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션이 깨운 아날로그, 아날로그가 일으키는 인디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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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cm

수수한 옷차림의 장재인이 '슈퍼스타K2' 오디션 현장에서 맨 바닥에 앉아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를 때 우리에게 신선하게 다가온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기획사 가수들의 화려한 옷차림에 눈멀고, 기계음으로 잔뜩 포장된 사운드에 귀 먼 우리들의 감각을 깨운 그것은? 꾸미지 않은 장재인의 스타일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가난해 보여도 모든 음악적 감성을 한껏 품고 있는 기타라는 악기가 가진 힘이었을까. 그 순간 우리가 느낀 건 디지털로 무장된 세상 속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온 아날로그의 힘이 아니었을까.

바야흐로 오디션 프로그램 열풍이다. '슈퍼스타K2'의 성공 이후 이 형식은 이른바 '되는 포맷'으로 자리 잡았다. '슈퍼스타K2'의 따라 하기라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위대한 탄생'이 성공할 수 있었던 건 그 형식 자체가 가진 힘 때문이었다. 거기에는 현실을 끊임없이 환기시키며 대중들을 열광시키는 경쟁 시스템이 있고, 그 위에 '공정함'이나 '멘토링' 같은 판타지가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음악이다. 실로 오디션 프로그램이 본격화되기 전까지 우리는 이토록 음악을 '제대로' 들어본 적이 별로 없다.

경쟁자들은 무반주로, 혹은 기타 하나 달랑 들고 나와 오로지 노래로 승부한다. 물론 춤을 추는 경쟁자들도 있지만 그들에게 심사위원들이 결국 주문하는 건 "노래를 하라"는 것이다. 게다가 심사위원들은 발성의 문제나 스타일, 음색 등을 조목조목 잡아내며 경쟁자들이 갖고 있는 노래를 친절하게 분석해준다. 그러니 음악에 대한 감성을 깨우는 프로그램으로 오디션 프로그램만한 게 있을까. 우리는 이 오디션 프로그램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 어떤 훈련을 받게 된 것이나 다름없다.

기획사 가수들의 화려한 춤과 사운드에 묻혀 있던 가사들이 귀에 들어오기 시작한 건, 이 훈련이 우리가 잊고 있던 감성을 깨웠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아날로그 감성이다. 물론 이 아날로그 감성은 음악에 있어서 새로운 것이 아니다. 장기하가 '싸구려 커피'를 부를 때 우리의 가슴을 탁 치고 들어왔던 것. 각종 라이브 무대 혹은 그런 무대를 방송화한 음악 프로그램에서 우리는 늘 그것을 봐왔다. 하지만 최근처럼 이 아날로그 감성의 음악들이 귀에 쏙쏙 들어오게 된 건, 분명 저 오디션 프로그램의 영향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작년 '남자의 자격' 하모니편이 대중들의 가슴에 쏟아 부은 것도 다름 아닌 이 아날로그 감성이다. 처음 보던 사람들이 하나 둘 모이고, 어색하게 목소리를 맞춰가고(그것도 오로지 목소리만으로), 하모니를 만들어가는 그 과정이 알 수 없는 뭉클함을 준 건 그 과정과 음악이 주는 아날로그의 힘 덕분이다. 그 대회에 나가는 과정이 오디션 프로그램과 거의 형식적으로 일치한다는 점은 우연이 아니다. 우리는 그 과정을 통해 노래와 하모니에 대한 일종의 학습을 받았다. 그래서 하모니를 그저 듣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을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세시봉'은 조영남, 윤형주, 송창식, 김세환이라는 음악적 거장들을 세워두고 창조적인 음악의 탄생 과정을 보여주었다. 윤형주가 즉석에서 만난 여자들을 위해 '라라라'의 가사를 단 40분 만에 담아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는, 그 놀라운 시적 가사들과 어우러지면서 진짜 음악의 단면을 끄집어냈다. 음악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직관적이고 즉흥적인 힘으로 창조되는 것이라는 걸 그 이야기는 들려주었다. 그리고 누군가 악기를 퉁 퉁기며 노래를 하기 시작하면 즉흥적으로 하모니를 맞춰 가며 부르는 노래는 아날로그적인 감동을 안겨주었다. 악동 이하늘이 눈물을 흘린 건 바로 그 알 수 없는(사실은 잊고 있던) 감성을 거기서 발견했기 때문일 것이다.

장재인이 주목받고 있는 것처럼, 지금 인디 레이블에 대중들이 눈을 돌리는 것이 이런 아날로그적 체험과 무관하지 않다. '제2의 장기하'라는 얘기를 들으며 주목받고 있는 인디밴드 10cm의 성공은 우연히 이루어진 일이 아니다. 디지털 음원 사이트 100위권 내에 앨범 전곡이 랭크되고, 음반도 초도물량 1만장이 이미 다 팔려나가 추가 생산에 들어간 10cm의 성공에는 현재 국내 대중문화계에 쓰나미처럼 불어 닥친 아날로그 감성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이것은 한 때의 유행이 아니다. 이미 깨워놓은 아날로그 정서에 대한 욕망은 복제된 가짜 디지털 정서가 채워주기 힘든 면이 있다. 이미 진짜 향기 나는 꽃을 보게 된 대중들이 조화에 눈을 돌릴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이미 2000년대 초반부터 홈레코딩 기술에 있어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면서 내부적으로 실력을 쌓아온 인디씬들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는 건 바로 이 대중들에게 깨어난 아날로그 감성 덕분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아날로그적 감성을 담은 인디씬들의 음악이 유튜브 같은 지극히 디지털적인 매체를 타고 대중들에게 번져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유튜브에 올려진 10cm의 '사랑은 은하수 다방에서'라는 곡의 라이브 영상을 보다보면 우리가 각종 쇼 프로그램에서 아이돌 그룹의 무대를 통해 발견할 수 없는 아날로그적 진수를 느낄 수 있다. 노래를 하다가 악기를 떨어뜨리자 잠시 멈췄다 악기를 집어 다시 연주하는 그런 실수조차 하나의 감성으로 전해지는 상황. 오디션 프로그램에서부터 서서히 깨어나고 있는 이 아날로그 감성은 어쩌면 대중가요의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낼 맹아로 자라나고 있다.

‘무한도전’ 봉우리 우화가 환기시키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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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도전'(사진출처:MBC)

이것은 하나의 우화다. 높이 90미터의 스키점프대 꼭대기에 깃발이 하나 꽂혀 있고, ‘무한도전’ 멤버들 전원은 그 경사를 올라가야 된다. 지금껏 ‘무한도전’이 제시했던 미션들과 비교해보면 지극히 단순하다. 하지만 이 단순한 미션의 과정이 보여주는 장면들은 너무나 감동적이다. 왜? 그 과정이 자꾸만 다른 현실들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한도전’의 이 단순한 미션과정을 보며 느낀 감동의 실체는 바로 여기에 있다.

오르는 길은 하나지만 그 길을 오르는 이들은 천차만별이다. 다리 부상으로 미션에 참가하지 못한 정형돈은 말 그대로 ‘성대투혼’의 응원을 벌여주고, 유재석은 그 특유의 체력과 순발력으로 제일 먼저 정상에 오른다. 하하와 노홍철이 가까스로 정상에 오르지만 거구의 정준하와 나이 많은 박명수는 자꾸만 밑으로 미끄러진다. 그건 꼭 오르고 올라도 제자리로 되돌아가는 시지프스의 신화를 보는 것만 같다.

결국 제일 먼저 정상에 오른 유재석이 줄을 타고 밑으로 내려가 정준하에 이어 박명수를 끌어올린다. 도무지 오르지 못할 것 같아 거의 포기상태에 이른 길에게 유재석은 아이젠을 풀어주고 그래도 오르지 못하자 심지어 줄을 놓고 맨 밑으로 다시 내려간다. 다시 올라와 뒤에서 길을 밀어주기 위함이다. 미안해하는 길에게 “포기만 하지 마라”는 유재석은 결국 길과 함께 동료들이 끌어주는 줄을 잡고 다시 정상에 오른다.

마침 배경음악으로 깔린 이적의 ‘같이 걸을까’는 이 우화 같은 장면에 울림을 더해준다. ‘길을 잃은 때도 있었지. 쓰러진 적도 있었지. 그러던 때마다 서로 다가와 좁은 어깨라도 내주어 다시 무릎에 힘을 넣어 높은 산을 오르고 거친 강을 건너고...’ 이 노래가 전해주는 ‘같이’라는 의미는 말 그대로 포기하지 않고 같이 오르고 또 오르는 ‘무한도전’ 멤버들의 훈훈한 장면들과 어우러졌다.

이 우화가 환기시킨 것은 무엇이었을까. 지병과 배고픔에 ‘남은 밥’이라도 달라는 쪽지를 남긴 채 저 세상으로 떠난 고 최고은 작가가 떠오르는 건 왜일까. 생활고에 시달리다 뇌출혈로 작년 말 숨진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의 고 이진원씨가 떠오르는 건? 지금도 장벽처럼 놓인 사회로의 좁은 통로 앞에서 절망하고 있을 수많은 청춘들이 생각나는 건? 비정규직이라는 이름으로 폭력적인 대우를 생계란 이름으로 받아들이고 있을 노동자들이 아른거리는 건? 도대체 왜일까. 이 ‘무한도전’이라는 우화의 세계 속에 찍혀지던 ‘우린 원래 평균이하이니까’라는 자막이 못내 눈에 밟히는 이유는?

물론 ‘무한도전’이 의도적으로 이런 우화를 그려낸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웃음을 전제로 우연히 해보자던 미션에서 갑자기 피어난 웃음기 사라진 감동적인 이야기는 결코 연출로는 만들어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돌발 상황 속에서 피어난 멤버들의 동료애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는 프로정신이 만들어낸 합작품이다. 하지만 ‘무한도전’의 이런 비의도적인 장면들이 가끔 우화처럼 그려지고 사회적 현실을 떠올리게 하며 그로 인해 우리 가슴을 파고드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여기에는 독특한 ‘무한도전’만의 심지어 카프카적인 색채가 돋보인다.

가상의 설정이나 놀이로 하나의 세계를 구축하고 그 속에 리얼한 멤버들의 반응을 담아내는 방식은, 완전히 가상의 세계처럼 보이면서도 보는 이마다의 현실을 자꾸만 떠올리게 만드는 카프카식의 세계를 떠올리게 한다. 이게 가능한 것은 그 가상의 상황 속에서도 목숨을 거는 멤버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무한도전’은 그렇게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끊임없는 우화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우화는 현실에 닿아있어 우리의 마음을 속절없이 울린다.

'두분토론', 희화화된 캐릭터가 가진 장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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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콘-두분토론'(사진출처:KBS)

"참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다. 그죠?" 여자가 당당해야 나라가 산다는 여당당의 김영희는 개그콘서트 '두분토론'에서 매번 이 멘트로 말문을 연다. 남자는 하늘이라고 주장하는 남하당 대표 박영진의 전 근대적인 남성우월주의 발언들 때문이다. 박영진은 "여자들이-", "건방지게-" 같은 남녀 차별적 발언을 거침없이 던져댄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그것도 모자라서 뭐?"하고 되물으면서 여성들의 행동을 비아냥거린다.

사실 이런 박영진식의 말투는 여성들 입장에서는 듣기조차 싫은 기분 나쁜 얘기들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박영진이 이런 여성 비하 발언을 쏟아낼 때마다 관객에서는 남녀 할 것 없이 웃음이 터져 나온다. 마치 자신들에게 욕을 하는데 그걸 보며 웃는 격이다. 도대체 왜 이런 반응이 나올까. 박영진이 보여주는 캐릭터가 여성들을 비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현실의 남성 우월적 태도를 가진 남자들을 비하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같으면 이런 얘기가 심지어 개그의 소재로 나온다는 것만으로도 여성단체들의 비판을 받았을 것이다. 그 때는 박영진의 이런 얘기들이 농담이 아니라 그 자체로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박영진이 연기하는 캐릭터는 이제는 사라진 과거의 유물이 되었다. 물론 여전히 그 과거에 묶여 지내는 이들도 있겠지만, 대부분 그런 남성들은 가족에서건 사회에서건 비난받기 십상이다. 이 개그가 공개적으로 보여지고 김영진식의 발언에 심지어 웃음을 던질 수 있는 건 전적으로 달라진 남녀 관계에서 비롯된다.

반면 매번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여당당의 김영희는 이런 전 근대적인 남성에게 어이 없다는 표정을 짓다가 자기가 발언할 시간이 돌아오면 거침없는 공격을 해댄다. 남자들이 뭔가 했다는 식으로 하는 행동에 대해 여성적인 입장에서 "대단한 ○○○ 나셨다 그죠?"하며 반문한다. 그 때마다 역시 남녀 관객 모두가 웃음을 터트린다.

김영희의 발언에 터지는 웃음은 박영진의 그것과는 결이 다르다. 박영진이 주는 웃음은 희화화된 자기 캐릭터에서 나오지만, 김영희가 주는 웃음은 그런 구시대적 캐릭터에 맘껏 비난을 쏟아 붇는 그 속 시원함에서 나온다. 그 속 시원함은 여성들에게만 해당하는 얘기가 아니다. 젊은 남성들이라면 권위적인 나이든 세대가 보이는 행동에 똑같은 불편함을 느끼기 마련이다. 김영희의 촌철살인은 그 권위를 순식간에 해체시키며 어떤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두분토론'은 남녀가 싸우는 것처럼 되어 있지만 사실은 둘 다 권위를 해체한다는 점에서는 같은 기조 위에 서 있다. 여기에 남녀 간의 다른 심리가 바탕에 깔리고, 각종 토론이 가진 공허함에 대한 풍자가 곁들여지니 금상첨화다. 물론 어떤 면에서 보면 박영진이 스스로를 희화하며 마구 쏟아내는 남성우월적 발언들 속에는 위축된 남성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한 기조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희화화된 캐릭터 위에 서있을 뿐이다.

남녀의 심리를 소재로 하는 개그는 늘 있어왔다. 하지만 '두분토론'은 좀 더 직설적인 발언대 위에 서 있다는 점에서 훨씬 강하다. 하지만 심지어 위험하다싶은 발언조차 과감하게 풀어내질 수 있는 희화화된 분위기는 이 코너가 가진 최대의 미덕이다. 그 바탕 위에서 남녀는 서로 싸우는 것 같지만 때론 같은 얘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시사도 즐거워지는 토크쇼, '열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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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광'(사진출처:tvN)

막돼먹은 영애 김현숙씨의 폭탄발언(?). "저 채식을 더 많이 해요. 사람들이 안 믿어줘서 그렇지." '육(肉), 욕(欲), 역(疫)'이라는 독특한 제목으로 고기에 대한 불편한 진실에서부터 그 욕망과 나아가 그것이 만들어내는 구제역 같은 대재앙까지를 다루는 '열광'이라는 시사토크쇼의 첫 멘트는 여타의 시사 대담프로그램과는 이토록 다르다. 믿지 못하겠다는 다른 패널들의 반응에 이어지는 영애씨의 발언이 좌중을 쓰러지게 한다. "육식공룡보다 초식공룡이 더 커요."

그러자 잡학박사 팝 칼럼니스트 김태훈이 특유의 엉뚱한 입담을 시작한다. "전에 절에 갔더니 스님들이 엄청 뚱뚱하시더라구요. 풀만 드셔도 살이 찌나 봐요." 문화평론가 탁현민이 불쑥 끼어든다. "풀만 먹는다는 것도 편견일 수 있어요. 근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정원문화(?)를 그렇게 좋아하잖아요. 여기저기 가든이 그렇게 많은 걸 보면." 그러자 이 엉뚱발랄한 시사토크쇼의 중심을 잡아주는 김정운 교수가 촌철살인의 화룡점정을 한다. "우리는 가든에서 먹고 파크에서 자죠."

개인적인 잡담처럼 시작되지만 이것은 말 그대로 대중들이 보다 쉽게 시사에 접근하기 위해 밑밥을 던지는 것이다. 차츰 토크쇼가 진행될수록 어떤 진지한 얘기들이 툭툭 튀어나온다. 국내 사육시설이 점점 대형화되고 있고 돼지 한 마리당 면적이 한 평도 되지 않는다는 얘기를 김정운 교수가 화두처럼 꺼내면 호란은 대부분의 돼지들이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는 충격적인 얘기를 꺼낸다.

하지만 토크쇼는 그렇게 진지하게 깊이를 향해 달려가지는 않는다. 불쑥 탁현민이 자신과 김태훈을 소에 비유해 얘기를 꺼내면서 분위기는 시사의 무거움을 털어낸다. "집단사육이 계속되는 이유는 입맛하고도 상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와 김태훈씨가 소라면 저 같이 운동 안하고 회사라는 틀에서 사육되는 소의 육질이 김태훈씨 육질보다 훨씬 맛이 있을 겁니다." 분명 시사적인 이슈를 던졌지만 웃음이 빵빵 터지는 이 순간. 이것이 바로 시사랭크쇼 '열광'만이 가진 독특한 토크의 결이다.

왜 토크쇼 하면 늘 연예인들만 나와서 하는 시시콜콜한 신변잡기를 들어야만 할까. 시사 대담프로그램은 왜 그렇게 늘 딱딱할까. 상대방 얘기는 듣지 않고 자기 얘기만 하는 그런 대담 프로그램을 왜 보고 있어야 할까. '열광'은 분명 예능 프로그램이지만 바로 이런 기존 예능 토크쇼와 시사 대담프로그램에 대한 도전에서 시작된 프로그램이다. 시사를 좀더 쉽게 접근시키고 재미있게 만드는 것이 이 프로그램의 목적이다. 그래서 신변잡기 같은 각자의 고기 경험이 먼저 얘기되고 그러면서 차츰 차츰 욕망에 대한 이야기, 사회적인 문제들, 그래서 구제역 같은 재앙까지 이야기가 넓혀져 나간다.

'열광'에 열광하게 되는 포인트가 분명히 있다. 먼저 이 시사토크쇼는 시사를 다루면서도 뭔가를 가르치려 하지 않는다. 이론을 얘기하기 보다는 구체적이고 개인적인 경험담을 통해 시사에 접근하기 때문에 주장은 설득이 아니라 공감이 된다. 그래 그래 나도 그런 경험이 있었어 하고 수긍하는 순간, 이미 우리는 시사가 그리 먼 세계의 일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양념처럼 유머가 곁들여진다. 시사를 다루기 때문에 이 유머 역시 기존 예능의 웃음과는 사뭇 다르다. 한번 생각해보면 웃음이 터지는 지적 유머는 '열광' 같은 프로그램이 아니라면 찾기가 쉽지 않다.

시사랭크쇼 '열광'은 물론 예능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어떤 결론을 향해 달려가지 않는다. 김일중 작가는 "그것은 우리의 영역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이야기가 깊어질 때면 다시 예능의 표면으로 되돌리려 노력한다. "웃음을 주어야죠. 물론 그 웃음의 결은 확실히 다르겠지만." 즉 예능과 시사 사이에 어떤 균형점을 잡아주는 것이 이 시사토크쇼의 관건이 된다. 너무 예능쪽으로 가면 알맹이가 사라지고, 너무 시사쪽으로 가면 재미가 반감된다. 그 중간 지점에 방점을 찍는 일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이 엉뚱발랄 시사토크쇼만의 색깔이 나온다.

지적으로도 충분히 재미있을 수 있을까. 아마도 기존 시사 대담 프로그램에 익숙한 분들에게 이런 질문은 부정적으로 들릴 것이다. 하지만 한번 '열광'을 보게 된다면 다른 생각을 할 지도 모른다. 그저 재밌게 웃으며 이야기에 빠져들다 보면 어느새 그 지적 유희에 열광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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