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징어 게임2

“넌 그 비행기를 탔어야 했어. 네 선택을 후회하게 될 거야.”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게임2’는 프론트맨(이병헌)이 기훈(이정재)에게 하는 경고로 문을 연다. 그건 ‘선택’에 대한 경고다. 시즌1 엔딩에서 미국으로 가려던 기훈(정재)은 발길을 돌리며 프론트맨(이병헌)에게 전화로 선전포고한 바 있다. “난 말이 아니야. 사람이야. 그래서 궁금해. 너희들이 누군지. 어떻게 사람에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는지. 그래서 난 용서가 안돼. 너희들이 하는 짓이.” 만일 기훈이 그대로 비행기를 탔다면 어땠을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고 저들이 원하는대로 세상은 흘러갔을 게다. 하지만 발길을 되돌린 그는 저들과 맞서려 하고 이 잔혹한 게임을 끝장내려 한다. 프론트맨의 경고와 기훈의 선전포고. 시즌2는 이 두 흐름의 부딪침을 그리고 있다. 

 

그런데 시즌2에서 저들의 실체에 접근하기 위해 딱지남을 찾는 기훈이 사채업자들을 움직이는 광경은 저 ‘오징어 게임’의 방식들을 연상시킨다. 무려 2년 간이나 지하철 곳곳을 수색해온 사채업자들은 회의감을 느끼지만 기훈이 성공보수 10억을 내걸자 눈빛이 달라진다. 눈앞에 놓인 돈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 이건 자본의 전형적인 작동 방식이다. 그렇게 드디어 찾아낸 딱지남은 게임에 미친 인물로 노숙자들에게 다가가 빵과 복권을 내밀며 선택하라고 한다. 당장 먹을 수 있는 빵을 선택하는 게 합리적이지만 대부분은 복권을 선택한다. 빵을 선택하면 모두가 나눠먹을 수 있는데도 왜 사람들은 극히 확률이 낮은 복권을 선택할까. 거기에는 더 많은 돈을 버는 것이 당연한 가치로 추구되는 자본의 방식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오징어 게임’은 바로 그 자본의 방식을 게임이라는 틀을 통해 보여준다. 456명이 참여해 1인당 1억씩 배정된 목숨값을 사람들이 죽어나갈 때마다 적립해 최후의 1인이 456억을 독식하는 게임이다. 저 복권과 다를 바가 없다. 다만 이 게임은 그 욕망한 결과가 실패로 돌아올 때 죽음으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이 달라보일 뿐이다. 그리고 이건 고도화된 자본화가 승자독식의 틀 안에서 운용될 때 실제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다. 몇몇은 엄청난 부를 거머쥐지만 그로 인해 무수한 이들이 길바닥으로 내몰려 죽어간다. 기훈이 공항에서 발길을 돌린 건, 자신이 우승상금으로 받은 456억이 저들의 목숨값이라는 걸 깨닫게 되면서다. 

 

‘오징어 게임’ 시즌1이 그래서 그 자본의 잔혹한 작동방식을 게임을 통해 알게 되는 이야기였다면, 시즌2는 그 게임과 맞서는 이야기다. 기훈은 말이 아닌 사람으로서 대항하려 한다. 그래서 다시 게임에 들어가려 하고, 저들이 원하는 방식대로 흘러가지 않게 하기 위해 사람들을 살려내고 또 설득하려 한다. 그저 놀이로 알았던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가 실제로 참가자들이 사살되는 게임이라는 걸 알고 있는 기훈은 그래서 죽을 위험까지 무릅쓰며 그들이 살 수 있는 길을 알려준다. 

 

시즌2에 새로이 도입된 룰은 매 게임 후 다음 게임을 계속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투표를 한다는 것이다. 투표에서 한 사람이라도 ‘X’가 더 나오면 게임은 중단되고 그간 적립된 돈을 살아남은 참가자들이 나눠갖고 나갈 수 있게 된다. 일방적으로 강요된 게임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게임이라는 걸 강조하는 이 룰은 그래서 이 게임을 멈출 수 있는 기회를 열어준다. 이 방식은 민주주의의 방식이다. 더 많은 이들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 그 공동체의 미래를 결정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민주주의의 방식은 저 비합리적이고 잔혹한 자본의 방식을 가진 게임 앞에 번번히 무력해진다. 참가자들은 나눠가질 돈이 너무 적다는 이유로 ‘한 판 더’ 게임을 하겠다는 ‘O’에 투표한다. 자신들이 희생될 수도 있다는 걸 망각한 채. 

 

게임을 멈추기 어렵게 만드는 또 하나는 프론트맨이 오영일이라는 이름으로 게임에 참가한다는 점이다. 오영일은 기훈의 조력자처럼 굴지만 사실은 그 안에서 이 게임을 계속 움직이게 하는 인물이다. 자본의 방식을 대변하는 프론트맨이 민주주의 방식으로 게임을 멈추려는 기훈 옆에 붙어 있는 이 설정은 그래서 민주주의 시스템 안으로도 깊숙이 들어와 있는 자본의 힘을 은유하는 것만 같다. 자본 앞에 민주주의라는 촛불은 연약하게만 보인다. 

 

과연 기훈은 프론트맨과의 대결에서 승리할 수 있을까. 자본의 무자비한 방식들을 민주주의는 극복해낼 수 있을까. 프론트맨과 기훈으로 대변되는 자본과 민주주의의 대결과 좌절을 그리는 ‘오징어 게임2’는 그래서 시즌3로 가는 빌드업이다. 그래서 좀더 시원시원한 결말 같은 걸 원했던 시청자들이라면 미진한 느낌을 줄 수 있다. 하지만 시즌1의 이야기에서 보다 확장된 세계로 나온 시즌2의 서사는 여전히 흥미롭고 대결의식은 더 팽팽해졌다. 특히 현 탄핵 정국에서 우리가 느끼는 민주적 절차에 대한 희망과 무력감을 떠올려본다면, ‘오징어 게임2’가 던지는 ‘선택’에 대한 질문은 특별하게 다가올 수 있을 게다. (글:중앙일보, 사진:넷플릭스)

다시 주목받는 가족서사, 우리 시대의 가족은?

가족드라마가 점점 퇴조하면서 가족은 지나간 옛 코드라 여겨졌지만 최근 들어 가족 서사는 다시금 전면에 떠오르고 있다. 어째서 가족 서사가 다시 부상하고 있을까. 또 그 가족 서사는 과거와 무엇이 달라졌을까. 

나미브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가족의 탄생

최근 ENA에서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나미브’는 해고된 스타 제작자 강수현(고현정)이 방출된 장기 아이돌 연습생 유진우(려운)를 스타로 키워내 재기하려는 과정을 담은 작품이다. 소재적으로 보면 ‘드림하이’나 ‘아이돌:The Coup’ 같은 K팝 아이돌을 소재로 담고 있지만, ‘나미브’에서 어른거리는 건 가족 서사다. 강수현은 잠시 한눈을 판 사이 아들 심진우(이진우)가 교통사고를 당해 청각을 잃게 된 데 대한 죄책감에 어떻게든 돈을 벌어 아들의 미래를 열어주려 안간힘을 쓴다. 하지만 그런 강수현의 집착은 남편 심준석(윤상현)도 또 심진우도 오히려 힘겹게 만든다. 심진우는 자신이 원하는 것도 아닌 미래를 강요하는 엄마 때문에 힘겨워 하고, 심준석은 결국 이혼서류를 내민다. 이 위기의 가정에 소속사에서 방출되어 갈 곳 없게 된 유진우가 들어온다. 그는 천재적인 재능을 가졌지만 어려서 부모에게 버림받은 충격 때문에 자해를 하는 등 심적으로 불안한 상태다. 그래서 ‘나미브’가 그리는 건 유진우라는 연습생이 스타로 성장하는 과정만이 아니다. 가족으로부터 버려져 불안하게 떠돌던 이 인물이 강수현과 심준석, 심진우가 같은 이들과 만들어가는 새로운 가족의 틀에서 안정감을 찾아가는 과정 또한 담겼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결코 느낄 수 없었던 가족애를 혈육 바깥에서 찾는 이야기. ‘나미브’는 그 새로운 가족 서사를 꺼내놓고 있다. 

 

최근 전편이 공개된 쿠팡플레이 ‘가족계획’도 마찬가지다.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영수(배두나)네 가족은 어딘가 특이하다. 영수는 타인의 기억을 자유자재로 편집할 수 있는 특수한 능력을 가졌고 그녀의 남편 철희(류승범)는 수십 명쯤은 맨손으로 때려잡는 무공의 소유자다. 쌍둥이 지훈(로몬)과 지우(이수현)도 전학 온 학교에서 단번에 일진들을 때려눕히는 아이들이고, 할아버지 강성(백윤식)도 그런 아이들에게 ‘힘 조절’을 하라고 말하는 인물이다. 알고 보면 이들은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이 아니다. 아이들을 훈련시켜 살인무기로 만드는 특수교육대대라는 곳에서 함께 탈출해 꾸려진 가족이다. 그런데 이 모래알 같은 가족은 위기를 맞게 되면서 진짜 끈끈한 가족애를 드러낸다. 헌신적인 희생을 해온 영수를 중심으로 똘똘 뭉친 이 이상한 가족은 그렇게 진짜 가족이 되어간다. 피와 살점이 튀는 잔혹극 형식을 장르로 가져온 작품이 훈훈한 가족드라마 같은 느낌을 주는 이유다. 

 

이 새로운 가족이 태생적 가족보다 낫다?

흥미로운 건 이 혈연 바깥에서 새롭게 탄생한 가족이 기존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과 대결구도를 보이기도 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종영한 JTBC 드라마 ‘조립식 가족’에서 윤정재(최원영)라는 아빠를 중심으로 김산하(황인엽), 윤주원(정채연), 강해준(배현성) 그리고 김대욱(최무성)이 말 그대로 조립식으로 꾸려낸 가족은 피로 연결된 혈육 관계의 가족들과 대결구도를 갖게 된다. 즉 진짜 가족 이상으로 끈끈하게 잘 살아가고 있는 이들 앞에 떠났던 부모들이 나타나 자식들을 데려가려 하면서 갈등이 생겨난다. 가족 코드에 더 몰입하는 중국드라마를 원작으로 가진 리메이크 작이지만 ‘조립식 가족’이 보여주는 이 새로운 가족의 서사는 국내 시청자들의 마음에도 울림이 적지 않았다. 가족드라마는 한때 공고했지만 지금은 사라져가고 있는 가부장제 시스템의 퇴조와 함께 힘을 잃은 지 오래다. 하지만 힘을 잃은 건 가부장적 시스템을 그대로 가져온 옛 가족드라마들일 뿐, 현재의 달라진 환경에 맞는 가족코드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걸 ‘조립식 가족’ 같은 작품이 보여준다. 

 

혈육이 아닌 타인이 가족이 되는 이런 새로운 경향은 사극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최근 JTBC에서 방영되고 있는 ‘옥씨부인전’에는 구덕이(임지연)라는 노비 신분의 인물이 옥태영이라는 양반가의 딸로 신분이 바뀌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가짜 옥태영을 가족으로 받아들인 건 다름 아닌 진짜 옥태영(손나은)의 할머니인 한씨부인(김미숙)이다. 한씨부인은 구덕이의 심성과 남다른 능력을 알아보고 그녀를 옥태영으로 살게 해준다. 이를 극구 사양하던 구덕이는 옥태영이 외지부(당대의 변호사)가 되어 억울한 일을 당한 힘없는 백성들을 돕겠다는 그 큰 뜻을 자신이 이뤄주겠다며 그 새로운 삶을 받아들인다. 그렇게 가짜 옥태영의 삶을 살게 되지만, 구덕이는 그 삶을 통해 막심(김재화), 도끼(오대환), 백이(윤서아), 끝동이(홍진기) 같은 노비들과 진짜 가족 같은 관계를 만들어간다. 그들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나서서 해결해주고, 노비와 상전 같은 상하관계가 아닌 수평적 가족 관계를 이어간다. 그런데 이렇게 이어진 구덕이와 그 주변인물들을 위협하는 이들은 혈연이지만 비뚤어진 가족관계를 가진 자들이다. 자기 아들이 노비인 백이를 좋아하게 되자 그 사이를 떼어놓기 위해 사람을 시켜 아들이 보는 앞에서 백이를 욕보이게 하려 했던 송씨부인(전익령)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자기 자식에 대한 엇나간 이런 집착은 결국 그 아들마저 자진하게 만드는 비극으로 끝이 난다. 

 

가족 바깥에서 찾아낸 새로운 가족

알다시피 가족드라마는 퇴조한 장르라 여겨진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건 가족드라마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KBS 가족드라마의 추락이다. 한때 50%까지 육박하던 KBS 가족드라마의 시청률은 최근 몇 년 사이 급속도로 떨어져 이제 20%도 넘기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물론 이 수치도 적은 건 아니지만, 과거에 비해 가족드라마에 대한 수요가 급격히 빠지고 있다는 반증이다. 이렇게 된 건 실제 우리네 사회가 1인가구가 급증하는 등, 과거 같은 대가족 체제가 사라지고 있는 현실과 맞물려 있다. 이제 더 이상 대가족이 등장하는 옛 가부장적 틀의 가족 서사가 공감을 주지 못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족 서사 자체가 무의미해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확실히 단촐해졌지만 여전히 가족 안에서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최근 등장하는 작품들에는 여전히 가족 서사에 대한 갈증들이 어른거린다. 다만 그 가족 서사는 과거의 가부장적 시스템과는 완전히 달라진 경향을 보일 뿐이다. 옛 방식의 가족 서사를 깨고 새로운 가족을 내세우는 건 그래서 최근 작품들의 새로운 경향이 되고 있다. 영화 ‘대가족’ 같은 작품을 보면 정자 기증이라는 코미디 코드를 활용해 우리 시대의 가족의 범주가 어디까지인가 대한 새로운 질문들을 유쾌하게 던지고 있다. ‘대가족’의 ‘대’가 ‘크다’가 아닌 ‘대하여’의 의미를 담아 영문 제목이 ‘About Family’인 이유다. 

 

‘나미브’의 강수현 가족과 유진우가 만들어가는 새로운 조합의 가족 서사나, ‘가족계획’이나 ‘조립식 가족’에서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이들이 가족이 되어가는 이야기는 이제 우리 시대가 꿈꾸는 새로운 가족의 그림들을 그려낸다. 이미 이런 변화의 징후들은 ‘아는 건 별로 없지만 가족입니다’나 ‘남남’ 같은 작품들에서 피어나고 있었고, ‘히어로는 아닙니다만’ 같은 새로운 장르물과도 엮어지며 그 모습을 드러낸 바 있다. 한때 퇴조했다 여겨졌던 가족서사는 그래서 새로운 관계들을 등장시키며 다시 부활하는 중이다. 어쩌면 K콘텐츠의 핵심적인 매력이었다고 볼 수 있는 가족 서사는 이제 달라진 시대에 맞춰진 옷을 입을 화려한 외출을 하고 있는 중이다. (글:시사저널, 사진:ENA, 쿠팡플레이)

K콘텐츠에 투영된 K시민의 비판의식

비상계엄 선포와 해제 그리고 탄핵 정국까지, 거꾸로 갈 것 같던 시간을 다시 현재로 되돌린 건 다름 아닌 시민들이었다. 마치 한 편의 드라마 같은 그 과정들을 보다보면, 새삼 K콘텐츠의 진면목이 바로 그 문제를 바로잡으려는 비판의식이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서울의 봄

비상계엄 사태를 ‘현실판 디스토피아’라 보도한 외신

지난 3일 갑작스런 비상계엄 선포와 그 해제 과정에 대해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은 ‘K팝과 독재자들:민주주의에 가해진 충격이 한국의 양면을 드러냈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냈다. 그 기사는 한국이 최근 한류 열풍을 통해 ‘문화적 거물’이 됐지만 갑자기 터진 계엄사태로 ‘현실판 디스토피아’가 생겨났다고 했다. 계엄 선포와 해제 과정에서 국회의원들이 담을 넘어 국회의사당으로 들어가고, 이를 막으려는 계엄군들이 군용 헬기를 타고 내려와 창을 깨고 국회로 난입하는 장면을 꼬집은 것이다. 실제로 그 장면은 현실이라기보다는 디스토피아를 그린 콘텐츠의 한 부분처럼 보였던 게 사실이다. 새벽까지 잠 못 이루며 실시간으로 보도되던 그 과정을 바라본 시민들은 80년 서울 한 복판에 등장했던 탱크를 떠올렸지만, 그것이 2024년 현재에 벌어진 일이라는 사실에 비현실적인 느낌을 받았다. 

 

우리가 이 정도였으니, 이를 접한 외신들의 충격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국가적 위상과 이미지가 훼손됐다는 비판이 나왔고, 평화로운 이미지가 한 순간에 무너졌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게다가 그 시점은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타는 순간이었고 이제 ‘오징어게임2’의 공개를 앞두고 전 세계의 관심이 다시 한국에 쏠리고 있던 순간이었다. 비상계엄 선포는 문화적 자긍심이 한껏 고조되는 순간에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 사태는 단 몇 시간 만에 종료되었다. 국회가 비상계엄 선포 해제를 선언했고, 윤석열 대통령도 이를 공식화했다. 그리고 이어진 후폭풍은 시민들을 거리로 나오게 했다. 저마다 응원봉을 하나씩 들고 국회 앞에 모여 대통령 탄핵안 통과를 독려하는 집회를 열었다. 국민의 힘 의원들이 투표에 참여조차 하지 않아 통과되지 못했던 탄핵안은 또다시 국회에 상정됐고 두 번째 투표를 통해 통과됐다. 그 광경 또한 드라마틱했다. ‘현실판 디스토피아’라고 외신이 보도했지만 그건 그저 절망적인 분위기만 가득한 드라마는 아니었다. 희망의 불씨 같은 게 담긴 드라마였는데, 그 주인공은 이름 없는 시민들이었다.

 

다시 보이는 K콘텐츠의 진면목, 비판의식

외신들은 K콘텐츠에 대한 전 세계적인 열광에 국가적 자긍심이 높은 한국이 이번 사태를 통해 심각한 평판의 타격을 입었다고 전하기도 했지만, 잘 들여다 보면 이번 사태는 K콘텐츠의 힘이 어디서 비롯됐는가를 정확히 알려준 것이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해외에서 주목받은 K콘텐츠들은 대부분 한국사회가 가진 다양한 문제들을 꼬집거나 비판하는 작품들이었다. 외신이 ‘디스토피아’라는 표현을 썼던 것처럼 K콘텐츠에 투영된 한국 사회는 어두운 터널 안에 들어 있었다. 

 

곧 시즌2가 나올 ‘오징어게임’이 그려낸 디스토피아는 치열한 경쟁이 내면화된 계급사회였다. 약자들이 서로 경쟁하게 만들어 누군가는 살고 누군가는 죽는 그 치열함과 처절함을 동력으로 굴러가는 사회가 그것이었다. 봉준호 감독이 아카데미상을 받은 ‘기생충’은 어떤가. 지상과 반지하 그리고 지하라는 공간으로 구획된 한국사회의 양극화를 이 작품은 블랙코미디로 그려냈다. 한국을 이른바 K좀비의 종주국으로 만든 무수한 한국형 좀비물들도 대부분 한국사회가 가진 모순되고 부조리한 시스템들을 비판한 것들이었다. ‘킹덤’이 조선사회를 빗대 권력에 굶주려 좀비가 된 지배층과 배고픔에 굶주려 좀비가 된 서민들을 비교했다면, ‘지금 우리 학교는’은 한국의 입시경쟁이 만들어내는 몰개성화되어 엇나가기도 하는 아이들의 비극적인 현실을 담았다. ‘부산행’은 KTX에 창궐한 좀비들과의 사투를 통해서 압축성장한 한국사회가 마주한 위기들을 디스토피아로 그려내지 않았던가.  

 

즉 K콘텐츠가 가진 진짜 힘은 바로 이러한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가 마주한 문제들은 우리만이 아닌 자본화된 현대사회가 맞닥뜨린 문제들이기도 했다. 그래서 전 세계적인 공감이 생겨났다. K콘텐츠가 글로벌한 각광을 받게 된 이유였다. 이렇게 된 데는 한국사회가 전쟁 후 짧은 기간 안에 압축성장해오며 겪은 일들이 사실상 자본화 단계에서 발생하는 많은 일들을 포함하고 있어서였다. 그래서 한국사회는 빠른 성장을 했지만, 그만큼 다양한 문제들을 동시에 품고 있었고 이에 대한 비판의식들이 K콘텐츠의 자양분이 됐던 거였다. 거꾸로 이야기하면 이번 비상계엄 사태가 터졌을 때 시민들이 그 비현실적인 장면을 보며 국회로 달려갈 수 있었던 데는 K콘텐츠가 그려내곤 했던 디스토피아의 양상들을 통해 이 사태가 야기할 문제들을 즉각적으로 실감한 부분도 작용했다고 말할 수 있다. 

 

다시 ‘서울의 봄’이 주목받게 된 건

작년 방영되어 1300만 관객을 동원하는 신드롬을 불러 일으킨 영화 ‘서울의 봄’은 이번 계엄 사태를 통해 또다시 주목받았다. 79년 12월12일에 버러진 군사 반란을 소재로 긴박하게 돌아간 7시간의 기록을 담은 이 영화는 시민들에게 중요한 교육적 효과를 불러 일으켰다. 당시 상황을 직접 겪어보지 않은 젊은 세대들도 이 영화를 통해 당대의 계엄 사태를 눈앞에서 생생히 경험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비상계엄 사태가 터졌을 때 인터넷에서는 이 사건을 ‘2024년판 서울의 봄’이라고 칭하며 재개봉을 추진해야 한다는 이야기까지 나오기도 했다. 또 ‘서울의 봄’을 패러디한 ‘서울의 밤’이라는 표현이 등장하기도 했다. 한편의 작품이 그 시대의 어둠을 치열하게 담아냄으로써 현재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를 ‘서울의 봄’은 이번 사태를 통해 보여줬다. 

 

넷플릭스에서 지난 10월 공개됐던 김상만 감독의 영화 ‘전,란’도 이번 비상계엄 사태를 통해 재조명됐다. 임진왜란을 시대적 배경으로 조선 최고 무신 집안의 아들 종려(박정민)와 그의 몸종 천영(강동원)이 각각 선조(차승원)의 최측근 무관과 의병이 되어 서로 칼을 겨누게 되는 상황을 그린 이 작품에서는 왕의 무능이 어떻게 민란으로까지 이어지는가를 그려냈다. 전쟁으로 피폐된 상황에서도 궁궐을 짓는데만 혈안인 왕의 실정으로 결국 봉기하는 민초들의 모습은 현재의 탄핵 정국을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번 비상계엄 선포와 해제 그리고 이어진 탄핵정국이라는 일련의 사태들이 보여준 건 몇몇 권력자들이 만들어낸 위기상황 속에서도 빛나는 시민의식이 한국사회가 가진 희망이라는 점이다. 여의도 집회 현장을 가득 메운 시민들이 저마다 색색의 응원봉을 들고 한 마음이 되어 한 목소리를 내는 광경은 바로 그걸 상징하는 장면들이었다. 그리고 이 드라마틱한 장면들 속에서 떠오르는 무수한 K콘텐츠들의 잔상들은 이 작품들이 본래 시민들이 가진 건정한 비판의식들을 담고 있었다는 걸 새삼 절감하게 만든다. K콘텐츠는 바로 이 높은 시민의식들이 갖고 있는 문제의식과 시대적 갈증들을 담아내면서 대중들의 호응을 얻었던 거였다. 

 

혹자들은 이번 비상계엄 사태가 언젠가는 K콘텐츠의 소재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사실이다. 비현실적으로 여겨질만큼 드라마틱한 사건이 아니었던가. 이러한 현실에 대한 재연과 재구성을 통한 비판과 문제의식의 공유는 K콘텐츠에도 또 한국사회에도 희망을 갖게 하는 토양이 될 것으로 보인다. (글:시사저널, 사진:영화'서울의 봄')

소녀시대

“사랑해 널 이 느낌 이대로- 그려왔던 헤매임의 끝. 이 세상 속에서 반복되는 슬픔 이젠 안녕-” 거리에서는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가 울려 퍼졌다. 시민들은 그 노래를 따라 부르며 응원봉을 흔들었다. 이건 콘서트나 축제의 현장이 아니다. 비상계엄 사태와 탄핵 정국에 거리로 나온 시민들의 시위 현장이다. 아마도 소녀시대는 자신들이 부른 노래가 시위 현장에서 우려퍼질 줄은 몰랐을 게다. 그것도 응원봉과 함께라니. 

 

이번 시위가 펼쳐진 광장에서는 다양한 K팝이 울려퍼졌다. 물론 여전히 ‘아침이슬’이나 ‘임을 위한 행진곡’ 같은 80년대 광장에서 울려퍼졌던 민중가요들도 빠지지 않았지만, 그 사이 사이를 에스파의 ‘슈퍼노바’나 로제의 ‘아파트’, 샤이니의 ‘링딩동’, 지드래곤의 ‘삐딱하게’, 방탄소년단의 ‘불타오르네’ 같은 K팝들이 채웠다. 응원봉도 저마다 가지각색이었다. 특정 아티스트를 응원하던 응원봉이 시위 현장을 색색으로 물들였다. 과거 촛불 시위에서 똑같은 촛불들이 한 자리에 모여 횃불이 되던 풍경을 떠올려보면, 색색의 응원봉과 LED 촛불이 만들어내는 다채로운 색깔은 시위문화에도 다양성을 추구하는 변화가 생기고 있다는 걸 말해준다. 

 

이 흥미로운 광장의 변화는 외신들도 주목했다. 로이터 통신은 ‘K팝 야광 응원봉이 한국의 탄핵 시위에서 불타오르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응원봉이 ‘비폭력과 연대의 상징’으로 떠올랐다고 보도했다. 블룸버그 통신도 ‘K팝 응원봉이 한국의 시위 참가자들을 하나로 묶었다’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서울의 경관은 K팝과 정치가 결합한 화려한 디스플레이로 변했다”며 “K팝의 밝은 분위기가 정치적 혼란상을 가려주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시위 참가자들이 상황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아니다”라고 전했다. 또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에서는 “엔터테인먼트 요소가 들어간 축제의 북적임을 보여주면서도 질서정연했다”며 “차세대형 민주주의의 모습이 떠오른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광장의 진화는 어떤 과정을 통해 이뤄진 걸까. 

 

본래 광장은 시민들의 것이었다. 민초들이 모여 권력의 비리를 꼬집고 그 아픔을 토로하며 또 공감하던 공간은 다름 아닌 마당에서부터였으니 말이다. 그래서 독재 권력이 등장했던 80년대에는 광장의 헤게모니 싸움이 치열했다. 신군부 쿠데타로 권력을 쥔 전두환 정권이 여의도에서 ‘국풍81’을 대대적으로 벌인 건, 시민들의 광장을 선점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 독재정권은 87년 6월 광화문 광장으로 나온 시민들에 의해 무너졌다. 최루탄이 터지고 전경들의 폭력적인 진압이 이뤄지던 당대의 광장의 풍경은 비장할 수밖에 없었다. ‘님을 위한 행진곡’이나 ‘광야에서’,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같은 노래들이 당대의 광장에는 울려퍼졌다. 

 

그토록 비장했던 광장의 풍경이 2002년 월드컵 시즌에는 완전히 달라졌다. 광화문 광장을 가득 메운 ‘붉은 악마’의 물결은 과거 광장과 밀실의 시대가 가진 트라우마를 밀어내는 듯한 상징으로 다가왔다. 레드 콤플렉스를 뛰어넘는 붉은 물결이 하나의 축제로 광장을 물들였기 때문이다. 그 광장에서 윤도현은 ‘오 필승 코리아’를 불렀고, 시민들은 그 노래를 따라부르며 우리 팀을 응원했다. 한 목소리의 응원은 월드컵 4강 진출로 ‘꿈은 이루어진다’는 캐치프레이즈를 현실화시켰다. 시민들이 한 자리에 모인 축제의 광장이었다. 

 

2016년 탄핵을 부르짖으며 광화문 광장에 모인 이들은 저마다 촛불을 들었다. 시국이 불러일으킨 진지함이 있었지만, 이 때의 광장 문화는 87년의 그것도 또 2002년의 그것도 아닌 새로운 것이었다. 마치 87년과 2002년을 합쳐 놓은 듯한 광장의 풍경이랄까. 무려 190만 명이 운집했지만 분위기는 투쟁이 아니라 촛불이 상징하듯 차분한 공감과 기원에 가까웠다. 심지어 전경들의 등을 두드려주는 시민들의 성숙한 모습들이 등장했고, 차분한 분위기에서 이승환과 전인권 그리고 양희은 같은 가수들이 노래를 불렀다. 그 와중에 촛불은 바람이 불면 꺼진다는 한 여권 정치인의 발언은 아날로그 초가 LED초로 바뀌는 계기가 됐다. 바람이 불어도 절대 꺼지지 않는 촛불이 등장한 것이다. 

 

2024년의 광장은 이 일련의 과정을 통해 진화해온 시위 문화가 또 한 차례 진화한 모습을 보여줬다. 그것은 ‘다양성’이라는 새로운 시대적 가치가 투영된 광장이었다. 민중가요와 더불어 K팝이 울려퍼지게 됐다는 건, 광장을 찾은 세대가 얼마나 다양했는가를 잘 말해준다. 거기에는 80년대 민주화 시대를 거친 세대들도 있었지만, 그걸 겪어보지 못했던 2,30대도 있었다. 그래서 이들 세대를 대변하는 노래들이 다양하게 울려퍼졌고, 그들의 문화 또한 한 자리에서 어우러지는 양상을 보였다. 민중가요나 민주화가 익숙하지 않은 젊은 세대들은 당대의 세대들을 이해하는 시간이 됐고, 거꾸로 기성세대들은 요즘 세대들이 즐겨듣는 K팝을 함께 흥얼거리며 그 팬덤 문화를 공유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또한 광장의 시위 문화를 바꾼 중요한 요소 중 빼놓을 수 없는 건 ‘디지털 기술’이다. 시위 현장을 응원하기 위해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에서 현장 근처의 카페에 송금 결제를 통해 시민들에게 커피를 나눠주는 기막힌 광경이 펼쳐졌다. 아티스트들은 응원봉을 들고 나온 팬들을 위해 핫팩을 주문해 보내주기도 했고, 직접 참여하기 어려운 시민들은 후원금을 소액 결제하는 방식으로 보태기도 했다. 아날로그의 광장 저 편으로 디지털 광장이 겹쳐져 있는 새로운 풍경이었다. 

 

민주주의를 위한 엄중한 메시지를 내면서도 동시에 보다 다양한 이들이 참여할 수 있는 축제같은 경쾌함이 넘치는 광장. 10대부터 50대까지 그 문화가 공존하는 다양성을 담보하는 광장. 나아가 아날로그와 더불어 디지털이 함께 하는 광장. 이것이 현재 대한민국의 진화된 광장의 모습이 됐다.(글:이데일리, 사진: SM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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