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한 파트너’, 공적인 일과 사적인 감정 사이

“너는 인질이야. 니가 있어야 범인이 나타났을 때 내가 잡을 수 있지.” SBS 수목드라마 <수상한 파트너>에서 노지욱(지창욱)은 은봉희(남지현)를 자신의 집으로 들이며 그렇게 말한다. 변호사일도 접고 태권도 사범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살아가려 마음먹었던 은봉희의 마음이 흔들린다. 노지욱은 어느 날 술에 취한 모습으로 그녀에게 툭 “너 내 사람 되라”고 했던 것이 진심이라고 말한다. 

'수상한 파트너(사진출처:SBS)'

누가 봐도 이들은 밀당을 하고 있다. 여기서 ‘인질’이라는 표현은 마치 그들의 동거가 범인을 잡기 위한 공적인 일처럼 만들지만 그건 누가 봐도 동거하자는 말이다. 또 “내 사람 되라”는 말 역시 노지욱이 새로운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고 합류해서 일하자는 말이지만, 그 안에는 은봉희에게 ‘내 사람’이 되라는 사적이고 멜로적인 감정이 담겨져 있다. 

그래서 은봉희는 ‘인질’이라는 말에 설렌다. 왜 이렇게 잘 해주냐고 묻자 “인류애”라고 했던 노지욱을 떠올리며 “인류애에서 인질로 발전했다”며 사랑에 빠진 여인처럼 좋아한다. 이것은 <수상한 파트너>가 그리고 있는 멜로의 실체다. 거기에는 사적인 차원의 멜로와 공적인 차원의 일(변호, 진범 찾아 누명 벗기)이 겹쳐져 있다. 멜로적 상황이 나올 때마다 인물들은 그것이 그저 공적인 일일 뿐이라고 애써 부인한다. 하지만 그 공적인 일 안에서는 인물들의 사적인 감정들이 피어오른다. 

이것은 이 드라마가 그리고 있는 멜로적 상황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이 드라마가 또 한 축으로 다루고 있는 사회적 편견의 문제나 진실과 정의 문제에 있어서도 공적 사안과 사적 감정들은 뒤엉킨다. 은봉희를 아들의 살인범으로 생각했지만 풀려나게 됐다는 사실에 분노한 지검장 장무영(김홍파)은 그 사적인 감정 때문에 진실을 제대로 들여다보려 하지 않는다. 자신이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끝까지 부인하는 은봉희에게 그는 그렇다면 진범을 잡아오라고 말한다. 그는 누구든 분노를 터트릴 대상이 필요한 것이다. 

유명 셰프의 살해 용의자로 붙잡힌 택배 기사가 은봉희를 변호사로 지목하고, 그녀가 그의 억울한 사연을 들었을 때 그녀 역시 공적인 선을 넘어 사적인 감정으로 그에게 지나치게 감정이입한다. 그 택배 기사의 상황이 자신이 과거 살인자로 몰려 있을 때의 처지와 너무나 똑같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 때 노지욱이 자신의 유일한 동아줄이 되어주었듯이 그녀는 그에게 동아줄이 되고 싶어 한다. 그런 그녀에게 노지욱은 너무 감정이입하지 말라고 말한다. 장무영도 또 은봉희도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에 사적인 감정들은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친다. 

물론 이 드라마의 실체는 분명 로맨틱 코미디다. 그래서 노지욱과 은봉희는 사건을 맡아 변호를 하면서도 멜로적 상황들을 놓치지 않는다. 택배기사의 변호를 하면서도 갑자기 내리는 비를 피해 내리는 소나기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은 사건을 변호하는 변호사의 얼굴이 아니라 사랑에 이제 막 빠지려는 연인들의 얼굴이다. 그리고 멜로적 상황을 일로서 슬쩍 감추는 그 방식은 오히려 이 멜로의 감정들은 더 강화시키는 힘이 된다. 

하지만 동시에 이 드라마가 진짜 살인범을 잡아 누명에서 벗어나는 목표를 갖고 있고, 또한 억울한 위치에 서 있는 이들의 변호를 해주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건 이러한 멜로적 상황들을 예사롭지 않게 바라보게 만든다. 공적인 입장과 사적인 감정들이 겹쳐져 일과 사랑을 명쾌하게 가르지 못하고 혼재시키는 상황들은 그래서 여기 등장하는 인물들을 따뜻하게 바라보게 만든다. 완벽하지 못하고 어딘지 부족하지만 그것이 인간적이라고 느껴지는 그런 부분들이 생기는 것. 

그래서 <수상한 파트너>에는 그 흔한 갑을관계조차 혹은 절친들이었지만 그 안에서 벌어진 불륜으로 인해 뿔뿔이 흩어지게 된 친구들 관계에서조차 가해자와 피해자로 선악이 구분되게 그려지지 않는다. 노지욱의 모친인 홍복자(남기애)가 운영하는 피자집에 은봉희의 모친인 박영순(윤복인)이 아르바이트로 들어오자 홍복자는 이른바 갑질을 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그런 전형적인 상황 속에서도 박영순은 결코 만만하게 당하기만 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그 갑과 을의 상황은 마치 친한 친구들이 툭탁대는 모습처럼 유쾌하게 그려진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라오며 절친으로 지냈지만 노지욱의 여자친구와 불륜을 저질러 이제는 멀어져버린 지은혁(최태준)을 대하는 노지욱의 감정은 미움과 분노와 더불어 우정이 겹쳐져 있다. 그래서 노지욱은 지은혁을 결코 앞으로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지만 그들을 내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의 “형제”나 다름없는 존재들이었기 때문이다. 실수를 저지르고 부족하지만 그래도 관계를 끊어낼 수 없는 이들의 모습은 그래서 인간적이다. 

<수상한 파트너>는 온전히 로맨틱 코미디로 봐도 충분히 재미있게 볼 수 있는 드라마다. 또 진범을 찾아내고 그래서 누명을 벗는 법정드라마로도 그리 나쁘지 않다. 하지만 이 두 부분이 엮어져 만들어내는 공적인 일들과 사적인 감정들의 혼재와 그 안에서 슬쩍 슬쩍 보이는 ‘인간의 모습’을 바라보는 건 어쩌면 이 드라마만이 가진 특별한 재미가 아닐까. 그 부족하고 선을 분명히 긋지 못하는 모습들이 그토록 예뻐 보일 수가 없으니.

작품에 불을 붙이는 밑그림 전문 허준호의 존재감

이 정도면 허준호는 작품의 ‘밑그림 전문’이라고 불러도 될 듯싶다. 허준호는 드라마든 영화든 주인공 역할로 등장한 적은 별로 없다. 대부분 악역이나 중요한 조연이 그가 연기해온 전문분야다. 하지만 그의 악역과 조연 역할은 그저 보조적인 것에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그 작품의 전체적인 정서나 분위기 혹은 팽팽한 긴장감 같은 것이 그의 연기로부터 부여된다는 점에서 그는 작품의 밑그림을 그려내는 숨은 주인공이 아닐까. 

'군주(사진출처:MBC)'

MBC 수목드라마 <군주>에서의 허준호가 그렇다. 사실 이 사극에서 편수회라는 조직이 갖는 존재감은 전체 이야기의 모티브라는 점에서 가장 중요하다. 왕의 뒤편에 서서 사실상 비선실세 역할을 하는 편수회의 국정농단으로 인해 파탄 나는 국가와 핍박받는 백성들이라는 이야기의 동기가 없다면, 이에 맞서 싸우며 스스로를 성장시켜 진정한 왕으로 돌아오는 세자 이선(유승호)의 모험담이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편수회의 수장으로서 대목을 연기하는 허준호는 그런 점에서 보면 이 편수회라는 조직의 비정함을 거의 혼자서 만들어내는 역할을 부여받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왕(김명수) 앞에서 예의를 갖추는 듯싶지만 실상은 왕을 허수아비처럼 여기는 인물. 그래서 결국 자신의 말을 듣지 않게 된 왕을 잔인하게 죽여 버리는 인물이 바로 대목이다. 

하지만 <군주>에서 대목이 더 살벌한 존재로 여겨지는 건 그가 돈과 권력이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꿰뚫고 있는 인물이라는 점이다. 가짜 세자를 허수아비 왕으로 세우려던 걸 군권을 쥐고 있는 대비가 막고 수렴첨정을 하자 대목은 돈줄을 죄어 군권마저 흔들 수 있다는 걸 보여 주려 한다. 편수회가 이끄는 양수청은 그래서 백성들을 상대로 돈을 빌려줬다가 일시에 회수함으로서 나라의 돈 가뭄을 만들어 버리려 한다. 결국 돈이 없으면 군사들도 흩어질 수밖에 없다는 걸 간파한 것. 

<군주>의 이야기는 한편의 게임처럼 구성되어 있다. 왕세자로 있던 이선은 부모를 모두 잃고 또 충신이었던 한규호(전노민)마저 자신의 잘못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만든다. 결국 죽을 위기를 간신히 벗어나지만 세자의 신분은 이제 저잣거리의 장사꾼 막내가 되어버린다. 그 밑바닥에서부터 다시 시작해 자신의 신분을 되찾는 이야기가 바로 <군주>다. 그런데 그 모든 이선의 이야기의 근거가 바로 편수회의 대목 때문에 비롯된 것들이다. 

허준호의 이런 존재감을 우리는 과거 사극 <주몽>에서 일찍이 발견한 바 있다. 주몽의 탄생 이전에 그의 길고 긴 모험담의 전사를 만들어낸 장본인이 바로 허준호가 연기한 해모수였다. 마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 같은 형상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해모수의 존재감은 그래서 <주몽>이라는 사극의 초반 동력을 만들기에 충분했다. 

사극뿐만이 아니다. 최근 개봉된 영화 <불한당>에서 허준호는 정통파 주먹의 보스 역할로 등장해 처연함마저 느끼게 하는 최후를 보여준 바 있다. 결국 그 장면을 통해 주인공들의 브로맨스가 시작된다는 점을 두고 보면 역시 허준호는 출연하는 작품마다 뒤편에 서서 실제 작품의 동력을 만드는 연기자라는 걸 확인하게 된다. 

옆에 서거나 아니면 반대편에 서서 빛나는 역할을 하는 것보다 중심에 서서 빛나는 건 어쩌면 더 쉬운 일인지도 모른다. 빛을 받는 주인공이 더 빛나는 순간은 그 반대편에 서 있는 그림자가 더 깊어질 때다. 허준호라는 연기자는 바로 그 깊어진 그림자다. 그것이 작품 전체에 드리워져 있어 힘을 만든다는 점에서 실질적인 주인공이라 해도 무방할.

‘쌈마이웨이’, 이 짠한 청춘들에게 기꺼이 빠져드는 까닭

이건 우정일까 사랑일까. 저건 쌈일까 썸일까. KBS 월화드라마 <쌈, 마이웨이>의 고동만(박서준)과 최애라(김지원)은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라 모르는 게 없을 정도로 가까운 친구사이. 그래서인지 두 사람은 남녀로서의 연애감정이라는 건 애초에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어 보인다.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대기 일쑤고, 쏘아붙이는 건 일상이다. 

'쌈마이웨이(사진출처:KBS)'

그런데 그렇게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인 듯 보이지만 상대방에 곤경에 처하거나 무시를 당하는 걸 보면 그들은 마치 자기 일인 양 나선다. 남자친구가 바람을 피운 사실을 알고 절망할 때도, 친구 결혼식에 갔다가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 대신 마이크를 잡았다가 그녀의 실체가 발각되어 남자들에게 무시를 당할 때도 최애라는 고동만을 찾는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고동만은 귀찮아하면서도 최애라에게 달려간다. 그건 친구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도움을 주는 우정처럼 보이지만, 슬쩍 슬쩍 선을 넘어 사랑 같은 감정이 뒤섞인다. 서로를 너무나 잘 알아 둘 다 꿈에서 멀어진 길을 걷고 있다는 것에 대한 깊은 공감이 있고, 그래서 상대방이 현실 앞에서 무시당할 때 마치 자기가 무시당하는 것처럼 화를 낸다. 무시당할 사람이 아니라고 상대방에게 하는 이야기는 그래서 마치 자기에게 하는 말처럼도 들린다. 

<쌈, 마이웨이>는 제목에서 드러나듯 현실이 ‘쌈마이’라도 ‘마이웨이’를 간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무슨 일인지 과거에 저지른 한 번의 실수로 국가대표 태권도 선수에서 멀어져 버린 고동만은 근근이 살아가지만 여전히 태권도에 대한 꿈을 접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그를 유일하게 인정해주는 코치의 도장 주변을 뱅뱅 돈다. 태권도에서 격투기로의 전향을 생각하며. 

한 때는 백지연 같은 아나운서를 꿈꿨던 최애라는 어쩌다 보니 백화점에서 손님들에게 인사하는 안내 일을 하고 있다.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마이크를 잡고 싶지만 이 청춘에게 현실은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고동만의 돌려차기와 최애라의 마이크. 그들이 꿈꿨지만 주어지지 않은 이 두 가지는 <쌈, 마이웨이>가 깔아놓고 있는 청춘들의 현실을 담아낸다. 

짠한 현실 앞에서 이 청춘들은 서로를 지지해준다. 눈물 흘리는 친구를 안아주고 등을 토닥여준다. 그리고 그것이 당연히 우정이라 생각하지만 그걸 바라보는 이들의 시선에서는 결코 우정의 차원이 아니다. 바로 이 지점이 <쌈, 마이웨이>가 갖고 있는 청춘들의 이야기에 덧붙여진 멜로가 피어나는 곳이다. 

<쌈, 마이웨이>는 특별한 소재나 대단히 놀라운 이야기를 갖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평범해 보이는 이 이야기에 마음이 가는 건 아마도 이 청춘들을 지지하고픈 마음이 생기기 때문일 것이다. 한 때는 저마다 큰 꿈을 꾸고 있었지만 어쩌다 현실에 날개가 꺾인 청춘들. 그래서 그들에 대한 지지의 마음은 마치 고동만과 최애라가 서로를 지지하는 마음으로 빙의하게 해준다. 이것이 짠하지만 설레는 이 청춘멜로에 빠져들게 되는 이유다.

‘터널’이 연쇄살인범 잡기보다 중요하게 생각한 것

“범인 잡았으니까 이제 다 끝났네요.” “아직 안 끝났다. 우리가 범인을 왜 잡았는데. 우리가 결국 사람은 못 구했지만 이미 죽은 사람 살릴 수는 없지만 그래도 얘기는 해줘야지. 범인 잡았다고. 우리가 안 잊고 있었다고 말해줘야지.”

'터널(사진출처:OCN)'

OCN <터널>의 마지막 회에서 범인 목진우(김민상)가 검거되고 범행 사실을 자백했지만 박광호(최진혁)는 아직 자신들이 할 일이 끝나지 않았음을 알린다. 그것은 피해자들의 가족을 찾아 범인을 잡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일이었다. 

일일이 형사들이 찾아가 그 소식을 전해주자 피해자 가족들은 저마다 무너져 내렸다. 거기에는 아픔과 회한이 뒤섞여진 감정 같은 것들이 엿보였다. 형사는 30년이 지나서야 겨우 범인을 잡았다는 것에 죄송하다고 말했고, 피해자 가족들은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그 눈물 속에는 고마움 또한 담겨져 있었다. 그것은 잊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고마움이었다. “고맙습니다. 우리 누나 잊지 않아줘서 정말 고맙습니다.”

아마도 <터널>이 여타의 범죄 스릴러 장르물과 확연히 달랐던 지점이 바로 이런 부분일 것이다. 보통의 스릴러 장르물들이라면 잔인한 연쇄살인범의 살해 장면으로 시청자들의 시선을 포획하고 그 범인을 잡으려는 형사들의 추격전이 이어지다 결국 범인을 잡는 그 장면에서 이야기가 끝났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터널>은 그것이 목적이 아니었다. 진짜 목적은 피해자들을 기억하는 것. 그렇게 30년의 세월 동안 범인을 잡기 위해 안간힘을 쓸 정도로 안타깝게 세상을 등지게 됐던 분들을 잊지 않고 노력해왔다는 그것이었다. 

스릴러 장르의 명가라고 불리는 OCN이 <터널>을 통해 그 정점을 찍었다 감히 말할 수 있는 건 바로 이런 부분 때문이다. <터널>은 스릴러가 그저 단순히 범인 잡는 형사 이야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인간’을 담을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자극이 아니라 휴머니즘을 담을 수 있는 스릴러 장르라니 놀라운 일이 아닌가. 

타임슬립이라는 장치가 여타의 드라마들과 달리 더욱 빛날 수 있었던 것도 마찬가지다. 결국 타임슬립이란 메시지를 담기 위한 도구일 뿐, 재미만을 위한 장치가 아니라는 걸 <터널>은 보여줬다. 어째서 터널을 통해 30년의 세월을 뛰어넘는 것이 판타지를 통해서라도 시도 되는가 하는 것에 대한 감정적, 정서적 개연성을 이 드라마는 충분히 드러내 보여주었다. 그것은 시간을 뛰어넘는다는 놀라움이 아니라, 그 정도로 간절한 마음을 담는 상징이다. 피해자 가족이라면 30년 세월 또한 어제 일처럼 잊을 수 없는 짧은 시간일 수 있으니.

또한 <터널>이 높은 완성도에 대중적인 열광까지 얻어낼 수 있었던 건 이 드라마가 가진 메시지가 건드리는 우리네 대중들의 트라우마 때문이었다. 갖가지 사건사고들을 통해 무수한 피해자와 가족들이 여전히 그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가해자를 잡거나 그들이 진심으로 사과하는 모습을 우리는 별로 본 적이 없고 심지어 그 기억조차 흐릿해져가는 현실 속에서 <터널>은 우리 안의 그 기억들을 되새기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피해자 가족들의 눈물을 잊지 않고 있다고 이 드라마는 말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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