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최근 드라마 최대 이슈는 아무래도 사극열풍의 주역인 ‘주몽’과 ‘연개소문’이 될 것이다. 그 중 ‘주몽’의 인기는 실로 대단한 것이어서 저 월드컵 시즌에도 식지 않는 열기를 과시했고 월드컵이 끝나자 마의 시청률 40%를 넘겼다. 심지어 휴가철을 맞은 지금에도 여전히 35% 전후의 시청률을 유지하는 괴력을 보이고 있다.

월드컵도 휴가철도 누르지 못한 ‘주몽’의 독주로 인해 타 방송사의 월화드라마는 아예 시작도 하기 전에 전의를 상실하고 있다. ‘주몽’의 강력한 견제자로 등장했던 ‘연개소문’ 역시 역부족이었다. 간신히 20% 정도의 시청률을 유지하던 것이 휴가철을 맞아 17%대로 떨어지는 수난을 겪고 있다. 이렇게 되자 고개를 드는 것이 주몽의 매너리즘이다.

고산국 소금산 모험에서부터 불거진 이 매너리즘의 정체는, 한 단계씩 문제를 해결하며 자신을 성장시키던 주몽의 독특한 영웅상이 과거의 영웅상으로 퇴행하는 과정에서 비롯됐다. 해모수 밑에서 자신의 처지를 괴로워하면서 스스로를 갈고 닦던 주몽의 모습은 사라지고 이제 주어진 운명으로서의 주몽의 모습이 전면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운명이 주몽에게 드리워지자 그는 살아있는 이 시대의 영웅이 아닌 과거의 무기력한 운명적 영웅으로 변질되었다.

소금산 모험에서 주몽이 한 역할이라고는 어머니 유화부인이 했던 소금산에 대한 옛이야기를 떠올렸다는 것과 그 곳 주민을 만나보고 모험을 떠나기로 결정했던 것뿐이었다. 무모하기 이를 데 없는 산채로의 침입에서 그가 얻은 건 비적들에게 포획되는 것이었다. 그를 구해내는 건 소서노며, 소금산까지 가게 되는 것 역시 소서노의 역할이 컸다. 여기서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적된 것은 소금산의 소금을 얻는 과정을 그저 과거 유화부인과의 고리에서 연유된 운명으로 그렸다는 점이다.

주몽이 운명적인 영웅이 되자, 그에 도전하는 다른 무리들(대소나 영포)은 빛이 바래기 시작했다. 운명 앞에서 도대체 그 어떤 도전이 가능하단 말인가. 유일하게 주몽에 도전할 수 있는 인물은 운명과 맞설 수 있는 인물, 신녀 여미을이다. 여미을은 과거 해모수의 운명을 꺾어놓은 전과가 있다.

그러자 드라마는 이제 여미을과 그녀가 말하는 ‘부러진 다물활’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간다. 부러진 다물활이 부여의 

앞길에 암운을 드러내는 하나의 신탁이자 주몽의 운명이라면, 그 사실은 금와왕을 비롯한 부여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어야 마땅했다. 금와왕이 주몽의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어야 했지만 맥이 빠진 것은 금와왕 역시 해모수와의 틀에 박힌 운명적 우정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여미을과 틀어져 있다는 것이다.

대소는 이미 흔들리고 있고, 영포는 계속 헛된 짓만 하고 있는 상황에서 주몽은 적 다운 적을 만나기가 어렵게 됐다. 그러자 드라마는 커다란 중심축을 이루는 갈등이 사라지고 소소한 인물들 간의 갈등으로 진행되면서 긴장감을 잃고 매너리즘의 늪으로 빠지게 된다.

‘주몽’이 40%라는 달콤한 시청률 속에서 매너리즘에 빠져 있는 사이, ‘연개소문’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초반 안시성 전투 촬영에 5개월이라는 시간을 보낸 연개소문이 얻은 것은 20여 %의 시청률과 전투 신으로 반복되는 장면들에 대한 비판, 들인 제작비만큼의 효과가 보이지 않는다는 비난여론이었다. ‘고구려사의 재조명’이라는 민족적 사명감을 갖고 진지한 접근을 시도한 결과로는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한 것이었다.

시청자들 중에서는 제작비 400억 원, 투입 연기자 400명, 보조연기자 1만 5000명이라는 이 기록적인 투자가 도대체 보이지 않는다는 볼멘 소리까지 들려왔다. 연개소문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 10%대로 떨어졌던 시청률은 을지문덕의 출연으로 20%를 회복했으나 이 역시 무더위라는 복병을 맞아 17%라는 최악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연개소문’이 처음부터 고전했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아마도 그중 ‘주몽’이라는 ‘퓨전사극이 가진 강한 중독성’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주몽’은 일찌감치 시청자들을 퓨전사극의 맛에 길들여지게 했다. 작가의 상상력이 자유롭게 발휘되는 만큼, ‘주몽속에는 현대를 살아가는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사랑과 성공’ 같은 욕망들이 포진되었다. ‘주몽’이라는 캐릭터를 영웅이 아닌 최대한 보통 사람과 비슷하게 시작한 것은 일단 친근하게 접근하고, 차차 감정이입이 되는 시기부터 시청자들의 주몽을 통한 대리충족을 극대화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그렇게 ‘주몽’은 월드컵이 시작되기 직전까지 이미 많은 시청자들을 그 중독성 강한 설정 속으로 끌어들였다. 시청자들은 마음 속에서 이 어리버리한 ‘주몽’을 영웅으로 ‘키우는’ 데 온통 마음을 빼앗겼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월드컵이라는 휴지기는 오히려 ‘주몽’을 키우는 결과를 낳았다. 보일 듯 보일 듯 안 보이는 그 안타까움과 기다림 속에서 ‘주몽’의 주가가 올랐던 것이다.

그리고 이 시기에 ‘연개소문’이 시작됐다. 물론 퓨전과 정통이 다르지만 같은 사극이며, 또한 소재 역시 같은 고구려사라는 점에서 ‘주몽’의 시청자들은 ‘연개소문’을 시청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깊숙이 ‘주몽’이라는 게임의 재미 속에 빠져있는 시청자들을 ‘연개소문’은 만족시키지 못했다. ‘주몽’의 아기자기한 설정과 전개에 익숙해진 시청자들은 이와는 다른 선 굵은 ‘연개소문’의 면모를 ‘디테일의 부족’으로 느낄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생각해봐야 할 것은 ‘연개소문’이 결코 ‘주몽’과 비교해 떨어지는 작품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환경이라는 굵직한 작가가 사극을 통해 늘 보여주었던 것처럼 역사 속에서의 ‘활달하고 호쾌한 사내들의 한판승부’가 때론 전쟁과 전투의 형태로, 때론 정치의 형태로 장면 장면에 잘 녹아들어 있었다. 시청자들이 느끼는 ‘디테일의 부족’은 아마도 ‘주몽’에는 있으나 ‘연개소문’에는 잘 나타나지 않는 ‘멜로 라인’이라든가, ‘성공에 대한 단계’ 같은 것일 가망이 높다.

하지만 이건 애초부터 이야기의 방향이 틀린 것이다. 어느 정도 상상력이 들어있는 것은 둘 다 마찬가지지만 ‘연개소문’은 역사의 흐름을 축으로 흘러가는 드라마인 반면, ‘주몽’은 역사보다는 한 ‘영웅의 탄생’을 그 주요한 축으로 잡아가는 드라마인 것이다. 만일 ‘주몽’이라는 드라마가 없는 상태에서 ‘연개소문’이 방영되었으면 어땠을까. 불을 보듯 ‘연개소문’은 거칠 것 없는 저 시청률의 국경을 넘어 중원을 달리고 있을 것이다. ‘주몽’이 미리 만들어놓은 강한 퓨전 사극의 중독성은 결과적으로 역사 중심으로 풀어 가는 ‘연개소문’을 힘겹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이 모든 것이 ‘주몽 탓’이라고 하기에는 ‘연개소문’에도 나름의 허점이 많다. 지금 현재 ‘주몽’이 걷고 있는 매너리즘의 길을 꿰뚫고 들어갈 만한 새로운 구석이 별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스펙터클과 민족주의에 대한 소구는 반복되면 반복될수록 힘이 약화되기 마련이다. 기왕에 민족주의적 영웅을 그려내는 드라마라면 역경과 고난이 있어야 하며, 눈에 보이는 강력한 적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연개소문’에는 아직까지 그럴 듯한 적이 보이지 않는다. 수문제는 황후에게 쥐여 사는 노망난 노인처럼 그려지며, 전투에 나가면 연전연패하는 양량은 자기감정을 절제하지 못하는 어린아이처럼 그려진다. 수양제는 좀더 교활한 면모를 가졌지만 아직까지 고구려의 적으로 등장하지는 못하고 있다. 1,2회에서 보였던 당태종과 같은 카리스마를 보이는 이는 아직 없다. ‘주몽’에서 주몽과 대적할 적이 없는 것처럼, ‘연개소문’ 또한 마찬가지다. 고구려는 연전연승이고 수당은 연전연패, 이제 드라마 속에서 전쟁의 승패는 운명적이 된다.

여기에 더 복잡한 것은 ‘연개소문’의 고전과 ‘주몽’의 매너리즘이 각자의 문제에서 머물지 않고 서로 영향을 주고 있다는 점이다. ‘주몽’과의 차별화 전략으로서 ‘연개소문’은 계속해서 전쟁장면을 통한 민족주의적 영웅을 부각하고 있으나 이것은 도리어 ‘연개소문’의 부진을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 그것은 반대로 매너리즘에 빠진 ‘주몽’을 살리는데 일조하기도 한다. 본래 중독성이라 하면 새로운 자극이 계속 해서 등장해야 그 기조를 유지하며 나가기 마련이다.

그런데 ‘주몽’에 있어 새로운 자극을 한 회도 쉬지 않고 연달아 제시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럴 때마다 ‘연개소문’이라는 정통사극을 통해 다시금 ‘주몽’의 중독적 가치를 재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마치 심하게 빠졌지만 익숙해진 연애에서 상대방의 가치를 잊고 있다가, 다른 사람을 만나 그 가치를 다시 알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연개소문’이 주말에 포진하고 바로 이어 ‘주몽’이 월화에 포진한 이 기막힌 상황은 ‘주몽’에 대한 기대감을 더 키워놓는 절묘한 장치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

‘연개소문’이든 ‘주몽’이든 각자 따로 떼어놓고 보면 기대 이상의 작품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현재 이 두 드라마가 서로에게 주는 묘한 영향력 속에서, 양자가 동반추락의 길을 걷지 않으려면 드라마라는 장르의 본질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드라마는 갈등이며, 갈등에는 반드시 주인공과 상응할만한 강력한 적을 필요로 한다. 시청자들이 보고 싶은 것은 갈등을 스스로의 힘으로 헤쳐나가는 영웅이지, 이미 운명으로 정해진 영웅이 아니다.

주몽의 인물론

영웅이라는 말은 시대와 나라에 따라 그 의미가 다르다. 영웅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 신에 도전하는 인물로서 숭배의 대상이 되기도 했고, 삼국지나 각종 전쟁에서 보여지듯 전쟁지도자나 정복자의 의미를 갖기도 했다. 또한 영웅이 포괄하는 범위는 넓어서 때로는 순교자, 과학자 혹은 예술가가 영웅이 되기도 했다. 이렇게 시대와 나라에 따라 다양한 의미가 존재하는 것은 당대에 살아가는 소시민들이 영웅이라는 ‘현실을 뛰어넘는 이상적 존재’에 투영하는 의미가 다양하기 때문이다.

이제 영웅이라는 말은 월드컵에 나간 축구선수일 수도 있고, 기술적 발견을 해낸 과학자가 되기도 한다. 그것은 심지어 연예인이 되기도 하며, 작게는 가족을 지키는 부모가 되기도 한다. 그만큼 영웅은 이제 저 멀리에서부터 우리 옆으로 찾아온 것이다.

‘주몽’이라는 드라마에 등장하는 주몽이라는 영웅은(본래 역사적 인물로서의 주몽과 드라마 속 주몽은 다르다) 바로 이런 점에서 이 시대의 영웅이라 할만하다. 역사적 사료에 보다 충실한 정통사극이 아닌 퓨전사극을 표방한 ‘주몽’은 보다 더 폭넓게 현대인들의 욕망을 사극이라는 그릇 속에 담아 넣었다. 그러자 주몽이라는 역사적 인물은 역사와 민족이라는 무거운 갑옷을 벗어버리고 현대인들의 욕망을 대변하는 영웅으로서 재탄생되었다. 민족주의 영웅이 될 것 같았던 ‘주몽’은 현대인들의 욕망을 대변하는 인물이 되었다.

드라마는 완성된 영웅에서 시작하지 않고, 소시민이었으나 차츰 영웅이 되어가는 과정에 천착한다. 이것은 현대인들의 영웅관과 상당부분 맞닿아 있다. 과거의 영웅이라면 절대적인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했지만, 지금은 보다 인간적이고 친근한 영웅을 희구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의 영웅이 손에 잡히지 않는 존경의 수직적인 대상이었다면, 현대의 영웅은 손에 잡힐 것 같은 그래서 때로는 질투가 나기도 하는 수평적인 대상이다. 드라마는 절묘하게 초기 해모수라는 과거 형태의 전형적 영웅을 등장시켜 안심시킨 다음, 주몽이라는 현대적 영웅을 그 테두리 안에 넣고 조금씩 키워나간다.

카리스마를 걷어내자 주몽은 이제 대화와 타협을 하는 이 시대의 인간경영자가 된다.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하지 않고 주변을 살피면서 조금씩 주변인물들을 끌어들여 일을 성사시킨다. 주몽의 이런 주도면밀함은 때론 그를 조금 소극적인 인물로 보게 만든다. 차라리 그의 어머니 유화부인이나 그를 돕는 소서노라는 여자 영웅들은 오히려 더 주체적이다. 그럼에도 주몽이 이들을 장악하는 이유는 우위에 있는 인간경영 능력 때문이다.

주몽은 이러한 능력을 가지고 역사적 영웅이 빠질 수 있는 민족주의적 환타지라는 함정을 피해나간다. 나라를 구원하는 영웅은 보기에 속시원할 지는 모르겠지만 오히려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은 채, 이루어낸 것 같은 환타지만 제공할 뿐이다. 드라마의 고구려 열풍이니, 영화 ‘한반도’니 하는 민족주의의 바람이 거센 요즘, 조금은 인간적인 영웅, 주몽이 주목받는 이유는 그가 오히려 그 민족주의의 환타지를 깨는 영웅이기 때문이다. <GQ>

괴물이 재난영화처럼 보이는 이유

개봉 전부터 화제를 불러 일으켰던 그 영화가 베일을 벗었다. 괴물의 모습이 궁금한 것은 당연지사. 고질라 만큼 거대하지도 않고, 에일리언처럼 작지도 않은 그저 아담한 크기의 괴물은 무엇이든 삼켜버릴 수 있는 거대한 입과, 손처럼 자유롭게 움직이는 꼬리 그리고 뒤뚱뒤뚱 걸어갈 때나 사용될 법한 다리가 위협적일 뿐이다. 심지어 축축하게 젖은 눈과 조그마한 공간에 벽을 보고 웅크리고 앉아 있는 모습은 슬퍼 보이기까지 한다.

물론 이것은 객관적으로 봤을 때 얘기다. 영화 속으로 빨려 들어가면 그 모습은 관객들을 공포와 경악으로 몰고 가는 영락없는 괴물의 모습으로 돌변한다.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는 긴장 속에 스크린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영화가 끝나고 나면 괴물의 정체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 불쌍한 괴물을 괴물답게(?) 만든 것은 사실 괴물 그 자신이 아니고, 괴물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고 말이다.

봉준호 감독은 장르를 잘 활용하는 감독으로 유명하다. 여기서 잘 활용한다는 것은 장르가 가진 속성을 이용해서 그 장르를 파괴하는 능력을 말하는 것으 통해 전혀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편의적으로 괴물을 구분한다면 어떤 장르가 적합할까. 괴물이 나왔으니 에일리언이니 고질라, 프레데터 등등의 괴수영화의 한 부류로 봐야 할까. 그러나 영화는 여기서 머물지 않는다. 영화는 블랙코미디, 가족극, 정치극 등등 수많은 요소들을 끌어안고 있다.

아마도 이 영화가 칸느에서 상영되었을 때, 그것을 본 전 세계인들은 괴물에 저마다의 의미를 부여했을 것이다. 괴물이 단순히 서스펜스와 스릴러, 공포를 곁들인 영화라면 불가능했을 이 의미부여를 가능하게 만든 것은 괴물이 하나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그 상징은 전쟁이 되기도 하고, 폭력이 되기도 하며, 부패한 권력이 되기도 한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상영되고 있는 괴물이 재난영화처럼 보이는 것은 당장 수해로 인해 눈앞에 펼쳐진 상황이 괴물의 영화 속 상황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수마가 할퀴고 간 도로는 마치 엿가락처럼 휘어있고, 자식처럼 키웠던 작물들은 하룻밤 새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무런 경고도 없이 갑자기 전기가 나가더니 벽이 무너지면서 토사가 집안으로 쓸려 내려왔다. 어제까지 함께 웃고 얘기하던 아들, 딸들은 강물처럼 도로를 질주하는 빗물에 쓸려 사라졌다. 몇 년 전 똑같은 수해를 입은 주민들은 당시 제대로 예방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해 분통을 터뜨렸다. 한번의 재해는 자연재해라고 해도 연달아 벌어지는 재해는 인재가 되었다.

어느 날 갑자기 벌어진 수해처럼 괴물은 대낮에 버젓이 한가로운 한강변을 습격했다. 사람들은 밟히고 찢겨지고 잡아먹혔다. 그 가운데 우리의 소시민 박강두네 가족이 있었다. 강두는 자신의 눈에 집어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 현서를 괴물에게 빼앗겼다. 그러나 합동분향소에서 오열하는 사람들이 직면한 것은 바이러스 감염이 두려워 행해지는 격리조치이다. 저 많은 헐리우드 괴수영화들이 보여주려는 것처럼 괴물이라는 재해(물론 괴물은 탄생부터가 환경오염으로 인한 인재이다)와 그에 대한 대결은 이 영화가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다. 이 영화는 이 재해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에 대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재해에 대한 대처는 미온적이거나 정치적이다. 실제 괴물을 찾아 나서거나 해치워야할 군 병력들은 오히려 사람들의 현장접근을 막기 위해 동원된다. 괴물의 실체는 분명 있지만, 그것보다 더 두려운 것은 그것이 가져올 사회적 파장이다. 그래서 그들이 취하는 제스추어는 있지도 않은 바이러스라는 새로운 공포를 주입하는 것이다. 박강두 가족은 괴물보다, 먼저 사건을 축소 왜곡하려는 정부와 맞닥뜨리게 된다. 이렇게 재해를 정치적으로 해결하려하는 동안에도 괴물은 한강변에 출몰하며 또 다른 재해를 일으킨다. 기물은 파괴되고 사람들은 죽어나간다.

이들 괴물과 싸우는 소시민, 박강두네 가족의 이야기는, 최근 피해가 가장 심했던 인제 지역에 나타난 8명의 산악인을 연상시킨다. 당시 고립된 주민들은 헬기를 보내달라고 했지만 비 때문에 헬기는 뜰 수 없었다. 도저히 사람이 들어갈 수 없는 길을 뚫고 들어온 산악인 8명은 2박3일 동안 무려 50여 명의 주민들을 구하고 영웅 대접하는 주민들에게 오히려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일상생활로 돌아갔다고 한다.

영화 속 박강두 가족이 괴물과 싸우는 이유 역시 소시민에 무슨 영웅이 되고 싶어하는 일이 아니다. 단지 자신들의 손주이자, 딸이자, 조카가 괴물에게 잡혀갔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 소시민들은 도대체 무얼 갖고 싸울 것인가. 저 산악인들이 자신들이 평소 쓰던 등산장비를 사용했던 것처럼(어떨 때는 이것이 헬기보다 더 유용하다) 가족들이 사용하는 무기도 그런 것들이다.

그것은 돈을 주고 구입한 총은 예비군 훈련장에도 사용하지 않을 것 같은 낡은 총이며, 양궁선수로 등장하는 박남주(배두나 분)가 쓰는 활, 그리고 운동권 출신이었던 박남일(박해일 분)이 사용하는 화염병이다. 이걸로 어떻게 괴물을 이기겠나 싶다. 그런데도 이 무기들은 괴물과의 사투에 아주 유용하다. 사실은 괴물 자체가 그다지 위협적이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로써 결국 박강두 가족이 싸워야 했던 것의 실체가 드러난다. 탱크 한 대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정부와 해결책을 주는 듯 접근해 괜한 내정간섭과 실험만 일삼는 미국이 그들이 싸웠던 진짜 괴물이었던 것이다.

영화는 수많은 우리 사회의 모습을 비춰낸다. 현장에 들어가기 위해 공무원에게 돈을 집어줘야 하는 상황이라든지, 격리되어 있는 병원에서 이유도 말하지 않고 검사를 해야하니 아무 것도 먹지 말라는 모습이라든지, 조사랍시고 행해지는 고문이라든지, 휴대폰 강국에 맞게 괴물의 은신처에서 제대로 된 휴대폰을 기다리는 현서나 통신회사에 있는 친구 빽으로 통화기록을 빼내는 장면 등등... ‘괴물’이라는 제목을 갖고 있기에 이런 장면들이 정작 괴물보다 더 많이 등장하는 면면을 보면서 관객들은 진짜 괴물을 보는 듯한 묘한 카타르시스를 얻기도 했을 것이다.

최근 반환된 미군기지의 심각한 오염 사태 또한 영화 속 괴물의 탄생과 맥락을 같이 하면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 미8군에서 버린 맹독성 포르말린이 한강으로 스며들면서 탄생하는 괴물처럼, 사건은 이미 터졌거나 진행중이지만 이에 대한 대처는 항상 뒷전이다. 백화점이 무너지고, 다리가 무너지고, 가스가 폭발하는 재난의 발생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잉태되어 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재난이 터졌을 때, 이 땅의 정치인들은 어떻게 대처했던가. 혹여 사태를 축소하거나 오히려 사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지는 않았던가. 봉준호 감독의 작은 ‘괴물’이 더 무섭고, 더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우리 사회라는 한강에서 잉태되고 있는 괴물의 존재 때문이다. 이것은 저 영화 속 괴물처럼 가상이 아니고,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이 몸서리쳐지기 때문이다.

유오성의 복합연기

유오성의 연기를 보면 참 복합적(?)이란 생각이 든다. 연기라는 것이 행복하면 웃고, 슬프면 울고, 화가 나면 화를 내면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유오성은 그게 다가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 수많은 감정과 심리에 따라 표정과 손짓, 행동이 어찌 다 똑같을 수 있을까. 유오성의 섬세하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는 복합감정의 표현은 자칫 단순할 수 있는 드라마에 미묘한 힘을 실어주고 있다. 그런 점에서 ‘투명인간 최장수’는 유오성이 가진 이런 힘이 백분 발휘되고 있는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편의적인 것이지만 ‘투명인간 최장수’를 장르적으로 구분해보면 어떨까. 드라마 첫 회의 장면들은 이 드라마가 마치 조폭이 등장하는 형사액션물이라는 착각에 빠질 정도였다. 쇠파이프와 야구방망이를 든 일단의 조폭들과 대결을 벌이는 최장수의 모습은 과거 곽경택 감독의 영화, ‘친구’를 연상케 했다. 그런데 그 액션에는 무언가 다른 점이 있었다. 심각하다기 보다는 우스꽝스런 코믹이 있었다는 것이다. 늘 얻어터지고 깨지면서도 일상으로 돌아와서는 바가지를 긁히는 최장수의 모습에 시청자들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데 좀더 드라마가 진행되자 장애를 겪고 있는 아이와 아버지로서의 사랑이 등장하며 휴먼드라마를 포함시키더니, 아내 오소영의 옛 남자친구 하준호가 등장하면서 멜로드라마로 연장된다. 물론 이 드라마의 기조는 휴먼드라마가 맞을 것이다. 하지만 이 속에는 액션과 코믹, 멜로가 복합적으로 녹아있는 게 사실이다. 이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건 아무래도 유오성이 가진 연기의 힘이 아닐까.

오소영을 앞에 둔 최장수의 얼굴은 웃고 있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를 앞에 두고 있기에 웃는 것이다. 그런데 오소영 옆에는 하준호가 있다. 그리고 오소영은 선언한다. “난 지금껏 단 한번도 당신과 행복했던 적이 없었다”고. 그러자 최장수의 얼굴은 순간적으로 찡그려지면서 폭발한다. 그는 애꿎은 하준호의 차를 부순다. 그리고는 다시 애원하는 얼굴로 바뀐다. “나 정신차리게 해주려고 그러는 거지? 거짓말이지?” 그렇게 다시 달래듯 대사를 건넨 유오성의 웃는 얼굴에서 눈물이 흘러내린다. 단 몇 분도 되지 않는 이 장면 속에서 유오성이 한 연기는 행복과 슬픔, 분노, 회유 같은 단 한 마디로 표현하기 어려운 심리의 표현이었다.

최장수가 여관방 욕조에 장미꽃잎을 뿌리는 장면은 섬뜩한 슬픔을 안겨주었다. 바보 같은 얼굴로 손에 피가 나는 지도 모르고 꽃잎을 따서 뿌리는 장면은 알츠하이머라는 막연한 병에 대한 실감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 장면에서도 유오성은 멍한 표정으로 바보처럼 웃다가 깨어나서는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 슬픔에 빠지는 연기를 선보였다.

이것은 최장수가 오소영에게 위자료라며 돈을 건네주는 장면에서도 등장한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식사를 하자”는 최장수에게 오소영이 “약속이 있어서 가봐야 한다”고 하자, 실망스럽지만 그걸 숨기는 얼굴의 최장수가 봉투를 건넨다. 오소영은 “받지 않겠다”하고 최장수는 “단지 내가 미안해서”라고 말하며 봉투를 건네준다. 헤어지는 장면에서 횡단보도 건너편 오소영에게 최장수가 소리치는 장면은 아마도 다른 연기자가 했다면 실소가 나왔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찌 보면 간지러운 대사, “정말 나랑 결혼하면서부터 행복한 적이 없었어?”라는 그 외침 속에 그간 최장수가 속으로 웅크려 놓았던 수많은 감정들이 녹아들어 있었다. 고개를 가로젓는 오소영의 그 부정을 보기 위해 뛰고 또 뛰어야 하는 최장수의 모습에서 아마도 대부분의 시청자들은 눈물을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웃으면서 울거나, 울면서 웃거나 하는 연기가 시청자들에게 공감을 일으키는 것은 그것이 실제 인간관계에서의 진정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드러내놓고 그렇게 감정을 표현하지는 않겠지만 어떤 일을 겪었을 때 우리가 마음 속에 갖는 건 이러한 복합적인 것이지 단순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연기는 몸과 동작으로 그 감정들을 표현해내야 하는 것이기에, 실제로 웃으면서 울어야하는 것이다. 물론 그 장면을 통해 시청자들은 자신이 경험했던 유사한 상황에 공감하게 된다.

상황과 감정을 단선적으로 이끌어 가는 트렌디 드라마들은 이제 점점 설득력을 잃고 있다. 대신 사랑하면서도 미워하고, 분노하면서도 굴종하고, 군림하면서도 고뇌하는 복합적인 감정으로 진정성에 호소하는 드라마들은 설득력을 얻고 있다. ‘돌아와요 순애씨’에서 섹시하면서도 푼수 같고, 털털해 보이면서도 섬세한 연기를 펼치고 있는 박진희에 대한 극찬 역시 그 리얼함 이면에 ‘그 상황이라면 충분히 그랬을만한’ 진정성에 있었던 건 아닐까. ‘투명인간 최장수’라는 제목에서 풍기듯이 유오성이 가진 힘은 비극을 희극으로도 끌어안는, 그럼으로 해서 비극을 더 강력한 비극으로 만드는 데 있을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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