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더풀 월드’, 선의와 악의, 인연과 악연 그리고 복수와 정의 사이

원더풀 월드

“그 여자한테 소중한 걸 전부 뺏고 싶으니까. 그러려면 나도 소중한 존재가 되어야지.” MBC 금토드라마 ‘원더풀 월드’에서 권선율(차은우)이 드디어 정체를 드러냈다. 그는 은수현(김남주)이 차로 치어 살해한 권지웅(오만석)의 아들이었다. 은수현의 아들을 차로 치어 죽게 만드는 죄를 지었음에도 제대로된 처벌을 받지 않은 권지웅에 대한 은수현의 사적 복수는 그렇게 부메랑처럼 악연의 악연으로 이어져 권선율의 복수극으로 진행되는 중이다. 

 

애초 은수현의 수감 시절 동료였던 장형자(강애심)가 병으로 사망하며 자신의 방화로 부모를 잃은 아들에게 전해달라 했던 일기장이 가야할 곳은 권선율이 아니라 권민혁(임지섭)이었다. 권선율은 의도적으로 교도소에서부터 은수현을 살펴보며 복수를 계획했고 권민혁인 척 그에게 접근했다. 그래서 은수현은 자꾸만 다치는 권선율을 챙기며 보호자를 자처하게 됐다. “네 인생이 아깝지도 않아? 좀 제대로 살 수 없어? 네 부모님 생각해서라도 너 망가지는 꼴 더는 못보겠어.”

 

하지만 은수현이 그렇게 말했을 때 권선율은 돌연 속내를 드러냈다. “어따 대고 조언이세요. 당신 살인자잖아.” 보다 철저한 복수를 꿈꿨다면 그런 속내 또한 감췄어야 했지만 어째서 권선율은 그렇게 감정을 드러냈을까. 그건 복수를 하는 그 역시 어딘가 흔들리고 있다는 걸 말해주는 건 아닐까. 은수현에게 복수를 하려 접근하곤 있지만 동시에 부모를 모두 잃은 자신의 아픔을 토로하고 있는 건 아닐까. 마치 소중한 걸 잃은 아이가 응석을 부리듯. 

 

하지만 은수현은 권선율의 정체를 알게 됐다. 등에 화상 자국이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고 묘소가 다르다는 것도 파악했으며 권선율의 목걸이에 들어 있는 아이가 권지웅과 함께 찍은 사진도 확인했다. 그렇게 은수현과 권선율은 다시 마주 서게 됐다. 비오는 날 묘소에서 우산을 내주던 권선율의 선의는 사실은 악의였고, 인연처럼 보였던 그들의 만남은 악연이었다.

 

“나 같아서.” 도박빚에 쫓기는 권민혁을 도와주고 그 빚까지 갚아준 권선율은 그렇게까지 한 이유에 대해 그가 자기 같아서라고 했다. 누군가의 사적 복수에 의해 만들어진 피해자. 그런 의미였을 게다. 그런데 은수현과 권선율의 관계가 그렇다. 은수현은 아들을 잃은 후 사적 복수를 했고, 그 사적 복수로 권선율은 부모를 잃고는 이제 다시 은수현에게 사적 복를 하려 한다. 과연 이 복수가 복수를 낳는 악연의 고리는 어떻게 끝을 맺게 될까. 

 

이들이 했거나 하려는 사적 정의는 사실은 복수에 불과하다. 그들은 서로를 찌르지만 그렇게 낸 상처들은 치유되지 않고 이들을 구원해주지도 않는다. 이들이 이렇게 사적 정의라는 이름으로 사실은 복수를 하게 만든 사회 시스템이 이러한 비극을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원더풀 월드’의 최강 빌런은 이러한 부조리한 사회 시스템을 대변하는 김준 의원(박혁권) 같은 인물이다. 권지웅과 결탁해 가까운 사이였던 김준은 아버지를 잃은 권선율에게 자신이 아버지처럼 해주겠다고 했지만, 그가 진짜 사회의 어른으로서 했어야할 일은 권지웅을 제대로 처벌받게 해 더 이상의 사적 복수 같은 비극이 벌어지지 않게 하는 일이었다. 

 

아버지 행세를 하려 하지만 썩은 내가 풀풀 나는 가짜 보호자 김준과 달리, 복수를 했지만 그 자식이 또 다른 피해자가 됐다는 사실을 알고는 사죄하려는 은수현은 진짜 보호자 역할을 하려 한다. 그 사이에서 권선율은 과연 어느 쪽의 손을 끝내 잡게 될까. 전혀 ‘원더풀’하지 않은 부조리한 세상의 끝에서 이들은 과연 스스로 원더풀한 선택을 하게 될까. 

 

“그 아들 한 번 만나볼래요?” 권선율은 은수현에게 그렇게 의미심장한 말을 건넨다. 그건 사실상 자신을 만나보겠냐는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은수현의 사적 복수에 의해 자신이 갖게 된 상처를 제대로 마주해보겠냐는 듯한 말이기도 하다. 은수현과 권선율은 그렇게 엇나간 복수심으로 얽혀져 마주하게 된 사이지만, 그들은 같은 피해자로서 서로를 공감함으로써 복수를 정의로 그 방향을 틀어버릴 수 있을까. (사진:MBC)

‘피라미드 게임’, 이 가상의 게임이 은유한 계급 폭력의 세상

피라미드 게임

“그래도 그 때 같이 놀자고 말 못해서 미안해. 너무 쉽게 잊어버려서 미안해. 진짜 진짜 너무너무 미안해.” 티빙 오리지널 드라마 ‘피라미드 게임’에서 명자은(류다인)은 백하린(장다아)에게 끝까지 사과한다. 백하린이 만든 피라미드 게임에서 F가 되어 집단적인 폭력을 당하면서도 명자은이 그걸 감수하려 했던 건, 어린 시절 자신이 실수로 내뱉었던 한 마디로 백하린이 학교폭력의 피해자가 됐기 때문이다. 

 

그 후로 명자은은 계속 백하린에 대한 미안한 감정을 지우지 않고 있었고, 온몸으로 사과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학교폭력을 당했던 피해자라는 사실 때문에 백하린은 다른 선택을 했다. 거기서 벗어나려 하기 보다는 자신이 당한 만큼 누군가를 당하게 하기 위해 피라미드 게임을 만들어 가해자가 된 것. 한 때의 잘못을 인정하고 끝없이 사과하는 명자은과, 가해자의 길을 선택한 백하린은 그렇게 서로 다른 길을 걸었다. 

 

‘피라미드 게임’은 가해자가 사실 피해자였다고 변명하는 백하린의 이야기에도 성수지(김지연)의 목소리를 빌어 단호한 선을 긋는다. “별 미친 년을 다 보네. 명자은 얘 남 탓하는 거 지금 나만 역겨워? 합리화 오지고 책임 전가하는 꼴 존나 극혐이고 자기 연민 토 나와.” 그러면서 백하린이 한 말들이 앞뒤가 맞지 않는 자기 연민이라는 걸 꼬집는다. “얘가 널 만나자마자 무릎 꿇었으면 니가 그 게임을 안 했어?” 실제로 백하린은 명자은 이전에 이미 조우리(주보영)에게도 똑같이 학폭 가해를 하고 있었다. 

 

결국 백하린은 저 스스로 판 함정에 빠져버린 꼴이 됐다. 학폭 가해자라는 게 밝혀지면서 그를 양녀로 입양했던 백연그룹은 파양을 통해 그와 손절했다. 무연고자 처리된 백하린은 그렇게 홀로 병원에서 눈을 떴다. “걔는 다시 만난 널 원망했다고 했지만 너 같은 방관자들로 성을 쌓아서 게임을 만들었어. 결국 가해자가 하는 변명이잖아. 그리고 그게 백하린이 받을 벌이야. 무관심과 방관. 그 속에 갇혔으니까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고 찾지 않는. 눈 뜨는 순간부터 백하린한테는 거기가 바로 지옥일 거야.” 성수지의 말대로 백하린은 무관심과 방관의 지옥에 갇혔다. 피해자들이 당했던 것처럼. 

 

‘피라미드 게임’은 백연여고 2학년 5반에서 이러한 계급을 나누는 게임이라는 가상의 설정을 가져와 우리 사회의 계급 폭력을 고발한다. 그 안의 백하린을 꼭짓점으로 세운 계급은 그 부모들이 가진 부와 권력에 따라 좌우되고, 심지어 그 힘은 선생님들도 어쩔 수 없을 정도로 시스템화되어 있다. 학생들의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이를 방관하는 것으로 사적 치부를 일삼는 선생들이나, 자기 자식들이 좋은 대학에 갈 수 있는 이익이라면 누군가 폭력을 당해도 눈하나 깜짝 하지 않는 학부모들이 사실상 이 계급 폭력의 진짜 동력이 되었다. 그들은 모두 방관자들이었다. 

 

‘피라미드 게임’을 끝장낸 건 전학생 성수지와 그와 뜻을 함께 하게 되는 친구들 그리고 이들을 돕는 몇몇 뜻있는 어른들의 연대였다. 이들은 더 이상 방관하지 않기로 했고 그래서 자신들이 방관했던 잘못을 인정하고 서로의 적이 아닌 ‘친구’로서 서로를 믿기 시작하면서 이 엇나간 게임을 끝낼 수 있게 됐다. 결국 학교폭력이든, 그것으로 상징되는 우리 사회의 계급폭력이든 그걸 바꿔 더 이상 피해자가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이를 방관하지 않는 것이라고 드라마는 말하고 있다. 

 

10부작짜리 드라마이고, 2학년 5반이라는 한 공간에서 거의 벌어지는 사건을 다룬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피라미드 게임’은 이 프레임 바깥에 있는 한국 사회의 숨은 폭력들을 다시금 생각하게 만드는 드라마였다. 무엇보다 극의 중심을 잡아준 김지연과 장다아의 팽팽한 연기 대결은 물론이고, 신인들의 개성들이 앙상블을 이룬 작품이기도 하다. 대단히 화려하진 않지만 선명한 메시지를 강렬하게 던져 놓은 작품으로 기억될 것 같다. (사진:티빙)

다시 달리기 시작한 ‘피지컬:100’ 시즌2, 기대감 키운 피지컬들

피지컬:100 시즌2

어두운 복도를 걸어 나오는 참가자들. 그들은 무엇을 봤는지 저마다 감탄사를 토해낸다. “피지컬:100 미쳤다. 진짜, 와!” “살명서 이렇게 된 걸 본 적이 처음인데..” “와 근데 진짜 대단하다 이렇게 준비를 했네, 이거를...” “이거 다 어디서 구했을까?” 도대체 이들이 본 게 무엇일까 궁금증이 한껏 커진 순간, 그 정체가 공개된다. 거대한 스튜디오를 가득 메운 100개의 무동력 트레드밀. 그 사이를 날아가는 카메라가 그 압도적인 광경들을 포착해낸다. 넷플릭스 예능 ‘피지컬:100’ 시즌2가 본격적으로 시작한다는 걸 알리는 신호탄이다.

 

시즌1에서도 시작과 함께 시선을 잡아끈 건 천장에 매달린 100명의 참가자들의 모습이었다. 그렇게 매달려 버티다 끝내 하나둘씩 물 위로 떨어져내리는 광경이 그것이다. 시즌2는 100개의 무동력 트레드밀 위를 100명의 피지컬들이 일제히 달리는 장관을 연출했다. 그 위를 달려 더 많은 거리를 기록한 이들이 살아남아 50위 ,10위를 차례로 가리고 최종 1위를 뽑는 사전 미션. 

 

숨이 턱에 타오르면서도 마지막 스퍼트까지 멈추지 않고 내달리는 100인의 피지컬들. 땀이 흘러내리는 팽팽해진 근육들은 단지 그 장관이 펼쳐내는 시각적 차원을 넘어 마치 시청자들 또한 그 운동을 하는 것만 같은 촉각적인 느낌으로 다가온다. 최종 1위는 전 시즌 참가자였던 소방관 출신 홍범석. 그는 시즌1에서 1대1 데스매치에서 져 아깝게 탈락한 후 마음을 다잡고 시즌2를 준비해왔다고 한다. 

 

시즌1에서 100개의 토르소를 세워둔 공간에 참가자들이 한 명씩 등장할 때마다 놀라움과 경탄이 쏟아졌던 것처럼, 이번 시즌2도 똑같은 형식으로 등장하던 참가자들만으로도 한껏 기대감을 높였다. 그 중에서도 단연 주목을 끈 건 김동현이다.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친근한 이미지로 알려진 인물이지만, 이 프로그램에서 그는 본색을 꺼내놓는다. 한국인 최초 UFC 진출자인데다 한국인 최다승 보유자가 그것이다. 40대의 적지 않은 나이지만 사전 미션이었던 무동력 트레드밀에서 선전해 최종 10위에 올랐다. 

 

지난 시즌에서 공 하나를 두고 격투를 벌이다시피 했던 1대1 데스매치는 UFC를 그대로 재연한 듯한 케이지가 새로 추가됐는데 김동현은 막강한 피지컬과 힘의 소유자인 임마누엘과 극적인 대결을 벌여 결국 승리를 따냈다. 미로 속에서 펼쳐진 팀 미션에서는 김동현이 리더가 되어 헌신적인 노력은 물론이고 승부사 특유의 판단력과 실행력으로 끝내 팀에 승리를 안겼다. 지난 시즌에서 추성훈이 프로그램의 최고 수혜자로 떠올랐던 것처럼, 벌써부터 김동현이 제2의 추성훈이 되는 건 아니냐는 이야기들이 나온다. 

 

하지만 주목되는 건 김동현만이 아니다. 사전미션에서 최종 1위를 거머쥔 홍범석은 시즌1에서 아픈 패배를 맛보게 했던 1대1 데스매치를 가볍게 이기고 팀전에서도 리더를 맡았다. 4화까지 공개된 현재 그 결과가 나오진 않았지만 과정에서 보면 홍범석이 시시각각 변화하는 상황에 맞게 전략을 바꿔 대응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만약 여기서 살아남는다면 홍범석에 대한 주목도는 더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한판승의 사나이’로 불리는 유도의 이원희는 노장답게 침착하게 미션에 임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1대1 데스매치에서는 가라테 국가대표 박희준과 맞붙어 누르기 기술로 가볍게 제압하는 모습을 보였고, 팀전에서도 리더가 되어 세 개의 깃발 점령 중 과감하게 하나를 포기하고 두 개에 집중하는 모습으로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이밖에도 우리에게는 배우로 더 익숙하지만 주짓수 브라운 벨트를 갖고 있는 이재윤이 케이지에서 벌인 1대1 데스매치나, 여성이지만 1대1 데스매치에서 남성 상대를 골라 끝내 이기는 놀라운 모습을 선보인 종합격투기 선수 심유리, 보기만 해도 압도적인 피지컬에 남다른 스피드까지 갖춘 타노스 김민수, 작다고 무시하지 말라는 듯 엄청난 괴력으로 명승부를 펼친 엉뚱한 매력의 소유자 역도선수 김담비도 시청자들의 눈도장을 찍기에 충분했다. 

 

시작부터 압도적인 스케일을 보여주는 장관이 펼쳐지고 그 장관 위에서 역시 압도적인 저력을 보여주는 피지컬들의 대결. 이것이 사실상 ‘피지컬:100’이라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가진 강점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번 시즌2는 이 두 가지를 모두 강화하는 방식으로 돌아왔다. 시즌1에서는 신화적 상상력이 느껴지는 스토리텔링을 가미한 세트가 압도적이었다면, 이번 시즌2는 ‘언더그라운드’라는 부제에 걸맞게 지하세계라는 마치 디스토피아의 한계상황을 스토리텔링으로 가져온 듯한 세트가 세워졌다. 

 

그리고 그 위에 저마다의 매력을 가진 피지컬의 소유자들이 하나하나 자신들의 몸으로 써내려가는 스토리를 쓰고 있다. 과연 이번 시즌에는 누가 이 ‘언더그라운드’의 어둠 속에서 오히려 더 반짝반짝 빛나는 스타로 떠오를까. ‘피지컬:100’이 또 달리기 시작했다. 운동 좀 해야겠는데 싶은 욕망을 툭툭 건드리면서. (사진:넷플릭스)

‘파묘’의 풍수사로 돌아온 연기 장인 최민식

파묘

“땅이야 땅. 우리 손주들이 밟고 살아가야 할 땅이라고!” 장재현 감독의 영화 ‘파묘’에서 김상덕(최민식)은 그렇게 말한다. 9백만 관객을 넘기고(20일 현재) 1천만 관객 돌파가 거의 기정사실이 된 이 영화는, 상덕의 이 말에 담긴 뉘앙스처럼 공포 가득한 오컬트 영화에서 무언가 가슴을 웅장하게 만드는 영화로의 확장을 꾀했다. 

 

묘를 파낸다는 ‘파묘’의 의미는 개인적 차원에서 보면 집안에 생긴 우환의 원인으로 묫자리를 잘못 썼기 때문에 이를 파내서 이장한다는 뜻을 갖고 있다. 관객들 입장에서 보면 그저 땅을 파는 게 아니라 묘를 파낸다는 그 상황이 주는 공포감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건 사적인 차원에서 우환을 없애기 위한 파묘일 때 생기는 공포감이다. 

 

영화가 중반을 넘어가면 그 사적인 차원의 파묘는 보다 공적인 의미로 확장된다. 일제가 민족 정기를 끊기 위해 범의 형상을 한 한반도의 허리에 해당하는 혈자리에 쇠말뚝을 꽂았다는 음모론을 상상력으로 확장한 이 작품은 바로 파묘를 하려는 이들에게 그 쇠말뚝을 뽑아내는 미션을 부여한다. 

 

이들의 행위는 그래서 끊어졌던 민족 정기를 잇는 의미를 갖게 되고, 공포감과 맞서는 일 또한 우리 민족이 힘겨워도 마주하고 넘어서야 할 일제의 과거사 문제들이라는 은유를 담게 된다. ‘파묘’가 오컬트 장르라는 다소 마니아적 한계를 넘어 천만 관객을 향해 달려가는 대중적인 영화가 될 수 있었던 이유다.

 

이 작품에서 묫자리를 봐주고 잘못된 건 바로 잡아주는 풍수사 상덕은 사적인 동기로 시작했던 파묘를 공적인 동기로 넘어서게 해줌으로서, 사실상 두 개로 끊어져 있는 이야기를 하나로 묶어내는 인물이다. 즉 ‘여우가 범의 허리를 끊었다’는 대사에 담긴 것처럼, 범의 형상을 한 한반도의 허리에 해당하는 곳에 꽂힌 쇠말뚝을 뽑아내는 이야기에 걸맞게, 앞뒤 두 개의 이야기가 끊어져 있는 것을 대사 한 마디로 이어내는 인물이다. 

 

그건 풍수사라는 직업이 땅을 보고 다루는 전문영역을 갖고 있어서 가능해진 일이다. 전문적인 직업의 영역은 그래서 사적인 욕망이나 생계수단이기도 하지만, 때론 그 경험들이 응축되어 무언가 뒤틀어진 것을 바로잡음으로서 모두가 제대로 살아갈 수 있는 공적인 역할이 되기도 한다. 상덕이 그러하듯이. 

 

이건 최민식이라는 배우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그가 걸어온 연기 인생을 들여다 보면 배우라는 전문영역에 그가 얼마나 일생을 던져 노력해왔는가가 엿보인다. 그는 엇나간 학생들을 엄하게 꾸짓는 선생님(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었고, 조폭들과 맞짱뜨는 검사였으며(넘버3), 바람난 아내 때문에 분노하는 남편이자(해피엔드), 달동네에서 살아가는 순박한 시골남자(서울의 달)였다. 

 

하지만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운 역할들 또한 그는 연기했는데, 남파 공작원(쉬리), 장승업(취화선), 수십 년을 갇혀 지내다 복수를 꿈꾸는 인물(올드보이), 연쇄살인마(악마를 보았다), 정재계 인사들과 연결된 비리로 점철된 브로커(범죄와의 전쟁), 심지어 이순신(명량) 역할까지 소화했다. 

 

그가 메소드 연기의 일인자라는 걸 생각해보면 어떻게 이토록 다양한 인물들을 진짜 그 인물이 되어 연기로 풀어냈는가가 불가사의하게 여겨질 정도다. 그의 메소드 연기에 얽힌 이야기들은 그래서 때때로 인터뷰를 통해 회자되곤 했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악마를 보았다’에서 연쇄살인마 연기를 했을 때 있었던 일화다. 

 

영화 촬영 중 동네 피트니스 센터 엘리베이터에서 평소 친근하게 다가오곤 했던 한 아저씨가 반말로 “어디 최씨냐”고 물어봤을 때 저도 모르게 “근데 이 XX가 왜 반말을 하지?”하는 생각이 들어 엘리베이터 비상정지 버튼을 누르고 싶었다는 이야기다. 최민식이 어떤 연기를 할 때 얼마나 그 인물 깊숙이 들어가는가를 잘 말해주는 일화다. 

 

그는 인터뷰를 통해 “살인자의 ‘살’자도 다신 안하고 싶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고 한다. 또 <명량>으로 이순신 장군의 역할을 할 때도 그는 엄청난 부담감을 느꼈다고 하는데, 그건 이 인물이 홀로 짊어졌을 무게가 고스란히 자신을 짓눌렀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실 메소드 연기는 최근 들어 배우들이 잘 시도하지 않는 연기 방식이다. 진짜 자신이 맡은 역할을 하기 위해 실제 생활을 해보는 등 완전히 그 사람이 되어 연기를 하는 것인데, 요즘은 이렇게 빠져서 하는 연기보다는 한 걸음 떨어져서 하는 생활연기법이 많이 활용되기 때문이다. 

 

최민식의 라이벌로 불리는 송강호가 바로 그런 스타일의 연기를 한다. 역할을 연구하는 건 같지만, 완전히 그 인물이 되어 연기하는 것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절제된 연기로 효과를 극대화하는 것이 다르다. 이 차이에 대해서 박찬욱 감독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최민식이 ‘고전주의자’라면 송강호는 ‘자연주의자’라고. 어느 쪽이 옳거나 낫다고 말할 수 없고 다만 스타일의 차이라고나 할까. 

 

어쨌든 최민식에게 연기란 끝없이 새로운 인물의 세계 깊숙이 들어가는 것이고, 그걸 연구하고 배우는 것이다. 그는 ‘유퀴즈 온 더 블럭’에 나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우리 작업이 죽어야 끝나는 작업이에요. 사람을 연구하고 세상을 관찰하고 연구하는 일인데 사람에 대해서 뭐 답이 있어요? 이 인생에 답이 있나요? 삶이 답이 있어요? 세상이 변하고 사고방식도 변하고 가치관도 달라지고 이게 졸업이 어디 있어요? 이걸 하나하나 알아나간다는 게. 힘들기도 하지만 재밌기도 하고 고통스럽기도 하고 이건 죽을 때까지 하는 공부예요.” 

 

그런데 그 공부에 임하는 태도가 흥미롭다. 무언가 새로운 세계를 하기 위해 우리는 뭐든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는 일단 뛰어들라고 말한다. “그냥 뛰어들어서 하면 돼요. 아니 이게 냄비 솥이 뜨거운지 알려면 만져봐야 뜨겁죠. 그러니까 한번 뜨거운 맛을 봐야... 만져보지도 않고 뭐 어떻게 알겠어요. 무슨 일이든지 그렇지 않나요? 내가 좋아하고 호기심이 있고 하고 싶다 그러면 한번 해봐야지 알지. 뭐... 방법이 없죠.”

 

‘파묘’의 상덕이 그러하듯이 땅 속에 뭐가 있는지는 일단 파 봐야 안다. 무엇이 나올지 두렵기도 하지만 파보지 않으면 뭐가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렇게 하나하나 땅을 파보듯이 최민식은 여러 역할들을 팠을 게다. 그리고 그 역할들이 동시대의 대중들에게 줬던 여러 감정들은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쳤을 게 분명하다. 무언가를 파다 보면 전문가가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고, 그건 때론 꽤 거창하고 의미있는 일들로 나아갈 수도 있다는 걸, ‘파묘’의 상덕이 아니 그 역할을 연기하는 최민식이 우리 앞에 꺼내 보여주고 있다. (사진:영화 '파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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