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콘><SNL>, 풍자 좀 하게 해주면 안 되나

 

KBS <개그콘서트> ‘11’ 코너에서 이상훈은 서로 비슷하여 견줘볼 필요가 없다는 뜻을 묻는 유민상의 질문에 여당과 두 야당이라고 답했다. 여당도 두 야당도 모두 국민을 실망시키고 있다는 뜻을 담아낸 풍자다. “친인척이나 가족을 보좌관으로 채용하지를 않나. 홍보 리베이트에 휩싸이지를 않나. 가장 도덕적이어야 할 분들이 이러면 어쩌느냐.” 그의 속 시원한 한 마디 한 마디는 시청자들의 답답한 마음을 잠시나마 풀어주기에 충분했다.

 

'개그콘서트(사진출처:KBS)'

이어지는 풍자. “두 얼굴을 가진야누스를 묻는 질문에 이상훈은 부산 경찰관들이라며 최근 부산에서 벌어진 경찰관들의 여고생 성관계 사건을 꼬집었다. 어찌 보면 지극히 상식적인 이야기일 뿐이지만, 그것이 개그의 소재로 삼아지는 것만으로도 대중들은 어떤 통쾌함을 느꼈다.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 아닌가. 이것은 바로 세태를 꼬집는 풍자가 가진 힘이다.

 

이 날 이상훈의 풍자가 더 특별하게 여겨진 것은 그가 지난 5월 어버이연합으로부터 피소되어 지난달 30일 영등포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았던 사실 때문이다. <개그콘서트>에서 이상훈은 계좌로 돈을 받기 쉬운 것을 무엇이라고 하느냐는 질문에 어버이연합이라고 답한 후, 그 이유로 가만히 있어도 계좌로 돈을 받는다. 전경련에서 받고도 입을 다물고 전경련도 입을 다문다.”고 말한 바 있다. 어버이연합은 이를 문제 삼아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사실 대중들에게 어버이연합이 하는 일련의 말과 행동들은 상식적이지 않다는 질타를 받아왔다. 항간에는 어버이라는 단어를 어버이연합이 훼손하고 있다는 지적까지 나왔다. 명예훼손을 이야기하지만 대중들에게는 어버이연합이 어버이를 훼손하는 느낌이다. 물론 정치적 사안들이야 다른 역학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개그와 코미디의 영역만큼은 그것이 무엇이든 내버려두는 게 그나마 답답한 현실에 작은 숨통이라도 틔워주는 일이 아닐까.

 

사실 이러한 외압 논란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개그콘서트>의 전성기 시절 최효종은 국회의원을 폄하했다며 강용석에게 고소당했고, 메르스사태를 풍자했던 민상토론이 결방되자 외압논란이 터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민상토론은 아예 이런 외압설을 소재로 끌어와 누가 하지 말라고 합니까?”라고 질문을 던져 대중들의 공감을 사기도 했다.

 

tvN <SNL코리아>는 본래 시사풍자와 19금 개그가 균형을 이루는데서 그 정체성이 만들어졌던 프로그램이다. 초기 위켄드 업데이트여의도 텔레토비같은 코너로 신랄한 시사풍자를 보여줬던 <SNL코리아>는 그러나 지금 이런 색깔이 사라진 지 오래다. 시사풍자가 갖는 품격이 사라지자 19금 개그의 선정성과 자극만 많아진 느낌. <SNL코리아>의 이런 변화에 대해서도 외압설이 끊이지 않는다. 어째서 <SNL코리아>는 그 날카로웠던 풍자를 거둬들였을까.

 

물론 누가 하지 말라고 합니까?”하고 물을 정도로 직접적인 외압이 있다고는 보기 어렵다. 하지만 단체들이 심지어 고소까지 하는 이런 환경 속에서 개그맨들이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실제로 <개그콘서트>의 많은 개그맨들은 자꾸 이런 일이 벌어지면 개그를 짜거나 할 때 소재나 표현에 있어 위축된다고 말한다.

 

적어도 웃음의 지대에서만큼은, 또 대중들이 향유하는 대중문화에 대해서만큼은 좀 자유롭게 내버려두는 여유를 줄 수는 없을까. 만일 얼토당토않은 풍자라면 대중들도 호응할리 없고, 그런 호응 없는 풍자를 굳이 개그맨들이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 말은 거꾸로 말하면 풍자는 어떤 식으로든 자체적인 기능에 의해 아무렇게나 만들어질 수 없다는 얘기다. 그만큼 공감을 추구하고 공감 받는 개그라면 자신들의 생각과 다르다하더라도 수긍해주고 받아들이는 게 진정한 어른들의 자세가 아닐까.

 

항간에는 개그가 점점 재미없어진다는 이야기를 하지만, 정작 그들이 마음껏 표현하고 싶은 걸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그런 사회 분위기인가를 한번 되물어볼 필요가 있다. 개그맨이 고소당하는 이런 웃지 못할 개그들이 현실에 넘쳐나는 한, 우리네 희극인들은 더더욱 위축될 수밖에 없다. 그잖아도 웃을 일 없는 세상, 풍자라도 시원하게 해줬으면. 답답하다 정말.

<무도>, 박창훈 PD가 보여준 각자 삶의 소중함

 

만일 그럴 수 있다면 당신은 유재석처럼 살 것인가, 박명수처럼 살 것인가. 자타공인 1인자로 모두의 사랑을 받지만 그렇기 때문에 항상 타인을 배려하고 자신을 절제하며 살아야하는 유재석의 삶. 반면 2인자지만 자기 하고픈 대로 마음껏 하며 살아가는 박명수의 삶. <무한도전>은 과거 바보전쟁특집에서 살짝 나왔던 이 화두를 일종의 실험 카메라를 통해 보여줬다.

 

'무한도전(사진출처:MBC)'

너무나 다른 아침 출근 길. 유재석이 거의 인사로봇처럼 행인들을 향해 인사를 하고 사진을 같이 찍어도 되냐는 요청에 기꺼이 시간을 내주며 출근하는 반면, 박명수는 캐릭터 그대로 호통과 버럭을 반복하며 출근한다. 두 사람의 삶은 이토록 다르다. 그래서 유재석이 음식점에서 티슈를 세 개 쓰면 낭비한다는 얘기가 나오는 반면, 박명수는 뭘 해도 그러려니 한다.

 

사실 유재석처럼 살 것인가 박명수처럼 살 것인가 하는 주제는 너무 자화자찬 같은 느낌을 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목적이 아니라 누구나 한번쯤 상상해볼 수 있는 것으로서 보편성 또한 갖고 있기 때문에 이 특집을 준비했다는 걸 <무한도전>은 사전에 명확히 했다.

 

흥미로웠던 건 <능력자들>의 박창훈 PD를 일종의 박명수 아바타로 세워 MBC 예능 부국장인 권석 PD와 마주하게 한 장면이었다. 워낙 소심하고 선해 보이는 박창훈 PD는 박명수의 지시가 너무나 어색하고 어려웠지만 억지로 수행하려 노력했고, 그래서 권석 PD에게 반말을 하기도 하고 그가 건넨 사탕을 집어던지기도 하며 또 무릎 위에 앉기도 하는 등의 모습으로 큰 웃음을 선사했다.

 

그 웃음은 박창훈 PD와 박명수라는 캐릭터가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생겨난 결과다. 박명수는 독하게 선배 PD 앞에서 박창훈 PD를 몰아세웠고, PD 역시 그게 하나의 미션이기 때문에 수행을 하기는 했지만 그게 제 몸에 맞지 않는 옷처럼 어색하더라는 것이다. 그러니 호통을 쳐도 호통 같이 느껴지지 않고, 반말을 던질 때도 어딘가 미안함과 죄송함이 가득한 박 PD의 얼굴에서 빵 터질 수밖에 없었던 것.

 

미션은 유재석 vs 박명수로 살아보기였지만 오히려 여기서 주목받은 건 그렇게 타인의 흉내를 미션으로 부여받아도 자신의 성정을 숨길 수 없는 박창훈 PD, 그런 짓궂은 미션에도 그걸 척척 잘 받아주는 권석 부국장이었다.

 

방송이 끝나고 박창훈 PD와 권석 부국장에 대한 칭찬이 쏟아져 나온 건 그래서다. 결국 아바타 미션으로 타인의 삶을 흉내 내는 걸 해봤지만 오히려 그 안에서 드러난 건 그 자신의 삶의 방식이었다. 조금 어눌하고 어색해 보이지만 사람 좋은 미소를 얼굴 만면에 드리우고 타인을 대하는 그 모습. 그리고 그런 일종의 짓궂을 수 있는 상황극 속에서 회사의 지위 고하를 넘어서 마치 동생처럼 부하직원을 잘 받아주는 모습이 그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무한도전>이 이번 유재석 vs 박명수로 살아보기미션을 통해 보여주려 했던 것일 게다. 타인의 삶이 항상 나아 보이고 좋아 보여도 결국은 각자의 삶을 자기 방식대로 잘 살아가는 것이 가장 보기 좋다는 것. 박창훈 PD의 서글서글한 미소는 그걸 증명해주었다.

<삼시세끼>, 유해진 합류 전과 후 뭐가 달랐나

 

차승원은 어딘가 어색해했다. 당연할 것이다. 얼굴만 봐도 척척 그 속내를 알아채고 같은 나이 또래에 함께 배우 생활을 해온 그 경험치를 공유해온 친구, 유해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를 맞아주는 손호준과 새롭게 가족이 된 남주혁은 반갑게 그를 맞아주었지만 툭 던지는 아재개그 앞에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들을 보며 차승원은 난감해질 수밖에 없었다.

 

'삼시세끼(사진출처:tvN)'

물론 차승원 역시 새로 합류한 남주혁을 세심히 살피고 챙겨주었다. 배우 이전에 모델 대선배인 차승원이 남주혁에게는 못내 어려운 선배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마트에서 남주혁이 우유를 만지작대면 그걸 좋아하나보다 하며 사주고, 그의 입맛을 배려해 떡볶이 떡을 사와 닭복음탕에 넣어주었다. 어려워할 그에게 불 잘 지핀다며 칭찬을 해주고 뭔가를 시킬 때도 조심스러워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런 배려의 모습은 훈훈하긴 하지만 <삼시세끼>가 본래 갖고 있는 그 편안함과 자연스러움과는 살짝 벗어나 있는 것이었다. <삼시세끼>가 애초에 정선에서 이서진과 옥택연을 출연시킨 건, 그들이 이미 <참 좋은 시절> 같은 드라마로 가까운 사이였기 때문에 굳이 어색한 만남의 과정을 가질 필요가 없어서다. 그래서 시작부터 투덜대고 못하는 밥이나마 챙겨 먹으며 자연스럽게 웃을 수 있었던 것.

 

하지만 별다른 사적 관계가 없는 남주혁의 출연에 유해진의 부재는 차승원으로서는 이번 <삼시세끼>가 만만찮게 다가왔을 것이다. 유해진 같은 존재가 있어 같은 또래끼리 치고 박고해야 편안해질 텐데, 두 명의 후배들 위에서 선배로 시키는 입장에 설 수밖에 없는 차승원은 오히려 자신이 불편해질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차승원은 새 삼시세끼 집에 도착하자마자 거두절미하고 요리에 들어갔다. 텃밭에서 야채를 가져와 간단하게 해먹을 수 있는 비빔국수를 만들어 먹은 것. 그렇게 뚝딱 한 끼를 해먹고는 바로 저녁엔 뭐 먹을까를 고민하는 그들은 읍내에 나가 장을 보고 돌아와 닭볶음탕을 해먹는다. 그렇게 어찌 보면 이 첫 날의 모습은 마치 차승원이 요리를 하는 미션을 수행하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하지만 이런 다소 어색한 분위기는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다음 날 아침 유해진이 이 마을로 슬슬 걸어 들어오면서 깨져나갔다. 특유의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보이며 아재개그를 툭툭 던지는 유해진은 바로 어제 만재도에서 나온 사람처럼 변함이 없었다. 그는 동네 이장님댁에 가서 차승원을 놀래키기 위한 이장 분장을 하면서도 너무 잘 그 동네에 어우러졌다. 물론 뒤태만 봐도 목소리만 들어도 그가 유해진이라는 걸 척 알아맞히는 차승원 때문에 몰래카메라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래도 이렇게 완성된 완전체는 이제야 비로소 <삼시세끼> 같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시골 길을 함께 걸어가며 유해진과 차승원은 비로소 특유의 아재스럽지만 푸근한 웃음을 짓게 만드는 개그들을 늘어놓는다. 후배인 남주혁을 편안하게 해주기 위해 선배들을 친구처럼 대하라며 이런 저런 농담을 던지는 그 모습은 당사자들은 물론이고 후배들까지 빠져들게 했다. 카메라가 부감으로 빠져나가며 비추는 네 사람의 즐거운 모습은 그래서 고창의 어느 마을과 조금씩 어우러져가는 이들을 잘 표현해주었다.

 

도대체 유해진의 무엇이 이런 효과를 가져온 것일까. 그것은 그에게서 배어나오는 시골스러움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차승원과 손호준 그리고 남주혁은 아무래도 그저 서 있기만 해도 모델 같은 도회적 느낌을 준다면, 유해진은 진짜 시골 이장님 같은 푸근한 인상이다. 그것은 외적인 것만이 아니라 그가 하는 말투나 사람을 대하는 방식 또한 그렇다. 이러니 <삼시세끼>에 그를 빼놓고 얘기할 수가 없는 것이다.

 

스케줄 때문에 생겨난 일이지만 하루의 격차를 두고 유해진 합류 전과 후로 <삼시세끼>는 분명한 차이를 보였다. 이것만큼 유해진의 존재감을 증명하는 일이 있을까. 유해진의 합류로 본격화된 완전체의 고창에서의 시골 살이가 더더욱 궁금해진다

가수보다 소녀 이미지로만 소비되는 걸 그룹

 

JTBC의 새 예능 프로그램 <잘 먹는 소녀들>에 대한 이승한 칼럼니스트가 쓴 이게 여성 아이돌에게 방송국이 할 짓인가라는 냉엄한 비판에 대해 대중들은 결국 터질 게 터졌다는 반응들을 보였다. 이 프로그램은 최근 대중문화에서 도드라져 보이는 두 가지 문제가 동시에 겹쳐져 부정적인 시너지를 극대화하고 있었다. 이른바 먹방걸 그룹 방송이 그것이다.

 

'잘 먹는 소녀들(사진출처:JTBC)'

먹방이 하나의 트렌드가 되기 이전부터 음식 프로그램들은 이미 푸드 포르노의 양상들을 그 안에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과거 <결정! 맛대맛>이나 <찾아라! 맛있는 TV> 같은 식욕자극 프로그램들은 먹방이 트렌드가 되기 훨씬 이전인 2006년에도 이미 푸드 포르노의 징후들을 보여준 바 있다. 그나마 <6시 내 고향>류의 프로그램에서 보여주던 음식 소개가 시장을 살린다거나 농촌을 살린다는 취지를 내세워 수위를 조절했다면, 당시 식욕자극 프로그램들에서는 점점 노골화되는 방송의 선정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잘 먹는 소녀들>은 먹방 프로그램이 갖고 있는 이러한 푸드 포르노적인 성격에 걸 그룹 소녀들을 수많은 시선들 속에 세워 두었다는 점에서 더 노골화된 먹방의 선정성을 드러냈다. 걸쭉한 음식이 소녀들의 입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클로즈업하고 슬로우 모션으로 자세히 보여주는 장면들은 만일 그것이 식욕과 성욕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담은 영화의 한 장면이었다면 기막힌 컷으로 여겨졌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건 그런 영화가 아니다. 실제로 먹방이라는 허울 아래 소녀까지 등장시켜 푸드 포르노를 극대화한 장면일 뿐이었다.

 

그것은 먹방이 본태적으로 갖고 있는 선정성은 물론이고, 최근 걸 그룹들이 방송에서 어떻게 선정적으로 소비되고 있는가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이미 이런 기형적으로 되어가는 걸 그룹 소비방식이 주는 불편함은 도처에서 그 징후를 드러낸 바 있다. 여름철만 되면 쏟아져 나오는 걸 그룹들의 섹시 경쟁은 이제는 식상해진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하의 실종이나 꿀벅지베이글이니 하는 입에 담기도 불편한 표현들이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게 방송에서 통용되는 용어처럼 되어버렸고, 이러한 섹시 이미지에 더해 오빠애교로 대변되는 귀여운 이미지까지 걸 그룹들은 동시에 수용해야하는 입장에 놓이게 됐다.

 

<프로듀스101>은 걸 그룹들이 어째서 노래만으로 승부할 수 없는가를 우리 눈으로 확인하게 해주었다. 화면을 가득 채운 채 피라미드형 삼각대형 무대에 올라가 군무를 추며 픽미!”를 외치는 그들의 절박함을 방송은 온전히 활용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호통치고 면박을 주고 경쟁에서의 탈락을 통해 눈물을 흘리게 만들고 경쟁하면서도 같은 위치에 서 있는 그 아픔들을 보듬는 선의까지 방송을 통해 소비되었다.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그 안에서 노래와 춤 같은 음악 자체는 그다지 주목되지 않았다. <슈퍼스타K><K팝스타> 같은 오디션 프로그램이 거기 출연한 이들의 음악에 집중하게 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방향이다. 대신 방송은 그 안에서 벌어지는 소녀들의 이야기에 더 집중되었다. 누가 누구를 도와줬고, 누구는 자신만 살기 위한 이기심을 드러냈다가 질타를 받기도 했다. 이것이 본래 오디션 형식을 갖고 있는 방송 프로그램의 생리일 수 있지만, 특이하게도 이 소녀들은 음악 자체보다 이미지로 더 많이 소비되는 양상을 보였다.

 

이것은 어쩌면 경쟁의 소산일 수 있었다. 즉 경쟁적으로 걸 그룹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또 그네들의 음악이라는 것이 확실한 변별력을 갖기보다는 너무 비슷비슷해 이른바 섹시와 큐티 사이의 이미지를 반복하는 걸 그룹 노래라는 틀로 뭉뚱그려지기 시작하면서, 그들은 어떻게 하면 음악 이외의 방법으로 자신들을 드러낼 것인가를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 지점에서 만나게 되는 것이 결국은 방송이다. 이제 방송에 나가게 된다면 무엇이든 감수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토크쇼에서 뜬금없이 춤을 춰달라는 요구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는 자리에서 민망할 수 있는 춤을 춰야 하고, 당당한 자신의 직능으로서의 가수가 아니라 누군가를 위로해줘야 하는 그런 존재로서 이미지 메이킹 되어야 한다. 심지어 그들이 누군가의 선물로 소비되는 방송 속에서 걸 그룹이 갖고 있는 가수로서의 존재감은 희석되어 버린다.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는 건 그들의 절박함을 미끼로 섹시와 큐티와 정숙까지를 요구받으며 끊임없이 기형적으로 소비되는 소녀 이미지.

 

과연 지금 우리에게 걸 그룹은 가수가 맞을까. 물론 음원차트 속에서 걸 그룹은 노래로 소비되지만 그 노래조차도 음률과 가사의 묘미라기보다는 섹시와 큐티와 정숙이 뒤범벅된 소녀 이미지들인 경우가 적지 않다. 모든 걸 그룹이 그렇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지금의 치열해진 청춘들의 전선들처럼 이들 걸 그룹들은 가수로서의 본질 그 이상의 이미지를 소비하면서까지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문제는 이것을 아무런 비판의식 없이 즐기며 내재화하는 일이 가져올 악영향이 적지 않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지금의 우리네 사회가 갖고 있는 많은 문제들이 거의 다 내포되어 있다. 자신을 지킬 수 없을 정도로 치열해진 경쟁사회와, 사적인 것들마저 무대 위에 올라 소비되는 투명사회, 우리에게 너무도 깊게 내재화되어 그것이 무슨 잘못인지도 모른 채 행해지는 기형적인 성 소비들 같은 문제들이 거기에는 뒤얽혀있다. 무엇보다 이런 방송들을 통해 어차피 세상은 다 저렇다고 체념하고 포기하며 나아가 순응하게 되는 청춘들의 냉소적인 시선은 어쩌면 가장 끔찍한 우리 사회의 디스토피아가 아닐까. 걸 그룹은 어째서 온전히 가수로서 설 수 없게 된 걸까. 청춘들이 그 나이에 걸맞게 도전하고 즐기며 살아가지 못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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