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용석 스캔들 진짜 피해자는 누구일까

 

그래서 강용석은 무고한 피해자인가. 그는 모든 방송에서의 하차를 선언한 후 곧바로 SNS에 웃는 사진과 함께 나는 결백하고 조용히 일상으로 돌아왔으며 SNS를 통해 대중과의 소통을 계속하겠다는 글을 올렸다. 꽤 많은 불륜설의 증거라 주장되는 기사와 인터넷 글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그는 여전히 결백을 주장한다. 물론 그 진실은 여전히 알 수 없다. 정황만 있을 뿐, 확증이 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강용석(사진출처:JTBC)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용석이 피해자인가 하는 질문에는 부정적이다. 그는 과거 여성 아나운서 성희롱 발언이 논란이 되어 결과적으로 보면 한나라당에서 제명당했다. 그리고 무소속으로 출마했지만 그 부정적인 이미지를 넘어설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정치권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그가 정치적 이슈들을 놓은 적은 없었다. 개그맨 최효종의 개그를 국회의원 집단 모욕죄를 들어 고소하고, 박원순 시장 아들의 병역비리 의혹을 제기하면서 자신에 대한 관심을 이어가게 만들었다.

 

물론 그것은 부정적인 이미지지만 그러한 논란은 무관심보다 훨씬 강력한 것이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논란으로 관심을 끈 그는 본격적으로 방송에 문을 두드렸다. 아마도 그건 부정적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바꿔 놓을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때 그가 취했던 방식은 공격적인 이미지와 정반대되는 당하는 이미지였다. 예능이란 판은 그에게 무대를 제공했다.

 

<슈퍼스타K>에 뜬금없이 출전해 심사위원들의 지적질을 받으며 탈락하는 모습을 보여주더니 <강용석의 고소한 19> 같은 그가 가진 고소의 이미지를 방송 캐릭터로 구축했다. <썰전>은 그에게 확고한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그는 독설로 김구라에게 면박 당하는 강용석의 이미지를 만드는 한편, 정치인들의 숨겨진 사적 면면들을 폭로하는 식으로 관심을 이끌었다. 대중들이 갖고 있는 정치인에 대한 혐오는 그런 뒷담화를 해주는 강용석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그는 몇 년 전만 해도 그 같은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정치인 집단에 있었지만 방송을 통해 그 집단과 자신을 분리시켰다. 그러면서 정치시사평론가 같은 위치에 서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이미지 세탁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었지만 그는 눈 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애초에 정치에 관심이 없다고 얘기하던 것에서 어느 순간부터는 공공연히 정치 복귀를 시사하고 대통령을 꿈꾼다는 얘기를 할 때면 강용석이 정치권에서 물러나 방송활동을 하면서 단 한 번도 정치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는 걸 실감하게 되었다.

 

결국 그 몇 년 간의 과정들은 모두가 우려하던 대로 이미지 세탁의 혐의가 짙었다는 점이다. 물론 이런 행보는 정치인들에게서 우리가 어렵지 않게 발견하는 모습들이다. 그래서 대중들은 정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조차 진저리를 치는 모습을 보인다. 단 몇 년 전만 해도 도저히 말도 안 되는 잘못을 저지른 인사도 어느 순간 보면 그런 이미지를 털어내고 권력의 한 자리에 앉아 있는 걸 우리는 쉽게 발견하곤 했다.

 

만일 불륜스캔들이 터지지 않고, 모든 방송에서의 하차를 선언하지 않았다면 강용석의 행보는 예상대로 순항했을 지도 모른다. 뭐든 쉽게 잊고 지워버리는 우리네 현실 속에서 방송에서 가진 이미지를 어느 순간 정치적인 힘으로 변모시키는 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사건이 일파만파로 커지기 전까지 방송인으로서 그가 가진 능력에 많은 이들이 이미지 세탁이라는 문제의 소지를 덮어버렸다는 건 우리 사회가 가진 너무 쉬운 관용과 망각의 허점들을 드러낸다.

 

그는 SNS를 통해 이렇게 자신의 심경을 토로했다. “무슨 신의 눈 밖에 난 시지프스도 아닌데 뭔가 좀 해보려고 고생고생해서 산중턱 넘어 애써 올라갔다 싶으면 쪼르륵 미끄러져 바닥에서 다시 시작해야 된다.” 그는 여전히 무고한 피해자라고 자신을 대중들에게 내보인다. 하지만 그가 방송을 통해 대중들에게 기여한 것이 무엇인가. 오히려 방송이 그에게 부여한 이미지가 더 클 것이다. 지금 그가 갑작스레 하차한 빈자리에서 방송 제작자들은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있다. 물론 이 피해는 시청자들에게도 그대로 전가된다. 하지만 그는 어떨까. ‘바닥에서 다시 시작해야 된다지만 그 바닥이라는 것이 잘 나가는 변호사 사무실이다. 그는 과연 피해자일까.



연예인, 그들만의 세상에 무슨 공감대가 있으랴

 

<아빠를 부탁해>는 지금 최대의 위기다. 시청률이 쭉 빠져 일요일 예능 대결에서 계속해서 꼴지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도 그렇지만, 더 안 좋은 건 이 프로그램에 대한 대중적 공감대가 예전만하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여기 출연하는 아빠들의 삶이 마치 우리네 삶처럼 다가왔었고, 그래서 그 아빠를 바라보는 딸들이 그토록 예쁠 수가 없었다.

 


'아빠를 부탁해(사진출처:SBS)'

하지만 이런 공감대는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사라져버렸다. 프로그램 초기만 해도 아빠와 딸이 그저 함께 무언가를 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그것은 아빠에게도 하나의 도전처럼 다가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이미 어느 정도 소통을 하게 된 아빠와 딸들의 관계 속에서 이들이 함께 하는 시간은 소통이라기보다는 그저 놀러 다니는 것처럼 비춰지게 되었다.

 

딸 다은이와 함께 남이섬을 찾은 것에 대해 강석우는 과거 <겨울 나그네>의 추억이 깃든 곳이라 다시 한 번 찾아보고 싶었다고 그 이유를 밝혔다. 하지만 강석우와 다은이의 방송분 어디에서도 그 추억에 대한 이야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강석우와 다은이가 짚와이어를 타는 장면과 번지점프를 하려다 포기하고 내려오는 장면만 있었다.

 

물론 이것은 여러모로 지난 리마인드 웨딩을 했던 강석우네 가족의 이야기에 쏟아진 비판을 의식한 면이 있다. 시청자들이 보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고 싶은 너무 사적인 일에 방송을 활용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그러니 이번에는 그들이 고생하는 모습을 보여 주겠다 작정한 듯한 느낌이 있다.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남이섬까지 갔던 그 본래의 의도를 모두 지워버리는 건 이 프로그램이 가진 자의적이고 부자연스러운 면면을 드러낸 것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조재현의 딸 조혜정이 연기연습을 위해 오빠에게 가발을 씌우고 미용 실습을 하는 장면도 그렇다. 조혜정이 드라마에 미용사 역할로 캐스팅되어 그 준비를 하는 장면이다. 물론 조재현은 그러한 딸의 연기연습이 연기자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고 인터뷰를 통해 말했지만, 사실 이런 내용이 <아빠를 부탁해>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알 수 없다. 거기에서 과연 우리네 보통 50대 아빠들의 공감대를 찾을 수 있을까.

 

공감이 사라진 지점에는 저들만의 세상이 보여주는 이질적인 삶을 왜 시청자들이 봐야 하는가에 대한 의구심만 남을 뿐이다. 50대 아빠들의 공감대를 목적으로 했던 이 프로그램이 자꾸만 딸 연예인 시키려는 방송이라고 오인 받게 되는 건 그래서다. <아빠를 부탁해>의 가장 큰 문제점은 그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초심, 즉 우리네 보통의 50대 아빠들이 갖는 삶의 여러 측면들을 프로그램이 공감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보통의 삶이 아닌 저들만의 세상으로 자꾸만 미끄러져 나갈 때 시청자들의 이탈도 동시에 일어날 수밖에 없다.

 

연예인들의 실제 삶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연예인 가족 관찰카메라는 그래서 쉬워보여도 결코 쉽지 않은 형식의 프로그램이다. 즉 어쨌든 카메라는 그들이 사는 공간으로 들어간다. 그들의 삶은 우리와 닮은 것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들도 있다. 잘 사는 집이 비춰질 때면 시청자들로서는 부러움을 갖게 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위화감을 느끼게도 된다. 이 차이는 전적으로 프로그램이 본래 갖고 있던 기획의도를 잘 지켜내고 있는가 아닌가에서 결정된다.

 

이것은 현재 <슈퍼맨이 돌아왔다>에서도 똑같이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나마 아이들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기본적인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이 프로그램은 어느 정도의 위치를 지키고 있지만 이 역시 반복적으로 노출되면서 여러 차례 시청자들에게 위화감을 준 적이 있다. 갖가지 PPL의 전시장이 되거나 똑같은 육아라고 해도 저들만의 화려한 삶의 일단이 발견되는 지점에서 시청자들은 고개를 돌리게 된다.

 

제 아무리 위장막이 되어 있다고 해도 그들의 삶이 우리네 보통의 삶과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 처음에는 가려져 있던 것들이 차츰 오래 반복되면서 그 실체를 드러내게 되는 것이고, 그랬을 때 조금씩 시청자들에게는 그것이 이질감으로 다가오게 된다는 점이다.

 

물론 연예인들이 잘 사는 것이야 그것만으로 무에 잘못된 것이 있을까. 중요한 건 그 잘사는 모습이 카메라에 담겨지고 방송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도 자신들의 삶이 힘들다고 얘기하지만 기획의도를 벗어나는 순간 서민들의 눈에는 그것이 놀면서 돈 버는 듯한 인상으로 다가오게 된다. 힘들다는 얘기가 실제 치열하게 살아가는 서민들에게는 배부른 소리로 느껴진다는 점이다.

 

<아빠를 부탁해><슈퍼맨이 돌아왔다> 같은 연예인 가족 관찰카메라에 대한 공감이 갈수록 사라지는 건 그래서다. 보편적인 육아나 가족관계의 이야기를 풀어내지 못할 때 그것은 저들만의 세상이야기가 되어버린다. 거기에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는 보통 서민들의 공감대는 있을 수 없다



<개콘> 횃불 투게더, 소시민적 분노에 대한 일침

 

<개그콘서트>횃불 투게더는 꽤 논쟁적인 개그 코너가 아닐 수 없다. 눅눅한 치킨을 참을 수 없다며 머리에 빨간 띠를 두르고 투쟁에 나서는 청년들. 치킨무를 공짜로 줄 수 없다는 주인아주머니에게 치킨에 빨간 양념을 찍어 마치 횃불을 들 듯 들고 일어나 치킨무를 달라!”고 왜치는 청년들.

 


'개그콘서트(사진출처:KIBS)'

투쟁이라는 풍경이 환기시키는 건 삶의 터전을 잃은 서민들의 절절함이다. 길거리에서, 공장에서 우리는 이 풍경을 꽤 오랫동안 봐왔다. 만일 그 투쟁에 나서는 서민들의 절절함을 피부로 그대로 느끼는 분들이라면 이러한 투쟁 자체가 어찌 보면 약간 희화화되어 있는 횃불 투게더가 자못 불편하게 다가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어쩌면 개그라는 한 장르를 너무 폄하하거나 혹은 투쟁이라는 현실적 사안의 무게감에 짓눌려 도무지 여유를 가질 수 없는 현실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실 개그는 어떤 소재든 가져올 수 있다. 중요한 건 횃불 투게더가 과연 그 절절한 투쟁의 현장을 희화화시킨 것인가 아니면 그 이면에 담겨진 무언가를 풍자한 것인가 하는 점일 게다.

 

횃불 투게더는 그래서 논쟁적일 수밖에 없지만 그 안에는 의외로 중요한 풍자적인 면면들이 발견된다. 즉 이렇게 횃불이 개그의 소재로까지 올라온다는 건 그것이 얼마나 비일비재한 상황인가를 잘 말해주기도 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현실 속에서 너무나 쉽게 이 투쟁의 풍경들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일상적인 풍경의 하나처럼 지나치게 되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됐다.

 

너무 많은 것은 오히려 그 본질을 가린다. 즉 횃불의 일상화는 그 사안들의 중대함을 들여다보지 못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그것은 횃불을 드는 사람들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이런 일들이 제대로 해결되지 않고 늘 묻혀짐으로써 결코 바뀌지 않는 세상에 대한 일종의 포기 같은 것이 공기처럼 자리했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공고한 시스템은 횃불의 일상화를 그런 식으로 포장해버린다.

 

건수만 나오면 횃불을 드는 횃불 투게더는 이 일상화의 풍경 속에 묻혀버린 우리네 소시민적 투쟁의 씁쓸함이 담겨져 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분노의 정체가 저 거대한 시스템의 부조리에서 비롯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결코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목도해온 우리네 서민들의 투쟁의 방향이 너무나 소소하고 사소한 일로 틀어져 있다는 이 코너의 메시지다.

 

세상에는 바싹한 치킨을 원하는 일보다, 치킨무를 더 많이 공짜로 얻어먹는 일보다 더 중대한 사안들로 넘쳐난다. 하지만 이들은 그런 중대한 사안들에는 결코 횃불을 들지 않는다. 그러니 이 엄한 일에 과도한 리액션을 취하는 횃불 투게더가 만들어내는 웃음은 결코 폭소가 되지 못한다. 거기에는 웃픈 현실이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왜 사소한 것에만 분노하게 된 것일까. 왜 그리고 저들은 저렇게 술집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는 걸까. 왜 저들을 힘겹게 만든 현실과 마주하지 않고, 음식점 아주머니 같은 똑같이 힘겨운 삶을 살고 있는 이들끼리 대결하고 있는 걸까. ‘횃불 투게더는 그저 웃고 넘기기에는 참 많은 걸 생각하게 만드는 코너가 아닐 수 없다



내 일 같은 <동상이몽>, 과한 편집도 수긍되는 까닭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눈꽃열차를 타는 거라고 말하는 엄마는 강원도가 미지의 세계라고 하셨다. 광주에 살면서 고작 강원도를 미지의 세계라고 하게 된 이유는 이런 여행조차 갈 시간을 낼 수 없기 때문. 엄마는 새벽부터 일어나 거의 뛰듯이 하루 종일 일 속에서 사셨다.

 


'동상이몽(사진출처:SBS)'

딸은 그런 엄마를 걱정했다. ‘눈꽃열차를 좋아할 정도로 예쁜 걸 좋아하시던 엄마가 일 때문에 그런 감성조차 잊고 사시는 걸 걱정했다. 새벽에 녹초가 되어 쓰러진 엄마 대신 마치 우렁각시처럼 집안일을 해놓고 잠이든 딸은 아침에 일찍 일어날 수가 없었다.

 

<동상이몽, 괜찮아 괜찮아(이하 동상이몽)>가 들려준 이야기는 빠른 엄마와 느려터진 딸 사이의 갈등이었지만 거기에는 누구나 이해하고 공감하게 되는 두 사람의 입장이 있었다. 가족을 위해 일 분 일 초도 쉬지 않고 일하는 엄마와 그 엄마를 걱정하며 조금은 느리게 살았으면 하는 딸의 입장.

 

이 이야기가 감동적으로 다가온 것은 지금 우리네 보통 서민들의 삶을 그대로 담고 있기 때문이다. 하루하루를 쉬지 않고 달려야 되는 결코 쉽지 않은 현실 속에서 옆을 돌아보거나 뒤를 돌아볼 여유도 없이 살아가는 부모들의 노동. 그래서 몸이 아파도 자기 자신을 돌보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은 다름 아닌 우리네 서민들의 모습 그대로가 아닌가.

 

입만 열면 자식 걱정 가족 걱정이지만 정작 자기 걱정을 하지 않는 엄마가 그러나 딸은 걱정스러웠을 것이다. 현실에서 살아남기 위해 부지런한 삶이 몸에 배어버린 엄마와 서로 부대끼며 살아가지만 그럼에도 그 엄마를 걱정해주는 건 역시 딸뿐이라는 이야기는 힘겨운 현실을 마주한 서민들의 삶이 그래도 어떻게 살아가게 되는지를 잘 말해준다. 결국 그 힘겨움을 넘어서게 해주는 것 역시 가족의 힘이라는 것.

 

그래서 여자의 몸으로 마트를 운영하며 정육 일을 하면서 몸에 익어버린 칼질에는 <생활의 달인>에서 느껴지곤 하는 그 삶의 신산함이 그대로 묻어난다. 놀라운 정육 기술에 관객들은 환호를 보내지만 그 달인이 되어버린 기술 이면에 그 엄마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힘들게 노력하며 살았을까.

 

문이 닫힌다는 것을 누구도 상상하지 못하는 마트를 운영하는 엄마에게 여전히 눈꽃열차는 이루기 힘든 꿈처럼 다가온다. 예쁜 하이힐을 좋아하지만 그것보다는 뛰어다닐 수 있는 운동화를 신어야 되는 엄마의 현실이다. 그럼에도 그 엄마가 힘겨운 삶을 버티게 해주는 건 그 마음을 낡은 운동화와 예쁜 하이힐에 담은 그림을 선물해주는 딸이 있기 때문이다.

 

딸이 엄마에게 가장 바라는 건 그냥 같이 할 수 있는 시간이라고 했다. 이건 아마도 지금의 대다수 서민들이 바라는 것일 게다. 우리가 바라는 건 대단한 게 아니다. 그저 가족끼리라도 함께 조금의 여유를 갖고 살 수 있는 그런 여지. 강원도 눈꽃열차가는 소소한 일이 심지어 꿈이라고 말하지 않게 되는 그런 삶.

 

<동상이몽>은 때로는 짓궂은 편집으로 우리의 뒤통수를 치곤한다. 두 사람의 입장을 차례로 보여주는 과정에서 앞부분은 과도하게 편집되어 비난받는 상황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또 다른 입장을 보여줌으로써 그 비난을 뒤집어 감동으로 바꾸는 반전을 연출해낸다. 물론 때때로 이 편집은 과도해져서 불편한 악마의 편집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적어도 가족 간의 숨겨진 사랑과 소통이 전제되기만 한다면, 조금 과한 편집조차 수긍되지 않을까. ‘눈꽃열차타는 게 꿈이라는 엄마와 그 엄마를 걱정하는 딸의 입장에 숨겨진 가족애가 모두 공감되었던 것처럼.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