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옛글들/스토리스토리 (24)
주간 정덕현
어린 시절, 아버지는 가끔 다락방에서 꺼내온 아코디언을 연주하셨다. 아코디언하면 어딘지 에밀 쿠스트리차 감독의 '집시의 시간'에 나오는 음악 같은 걸 떠올리겠지만, 아버지가 연주하는 곡은 그런 게 아니었다. 그것은 트로트, 이른바 뽕짝이었다. 쿵짝 쿵짜작 하며 이어지는 아코디언의 반주는 기막히게 뽕짝에 잘 어울렸다. 아버지는 그 연주에 맞춰 '목포의 눈물'이나 '동백아가씨' 같은 곡을 잘도 부르셨다. 아버지가 연주할 때 어머니는 다소곳이 앉아 그 노래를 감상하시곤 했다. 마치 팬이라도 되는 듯이. 그래서일까. 어린 시절의 어머니를 생각하면 나는 왠지 '동백아가씨'를 떠올리곤 한다.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일로 지새우시던 어머니는 어쩌면 아버지의 노래 한 자락에 피로를 푸셨을 지도. 아버지에게 ..
정말 영화처럼 사는 형이 있다. 물론 이 영화는 로맨틱한 장르가 아니다. 예술가의 삶을 다루는 조금은 지질하게도 보이는 홍상수표 영화 같은 장르다. 회사를 다녔고 마흔 즈음에 때려 쳤다. 그리고 한 지방 도시로 내려가 자그마한 방 한 칸 딸린 집을 얻었다. 한 때 음악카페를 운영하기도 했던(쫄딱 망했지만) 이 형은 방안 한쪽 벽 책장에 레코드판을 빼곡히 채워 넣었다. 찾아갈 때마다 마치 음악카페처럼 형은 velvet underground나 한대수 판을 틀어주곤 했다. 비가 올 때 좁은 방안에서 형이랑 소주 한 잔을 마시면서 음악을 듣는 맛은 정말 좋았다. 그것은 마치, 영화 속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12시쯤 해서 게으르게 일어나 대충 밥을 챙겨먹고 하루 종일 동네와 일상을 기웃거리면서 감성을 열어놓고 지..
아주 예전 곤지암에 사는 화가 선생님을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작업실로 쓰시는 집이었는데 넓은 마당과 집 구석구석 선생님의 손때가 묻은 작품들이 투박하게 놓여져 있었죠. TV가 없어서 우리는 서로 얼굴보고 얘기를 많이 했습니다. 술도 많이 마셨죠. 선생님이 집 뒤켠에서 따온 호박을 듬성듬성 자르고 햄 하나를 통째로 꺼내서 역시 대충 썰어 넣고는 볶아서 안주로 내놓으셨습니다. 글쎄요... 맛으로 치면 식당처럼 맛깔나진 않았지만 선생님이 그러시더군요. "여긴 농약도 없어. 그냥 먹어도 되지." 그 말 한 마디에 왠지 더 맛이 나더군요. 술이 거나하게 취하면 노래도 듣고 그러다 녹차도 마셨습니다. 차와 술은 함께 하면 안된다고들 했지만 그 때는 녹차를 안주삼아 술을 마시기도 했죠. 그렇게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행주산성 밑 국수집에서 국수 한 사발 먹고 서성댔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계절이다. 달칵이는 경쾌한 얼음소리를 들으며 그늘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데 아내의 메시지가 왔다. 점심을 먹고 있단다. 모두가 나간 빈 사무실에 앉아 싸가지고 간 도시락을 까먹는단다. 때론 한없이 모든 것들이 감사하게 여겨지는 그런 순간이 있다. 이럴 때는 그간 수없이 원고 수정을 요구했던 편집자나 말 지겹게 듣지 않는 회사 후배나 어딘지 일상에 지쳐 대화가 멀어진 배우자에게나 전화를 걸 일이다. 한껏 여유로워진 그 마음 속으로는 뭐든 들어오지 않을 것이 없다. 며칠 전 부모님을 베트남 가는 비행기에 태워 보냈다. 한 달 간의 여행이었다. 마음에 부모님에 대한 부채감이 있었다. 한 번 심하게 다퉜던 것이다. 고부 간의 갈등 사이에서 ..
"저 식스팩 좀 봐. 남자라면 모름지기 저렇게 관리되어 있어야 남자지." 이른바 짐승남이라 불리는 아이돌이 보기 좋게 셔츠를 쫙쫙 찢을 때마다 내 마음도 쫙쫙 찢어졌다. 그 때마다 불쑥 튀어나온 내 원팩은 한없이 초라해졌다. "시간이 없어서 그렇지. 나도 관리하면 저렇게 할 수 있어." 괜한 호기에 등 떠밀려 덜컥 동네 헬스클럽을 끊어버렸다. 그래 꽃중년이 대세라는데 꽃중년은 못돼도 배불뚝이는 면해야지, 하며 찾은 헬스클럽. 하지만 하루 동안 트레이너의 혹독한(?) 트레이닝을 받고 나자 생각이 달라진다. 이게 운동이야? 노동이지. 이러다 늙는다 늙어. 괜스레 반복적인 헬스보다는 특별강좌식으로 한편에서 매일 벌어지는 요가나 필라테스, 에어로빅 같은 게 눈에 들어온다. 저거라면 할 수 있겠는데... 마음은 ..
낯선 곳에 가는 걸 원체 좋아하질 않는다. 그런 내가 20대 중반에 혼자 12시간 비행을 해서 말도 잘 통하지 않는(그 때는 영어가 젬병이었다) 멜버른의 그것도 한참 외곽에 있는 대학교 기숙사를 찾아갔다는 건, 지금 생각해도 놀라운 모험이었다. 홍콩에서 비행기를 갈아타면서 포비아(Phobia)를 경험했다. 탑승시간은 30분밖에 안 남았는데 이국의 공항에서 길 잃은 청년이 겪었을 공포감을 생각해보라. 가까스로 비행기를 타고 멜버른에 도착해서 택시 타고 물어물어 기숙사에 도착했는데, 마침 토요일이었다. 주말이면 주변의 모든 상점이 문을 닫는 바람에 거의 이틀을 굶다시피 살아야 했다. 문밖을 나서면 외계인이 달려들기나 하는 것처럼, 기숙사 방에 콕 박혀서. 그 때 기숙사 벽 한쪽에는 내가 가져간 '천국보다 낯..
"어, 너 거기 있었니?" 어린 시절 이런 얘길 참 많이도 들었다. 극도의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말수도 없는데다가 막상 입을 열어도 그다지 빵빵 터트리지 못했던 나는 말 그대로 존재감 없는 아이였다. 심지어 말할 때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아서, 무슨 얘길 꺼낼 때마다 이걸 말해 말어 고민할 정도였다. 그런 시골 아이가 떡 하니 서울 한 복판으로 전학을 왔으니 이건 투명인간이 따로 없었다. 그 때 나는 대신 아주 특별한 재주(?)를 갖고 있었는데, 어디 바깥에 나가면 늘 뭔가를 주워오는 것이었다. 누나는 그런 내가 신통했던지 "어디 바닥에 그런 게 다 있어? 난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없던데...", 하곤 했다. 그렇게 내가 주워오는, 누군가 버린 물건들은 하나하나 모여서 내 책상의 한 구석을 장식하곤 했다..
먼저 한 세기 전에 있었던 충격적인 사실. 당시 서구 사회에서는 전염병의 공포가 만연되어 있었다. 그래서일 게다. '위생'을 이유로 당시 사회에는 엄마와 아기의 신체적 접촉이 권유되지 않았다. 면역력이 부족한 아기가 감염되어 죽음에 이르는 경우가 흔하게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의사가 버려진 아기들을 보호해주는 병원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아기들이 아무 이유 없이 죽어나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전염병에 노출된 것도 아니었다. 나중에 밝혀진 일이지만 그 원인은 어처구니없게도 아기의 '의욕상실' 때문이었다. 이 병원 역시 간호사들조차 아기와의 접촉이 거의 없었다고 하는데 이처럼 아기가 어떤 대상과의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자 '삶의 의욕'을 잃었다는 얘기다. 그 후로 아기와의 접촉을 다시 허용하자 아기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