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사제들>, 밋밋한데도 이토록 몰입시킬 수 있는 건

 

영화 <검은 사제들>은 이야기가 복잡하지 않다. 전형적인 장르영화의 틀을 갖고 있고 거기서 크게 벗어나지도 않는다. 다만 특이한 건 오컬트라 불리는 이 영화의 장르적 특성이다.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 현상, 그 중에서도 악령 같은 주로 서구의 문화적 배경에서 자리를 잡은 장르다. <오멘>이나 <엑소시스트> 같은 영화들이 그 범주에 속한다.

 


사진출처:영화<검은사제들>

우리에게도 오컬트적 소재들은 어쩌면 서구보다 훨씬 가까이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 그 많은 무당들의 접신 이야기가 그렇다. 최근에 상영됐던 <손님>이나 <그 놈이다> 같은 작품 속에서도 이러한 무당 소재의 오컬트적 요소들이 들어있었다.

 

하지만 <검은 사제들>이 다른 점은 악령을 퇴치하는 방식으로서 사제들의 활약을 거의 변형함이 없이 그대로 그려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다만 한국이라는 특수한 사회적 문화적 상황이 있기 때문에 무당 같은 우리 식의 해석이 살짝 들어가 있긴 하다. 하지만 그래도 <검은 사제들>은 거의 오컬트 장르의 공식 그대로를 잘 살려내고 있다.

 

오컬트 장르의 이야기 구조는 초자연적인 사건(악령의 출연 같은)이 벌어지고 이를 추적하는 사제가 있으며 누군가의 몸속으로 들어간 악령을 우여곡절 끝에 그 사제가 끄집어내는 그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니 어찌 보면 단순하다. 실제로 이 영화는 후반부의 반 정도를 한 공간에서 악령과 싸우는 사제들의 이야기로 채워 넣는다.

 

이 정도면 조금은 밋밋하게 여겨질 법도 한데 절대 그렇지가 않다. 오히려 정반대다. 영화가 어떤 곁가지로 흐르거나 복잡한 스토리로 흘러가지 않기 때문에 도리어 굉장한 집중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이것이 가능해진 건 끊임없이 관객을 불안감으로 몰아넣는 감독의 연출력은 물론이고 김윤석과 강동원 그리고 박소담이 이끌어내는 놀라운 연기력 때문이다. 감독은 제대로 판을 벌렸고 그 위에서 김윤석과 강동원 그리고 박소담은 제대로 놀았다.

 

김윤석과 강동원의 케미는 이미 <전우치>에서도 본 바 있지만 이 작품에서 더 폭발하는 듯하다. 이 두 사람은 브로맨스의 느낌마저 주는데 악령을 퇴치하는 전면에 나서있는 김신부(김윤석)가 영화의 어떤 추진력과 안정감을 부여한다면 그를 보조하는 최부제(강동원)는 관객들이 빙의될 수 있는 친숙함을 준다. 결국 관객은 최부제에 몰입하고 김신부라는 가이드를 통해 오컬트의 현상 속으로 들어가는 셈이다.

 

즉 강동원이 최부제라는 캐릭터를 통해 관객에게 어떤 두려움과 공포감을 부여한다면 김윤석은 김신부를 통해 그 두려움을 헤치고 영화를 즐길 수 있게 해준다. 김윤석과 강동원의 연기야 이미 정평이 나 있는 것이지만 <베테랑><사도>를 거쳐 차근차근 필모그라피를 쌓아가고 있는 박소담의 신들린연기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영화에서 연기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어느 정도 될까. 물론 작품에 따라 다르겠지만 <검은 사제들>의 경우에는 연기자 비중이 상당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들이 연기할 수 있게 연출이 판을 깔아준 덕이지만 이 영화에서 김윤석과 강동원 그리고 박소담의 지분은 결코 작다고 말할 수 없다



사극의 진화, <뿌나>에 이은 <육룡>

 

사극의 전형은 아마도 왕이 명을 내리고 신하들은 일제히 통촉해 주시옵소서!”하며 외치는 장면이 아닐까. SBS <육룡이 나르샤>에는 그런 장면이 없다. 아니 아예 왕은 전면에 등장하지도 않는다. 동시대를 다뤘던 KBS <정도전>에서 그래도 공민왕도 나오고 공양왕도 나오며 공민왕의 어머니인 명덕태후도 나오는 것과는 사뭇 다른 그림이다.

 


'육룡이 나르샤(사진출처:SBS)'

왕이 전면에 나오지 않자 대전의 모습도 거의 없다.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건 도당의 풍경이다. 도당은 고려후기 최고의 정무기관으로 도평의사사라고도 불린다. 하지만 이런 역사적 사실보다 중요한 건 이 도당이 지금 현재의 국회를 연상시킨다는 것이다. 왕이 등장하지 않을 정도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이 시대, 그 실세는 도당3인방이라고 불리는 이인겸(최종원), 길태미(박혁권), 홍인방(전노민)이다. 물론 이들은 가상인물이다.

 

이것은 <육룡이 나르샤>의 독특한 인물구성이다. ‘육룡이 그렇듯이 거기에는 실존인물인 이성계(천호진), 정도전(김명민), 이방원(유아인)과 함께 가상인물인 분이(신세경), 땅새(변요한), 무휼(윤균상)이 뒤섞여있다. 이런 구성은 이미 김영현, 박상연 작가의 전작인 <뿌리 깊은 나무>에서도 시도됐던 것이다. 거기에서도 세종(한석규)이라는 실존인물과 강채윤(장혁), 소이(신세경) 같은 가상인물이 함께한다.

 

이들 가상인물들은 그저 역사적 인물들을 보조해주는 캐릭터가 아니다. 그들은 오히려 이 역사의 뒤안길에서 실제 역사를 만들어낸 주역들로 그려진다. 전면에는 역사적 인물이 있지만 그 이면에는 그들을 돕거나 그들이 어떤 결심을 하게 만드는 요인으로서의 가상인물들이 자리한다. 이것은 <뿌리 깊은 나무>에 이은 <육룡이 나르샤>라는 사극이 이제 어떤 새로운 진화의 단계를 보여주고 있다는 증거들이다.

 

사극이 역사로부터 조금씩 떼어져 나와 상상력을 가미하기 시작한 건 이병훈 감독이 시작했던 이른바 퓨전사극이라고 불리는 시도에서부터였다. <허준>, <대장금> 같은 작품이 그것이다. 이들은 실존인물이지만 역사적 사료가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아 나머지 행적들은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다시 쓰여졌다.

 

이렇게 상상력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만들어지자 사극은 좀 더 과감한 시도들을 보여준다. 즉 결국은 권력자의 기록이 될 수밖에 없는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것들을 상상력으로 재구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추노> 같은 사극은 역사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분명 존재했을 노비들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놀라운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사극이 역사에서 점점 벗어나 심지어 역사의식 자체를 버리고 상상력 깊숙이 들어가자 사극은 하나의 장르극일뿐 사극 특유의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해를 품은 달>이나 <성균관스캔들>은 현대적 장르물이 단지 과거의 어떤 시점을 배경으로 재연된 느낌을 주었다. 물론 그것이 의미 없다는 건 아니지만 사극이라면 응당 있어야만 될 것 같은 역사의식이 배제된 느낌은 사극만이 가진 독특한 영역을 허물어뜨리게 되었다.

 

그래서 사극이 다시 회귀한 것이 <정도전>이나 <징비록> 같은 정통사극이다. 다시 역사와 역사의식을 회복시키는 것이 사극의 명맥을 이어갈 수 있는 힘이라 여기게 된 것이다. 그래서 역사적 사료에 충실한 정통사극이 다시 주목을 받았으나 이 또한 역사라는 틀의 한계에 머물러 있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결과라 보기는 어려웠다.

 

이런 일련의 흐름에서 보면 <뿌리 깊은 나무>에 이어 <육룡이 나르샤>가 구축해가고 있는 역사와 가상의 공존방식은 사극의 대안적인 진화가 아닐까 싶다. 역사이기 때문에 우리는 과거를 들여다보는 것이지만 그 과거는 현재를 위한 것이다. 그러니 현재의 대중들이 갖고 있는 역사의식과 상상력이 투영되어야만 그 역사는 박제된 것이 아닌 살아 움직이는 것이 된다.

 

역사란 이처럼 팩트에만 머물러 있을 때 오히려 왜곡의 길을 걸을 수 있다. 역사의 기록은 권력자들에게는 팩트일 수 있어도 피권력자들에게는 왜곡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역사적 인물과 가상인물이 한 공간에서 대화를 나누고 그 결과로서 어떤 역사를 그려나가는 이야기는 그 자체로 우리가 역사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하는 관점이 들어있다. 이것은 저 역사학자 E.H 카가 말한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맥락을 잘 구현해낸 것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사극조차도 역사를 바라보는 이런 식견을 드러내고 있는 상황이다.



<송곳>에서 중간관리자 지현우의 역할

 

JTBC <송곳>은 노동운동을 소재로 한 드라마다. 외국계 유통체인점인 푸르미 마트에서 벌어지는 비정규직 정리해고에 맞서는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주인공으로 당사자라기보다는 관리자인 이수인 과장(지현우)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다. 왜 비정규직 노동자가 아닌 정규직 그것도 사원도 아닌 관리자가 이 드라마의 주인공이 됐을까.

 


'송곳(사진출처:JTBC)'

사실 이 부분은 <송곳>에서 이수인 과장이 부신노동상담소를 찾아갔을 때 구고신(안내상) 소장이 그의 의도를 의심하는 장면에서 이미 거론됐던 이야기다. “이수인씨 관리자잖아요. 당신이 해고당한 것도 아닌데 왜 나서는 거요?” 그것이 구고신이 이수인 과장에게 던진 의구심이었다. 즉 자기 일에 나서는 것과 그저 나쁜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나서는 건 다르다는 걸 구고신이 지적했던 것.

 

그렇다면 정작 <송곳>이라는 드라마는 왜 이수인을 주인공으로 세운 걸까. 그것은 드라마를 좀 더 객관화하려는 작가의 선택이라고 볼 수 있다. 아무래도 해고노동자 당사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되면 드라마는 감정적으로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 시청자 입장에서는 그들의 감정에 동일시하게 되고 그것은 드라마를 생각하게 하기 보다는 감정적으로 불을 지르는 방향으로 흐르게 만들 수 있다.

 

<송곳>은 해고노동자들의 힘겨운 삶을 다루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드라마다. 너무 깊게 빠져 들어가면 드라마가 지나치게 무거워질 수 있다. 물론 현실은 더 무거운 이야기다. 하지만 <송곳>이 추구하는 건 노동자들만 공감하는 노동자들만의 드라마가 아니다. 이것은 지금 이러한 현실을 당면하지 않은 보통사람들 또한 공감하기를 원하는 드라마다. 결국 달라지지 않는 시스템 안에서는 그런 현실이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수인 같은 앞뒤 꽉 막힌 듯한 캐릭터는 그래서 <송곳>이라는 드라마의 중요한 가이드 역할을 해준다. 즉 한 발 물러서 있지만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노동자들의 입장에 다가가는 인물. 그래서 그들의 입장을 객관적이면서도 타인의 관점에서 공감하게 해주는 인물이 바로 이수인이다. 노동지부장 선거에서 지부장이 이수인이 아닌 푸르미의 직원인 주강민(현우)이 되는 건 그런 이유에서다.

 

실제로 길거리에 천막을 치고 있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구고신이 항상 얘기하듯 남일이다. 심지어 푸르미의 노동자들도 자신에게 해고 통지 같은 부당한 일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노동조합에 가입하려 들지 않는다. 결국 내 앞에 떨어진 일 앞에서야 그것이 내 일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이수인은 그런 점에서 보면 독특한 캐릭터다. 오지랖이 넓다기보다는 무언가 부당한 일을 하는 자신을 견딜 수 없어 하는 그런 인물. <송곳>이라는 제목에 딱 어울리는 인물이 아닐 수 없다. <송곳>이 지목하고 있는 건 결국 현실에서 싸워야 하는 노동자들의 각성을 위한 이야기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직접 관련은 없지만 부당한 것을 부당하다 말할 수 있는 이 시대의 잠재적 송곳들을 일깨우는 이야기다. 이수인이라는 중간관리자의 시선을 통해.



<응팔>, 무엇이 80년대까지 우리를 되돌렸나

 

도대체 <응답하라1988>의 무엇이 우리를 그 시대로 눈 돌리게 했을까. 97년과 94년이라는 시점과 88년이란 시점은 사뭇 다르다. 많은 이들이 1988년이라는 시점에 의구심을 갖게 된 건 그럴만한 일이다. 97년과 94년은 그나마 상대적으로 젊은 세대들에게 익숙할 수 있는 시대다. 97년을 기점으로 디지털문화, 팬 문화가 시작됐고, 무엇보다 IMF 이후의 장기불황이 이어져왔기 때문에 당대를 직접 경험하지 않은 젊은 세대에게도 그 기점이 흥미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응답하라1988(사진출처:tvN)'

하지만 1988년은 다르다. 80년대 문화를 이해하는 이른바 386세대들에게는 아련한 향수지만 젊은 세대들과 그것이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지 애매한 시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모든 우려가 기우였다는 것이 <응답하라1988> 2회만에 증명되었다. 첫 회에 평균시청률 6%를 간단히 넘긴 이 작품은 2회에는 7.4%(닐슨 코리아) 시청률을 기록했다. 고무적인 건 10대부터 50대까지 전 연령층에 고루 소구하는 시청률 분포를 보였다는 점이다. 무엇이 이런 힘을 발휘하게 했을까.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가장 주효했던 건 신원호 PD가 왜 굳이 1988년까지 시간을 되돌린 것인가에 대한 이유에서 찾아질 수 있을 것 같다. <응답하라1988>은 신원호 PD의 말대로 가족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그 가족의 모습이 지금과는 사뭇 다르다. 엄마가 없는 바둑천재 택(박보검)이 바둑대회 우승을 하자 이웃인 라미란의 가족이 그걸 축하해주기 위해 비빔국수 같은 스파게티를 나눠먹는 풍경이 그 시대의 가족이다. 갑자기 귀가한 남편의 밥 한 공기를 빌릴라 치면 각자의 집에서 저녁에 만든 반찬이 이웃으로 배달(?)되어 결국은 비슷비슷한 저녁을 먹는 이웃이라니.

 

이웃집 딸이 88올림픽 피켓걸로 나온다고 하면 마치 자기 딸인 양 비디오테이프에 녹화를 해주는 그런 풍경을 지금 우리는 어디서 찾아볼 수 있을까. 학교 점심시간이면 서로가 싸온 반찬을 꺼내놓고 친구들끼리 함께 둘러앉아 먹던 그런 풍경. 맛없는 도시락이라도 애써 싸준 엄마가 미안해 귀갓길에 남은 반찬을 다 먹는 그 따뜻한 마음. 골목길 한 켠에 놓여진 평상에서 수위 높은 부부생활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마치 자매들처럼 환한 웃음을 채워놓는 이웃들.

 

876.10 이후 6.29 선언이 이어지고 그해 말에 치러진 대선이 직선제로 대통령을 선출했던 그 시점부터 198888올림픽으로 이어지면서 우리는 대책 없는 낙관론 속에 있었다. 하지만 <응답하라 1997>이 보여줬던 것처럼 88년부터 97년 사이에 있었던 낙관론이 실로 대책 없는 거품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도시는 재개발되었고 다닥다닥 붙어 있던 집들은 아파트로 재정비되었다. 정치적 이슈들을 저 경제논리 속에 묻혀져 갔고 세계화를 부르짖던 기업들은 대마불사를 꿈꿨지만 결국은 무너져버렸다.

 

88년부터 97년 사이의 10년은 그래서 세계로 뻗어나간 경제 성장이 아니라 안으로부터 허물어진 10년이 되었다. 우리는 번지르르한 아파트들이 세워진 그 10년 사이 많은 걸 잃어버렸고 결국은 그것이 허상이었다는 것을 IMF를 통해 확인했으며 그 여파를 지금껏 겪고 있는 중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신원호 PD가 왜 굳이 1988년까지 시간을 되돌린 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그 대책 없는 낙관론으로 모든 것이 뻥튀기되기 직전 실로 진솔했던 우리네 삶에 대한 그리움. 부유하진 않았어도 많은 걸 갖고 있었던 그 시절이 88년까지 거슬러 올라가서야 비로소 보이게 됐다는 것이다.

 

그래서 <응답하라1988>은 지금의 자극적인 삶을 담아내는 살풍경한 드라마들과는 궤를 달리한다. 어찌 보면 너무 밋밋하고 소소한 느낌마저 갖게 된다. 거품 없는 세상의 진짜 사람 간의 정과 삶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이다. 88년을 경험한 세대든, 아니면 그걸 경험한 적 없는 그 이후의 젊은 세대든 이 드라마에 막연히 끌리는 이유는. 경제적 수치는 올라갔다고 하지만 너무나 많은 걸 잃어버린 채 각박해진 우리네 현재의 삶. 그것이 88년의 한 골목이웃들에게서 벌어지는 소소한 이야기에 귀 기울이게 하는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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