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레길을 걸으며 '1박2일'은 무엇을 얻었을까

장수하는 리얼 버라이어티쇼에는 높은 인기만큼 위기설도 끊임없이 제기된다. 주말 버라이어티의 최강자로 군림해왔던 '1박2일'도 예외는 아니다. 본래 취지는 사라지고 복불복에만 몰두한다는 비판이 조금씩 고개를 들면서 위기설은 솔솔 피어났다. 프로그램에 어떤 멋과 다큐적인 베이스를 깔아줬던 김C의 하차와 공교롭게도 이 시기에 투입된 김종민의 부진, 이수근의 빵빵 터지는 상황극에 대한 지나친 몰입이 가져오는 '1박2일' 특유의 자연스러운 웃음의 실종, 제기된 병역기피 혐의로 잔뜩 위축된 MC몽... 이즈음에 터진 이수근이 차 밑으로 들어가 라면을 먹는 장면이 제기한 안전불감증 논란 같은 것들은 '1박2일'의 위기를 실제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하지만 위기는 늘 존재하기 마련이다. 최고의 예능 프로그램이 그 위치를 고수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런 위기에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1박2일'이 꺼내든 방식은 문제를 덮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 드러내는 것이었다. 모든 걸 인정하고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 '지리산 둘레길을 가다' 편에서 강호동은 오프닝에서 이례적으로 '1박2일'의 이 위기설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이승기는 모든 영혼이 드라마에 가있고, 은지원은 신혼의 단꿈에 빠져 있으며, MC몽은 차마 방송에서 얘기하기 부담스러운 상황이고, 김종민은 묵언수행중이라는 이야기. 그러니 말을 할 때마다 빵빵 터뜨려야 한다는 이수근 역시 위기상황일 수밖에 없다는 것.

'1박2일'의 자기반성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해외연수 프로그램으로 영국에 간 이명한 PD를 대신해 들어온 이동희 PD는 그 첫 마디에서 "많이 고여 있고 젖어있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건넸다. 그리고 "많은 개혁'이 있을 거라고 예고했다. 지금껏 제기된 수많은 위기설들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이 같은 자세는 '1박2일'이 그토록 많은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여전히 건재함을 과시하는지 잘 보여주는 것이다. '1박2일'은 지금껏 그것이 설사 오해에서 비롯된 억울한 논란이라고 하더라도 부정한다거나 외면하는 자세를 보이지 않았다. 그것을 시청자들의 관심의 하나로 받아들이면서 오히려 더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 왔던 것. 이 소통의 노력은 '1박2일'이 가진 가장 큰 힘이 아닐 수 없다.

'1박2일'이 '지리산 둘레길' 특집을 통해 보여준 것은 본래 '1박2일'이 가졌던 초심의 복원이다. 다섯 개의 코스로 나뉘어 그 아름다운 풍광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담아내는 이른바 '다큐' 형식의 차용은 '1박2일' 본연의 여행 버라이어티를 다시 살려냈다. '1박2일'이 처한 가장 큰 위기는 바로 본래 취지인 '여행'에 집중하지 못하고 부수적인 자극들, 예를 들면 복불복 같은 게임에 자꾸 몰입하는 것이었다. 초창기 '1박2일'이 보여준 여행은 대중들에게는 하나의 판타지처럼 다가왔다. '저렇게 마음 맞는 사람들과 하룻밤의 여행을 훌쩍 떠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감성이 거기에는 담겨져 있었다.

물론 복불복 같은 게임은 프로그램의 감초로서 없으면 안되는 자극이지만, 거기에 몰입하다보면 더 큰 것을 잃게 되기 십상이다. 둘레길을 걸으며 온몸으로 자연을 느끼는 그 체험의 신산함, 헬기에서 찍어 보여주는 스펙터클한 영상에서부터, 스틸 사진으로 잡혀지는 순간의 아름다운 풍광, 게다가 오랜만에 듣게된 김C의 정감어린 내레이션까지. 각각 나뉘어진 컨셉트는 복불복을 지우고 대신 각자 지금껏 '1박2일'을 해왔던 자신들을 회고하고 반추하는 시간을 줌으로써 새로운 각오를 다짐하는 계기가 되게 해주었다.

이것은 제기된 문제들을 소통의 방식으로 해결하려는 '1박2일' 특유의 노력으로 가능한 것이다. 크고 작은 사건들이 주는 위기감은 분명하지만, '1박2일'을 진짜 위기에 몰아넣는 것은 본래 취지인 '여행'이라는 아이템을 잃는 것이라고 볼 때, 그 해법은 너무나 간단하지만 역시 '여행'을 복원시키는 것일 것이다. '1박2일'을 보면서 다시 그 여행이 주는 설렘과 기대감을 가질 수 있게 된다면 위기는 더 이상 위기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지금 '1박2일'은 다시 그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무한도전', 예능 그 이상의 도전이 갖는 가치

만일 시청률을 위한 것이라면 '무한도전' 레슬링 특집은 무모한 도전임이 분명하다. 들인 시간과 노력이 너무 엄청나기 때문이다. 그러니 시청률만을 생각한다면 차라리 예전 가끔 예능 프로그램에서 했던 것처럼 레슬링 협회 같은 곳을 찾아가 적당한 시범과 몸 개그로 웃음을 뽑아내는 편이 낫다. 진짜 프로가 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레슬링경기답게 해보겠다며 장장 1년 동안 기술을 배우며 링 바닥에 몸을 수십 번씩 내던지는 그런 행위가 어찌 시청률 하나만을 위한 것일까. 그렇다면 그건 너무나 무모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대충 레슬링을 한답시고 흉내만 내면서 몸 개그를 시도한다면 그게 '무한도전'일까. 초창기 진짜로 '대한민국 평균 이하'였던 '무한도전'은 그랬을지 모르지만 이미 세월을 겪으면서 캐릭터의 성장과 함께 실제 출연자들도 성장을 거듭했던 '무한도전'에서 이런 '대충대충'은 허용되지 않는다. '무한도전'은 이미 댄스스포츠 대회에도 나간 적이 있고 에어로빅 대회에도 출전한 적이 있으며 심지어 그 살벌한 봅슬레이 위에도 오른 바 있다. '무한도전'은 이제 예능이 다루지 않았던 영역 바깥으로 나가, 예능이 다루던 방식 그 이상을 도전하는 프로그램이 되어버렸다. 그러니 '무한도전'의 레슬링은 기대치에 걸맞게 달라야 한다.

'무한도전' 레슬링 특집 편이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것은 그것이 예능 그 이상을 보여주기 때문이면서 동시에 그 도전 자체가 다른 것에 비해 훨씬 어렵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물론 어느 정도는 합을 맞춰서 하는 것이지만 맨몸으로 부딪치는 레슬링은, '무한도전' 멤버들이 처음 생각했던 것과 달리 엄청난 고통을 통해 알게 된 것처럼 힘겨운 스포츠다. 하지만 힘겨워도 고통을 감내하며 링 위에 오르는 그들의 도전이 보여준 것은 다름 아닌 레슬링이라는 스포츠의 매력이 아닐 수 없다. 이 '무한도전'이 몸으로 보여준 모습들은, 한때 그저 쇼일 뿐이라는 오해의 시선 때문에 이미지가 추락한 프로레슬링에 충분히 긍정적인 시선을 만들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무한도전' 레슬링 특집에 제기된 레슬링 협회와의 마찰이 생겨난 것은 오히려 '무한도전'이 여타의 예능 프로그램과 달리(이게 예능 맞아하고 물을 정도로) 지나치게 진지했다는 반증이다. 만일 그저 몸 개그를 끄집어내기 위한 제스처였다면, '무한도전'의 동호회 성격의 레슬링에 대해 프로 협회가 문제제기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무한도전'의 멤버들의 실제를 방불케 하는 연습은 프로 경기를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여전히 아마추어고, 레슬링이라는 경기 자체에 대한 찬사를 1년 동안 온 몸을 던지며 보여주려 했을 뿐이다. 여기에 대한 레슬링계의 비판은 가혹하다. '무한도전'은 예능 프로그램이지 다큐가 아니다. 레슬링을 소재로 하는 예능 프로그램의 목적은 좀 더 대중들에게 레슬링을 알려주기 위한 것일 뿐이지 레슬링 자체가 될 수는 없다.

"예능이 너무 지나친 것 아니냐"는 비판에는 예능에 대한 선입견이 들어가 있다. 예능은 그저 재미있는 말을 건네고 우스꽝스런 몸짓으로 웃음을 만드는 그저 그런 어떤 것이라는 생각. 하지만 이미 예능의 외연이 다큐와 드라마의 영역을 넘어서고 있는 상황에서 그 속에 온몸을 던져 웃음을 만들어내는 예능의 몸이, 링이라는 경기장 위에서 몸뚱어리 하나를 던져 보는 이들의 아드레날린을 자극하는 레슬링의 몸과 뭐가 다를까. 고통의 강도는 다를 지 몰라도, 그 몸이 해야 하는 일과 해내는 일의 강도는 그다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저 늘 예능이 해왔던 웃음의 코드 속에서 익숙한 웃음을 반복하려고 한다면 그럴 수도 있을 것지만, 적어도 '무한도전'은 그런 프로그램이 아니다.

'예능이 아니라 다큐'라는 말은 역시 '무한도전'이 그만큼 예능에만 머물지 않고 그 한계 바깥으로 나가는 도전을 멈추지 않고 있다는 반증이다. 물론 부상 투혼까지 발휘하는 출연진들에게 좀 더 안전하게 도전을 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내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은 남는다. 하지만 그저 평범한 사내들에게 겨우 1년이라는 시간을 주고(1년도 작을 것이다) 완전히 프로는 아니지만 그래도 레슬링다운 경기를 선보이겠다는 도전을 한 것 자체가 어떤 어려움을 내포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일 지도 모른다.

그래서 몇몇은 진짜 선수 못지않은 실력을 선보이지만 몇몇은 그다지 달라지지 않은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고, 바로 그것이 '무한도전' 레슬링 경기가 말해주는 진정성이다. '무한도전'의 레슬링 경기를 보기 위해 장충체육관에 운집한 관객들이 보고자하는 것은 레슬링 경기 그 자체가 아니다. 그간 '무한도전'이 해온 과정들을 확인하고자 함이다. 그 확인 과정을 통해 레슬링은 관객은 물론 시청자들에게 새로운 매력으로 다가올 것이다.

새로운 영역을 향해 늘 새롭게 도전해가는 '무한도전'을 그저 시청률이라는 숫자로 평가하기는 어렵다. 도대체 온 몸이 부서질 듯한 고통을 감내하며 1년 동안 지옥 같은 링 위에서의 연습을 어떻게 숫자 하나로 평가할 수 있을까. 그 몸의 고통스러움이 주는 지독한 진정성을 느끼면서, 바로 그것 때문에 예능 프로그램으로서 웃음이 상대적으로 줄었다고 안타까워한다면 그것은 작금의 달라진 예능을 한 가지 면으로만 바라보는데서 나온 오해일 것이다.

이제 예능은 웃음은 물론이고 리얼함이 주는 진정성을 통한 감동까지 다양한 스토리텔링으로 다양한 재미를 추구하게 되었다. 예능의 외연이 이만큼 넓어진 데는 예능이 오로지 웃음에만 집착하지 않고 형식실험을 통해 다양한 차원의 재미들을 끌어안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무한도전'의 일련의 도전들은 예능 전체가 그 수혜자가 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 성공이든 실패든 도전해온 것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알게 되었다. '어 이런 것도 예능이 되네?', 하고 말이다.

모든 도전이라는 것이 그렇듯이 결과보다 중요한 건 과정이다. 그리고 '무한도전'은 특히 이 도전의 과정이 갖는 가치를 그 어떤 것보다 더 집중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떤 도전 목표를 두고 그 목표를 향해 어떻게 걸어갔느냐가 중요하다. 실패? 적어도 '무한도전'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실패란 그래서 없다. 도전 자체가 의미있는 것이라면 실패한 과정 자체 역시 성공이기 때문이다. '무한도전' 레슬링 특집이라는 도전은 그래서 실패가 아니다. 조금 떨어진 시청률로도, 또 예능 영역 바깥으로 나옴으로써 조금 줄어든 웃음으로도 '무한도전'이 1년 간 온 몸을 링 위에 던진 그 도전 자체가 주는 가치를 상쇄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제빵왕 김탁구', 빵으로 시대를 풀어내다

굶주린 아이가 빵집을 들여다보는 장면은 배고팠던 70년대의 감성을 자극한다. 그 고소하고 달콤한 향기에 씹을수록 말랑말랑한 질감의 기억은 당대의 가난을 향수할 수 있을 만큼 아련하게 다가온다. '제빵왕 김탁구'가 처음 그려낸 정서는 바로 이 가난한 시대에 맡았던 빵의 향기처럼 유혹적이면서도 처절하다. 가난은 폭력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김탁구(아역 오재무) 모자를 삶의 바깥으로 밀어낸다. 그런 탁구를 다시 본래 자리로 돌아오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그 배고팠던 시절에 코를 자극했던 빵의 기억이다. 그가 팔봉빵집으로 들어오기까지의 세월은 가난이 몸에 배어 배고픔을 잊기 위해서는 뭐든 했던(그래서 그것이 심지어 '생활의 달인'을 만들었던) 시대를 함축한다.

김탁구(윤시윤)가 경합에서 첫 과제로 받은 '세상에서 가장 배부른 빵'이라는 주제는 이 시대의 감성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김탁구는 자신의 배고팠던 시절을 떠올리며, 시장통의 한 아이를 위해 빵을 만든다. 팔봉(장항선)선생의 말처럼 이 과제는 '남을 생각하는 마음'을 시험하는 것. 이 과제에서 탁구에 의해 만들어지는 옥수수 보리밥 빵은 기억 속 서랍장에 넣어두었던 가난했던 보릿고개의 기억 한 자락을 끄집어 올린다.

그렇게 돌아온 김탁구는 차츰 다양한 빵을 실험하는 일에 재미를 느끼기 시작한다. 적당하게 숙성시켜야 맛을 내는 발효과정이나, 적절한 습도를 조절해야 빵을 제대로 구울 수 있다는 노하우를 배워나가면서 김탁구는 빵 만드는 일에 희열을 느낀다. 드라마의 시대로 80년대를 상정하는 이 시기에 김탁구는 이제 일이 그저 생존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다. 그저 배고픔을 없애는 빵에서 이제는 건강까지 생각하는 빵을 만들면서 그 도전이 가진 가치를 깨닫기 시작한다.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빵'이라는 경합에서의 두 번째 과제는 이 시대의 감성을 담는다. 생존을 넘어서서 새로운 세계에 대한 끝없는 도전은 이 과제에서 탁구와 마준(주원)으로 하여금 이스트 없는 빵을 만들게 한다. 그리고 그 도전은 좀 더 좋은 빵(맛도 좋고 건강에도 좋은)을 만들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기술혁신을 통한 성공에 몰두하던 8,90년대 경제상황을 돌아보게 한다. 당대에 사람들의 소비가 단지 기능적인 것 이외에 부가적인 가치들에 시선을 빼앗기고 있었듯이.

그리고 팔봉 선생이 죽은 후 유지처럼 남겨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빵'은 현재는 물론이고 미래의 가치를 빵에 담아낸다. 이제 이 시대의 가치는 살아남기 위한 생존도 아니고 성공을 위한 도전도 아닌 스스로 느끼는 행복이다. 남을 생각하는 마음만큼 자신 스스로가 즐거워야 그 마음이 온전히 빵에 담겨져 맛을 낸다는 것을 김탁구는 알게 된다. 그래서 그는 팔봉 선생의 부고에 영업정지까지 맞은 팔봉 빵집에서 아침 일찍 일어나 즐거운 마음으로 빵을 굽는다. 팔봉 빵집 식구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여 즐겁게 담소하며 먹는 빵, 그것이 문제로 제시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빵'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팔봉 선생이 낸 세 가지 과제는 우리 시대의 흐름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첫 번째 과제는 가난의 시대를 담고, 두 번째 과제는 도전의 시대를 담았다면 마지막으로 제시된 과제가 담아낼 것으로 요구하는 것은 행복의 시대다. 이것은 빵으로 시대를 풀어낸 '제빵왕 김탁구'만의 독특한 시대극이 거둔 성과다. 그저 시대의 역사적 사건들을 나열하기보다는 빵이라는 맛과 향으로 그 시대를 맛보게 한 것. '제빵왕 김탁구'가 꺼내놓은 빵들에서는 우리가 살아왔던 시대의 향기가 느껴진다.

'7일간의 기적', 우리에게도 기적인 이유

김제동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일주일 간 컨테이너에 살고 있는 네 식구를 위한 집을 찾아헤매던 그에게 선뜻 자신의 집을 내주겠다는 집주인의 진심을 느꼈기 때문이다. 김제동을 바라보는 PD도 눈물을 참지 못했다. 비록 마당에는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풀들이 무성하고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은 낡았지만, 그 집이 컨테이너에 살고 있는 네 식구에게는 어떤 의미인지를 잘 알기 때문이었다. 처음 유재석이 기부한 선글라스 하나로 시작해서, 그 선글라스가 수많은 물건으로 교환되고 변신해 결국은 집으로 변하는 이 기적 같은 일은 '7일간의 기적'이 매주 우리 앞에 보여주는 마술이다.

우리 주변에 넘쳐나는 물건들. 너무 흔해서 때론 있는지조차 몰랐던 그 물건들이 우리를 이토록 감동시킬 수 있을까. '7일간의 기적'은 '물물교환'이라는 방식을 통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어떻게 기적 같은 기부와 나눔이 일어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프로그램이다. 왜 하필 '물물교환'일까. 화폐 경제 사회 속에서 가격이라는 수치로만 가치매겨지는 물건은 '물물교환'이라는 조금은 구닥다리의 방식을 통해 가치가 새로 매겨진다. 누군가 사용하던 만년필이 장인의 다기와 교환되고, 누군가의 캠코더가 일년 내내 어떤 이가 자식처럼 키운 마늘과 교환될 때, 물건들의 가치는 수치를 넘어선다.

대부분의 물건들이 그렇듯, 구매할 때는 수치로 가치매겨지던 것도 사용하면서 저마다의 이야기들이 그 물건에 새로운 가치로 덧입혀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물건과 물건이 교환되는 순간, '7일간의 기적'은 단지 그 수치적인 가치가 교환되는 것을 바라보지 않고, 그 물건 뒤에 숨겨진 이야기들에 천착한다. 40여만 원에 달하는 야구 글러브가 가치 있는 것은 그 가격 때문이 아니라, 그 글러브를 처음 끼고 마운드에 섰던 주인의 마음과 경험치 때문이다.

이 기부 프로그램이 기적을 일으키는 것은 그래서 어떤 작은 물건이 수혜자들에게 간절히 필요한 거대한 물건으로 변신하는 그 결과에 있는 것이 아니다. 작은 물건들이 다른 물건으로 변화할 때 거기에 담겨지고 중첩되는 따뜻한 이야기들이 하나의 거대한 흐름을 만들어낼 때, 그래서 우리가 우리 주변에 있는 물건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될 때 그 기적은 일어난다. 결과가 아니라 과정 속에 기적이 있다는 말이다.

사실 '느낌표'나 '일밤'에서 사회 공익을 위한 프로그램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7일간의 기적'을 돋보이게 하는 것은 이 프로그램이 가진 담담한 시선 때문이다. 흔히들 수혜자의 힘겨운 삶 앞에 눈물을 흘리고 그 동정적 시선을 기반으로 카메라의 위력을 과시하던 기부 프로그램들과는 달리, '7일간의 기적'은 기부자와 수혜자 사이에 수직적인 시선이 없다. 수평적인 눈높이로 위가 아니라 옆자리에 서서 수혜자를 동등한 눈높이로 바라보는 김제동이라는 MC의 시선은 '7일간의 기적'이 가진 진정한 가치를 드러낸다. '물물교환'이라는 방식은 기부가 가진 일방성을 교환이라는 쌍방향성으로 바꿔놓음으로써 이 수평적 시선을 가능하게 해준다.

그리고 나아가 이 '물물교환'을 통해 목도하게 되는 물건이 가진 가치의 재배열은,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생각을 바꿔놓는다는 점에서, 이 '기적'은 단지 TV 속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물건이 더 이상 부의 증명이거나 소유의 욕망으로 존재하는 교환가치가 아니라 본래 있었던 사용가치를 복원하는 지점에서 우리는 생각하게 된다. 내가 가진 물건이지만 다른 사람이 가진다면 더 큰 가치를 가질 물건은 무엇일까. '7일간의 기적'이 제안하는 이러한 생각의 전환은 어쩌면 이 프로그램이 사회에 전하는 가장 큰 기적일 것이다. 그래서 매주 '7일간의 기적'이 방영되는 1시간 동안 우리들은 우리가 변화하는 기적을 체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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