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시여>가 보여준 현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SBS 주말 드라마 ‘하늘이시여’가 끝났다. 끊임없는 연장방송, 억지스럽기까지 한 설정, 연속되는 자극적인 장면들, 특정 직업인들에 대한 비하발언 논란, 심지어는 국정홍보 논란까지 드라마가 할 수 있는 모든 논란의 중심에 섰던 ‘하늘이시여’. 하지만 논란과 함께 이 드라마는 30%∼40%를 오가는 놀라운 시청률을 기록했다. 시청자들은 욕하면서도 이 드라마 채널을 돌리지 못했다는 얘기다. 무엇이 시청자들을 그렇게 TV 앞에 모이게 만들었을까. 드라마의 완성도나 각종 논란과 욕에 가까운 비판들은 일단 접어두고 ‘하늘이시여’가 우리 사회를 움직였던 그 파괴력의 원천은 도대체 뭐였을까. 그것들은 우리네 현실 속에서 가족 간에 존재하는 병적인 관계에서 비롯된다.

피끓는 고부간의 환타지 제공
‘하늘이시여’가 가진 가장 큰 파괴력은 우리 사회에서 ‘며느리-시어머니 : 딸-친어머니’관계에 대한 강력한 환타지를 만들었다는데 있다. 우리 사회에서 고부간의 갈등은 과거 ‘며느리의 시집살이’에서 최근에는 ‘시어머니의 시집살이’까지 이어져왔다. ‘하늘이시여’는 바로 이 상황에 주목하고 그 관계를 역전시켰다. 며느리를 딸로 대치하고, 시어머니를 친어머니로 대치하자 상황은 정반대가 되었다.

시청자들은 자경과 영선이 실제로 모녀관계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그 관계에 ‘며느리-시어머니’등식을 집어넣어 스스로 환타지를 만들었다. ‘저런 친어머니 같은 시어머니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저런 딸 같은 며느리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딸을 며느리 삼는다는 설정은 우리 사회가 가진 가장 강력한 환타지를 건드리고 있기 때문에 그 무리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시청자들을 TV앞에 끌어들였다.

우리는 무엇에 눈물 흘린 걸까
‘하늘이시여’ 마지막 회는 눈물의 바다였다. 그런데 그 눈물은 대부분이 참회와 용서를 비는 것이었다. 누가 누구에게 무엇 때문에 용서를 비는 걸까. 용서를 비는 대상은 바로 자경이다. 드라마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다) 자경에게 용서를 비는 것은 사실은 그다지 납득이 가지 않는다. ‘고통받고 있는 딸을 보다못해 며느리로 삼았다’는 것이 어머니가 용서를 빌어야할 일인가. 그 손주딸(자경)과 함께 살기 위해 그 엄마(영선)를 자기 자식(홍파)과 결혼시킨 것이 용서를 빌어야할 일일까. 그 사실을 숨긴 것이 용서를 빌어야 하는 일일까. 일이야 어떻든 결과적으로는 자경을 위해 그리 한 일이 아닌가.

실제로 용서를 받아야할 인물은 자경보다는 왕모가 맞다. 왕모는 자경을 며느리로 삼으려한 어머니에게 배신감을 느껴야 마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모는 모든 걸 용서하며 오히려 자경과 영선을 감싸안는다. 왕모는 영선에게 이렇게 말한다. “장모님이란 말은 기대하지 마세요. 저한테는 어머니니까요.” 왕모는 자경에게 어머니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럼 나는 고마워. 당신을 낳아주셨고, 나를 길러주셨으니까.” 또 이렇게 말한다. “당신한테 미안해. 당신이 가져야할 행복을 내가 가졌던 것 같아서.” 실제로 용서받아야할 인물이 오히려 자경에게 미안하다고 하자, 실제로 이 모든 용서는 자경이 받아야할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청자들은 드라마 속의 어르신들이 줄줄이 자경에게 용서를 비는 모습에 감동을 느낀다. 특히 왕모의 애절하기까지 한 자경에 대한 사랑은 시청자들의 가슴까지 먹먹하게 만든다. 그런데 이것은 드라마 속 캐릭터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엮어진 감정이 아니다. 시청자들이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은 엉뚱하게도 드라마 속이 아닌 드라마 밖이다. 그동안 자신이 받았던 시집살이가 주마등처럼 눈앞을 지나간다. 어떻게 저런 남편이 저런 사위가 있을까 하는 점이 시청자들을 울게 만든다. 시누이 행세를 했던 슬아가 자경이 자신의 언니임을 깨닫고 과거 자기가 했던 행적을 떠올리며 어찌할 바를 모르는 장면에서는 통쾌함마저 느낀다. 자경에게 줄줄이 용서를 구하는 장면을 보며 우리가 눈물을 흘렸던 것은 드라마에 공감해서라기보다는 우리네 현실을 거기서 보았기 때문이다.

누가 누구에게 용서를 비는 걸까
‘하늘이시여’의 미덕은 바로 우리네 현실 속의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겪는 동병상련의 고통과 악연을 포착한 점에 있다. 자신이 똑같은 시집살이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며느리에게 같은 시집살이를 반복하게 하는 현실을, 드라마는 거꾸로 뒤집어 비현실적이지만 강력한 환타지로 만들었다. 비현실적이라는 것은 강한 비판의 요소가 되지만, 그것은 또한 그만큼 강한 환타지가 되기도 한다. ‘오죽했으면 저런 상상을 했을까’하면서 비현실에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것이다.

드라마는 결국 어머니와 딸이 포옹하는 장면에서 감정이 극에 이른다. 그것은 어머니와 딸,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면서 서로를 껴안는 장면이다. 거기서 나오는 멘트는 ‘너도 이제 한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는 것이다. 시쳇말로 ‘자식 낳아봐야 안다’는 그 부분을 이제 서로 공감하게 된 것이다. 드라마 종반의 용서와 눈물의 잔치는 우리 시대 어머니와 딸, 시어머니와 며느리에 대한 작가의 직접적인 표현이다. 억지스런 장면들에도 불구하고 그 장면들에 감동이 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우리네 현실을 작가가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반증이다.

하지만 그 용서와 눈물의 잔치의 분명한 이유는, 이 드라마의 무리한 설정으로 인해 자경과 영선이 겪었던 수많은 고통들을 어떤 식으로든 해결해야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시청자들은 어떤 식으로든 그녀들에게 감정이입되어 그녀들의 고통을 똑같이 느껴야만 했다. 그 수많은 상처들을 분명하게 풀어주기 위해서는 그녀들에게 상처를 준 모든 이들의 참회가 필요했다. 드라마 속 그들의 참회와 용서는 사실, 그간 작가가 시청자들의 감정에 그어놓은 상처들에 대한 용서가 되기도 할 것이다.

당신은 며느리이자 딸이다
많은 약점과 억지에도 불구하고 이 드라마는 많은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것은 우리네 기형적인 혈연주의의 대한 질타이다. 당신은 여러 가지 호칭을 갖고 있다. 딸로도 불리며 며느리로도 불린다. 어머니로도 불리며 시어머니로도 불린다. 당신은 하나이지만 그 호칭에 따라 행동이 달라진다. 드라마 속 자경이 며느리에서 딸로, 새언니에서 언니로, 손주 며느리에서 손주딸로 바뀌는 순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깟 호칭이 뭐가 그리 대단한 것일까. 지금 당신 옆에 있는 며느리는 사실 당신의 딸이다. 당신 옆에 있는 시어머니는 사실 당신의 어머니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할 일은 단 하나뿐이다. 속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하늘이시여 우린 모두 당신의 아들딸들입니다.’ 드라마 속에서처럼 가능할 지는 모르겠지만.

<주몽>이 아우르는 다양한 세대들

세대간의 격차는 드라마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드라마는 특정 세대를 주 시청자로 겨냥하는 것이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금요드라마가 중년층을 위한 드라마로 자리매김하고, 일일드라마(8시30분대)와 주말드라마가 중장년층에 주 타킷을 설정하고 있다면, 주중드라마(월화수목 10시대)는 그보다는 젊은 세대를 겨냥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이건 온 가족이 모여 드라마 한 편을 함께 보는 일이 점점 없어진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는 MBC 드라마 ‘주몽’은 예외적인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사극이라는 장르는 현대극보다는 시청자의 폭이 넓은 게 사실이지만 이 드라마는 보다 적극적으로 모든 세대의 감성을 끌어안는 노력을 보이고 있다.

중ㆍ장년층 남성 - 금와의 카리스마! 난 아직 건재해!
4ㆍ50대 남성들은 드라마의 대중을 이루고 있는 멜로에 시큰둥하다. 젊은애들이 나와서 얽히고 설키는 드라마 속에서 자신이 감정이입할 대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별남별녀’같은 일일드라마가 시청률에서 수위를 가졌던 것은 바로 그 시간대의 채널권(온 가족이 모여 저녁을 먹으며 TV를 볼 때 누가 리모콘을 들고 있는가)을 가진 동년배 남성(여기서 중ㆍ장년 여성은 예외로 두자. 드라마에 익숙한 그분들은 사실상 모든 세대의 드라마를 끌어안는 힘을 갖고 있다)을 붙잡아두었기 때문이다. 일일드라마는 특정 세대가 주인공이 아니라 한 가족을 다룬다. 그 가족에는 어김없이 부모가 등장하는데, 젊은 세대들의 사랑이야기는 이 부모들의 품안에서 울고 웃는다. 주말드라마,‘소문난 칠공주’는 가부장적인 구조와 자극적인 내용으로 논란이 되었지만 역시 바로 그들의 감성을 끌어안는 모습으로 시청률이 상승하고 있다. 이런 드라마들을 보며 우리네 소외됐던 중ㆍ장년 남성분들은 안심한다. 난 아직 건재하다고!

하지만 이건 드라마를 보고는 싶지만 볼 게 별로 없는 중ㆍ장년 남성분들의 관성적인 선택이다. 그들이 사극에 관심을 갖는 것은 그 안에 자신이 투사할 인물들이 분명 존재한다는 것이다(사극에는 왕이나 그에 상응하는 카리스마가 늘 존재한다). 그런 면에서 ‘주몽’은 금와왕이라는 인물의 카리스마를 내세운다. 중ㆍ장년 남성분들은 금와왕의 말 한 마디에 음모를 꾸미던 이들이 쩔쩔매는 모습에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드라마 제목이 ‘금와’가 아닌 ‘주몽’이라는 점에서 금와는 한물 지나간 사이드적인 인물이지만 카리스마는 여전하다. 그의 카리스마가 발휘하는 힘은 주인공 ‘주몽’에게 더해진다는 면에서 중ㆍ장년 남성분들은 자신의 역할에 안심한다.

중ㆍ장년층 여성 - 고전적 드라마와 유화의 모성애
이 드라마는 주몽을 중심에 두고 다루고 있지만 이 드라마의 초반부에 주를 이룬 내용은 주몽보다는 주몽 윗세대인 금와와 해모수 유화의 드라마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강력한 카리스마의 해모수와 그를 사랑하는 유화, 그리고 우정과 사랑 사이에 끼어 있는 금와. 이들이 만드는 삼각구도는 고전적이면서도 강력하다.

그 강력한 불길에 기름을 붓는 것은 모성애이다. 드라마에서의 대립은 주몽과 대소의 대결양상으로 벌어지지만 그 뒤를 보면 주몽의 모친인 유화부인과 대소의 모친인 원후(견미리 분)의 왕위쟁탈전이다. 이렇게 모성과 젊은 주인공을 연결함으로써 주몽의 성공과 패배는 유화부인에 감정이입된 중ㆍ장년층 여성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된다. 과거 수많은 사극에서 등장했던 왕후들의 세자쟁탈전은 여전히 유효하다. 음모는 모성이란 이름으로 꾸며지고 그것은 사건을 만들어내며 그 사건을 해결하면서 주인공은 점점 성장한다.

30대 남녀 - 환타지와 무협지의 감성
30대들에게 무협지와 환타지는 하나의 노스탤지어다. 암울하고 답답한 독재시절, 왜소하기만 했던 현실 속의 그들은 무협지 속에서 광활한 대륙을 날아다니는 영웅이었다. 무력이 판을 치는 남성 권위주의적 사회 속에서 그들은 아련하면서도 우아하고 환상적인 환타지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드라마 ‘주몽’은 고대사라는 사료의 부족을 오히려 상상력을 동원해 풍부하게 만들었다. 중국의 무협지보다 우리의 무협지가 더 재미있는 것은 멀리 떨어져 있고 가보지 못했기 때문에 오히려 상상력을 마음대로 발휘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주몽이 가진 무협지적 요소는 도처에서 발견된다. 해모수가 주몽에게 막힌 기를 뚫어주는 장면이라든지, 무술을 가르치는 장면은 그대로 무협지의 세계를 재현한다. 비밀감옥이라는 공간이 주는 재미는 무협지 매니아들에게는 익숙한 것이다. 또한 드라마 초반부에 나왔던 ‘다물활을 찾는 모험’은 무협지적 감성이면서 동시에 중세 유럽을 배경으로 하는 환타지모험담을 닮았다.

여기에 폭발력을 주는 것은 바로 ‘주몽’, ‘해모수’같은 역사적 인물이 그 무협지와 환타지의 주인공이라는 점이다. 무협지와 환타지 세계의 주인공은 가상의 인물인 반면, 이 드라마의 주인공은 역사적 영웅이라는 점에서 시청자들의 공감은 더 커진다. 역사왜곡이냐 창의적 해석이냐 논란이 많지만 역사적 인물에 무한한 힘을 제공한 것은 이 드라마가 갖는 근원적인 힘이다. 월드컵 시즌에 맞춰져 더 힘을 발한 것은 바로 그런 애국적 요소가 한층 작용했다는 것도 간과할 수 없는 점이다.

20대 - 당차지만 나대지 않는 카리스마
‘주몽’의 캐릭터는 다른 사극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태어날 때부터 완벽한 능력치를 가진 주인공이 아닌 오히려 덜 떨어진 별 볼일 없어 보이는 캐릭터이다. 많은 젊은 시청자들은 소위 말하는 ‘폼잡는’ 카리스마에 질려 있다. 그보다는 내게 친숙하고 가까운 인물에 더 쉽게 동화된다. 선망보다는 질투가 가까운 세대들이다. 자기주장이 강하기에 너무 강한 카리스마는 ‘그래 너 잘났다!’는 식으로 무시해버리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주몽의 부족하고 인간적인 캐릭터는 그들의 감성을 끌어들이기에 부족함이 없다. 물론 그 주몽의 덜 떨어진 역할이 여전히 카리스마를 잃지 않는 것은, 그 주변에 강력한 카리스마를 발휘하는 해모수와 유화부인 금와왕의 보호막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몽의 연인이 되는 소서노라는 여자 캐릭터 역시 젊은 감성을 대변한다. 한 명도 아닌 두 명의 왕자 사이에서 ‘선택은 내가 한다’는 식의 당돌함은 동시대 여성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주기에 충분하다. 여기에 또 다른 주몽의 연인인 부용은 정반대의 역할을 해줌으로써 드라마의 균형을 맞춘다. 부용은 소서노와는 다른 운명 순응적이며 희생적인 캐릭터를 보여준다.

10대 - 게임의 감성
많은 언론에서 다루었듯이 이 드라마는 게임의 감성을 끌어안음으로써 10ㆍ20대 시청자들을 열광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드라마 속의 많은 공간에서 롤 플레잉 게임 속 익숙한 장소들을 만나게 된다. 녹색의 파란 자연공간 속에 허물어지듯 앉아있는 가옥 한 채. 그리고 거기서 뛰고 차며 무술을 연마하는 주몽은 우리가 흔히 게임 속에서 말하는 ‘능력치를 올리기 위한 노가다’를 하는 공간을 닮아있다. 무기를 만드는 철기방은 게임 속에서는 대장장이를 만나는 공간이다. 거기서 게이머들은 자신이 얻어온 아이템을 팔기도 하고 새로운 아이템을 사기도 하며 무기를 다시 재정비하기도 한다. 여기에 모팔모라는 캐릭터는 게임 속 대장장이의 유쾌하면서도 엉뚱한 역할에 잘 조응한다.

두말 할 것 없이 의상은 게임의 영향을 그대로 받았다. 롤 플레잉 게임에서 갑옷은 그 캐릭터의 능력치를 대변한다. 초기에는 누더기로 시작해서 점점 번쩍이는 갑옷으로 변해 가는 즐거움은 게임이 주는 재미 중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다. 역사 해석의 문제가 분분하지만 한나라의 철기군 복장과 금와왕과 대장군의 눈부신 갑옷은 그 자체로 볼거리이다. 아직 장군의 즉위에 오르지 못한 주몽은 평범한 의상을 입음으로 해서 이 드라마는 많은 게이머들의 감성을 자극한다. 리모콘을 계속 고정하고 있으면 주몽은 언젠가는 더 멋진 갑옷을 입을 거라고.

모든 세대 - 삼국지적 사건과 인물의 재미
‘주몽’이 이렇듯 모든 세대를 드라마라는 하나의 용광로에 쏟아 넣을 수 있었던 것은 등장하는 많은 캐릭터들에 공을 들인 덕분이다. 우리는 ‘주몽’을 읽으며 삼국지적인 재미에 빠져든다. 주몽은 야망을 숨기고 대소 앞에 무릎을 꿇을 정도로 유비 같은 외유내강형 인물이며, 대소는 단 몇 마디의 정보를 가지고도 상대편의 정황을 읽어내며 필요하면 간교한 술수도 마다치 않는 조조 같은 인물이다.

유비가 그랬던 것처럼 주몽은 그 특유의 인간성으로 많은 인물들(협보, 오이, 마리 등등)을 끌어들인다. 그가 왕실의 자손이라는 것도 비슷하다. 대소 역시 조조처럼 많은 인물을 끌어들이나 그것은 목적에 의한 것이 대부분이다. 심지어 대소는 자신의 친동생인 영포를 무시하는 모습을 보인다(이것이 앞으로 드라마 전개에 어떤 식으로 반영될 지는 의문이다). 해모수라는 캐릭터는 여러모로 보나 관우를 닮았다. 절대 카리스마와 일당 백의 정신, 게다가 죽어서까지 활약하는 인물이 해모수이다. 모팔모는 물론 장수는 아니지만 그 성격만큼은 장비를 닮았다. 이들이 엮어 가는 사건들 속에 책사들의 등장은 극의 재미를 한층 높여준다. 연타발 상단의 책사인 사용이나 부득불 같은 캐릭터는 드라마 전개에 있어 삼국지적인 긴장감과 재미를 더해준다. 현재는 부여 내에서의 암투가 대부분이지만 결국 한나라와의 일전을 남겨두고 있는 주몽에 있어 이런 재미들은 더 힘을 발할 것이 틀림없다.

주몽의 성공에는 바로 이런 모든 세대를 감싸안는 캐릭터들의 부딪침에 그 요인이 있다. 앞으로도 새로운 캐릭터들은 계속 등장할 것으로 기대되며 그것이 바로 이 드라마가 갖는 근원적인 힘이 될 것이다.

<비열한 거리>에 드러난 시스템의 문제

조폭이라는 코드가 주는 드라마틱한 이야기 속에는 강한 사회성이 들어있다. 장현수 감독의 ‘게임의 법칙’, 이창동 감독의 ‘초록물고기’, 송능한 감독의 ‘넘버3’ 모두 조폭을 다루고 있지만 그 속에서 우리는 사회의 구조를 발견한다. 그것은 권력의 문제이고 경제의 법칙이면서 결국 사회라는 시스템이 움직이는 법칙이다. 그러므로 조폭 영화는 사실상 액션도 아니고, 드라마도 아닌 사회극에 가깝다.

그렇다면 유하가 건드린 사회의 문제는 무엇일까. 그것은 조폭이라는 피비린내 나는 폭력의 현실과 바로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시스템의 권력자들에 대한 비판이다. 그 권력자들은 소위 경제인으로도 불리고, 지식인으로도 불리는 이들이다.

학생신분에서 비열한 거리로 나온 이야기
‘비열한 거리’를 ‘말죽거리 잔혹사’의 연장선상으로 보는 것은 그것이 다시 폭력을 다루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만일 유하라는 감독의 작품이 성장기를 겪고 있다면, ‘비열한 거리’는 학생신분에서 성인으로 가는 그 지난한 성장과정을 보여준다.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무채색이었지만 그래도 낭만적이었던 ‘로미오와 줄리엣’과 ‘이소룡의 영화들’이 있었다면, ‘비열한 거리’는 칼라를 얻었으나 핏빛으로 물들어 있다.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동명의 영화와, 많은 ‘게임의 규칙’류의 영화들처럼 처절해진다. 학생신분에서는 감성적으로 부딪치던 것이 이제 사회로 나오자 보다 분석적이 된다. ‘알 수 없는 분노와 슬픔’은 ‘이 갈리는 비열함에 대한 증오’로 바뀐다. ‘증상으로 나타난 폭력’은 ‘소비되는 폭력’으로 구체화된다. 영화는 폭력이 소비되는 시스템을 건드린다.

자기를 부정하게 만드는 시스템
사회가 폭력을 소비하는 시스템은 황 회장 역으로 새로운 면모를 보인 천호진과, 극중 병두로 분해 자신 앞에 놓인 두 세계(폭력의 세계와 평범한 일상)를 잘 소화해낸 조인성, 그리고 종수역을 맡아 칼날 같으면서도 동시에 마음 약한 면모를 보여주는 내면연기를 펼친 진구가 수직적인 축을 이룬다. 거기에 조인성을 중심으로 욕망과 우정 사이에 분열되는 영화감독 역의 민호역의 남궁민, 그리고 조인성의 폭력성을 혐오하면서도 그의 가녀린 면을 사랑하게 되는 현주역의 이보영이 수평적인 축을 이룬다.

영화는 이 수직적인 축과 수평적인 축을 오가면서 일상과 비일상, 평범과 비범, 폭력과 안전이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고 아주 가까이서 서로 침범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중심에 서 있는 조인성은 다양한 세상사의 이야기를 묶어두기에 적합한 캐릭터이다. 그는 가녀린 슬픈 눈빛과 강렬하고 광적인 눈빛을 동시에 보여주는 연기로, 때로는 잔혹함에 인상을 찌푸리게 하다가도 때로는 동정심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황 회장은 사실상 아버지가 없는 병두의 대부격이다. 학생신분을 벗어나 거리에 나온 병두를 어른으로 조련하는 것은 황 회장이다. 황 회장은 병두에게 시스템의 법칙을 말해준다. 그것은 “내가 얻고 싶은 것과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 얘기를 통해 병두는 어른의 세계, 즉 비열한 거리에 세워진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겪어야 하는 통과제의가 있다. 그것은 황 회장을 괴롭히는 검사와, 자신과 함께 커온 중간보스 상철을 제거하는 일이다. 그러면서 병두는 시스템의 법칙을 따라간다. 그런데 이 시스템 속에는 놀라운 자기부정이 숨어있다. 상철의 말 한 마디에 물불 안 가리고 달려들었던 병두가 시스템에 편입되기 위해 죽인 건 바로 상철이었던 것이다. 이 말은 언젠가 그 칼날이 자신에게 날아올 것이라는 걸 시스템에 들어가는 순간 인정한다는 얘기가 된다.

누가 마지막에 살아남는가
이것은 단지 병두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시스템 속에 있는 황 회장도 마찬가지고, 병두의 오른팔인 진구에게도 마찬가지 얘기다. 시스템은 인격이 없고 단지 비정한 법칙에 의해서만 움직인다. 그 불안한 시스템 속에서 그들의 자아는 모두 분열되어 있다. 황 회장은 병두의 아버지 같은 자상함을 갖고 있으면서도 병두를 죽음으로 내모는 인물이고, 진구는 병두의 말 한 마디에 죽음도 불사하는 형제 같은 인물이지만 그걸 배신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영화는 ‘라스트맨 스탠딩’ 스토리로 흘러간다. 이 영화에서 반복되는 룸싸롱 신은 “누가 마지막 노래를 할 것인가”를 보여준다. 처음 노래를 했던 이는 중간 보스였던 상철이고, 그 다음에는 병두가 노래했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황 회장이 마이크를 잡는다. 그는 마치 참회하듯 알란 파슨스 프로젝트의 ‘Old And Wise’를 부른다. 그 노래를 부르면서 황 회장 스스로도 자신이 ‘라스트맨’이라는 생각을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수평에서 수직으로 오르는 욕망 그리고 순수
반면 수평적인 틀 안에서 친구로서 다가온 영화감독 민호는 친구와의 우정과, 영화감독으로서의 성공에 대한 욕망 사이에 갈등하는 인물이다. 조폭 영화를 만들기 위해 취재를 하면서 병두와 민호는 점점 가까워진다. 재미있는 것은 가까워지면서 병두는 점점 민호와 가졌었던 우정, 의리 같은 순수의 세계, 수평의 세계로 점점 다가가는 반면, 민호는 병두가 가진 수직의 세계로 접근한다는 점이다.

영화촬영장을 찾아온 병두는 민호에게 “의리가 뭔지 확실하게 보여주는 영화”를 찍어달라고 하지만 결국 민호가 찍은 영화는 의리를 배반하는 영화가 된다. 이것은 마치 병두가 자신의 입지를 세우기 위해 치렀던 통과제의, 자신의 중간보스 상철을 제거한 것과 똑같은 사건으로 이를 통해 민호는 시스템 속으로 들어온다.

순수를 지키고 항상 수평적인 위치에 서 있는 이는 병두의 사랑, 현주 뿐이다. 그녀를 위해 병두는 모든 걸 다 버릴 수 있다고 말한다. 결국 병두가 수직적인 시스템의 희생양이 된 것은 그가 가진 이런 순진하고 순수한 구석 때문이다. 어제의 형제를 오늘 땅에 묻는 시스템에서 진정한 관계는 용납되지 않는다.

욕망을 위해 폭력을 소비하는 사회
영화는 이 사회의 욕망을 쟁취하려는 군상들과 그걸 얻기 위해 소비되는 폭력의 시스템을 다룬다. 기존의 조폭영화와 이 영화가 다른 점은 이 시스템 속에 지식인을 포함시켰다는 점이다. 병두가 처한 조폭의 시스템과 민호가 처한 영화 제작 시스템은 거의 동격이다.

친구와의 의리를 배신하고 친구를 희생시키면서 그가 편입된 시스템은 조폭의 시스템이 아니라 영화 제작의 시스템이다. 결국 따지고 보면 민호와 병두는 성질만 다를 뿐, 같은 시스템 안에 있었던 것이다. 병두를 희생시킨 후의 민호의 성공이 불안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조폭이 소비되는 것처럼 영화감독 역시 소비된다.

비열한 거리는 바로 여기 있다
유하 감독의 자기부정은 처절하다. 굳이 영화감독을 작중 인물로 끌어들여 자의식 과잉이라거나 먹물냄새가 난다는 등의 비판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이 영화는 하나의 퍼포먼스가 되었다. 이 영화를 보면서 우리는 흔히 말하는 ‘조폭영화’의 스릴을 만끽한다. 진흙탕 격투 신은 그 백미가 될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그렇게 관객을 조폭영화의 틀 속으로 끌어들인 연후에, 민호라는 영화감독을 통해 그 틀을 넘어서 버린다. 여기서 우리는 좀더 비판적 거리를 두고 폭력에 열광했던 자신을 바라보게 된다. 감독의 자기부정은 관객의 자기부정으로 전염된다.

마지막 장면, 황 회장이 주관하는 자리에 민호와 종수가 함께 술을 나누는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그들은 모두 시스템 속에서 살아남아 있는 자들이지만 언제 희생될지 알 수 없는 인물들이다. 그 불안한 눈빛들 속에서 그들은 술을 나누고 노래를 부른다. 그 장면이 평범한 일상을 사는 샐러리맨들의 가슴을 찡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 역시 그 시스템 속에서 늘 불안한 눈빛들을 나누며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 장면 속에 조폭이라는 미지의 세계가 아닌 영화감독이라는 친밀한 세계를 끌어들임으로써 영화의 의미는 좀더 확장된다.

‘비열한 거리’는 저 베일에 싸인 조폭의 세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조폭을 다루는 영화 속의 이야기만도 아니다. 우리는 늘 집을 나서면서 시스템이 지배하는 수직적인 세계에 직면하고 집으로 돌아와 수평적인 세계 속에서 살아있음에 안도한다. 일상의 평범을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수직적 세계에 대한 욕망을 불태운다. 시스템은 누군가의 희생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 희생을 감수하는 순간, 자신도 그 시스템의 법칙에 따라 희생될 거라는 계약서에 사인을 하게된다.

바로 여기 우리가 서 있는 이 곳이 비열한 거리다.

드라마와 월드컵

요즘 월드컵 특수로 TV는 이른바 월드컵과 드라마의 양극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TV들이 온통 월드컵에 올인하는 상황에서 드라마들은 슬금슬금 옆으로 빠지거나, 빼내진다. 2002년의 월드컵이라는 ‘각본 없는 드라마’가 이룩한 성과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4년이란 긴 시간을 거친 지금에까지 그 맹위를 발휘하고 있다.

2002년에 월드컵 4강 신화에 비견되는 문화적 사건이 있었는데 그 주역은 바로 우리네 드라마들이었다. <겨울연가>를 필두로 당시 일본에 수출된 드라마는 1300편이 넘으며 수출액만도 100만 달러를 넘어섰다. 우리네 드라마들은 한류바람을 일으키며 일본으로 중국으로 수출됐다.

그런데 작금의 드라마들을 보면 어떤가. 모든 드라마들을 천편일률적으로 재단할 수는 없겠지만 늘 비슷비슷한 설정과 스토리의 드라마들이 시청자들을 식상하게 만들고 있다. 조폭 아니면 멜로라는 소재의 획일화, 비비꼬인 인물관계, 한 꺼풀 벗겨내면 도저히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설정, TV방송에는 어울리지 않는 선정적인 장면들, 툭하면 남매, 툭하면 혈연인 코드 중심의 드라마들이 매일 전파를 타고 있다. 일단 제목과 첫 회를 보면 전체를 대충 감 잡을 수 있는 이런 드라마로는 더 이상 시청자들의 눈과 귀를 잡아놓지 못한다. 이것이 ‘각본 없는 드라마’ 월드컵에서 드라마가 배워야할 점이다.

각본 없는 드라마 vs 드러나는 각본
우리가 흔히 ‘각본 없는 드라마’라고 말하지만 월드컵의 재미는 그 의외성에 있다. 전력으로는 누가 봐도 승산 없는 경기에서 이변이 속출하는 것. 그래서 공은 둥글며 어디로 튈지 모른다고 한다.

하지만 요즘 드라마들은 어떤 상황 전개를 함에 있어서 의도가 쉽게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예민한 시청자들은 지금 이 장면으로 인해 잠시 후엔 이런 전개가 될 것이라는 것을 쉽게 짐작한다. 심지어는 앞의 몇몇 장면으로 결말까지 알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그것을 실제로 시청하는 순간 극은 긴장감을 잃고 이른바 김이 빠지게 된다.

예를 들면 ‘소문난 칠공주’는 그 제목에서부터 벌써 이 드라마의 내용과 결말 주제까지를 모두 도출해낼 수 있다. ‘딸 부잣집 이야기’라는 전통적인 드라마 구조를 그대로 가져온 탓이다. 이런 드라마에는 늘 등장하는 것이 가부장적인 아버지고 핍박받는 가족들이다. 이런 트렌디한 방식을 시청자들이 좋아한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건 이미 한번 사용되었을 때 신선함을 잃은 방식이다.

최근 이런 드라마들이 꽤 많은 이유는 아마도 이제 드라마를 하나의 작품으로 보고 창작의 과정을 거쳐 만들어내려는 노력보다는, 상업적인 성공을 목적으로 자극적이고 트렌디한 몇몇 설정들을 끌어다 이야기를 붙여 기획한 작품들이 많기 때문인 것 같다. 아무래도 선 기획된 작품에 살을 붙이는 작업에는 잘 쓰이는 드라마 문법에 먼저 손이 가기 때문이다.

스스로 움직이게 하는 감독 vs 작가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드라마
경기가 다 끝나기 전에는 어느 누구도 누가 골을 넣을 것인지 알지 못한다. 그건 시청자도 마찬가지고, 경기를 뛰는 선수들도 마찬가지며, 그들을 조련한 코치나, 위치를 지정해준 감독도 모른다. 작가라는 감독은 캐릭터들 스스로가 만들어 가는 힘에 귀기울여야 하고, 필요할 경우엔 방향성을 지정해줘야 하지만, 조종해서는 안 된다. 그들을 조종하는 순간, 그들은 자율성을 잃고 창의적인 게임을 하지 못하게 된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긴장감을 잃지 않는 드라마 진행을 위해 먼저 필요한 것은 작가가 극중 캐릭터들에게 겸손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흔한 경우는 아니지만 때로 어떤 드라마는 작가에 의해 좌지우지된다. 실제로 작가는 자신이 만들어내는 창작의 공간에서는 신의 권위를 부여받은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작가가 모든 걸 조정하기 시작하면 살아있던 캐릭터는 죽고 인형들만 난무하는 드라마가 나온다. 대표적인 것이 요즘 ‘욕하면서 보는 드라마’라는 오명을 얻고 있는 ‘하늘이시여’나 ‘소문난 칠공주’다. 최근 ‘하늘이시여’에서 벌어진 공포의 캐릭터 사망 해프닝(소피아의 급사)은 작가가 신이라는 걸 명백히 보여주는 사건이다. 이것은 작가가 자극적인 설정을 위해 캐릭터 몇 죽이는 것은 예사로도 할 수 있다는 섬뜩한 현실을 보여준 것은 아닐까. ‘소문난 칠공주’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 현실에서는 벌어지기 어려운(예를 들면 임신한 딸을 질질 끌고 다니는 식의)사건들이 벌어지는 것은 작가에 따라 캐릭터들은 어떤 상황도 감수해야만 한다는 걸 말하는 것 같아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이렇게 작가의 의도가 과잉된 드라마는 늘 문제와 논란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그것은 작품이라기보다는 지독한 상업주의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그 논란마저도 마케팅의 한 방법으로 활용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우리는 ‘욕하면서 보는 드라마’라는 괴물을 만들었다. 작가라는 감독은 선수(캐릭터)들 독려하고 방향성을 줘서 스스로 살아 움직이도록 해야 한다. 선수가 살아있지 않은 드라마는 더 이상 드라마로서의 가치를 잃는다.

스피디한 전개 vs 연장방송
현대축구는 스피디한 전개의 공격축구가 대세라고 한다. 월드컵이 재미있는 것은 그 박진감 넘치는 경기에 있다. 만일 소극적이고 수비 중심의 경기를 양 팀이 한다면 그만큼 지루한 경기도 없을 것이다. 초반에 점수를 따냈다고 수비만 하고 있다면 오히려 역전의 빌미를 줄 수도 있고, 그렇게 이겼다고 하더라도 그건 감독으로서 선수로서 그리 떳떳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드라마에 있어서 박진감 넘치는 전개는 이제 대부분 드라마의 정석이다. 따라서 첫 회를 보면 그 속도감이 얼마나 빠르고 그 빠른 시간 내에 앞으로 전개될 드라마의 기대감을 최대치로 끌어올리느냐에 따라 앞으로의 성공을 예감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어느 정도 진행되면서 드라마 자체의 끌림보다는 관성에 힘입어 흘러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여기에 만일 초반의 승기를 잡은 경우, 작가나 PD나 방송사는 ‘슬슬 경기를 하면서 점수나 지키는’ 연장방송의 유혹을 받게된다. 축구경기는 전후반 90분을 해야지 재미있다고 한없이 늘린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 것인가. 이때부터 드라마의 박진감은 사라진다. 결론이 궁금해 관성적으로 보는 시청자들에게 30회에 나와야 할 새로운 국면을 40회로 미뤄 시청률을 유지하는 데만 주력하는 것이다.

이렇게되면 이미 작가나 PD는 스스로 자기가 만든 작품을 죽인 셈이 된다. 마음대로 늘리고 줄이면서 어떻게 작품의 생명을 살릴 수 있을까. 어쩌면 애초부터 자신의 작품을 생명이 없는 피조물, 시청률에 앵벌이하는 인형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새로운 기량의 발굴 vs 잘생긴 얼굴의 활용
축구장안에서 종횡무진 뛰어다니는 박지성은 아름답다. 과감하게 상대편 진영을 파고들고 때로는 발에 걸려 넘어지고 때로는 슛으로 골을 선사하는 그는 아름답다. 하지만 축구장이 아닌 다른 곳이라면 어떨까. 이미 우리에게 익숙해진 얼굴이라 광고 속에서 그는 이제 자연스러워졌지만 처음 그의 광고 장면들은 너무나 어색하게만 보였다. 광고나 TV에 어울리는 얼굴은 아니기 때문이다. 축구선수는 축구를 잘하면 된다. 그것이 아름다운 축구선수다.

요즘 드라마에서는 ‘연기자 = 선남선녀’라는 등식이 많이 깨진 게 사실이다. 그것은 아마도 시대가 ‘잘 생긴 얼굴’보다는 ‘개성 있는 얼굴’쪽에 더 손을 들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몇몇 드라마에서는 연기의 기량이 좀체 나아지지 않는 잘 생긴 얼굴들을 보게 된다.

‘스마일 어게인’을 보다보면 이동건과 김희선 사이에 연기의 간극이 있다는 걸 감지하게 된다. 둘 다 ‘선남선녀’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연기자들이지만 이동건은 마치 무너지기 위해 총력을 다하는 것 같은 인상을 주는 반면, 김희선은 드라마 캐릭터 오단희에 아직 몰입되지 않은 것 같다. 우리가 보고싶은 건 축구장에서 넘어지고 깨지면서 뛰어다니는 박지성이지, 광고 속에서 폼잡는 박지성이 아니다.

다양한 캐릭터로 변신해야만 하는 연기자로서는 ‘잘 생긴 것’이 오히려 부담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그걸 뛰어넘기 위해 부단히도 무너지고 자신을 깨는 연기를 선보이려 노력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기량을 가진 얼굴이 최근 인기를 얻고 있는 ‘주몽’의 허준호와 송일국이다. ‘주몽’의 인기는 그 요인이 여러 가지가 되겠지만 그 중 연기자들의 몫이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허셀크로라는 닉네임을 얻을 정도로 카리스마 연기를 펼친 허준호, 그 카리스마 속에서도 오히려 더 빛나는 송일국은 이 드라마 초반부의 힘을 실어주었다. 경기 초반의 이런 활기는 전체 경기를 압도할 수 있는 중요한 요소이다.

과거 같으면 허준호같은 카리스마가 나오면 다른 연기자는 눈에 띄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송일국의 연기는 그 속에서도 살아났다. 허준호가 부러지지 않는 단단한 소나무였다면 송일국은 유연하게 휘면서도 카리스마를 잃지 않는 대나무 같은 차별점을 연기했기 때문이다. 허준호가 신적인 영웅이라면 송일국은 인간미 넘치는 영웅을 연기했기 때문이다. 이 두 기량이 잘 어우러져 8회만에 시청률 30%라는 골을 선사하게 된 것이다.

우리 식의 축구 vs U턴 하는 한류
힘이 넘치는 유럽축구와 화려한 개인기의 남미축구가 있었지만 2002년 월드컵을 치르기 전까지 우리는 우리 식의 축구라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히딩크라는 감독을 만나 우리는 우리 식의 축구를 갖게 됐다. 그것은 강인한 체력과 미드필드의 압박, 그리고 조직력이다. 그런데 이 우리 식의 축구는 이제 현대 축구의 흐름이 되었다. 그것은 히딩크라는 명장이 미리 현대 축구의 흐름을 읽고 거기에 우리의 장점을 접목해 그 성공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우리 식의 드라마, 대중문화, 우리네 한류는 최근 역류하거나 혹은 U턴 중인 것 같다. 일류(日流)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많은 일본 원작들이 드라마화 되었거나 준비중이다. 대표적인 것이 ‘연애시대’와 ‘101번째 프로포즈’이다. 물론 원작은 일본에서 들어온 것이지만 드라마들은 상당한 해석을 통해 우리 것으로 바뀌었고 작품의 질도 높다. 그래서 이 드라마들은 다시 일본으로 역수출될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작품을 제작해서 유통하는 한 방법으로 잘못된 것은 없다. 하지만 이러한 성공사례가 하나의 전례로 흐름을 타는 것은 좀 문제가 있다. 여기저기 쉽게 원작을 사다가 각색해 만들어 되팔게 되다가는 자칫 원작 없는 명품 리메이크만 넘쳐나는 기형적인 상황이 도래할 수도 있다. 외국 것을 가져다 드라마로 성공시키면 드라마로서는 수입을 얻을 수 있겠지만 결국 그 원작을 돕는 꼴밖에는 안 된다.

문제는 우리 것에 대한 자신감이다. 말로만 떠드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네 정서를 보여줄 수 있는 우리 소재들을 찾아내고 그걸 전 세계가 공감할 수 있는 코드로 풀어내야 한다. 물론 과감한 작품과 작가의 발굴이 선행되어야 우리 것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을 끌어 모을 수 있는 다양한 등용문의 통로가 있어야 한다. 한편으로 이것은 드라마에만 국한된 얘기가 아니다. 드라마 이전에 소설과 만화, 연극 등 많은 원작이 나올 수 있는 풍토가 만들어져야 우리 드라마는 충분한 기초체력을 바탕으로 특유의 저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축구가 가능성과 저력을 보여줬듯이 우리 드라마는 이미 그 가능성을 한류로서 확인한 바 있다. 히딩크가 떠난 후 잠시 주춤했던 우리 축구는 다시 아드보카트라는 명장의 조련으로 다시 깨어나고 있다. 침체된 드라마를 되살릴 드라마의 아드보카트는 어디에 있는 걸까. 만일 그런 문화 콘텐츠가 등장한다면 한류의 붉은 물결이 ‘아시아의 호랑이’를 넘어 ‘문화 강국, 한국’으로 거듭 태어날 수 있을 것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