은 이처럼 불교적 연기론을 가져옴으로써 가능해졌다. 환생한 귀물들의 이야기는 마치 연쇄살인마들이 등장하는 범죄스릴러를 가능하게 하고, 그들과 싸우는 단활은 그래서 다크 히어로의 액션을 현대에서도 그려낼 수 있게 했다. 게다가 전생의 인연으로 엮어진 단활과 민상운 그리고 단솔의 얽힌 관계는 보다 복잡한 멜로적 색채까지 띠게 만든다. 흥미로운 재해석이 아닐 수 없다. 우리네 전통 설화 속 이야기를 끌어와 이토록 세련된 현대물의 스릴러 판타지를 구현해내고 있으니 말이다. (사진:tvN)

개그맨인 줄... ‘옷소매’ 숨통을 틔워주는 매력 캐릭터들

옷소매 붉은 끝동

“전하. 신이 얼마 전 늦장가를 들지 않았사옵니까. 제 내자를 그렇게 쫓아다녔는데 아무리 혼인을 하자고 졸라대도 대답을 안 해주는 것입니다. 아니 차라리 싫으면 싫다 이렇게 말을 해줘야 되는 게 아니겠습니까? 처음엔 멋있게 보이는 게 중요하다 생각이 돼서 제 내자 앞에서 이 칼을 막 쓰고 활도 쫙쫙 과녁에 팍! 그랬더니 되려 무섭다고 도망만 치는 게 아니겠습니까. 하루는 이 신이 군사를 훈련시키다가 손을 좀 다쳤사옵니다. 이 꼴사나운 모습을 보일 수 없다 생각이 들어 제 내자를 도망쳐 다니면서 피해 다녔는데 갑자기 갑자기 저한테 관심을 보이는 겁니다. 한 번은 저에게 오더니 밥은 드셨소? 어 손이 이래서 밥을 못 먹었소. 그랬더니 국밥을 막 먹여주는 겁니다. 한 번은 소쇄는 하셨소? 어 내 손이 이래서 못 하였소. 그랬더니 아이고 더러운 사람 이러면서 소쇄를 시켜주는 게 아니겠습니까? 아시겠습니까 전하. 전하 여인들 앞에서는 무조건 약한 척 불쌍한 척 여인들의 동정심을 막 자극을 해야 여인들이 잘 해줍니다...”

 

이건 한 편의 만담 같다. MBC 금토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 성덕임(이세영)에게 후궁이 되어 달라 고백을 했지만 답을 주지 않고 피하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이산(이준호)에게 호위무사 강태호(오대환)가 떠는 너스레다. 보통 호위무사라고 하면 강인하고 묵묵한 캐릭터로 그려지며 액션을 선보이기 마련이지만, 강태호는 그런 모습과 더불어 코미디에 가까운 웃음을 주는 캐릭터다. 

 

성덕임과 이산이 물수제비를 던지는 내기를 할 때도 돌을 찾을 때 은근히 성덕임과 각을 세우는 강태호의 모습은 미소를 짓게 만든다. 어떻게든 자신이 모시는 이산이 이기게 하려고 애쓰는 모습이 그렇다. 성덕임의 동무들이 수다를 떨며 문관보다 무관이 더 멋지다는 이야기를 훔쳐 듣는 장면에서도 강태호가 주는 웃음을 압권이다. 흐뭇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이산의 눈치를 보는 모습이 그것이다. 그 광경은 마치 왕세자와 호위무사가 나오는 <개그콘서트>의 한 코너 같은 느낌이다. “덕임이 넌 문관이 좋아 무관이 좋아?”하고 묻고 성덕임이 문관도 무관도 아니라고 하자 강태호가 “내관?”하고 말하는 대목이 그렇다. 

 

<옷소매 붉은 끝동>은 궁 안에서 벌어지는 긴장감 넘치는 사건들과, 이산과 성덕임 사이에 벌어지는 애틋하지만 쉽게 이뤄지지 않는 멜로가 주된 스토리지만 이 이야기들 속에서 간간히 숨통을 트이게 해주고 웃음을 터트리게 만드는 ‘미친 존재감’의 감초 캐릭터들의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강태호는 물론이고 성덕임의 가까운 동무인 김복연(이민지)이나 엄마처럼 돌봐주는 서상궁(장혜진)도 빼놓을 수 없는 미친 존재감들이다. 

 

홍사모(홍덕로를 열렬히 사모하는 궁녀들의 모임) 회원인 김복연은 궁녀로서 어떤 야망을 갖기보다는 자잘한 ‘소확행’을 추구하는 인물로서 편안한 웃음을 선사한다. 이미 권력을 잡고 세도가가 되어 궁녀들 사이에서도 예전 같은 인기를 갖지 못하는 홍덕로(강훈)를 동무들이 지적하자 그럼에도 힘없이 “우리 나으리 욕 하지마”라고 말하는 김복연의 모습이 그렇다. 

 

또 성덕임의 스승상궁인 서상궁은 궁녀들의 비밀조직을 이끌었던 제조상궁 조씨(박지영)와 완전히 대비되는 인물로서 시청자들을 미소 짓게 만드는 캐릭터다.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허술한 면을 보이는데다 겁도 많지만, 술에 취해 점 하나 찍어놓고 그림이라 주는 이산 앞에서 “겸재 정선이 울고 가겠나이다”라며 호들갑을 떨어주는 모습에서는 따뜻한 웃음이 피어난다. 

 

이 인물들이 미친 존재감을 드러내는 건 이 캐릭터를 연기하는 연기자들의 만만찮은 공력 덕분이다. 오대환은 다양한 역할을 해왔지만 왕을 위해서는 진지하게 목숨을 내걸고 싸우는 모습과 정반대로 이를 허물어뜨리는 허술한 캐릭터를(기억력이 없어 자꾸 까먹는 캐릭터가 그것이다) 자유자재로 넘나들고 있고, 장혜진은 <기생충>에 나왔던 그 배우가 맞나 싶을 정도로 보기만 해도 웃게 만드는 코믹한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이민지 역시 <응답하라1988>에서 보였던 그 미친 존재감을 사극에서도 펼쳐 보이고 있는 중이다. 

 

특히 이들이 더욱 주목되는 건, 이 웃음의 코드가 그간 사극에서 스테레오 타입으로 그려지곤 하던 호위무사, 상궁, 나인 등의 역할을 새롭게 그려냄으로써 생기를 갖게 해주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만으로도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 이들 미친 존재감들의 지분은 박수받을만큼 충분하다 여겨진다. (사진: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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