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드라마, 예능까지, ‘헬조선의 그림자

 

올해의 대중문화를 단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헬조선이 되지 않을까. 이른바 ‘N포세대들이 우리나라를 자조하며 일컫는 이 단어는 아이러니하게도 올 한 해 우리네 대중문화의 동력이 되었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노와 답답함이 그나마 대중문화의 판타지와 위안 속에서 숨 돌릴 수 있는 여지를 찾게 했던 것이라고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사진출처:영화<내부자들>

헬조선의 그림자를 여지없이 느낄 수 있는 건 영화 <베테랑><내부자들>의 대흥행이다. 상반기 블록버스터 시장을 천만 관객을 훌쩍 넘기며 전면에서 이끈 <베테랑>의 그 동력은, 하반기로 와서는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7백만 관객을 넘보는 기록적인 수치를 만들어낸 <내부자들>로 이어지고 있다. 두 영화는 결국 우리네 젊은이들이 우리 사회를 헬조선이라 부르는 그 현실을 끌어와 영화로나마 카타르시스를 제공했다.

 

<베테랑><내부자들>이 드러내고 있는 헬조선의 그림자는 무소불위의 힘을 발휘하는 자본의 권력과 그 권력에 붙어 기생하는 시스템들(정치부터 언론까지)이다. 이들 영화는 현실 어딘가에서 봤음직한 인물들과 상황들을 영화 속으로 끌어와서는 한껏 그 부조리한 권력 시스템의 더러움을 고발하고 폭로함으로서 관객들에게 통쾌함을 선사했다. 단 몇 시간 동안의 즐거움일 수 있지만, 또 그것이 현실을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어차피 바뀌지 않는 현실이 주는 막막함 앞에 대중들은 그 작은 위안 속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올해의 드라마들 역시 헬조선의 그림자를 여러 각도에서 비추어 냈다. 작년 <미생>에 이어 노동운동을 소재로 다룬 <송곳>은 현실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노동자들의 부당해고 문제를 세세하게 그려내며 심지어 대처요령까지 알려줌으로써 화제가 되었다. 물론 현실 그 자체보다는 판타지를 추구하는 드라마 시청 소비패턴의 성격상 시청률은 낮게 나왔지만 충분히 그 가치가 인정될 수밖에 없는 드라마였다.

 

헬조선의 그림자를 역으로 알려준 올해의 드라마는 <응답하라1988>일 것이다. 1988년 쌍문동 골목으로까지 돌아간 이 드라마는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이웃 간의 정과 훈훈한 이야기로 시청자들을 사로잡았다. 결국 복고의 힘이란 현실의 결핍에서 나온다고 볼 때, <응답하라1988>이 케이블 채널로서는 이례적으로 무려 18%에 육박하는 시청률을 냈다는 건 얼마나 지금의 현실이 깊은 결핍으로 가득 차 있는가를 말해준다. 살풍경한 헬조선의 현실 속에서 대중들은 드라마가 그려내고 있는 시간여행의 위로 앞에 눈물지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예능 프로그램도 예외는 아니다. 올해 가장 뜨거운 예능 프로그램으로 <삼시세끼>를 떠올려보라. 복잡한 도시를 떠나 잠시 현실을 잊고 오로지 삼시세끼를 챙겨먹는 일에만 몰두하는 것에 이토록 대중들이 열광했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닌가. 이것은 거꾸로 지금의 대중들이 그저 걱정 없이 세끼만 챙겨먹게 해달라는 염원이 담겨 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많던 쿡방 트렌드도 결국은 헬조선의 그림자 안에서 그나마 찾을 수 있는 작은 위안으로서 요리와 음식이라는 소재에 대중들이 빠져들었다는 걸 말해주지 않는가. 이제 거대한 꿈이나 현실을 깨치고 이상을 추구하는 일 따위는 헬조선에서는 결코 이뤄지지 않는 일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그래서 포기 세대들은 그런 거창한 꿈이나 이상을 추구하지 않는다. 섣불리 현실을 바꾸려고도 하지 않는다. 워낙 공고한 시스템이기 때문에 바위에 부딪쳐 깨지기보다는 작은 힐링과 위안으로 하루하루를 위무하려는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올 한 해 대중문화의 키워드가 헬조선이었다는 걸 부정하긴 어려울 것 같다. 한 해의 키워드가 헬조선이 된다는 건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그래도 이를 어떻게든 대중문화의 틀로 끌어오려는 노력들이 있어 때론 위로를 주고 때론 각성하게 해주며 답답한 현실에 작은 숨통을 틔워준다는 건 중요한 일이 될 것이다. 내년에는 제발 헬조선이라는 단어가 눈에 띄지 않기를 바라지만 그게 그리 쉬울 것 같지는 않다.



김구라 대상수상, 그에겐 위기가 기회가 되었다

 

<MBC 연예대상>의 대상은 김구라에게 돌아갔다. 마지막까지 경합한 유재석이 무관이 된 것에 대해 팬들은 깊은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다. 무려 10년 간이나 <무한도전>을 이끌어왔으니 당연한 아쉬움일 것이다. 하지만 어찌 보면 유재석은 이제 대상의 차원을 훌쩍 뛰어넘지 않았나 싶다. 대상을 받고 소감을 말하는 김구라 역시 그에게 경외감을 느낀다고 표현하지 않았던가.

 


'MBC연예대상(사진출처:MBC)'

따라서 김구라의 대상 수상은 올 한 해 MBC새로운성과들을 놓고 봤을 때 그의 공헌도를 치하하는 의미가 크다고 여겨진다. 김구라는 오래도록 <라디오스타>의 터줏대감으로 앉아 있었고, 종영했지만 <세바퀴>에도 끝까지 앉아 있었다. 또 방송사를 떠나서 올해의 예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마이 리틀 텔레비전>의 중심추 역할을 했고, MBC 주말 예능을 되살린 <복면가왕>에서도 연예인 패널로서 맹활약했다. 그러니 이렇게 다양한 프로그램에 포진해 있는 그에게 MBC로서는 상을 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물론 최근 예능 프로그램의 성격상 그것이 온전히 김구라 혼자만의 몫이었다고 말하긴 어렵다. 이를테면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서 김구라가 콘텐츠쇼라는 형식을 줄곧 유지함으로써 이 방송의 색깔을 유지했던 건 사실이지만, 이 프로그램을 확 살려낸 인물들은 백종원이나 이은결, 김영만 같은 핫한 출연자들과 이들을 섭외해 방송으로 잘 만들어낸 박진경, 이재석 PD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대부분의 예능 MC들에게도 다 해당되는 이야기다. 물론 유재석은 독보적이지만 <무한도전>의 강력한 지분은 역시 김태호 PD와 작가들에게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이제 지상파 연예대상은 본인 혼자의 공적이라기보다는 프로그램을 대표해 받는 상의 성격을 갖게 되었다. 김구라의 대상 수상은 올해의 MBC 예능 프로그램으로서 <마이 리틀 텔레비전><복면가왕>의 성과를 인정했다고 말하는 편이 옳다.

 

흥미로운 건 김구라가 이렇게 다작을 통해 대상 수상이라는 결과까지 얻게 되는 그 과정이다. 사실 김구라가 이토록 프로그램에 올인하고 마치 작정한 듯 여러 프로그램에 얼굴을 내밀게 된 건 아내의 빚보증 문제로 공황장애까지 겪게 되고 결국은 이혼이라는 불운한 개인사에서부터 비롯됐다는 점이다. 결국 그는 빚을 갚아나가야 한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이유였겠지만, 무엇보다 힘겨운 시기를 일에 빠짐으로써 넘어서려는 노력을 했다고도 여겨진다. 그는 최근 술도 끊고 간간히 하던 골프도 치지 않는다고 한다. 오로지 일에만 집중한다는 것. 그에게 불운은 오히려 운이 되는 새로운 전기가 되었다.

 

이런 점은 그저 우연이라고 보기가 어렵다. 사실 과거 김구라가 인터넷 방송에서 했던 위안부 관련 발언이 논란이 되어 방송 하차를 하게 되었던 시절도 지금 돌이켜보면 그에게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수 있는 기회로 작용했다. 당시는 유재석-강호동 이원 체제로 대변되듯 예능 MC 전성시대였다. 하지만 김구라가 방송을 떠나 있는 사이 이런 환경들이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다. 예능 MC에 있던 파워가 예능 PD로 옮겨져 갔고 스타 중심이 아니라 콘텐츠 중심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던 것.

 

김구라가 다시 복귀하는 시기에 이러한 변화는 그에게 득이 되었다. 대부분의 자숙 후 방송 복귀를 하는 연예인들이 지상파가 아닌 비지상파를 통해 우회하는 것처럼 그 역시 JTBC를 통해 자신의 새로운 입지를 다졌다. 그런데 대부분의 스타 예능 PD들이 지상파에서 비지상파로 옮겨간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가 선택한 프로그램들은 괜찮은 성과를 만들어냈다. <썰전>은 그의 새로운 기반이 되어주었고 이를 통해 <라디오스타>로의 복귀가 이어졌으며, 향후 비지상파의 변화를 일찌감치 간파하고 새로운 예능들을 선보인 MBC에서 그의 입지가 마련되었다.

 

위기 혹은 불운의 상황에서 그것을 오히려 운으로 바꾸는 과정을 김구라는 줄곧 보여줘 왔지만 그것을 그저 행운으로만 보기는 어렵다. 중요한 건 그 과정에서 그가 해온 선택들이 나쁘지 않았다는데 지금의 결과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예능 MC들 중 거의 유일하게 비평적 시선을 갖고 있는 김구라는 아마도 변화하고 있는 환경을 본능적으로 읽어냈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그 안에서 자신이 설 수 있는 위치를 정확히 간파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향후 달라지고 있는 예능 환경에서 이제 예능 MC들이 어떻게 하면 생존할 수 있는가에 대한 작은 해답이 되지 않을까. 본인이 어떤 능력을 갖고 있고 그것을 선보이는 건 중요한 일이지만, 그만큼 중요해진 건 그 능력이 한 프로그램이라는 콘텐츠 안에서 조화를 이뤄야 한다는 점이다. 대중들은 이제 점점 더 한두 명의 예능 MC가 아니라 프로그램 전체가 주는 그 정서와 느낌들을 중요하게 여기게 됐으니 말이다. 김구라의 대상 수상은 그래서 개인적인 공과라기보다는 현재의 변화하고 있는 예능 환경과 그 속에서의 예능 MC의 역할을 다시 한 번 들여다보게 만드는 일로 다가오고 있다.



<육룡><리멤버>, 멜로에 대한 기대와 우려

 

SBS <육룡이 나르샤> 도화전에서 벌어진 이성계파와 조민수파의 혈투는 약 20분간 숨 가쁠 정도로 휘몰아쳤다. 이성계와 그 일파를 제거하기 위해 조민수는 수많은 살수들을 세워놓았지만 삼한제일검 이방지(변요한)와 각성한 무휼(윤균상)의 칼 앞에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결국 이방원(유아인)과 가별초들이 들이닥치면서 조민수의 암살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육룡이 나르샤(사진출처:SBS)'

그런데 이 한 편의 액션 활극을 본 것처럼 여겨지는 이야기는 어린 시절 연희(정유미)를 겁탈했던 사내의 뒤를 따라간다. 그를 쫓는 이방지와 분이(신세경) 그리고 그 앞에 나타난 연희. 연희와 이방지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와 굴욕을 안겼던 그 사내는 결국 이 두 사람의 손에 의해 처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

 

두 사람의 관계를 깨뜨려 놓았던 사내의 죽음으로 인해 새록새록 피어나는 건 향후 연희와 이방지가 다시 사랑하는 사이로 돌아갈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이다. <육룡이 나르샤>는 그 촘촘한 이야기와 긴박감 넘치는 대결구도가 압권이지만 상대적으로 멜로는 별로 없는 드라마다. 그래서 한 편에서는 멜로에 대한 아쉬움을 드러낸다. 이방지와 연희 그리고 이방원과 분이의 멜로가 이 사극에서는 가능한 부분이다.

 

하지만 정반대로 굳이 멜로가 필요한가 하는 의견도 심심찮게 나온다. 어설픈 멜로는 오히려 극의 긴장감을 흐트러뜨리는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육룡이 나르샤>는 고려 말 혼돈기를 깨치고 나와 조선을 건국하는 여섯 용의 영웅담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니 그 과정에 집중하는 것이 훨씬 더 흥미진진해질 수 있다는 것.

 

멜로에 대한 이런 상반된 입장은 이제 지상파 드라마가 어떤 과도기에 놓여있다는 걸 말해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과거 지상파 드라마는 어떤 식으로든 어떤 장르든 항상 멜로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전통적인 지상파 시청층은 드라마는 멜로라는 어떤 공식화된 틀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알고 있듯이 <미생>이 지상파가 아닌 케이블 채널 tvN에서 방영되게 된 것도 결국이 멜로의 부재 때문이었다. 그런데 과연 지금도 멜로에 대한 이러한 강박은 여전히 유효할까.

 

SBS 수목드라마 <리멤버-아들의 전쟁>은 복합장르 드라마다. 변호사가 나오는 법정극 장르에 사회극 요소가 가미되어 있고 거기에는 또한 조폭물의 흔적들도 들어가 있다. 그런데 이 복합장르에서도 빠질 수 없는 것이 멜로다. 주인공인 서진우(유승호)와 이인아(박민영)가 그 멜로의 대상이다. 이 둘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사형수가 된 서진우 부친의 무고함을 풀어내기 위해 변호사가 된 인물이다.

 

그런데 누가 봐도 다분히 멜로 구도를 예감케 하는 서진우와 이인아의 관계설정에 대해 굳이 멜로가 필요한가를 묻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공분을 일으키는 갑질 재벌 후계자를 응징하는 복수극이자 사회극에 더 충실해지는 것이 작품의 몰입도를 올릴 수 있다는 얘기다. 실제로 5년 만에 서진우를 만난 이인아가 달라진 그의 모습에 실망하고 술에 취해 그를 불러내는 에피소드는 현실적이라고 말하긴 어렵다. 검사와 변호사가 그런 식으로 만나는 것이 비현실적이지만 그건 다분히 두 사람의 멜로를 위한 설정으로 들어갔다고 볼 수 있다.

 

드라마 시청자들의 눈높이가 높아지면서 드라마 하면 무조건 멜로는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강박관념도 조금씩 사라지고 있는 추세다. 물론 멜로에 대한 기대는 어떤 순간에서도 불쑥불쑥 수면 위로 피어오르지만 그만큼 우려 섞인 목소리도 점점 커지고 있다. 아예 멜로드라마거나 아니면 반드시 필요한 멜로가 아니라면 그것이 물과 기름처럼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이제는 시청자들도 몰입감의 차이로서 인식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응팔>, 덕선 남편보다 빛나는 택이와 정환의 우정

 

어남류인가 혹남택인가. 이게 무슨 말인가 어리둥절한 분들도 있을 게다. ‘어남류어차피 남편은 류준열이란 뜻이고 혹남택혹시 남편은 택이란 뜻이다. 이 두 신조어는 tvN <응답하라1988>의 인기를 말해준다. 오죽 드라마가 인기 있으면 누가 극중 여주인공인 덕선(혜리)의 미래 남편일까를 두고 이토록 열띤 화제가 될 것인가.

 


'응답하라1988(사진출처:tvN)'

드라마가 시작하기 전에는 단연 택이(박보검)가 돋보였다. 그는 이미 쌍문동 골목에서 천재 바둑기사로 성공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는 국가적인 보물(?)로 추앙받는 인물이고 대회에서의 연전연승으로 상당한 돈과 영향력을 거머쥔 인물이기도 하다. 보통의 멜로드라마라면 이런 판타지적인 캐릭터의 손을 들어주기 마련이다.

 

하지만 드라마가 시작되고 단 몇 회만에 어남류라는 말이 나왔다. 정환(류준열)은 덕선을 좋아하지만 그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고 벙어리 냉가슴을 앓는 인물이다. 덕선 모르게 그녀를 챙겨주지만 앞에서는 냉랭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을 보인다. 요즘 젊은 세대를 열광시키는 이른바 츤데레(겉으로 퉁명스럽지만 속은 따뜻하다는 뜻의 신조어)’를 자극하는 인물이다.

 

그런데 정환이 이른바 어남류라는 말까지 만든 데는 단지 애정만이 아니라 친구를 배려하는 우정도 빼놓을 수 없는 요인이다. 정환의 마음을 아무도 모르는 사이, 어느 날 택이가 덕선을 좋아하는 마음을 슬쩍 꺼내놓자 그는 더 꽁꽁 자신의 마음을 숨긴다. 그래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덕선과 더 선을 긋는다. 또 자신은 가슴앓이를 해도 진정으로 친구가 잘되기를 바라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어떤 면으로는 너무 바보스러울 정도다.

 

이렇게 되자 시청자들의 마음은 어딘지 약자(?)의 위치에 서 있지만 심지어 배려까지 하고 있는 정환쪽으로 자연스럽게 기울게 된다. 여기에는 상대적으로 평범하게 생긴 정환에게 시청자들이 어떤 동질감을 느끼는 심리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택이가 점점 덕선에게 다가가고 정환은 의도적으로 뒤로 물러나는 모습을 보면서 그를 응원하는 마음은 더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응답하라1988>은 여기서 또 한 번의 반전을 만들어낸다. 아무 것도 모른 채 덕선에 대한 사랑을 이제 막 표현하려고 할 때 택이가 정환의 마음을 알아채게 된 것. 덕선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남다르다는 걸 눈치 채고 또 그가 놓고 간 지갑에서 덕선과 함께 찍은 사진이 보물처럼 들어있는 걸 확인하고는 택이는 특유의 어른스러움으로 돌아간다. 택이는 바둑기사의 그 속내를 알 수 없는 얼굴로 돌아가 덕선에게 고백하려던 마음을 접어버린다.

 

애초에 <응답하라1988>이 시작되기 전 신원호 PD는 이 시리즈에서 반복해왔던 남편 찾기콘셉트가 이번에도 또 나올 거라고 얘기한 바 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재미요소일 뿐 이번 드라마의 주요 콘셉트는 가족이라는 걸 명확히 했다. 이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응답하라1988>에서 어남류혹남택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누가 누구의 남편이 되는가에 대한 관심은 높지만 이 드라마가 하려는 이야기는 거기에 머물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덕선에 대한 사랑이 친구 간의 우정을 끝장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우정을 확인하는 계기로 작용하는 건, 이 드라마가 애정보다 우정 나아가 친구와 이웃을 넘어서 마치 가족 같은 정에 더 집중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이것은 다분히 사랑타령보다는 사람 간의 정에 더 갈급해진 현실 정서를 잘 반영하고 있다. <응답하라1988>이 그 어떤 <응답하라> 시리즈보다 더 큰 공감대를 가져갈 수 있었던 힘. 덕선의 남편찾기보다 빛나는 택이와 정환의 우정에서 그 힘의 일단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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