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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 정덕현
"불합격되셨습니다." 이처럼 가슴을 쿵 치는 말이 있을까. 대학을 갓 졸업하고 취업은 뒤로 한 채 소설을 쓰고 있을 때, 주변 성화에 못 이겨 카피라이터에 응모한 적이 있다. 1명 뽑는데 무려 5백여 명이 지원을 했던 터라, 과연 될까 싶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서류심사와 1차 시험을 통과했다는 통보를 받았다. 사실 카피라이터에 대해 그다지 호감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애초에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지만, 그 놈의 '합격 통보'를 받으니 마음이 달라졌다. 이거 한 번 해봐? 그런데 2차로 면접을 보러갈 때 마음은 또 달랐다. 차라리 떨어지고 말걸, 왜 1차는 통과해서 이 고생인가 했다. 시험 통과한 게 후회될 정도로 나는 떨렸다. 한 사람을 앉혀놓고 열 명 정도 되는 임원이 스무 개의 눈으로 나를 노려..
곰배령에 대한 첫번째 기억은 'MBC 스페셜'이라는 프로그램이다. 카메라라는 것이 늘 그렇듯이 그 프로그램은 우리가 평소에 발견하지 못하는 것들까지 세세하게 우리 앞에 던져 놓았다. '곰배령 사람들'이라는 제목의 그 다큐멘터리는 나를 단박에 매료시켰다. 그래서 나는 "우리 한 번 곰배령 가볼까?"하고 물었고 아내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휴식년제에 들어간 곰배령은 사람들의 발길을 허락하지 않는다, 지만 그래도 가려면 갈 길은 있다. 그 해에는 민박집 주인 아주머니가 곰배령 안에 사는 분의 이름을 가르쳐주면서 입구에서 그분을 만나러 왔다고 얘기하고 들어가라고 일러줬다. 우리 가족은 그 패스워드를 정확히 불러주었고, 그 입구를 막고 있는 관리인은 들어가라고 해주었다. 참 이런 자연이 없었다. 사람 발길..
"야 너 아주 내 얘길 그대로 썼더라." 시골에 갔더니 아버지께서 불쑥 이 얘기부터 건네셨다. 사실 조금 부끄러웠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는 뭔가 속내를 들킬 때 어색해하는 감정이 남는 모양이다. 그래도 아버지는 내 속내가 궁금했던지, 책이 나왔다고 하니 단박에 책을 구해서는 읽었다고 하셨다. 책상 위에 놓여진 책은 접어가면서 보았는지 벌써부터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사실 시골 내려가기 전에 어머니가 전화를 했었다. "얘. 네 아버지가 이상하다." "네? 어디가 편찮으세요?" "아니 그런게 아니고 네 책을 읽으면서 깔깔깔 웃다가 또 갑자기 울고 그런다지." 아들이 책을 쓴 것에 대한 과장이겠거니 했다. 그런데 막상 아버지가 내게 그렇게 얘기하니 마음 한 구석이 짠해졌다. 초등학교 때 서울로 온 후, 줄곧 ..
마흔, 그 미친 존재감에 대하여 병수는 제 오랜 친구입니다. 젊은 시절, 신촌에 있는 '도어스'를 드나들고 짐 모리슨처럼 살아야지 하면서 술을 밥처럼 마시던 친구였죠. 뭐 하나 결정된 것이 없지만, 아니 아마도 그랬기 때문에, 우리들은 그처럼 하루하루를 불태웠던 것(?) 같습니다. 그 땐 저도 좀 그랬습니다. 그런데 벌써 마흔을 넘겼군요. 이제 머리도 희끗희끗해지고, 혈압약을 챙겨 먹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가끔 강남역 '우드스탁' 같은 데서 존 레논을 들으며 하루 동안 귀에 덧씌워진 삿된 것들을 씻어내곤 합니다. 병수는 한때 보험소장을 하다가 지금은 나와서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늘 인상을 잔뜩 쓰고 입만 열면 '죽겠다'는 말을 달고 살죠. 물론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듣지는 않습니다. 꽤 잘 살고 ..
예능은 이제 더이상 오락프로그램이라는 지칭을 쓰기 어려워질 것 같습니다. 웃음을 주는 것이 예능이라는 생각에서 이제는 눈물을 주는 것도, 감동을 주는 것도, 때로는 어떤 짜릿한 스릴과 미스테리한 재미를 주는 것도 예능 프로그램의 몫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무한도전'은 '타인의 삶' 속으로 들어가 서로 다른 삶의 어려움을 새삼 느끼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의사로 분한 박명수와 투병하는 환우 아이 사이에 훈훈한 정을 그려냈고, '1박2일'은 외국인근로자 친구들이 가족들과 상봉하는 장면을 통해 그 무엇보다 우리네 가슴을 울리는 끈끈한 가족애를 그려냈습니다. '런닝맨' 같은 프로그램이 액션 장르의 서스펜스와 멜로를 예능으로 끌어들이고, '남자의 자격'이 아저씨들의 훈훈한 이야기를 전해주며, '뜨거운 형제들'이 역할..
현빈의 눈빛이 저토록 깊은 줄 몰랐습니다. 장난기와 슬픔이 함께 깃들어 있는 그 눈빛은 마치 '시크릿 가든'이라는 드라마가 보여주듯, 희극과 비극은 같은 몸의 다른 표정이라는 걸 말해주는 듯 합니다. 통렬한 웃음이 결국은 깊은 슬픔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그 한없는 슬픔 속에서 오히려 헛헛한 웃음이 배어나오기 마련이죠. 희비극은 그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는 우리네 삶을 가장 리얼하게 포착하는 면이 있습니다. 웃다가 울다가.... 관련글 '시크릿 가든', 그 시크한 매력의 정체, 현빈 왜 굳이 현빈과 하지원은 몸을 바꿨을까 하지원이라 가능한, 현빈이어서 돋보이는
매포 외할머니댁을 찾아가는 길은 늘 낯설고 두려웠다. 버스가 당도하는 시각은 늘 어둠이 내린 한밤중이었고, 외할머니댁으로 가는 나룻배를 타려면 빛 한 자락 찾기 힘든 캄캄한 길을 걸어야 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은 괴물의 아가리처럼 입을 벌리고 당장이라도 나를 삼킬 것 같았다. 그때 문득 올려다본 하늘 위에 펼쳐진 별들의 향연. 어머니는 거기 떠 있는 별들을 손으로 가리켜 이리 잇고 저리 이으면서 별자리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북두칠성, 카시오페이아, 오리온... 그 별들은 지금도 저 하늘에서 빛나고 있을까. 물론 그 별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것이지만, 이제 도시의 빛에 멀어버린 눈은 그 별을 바라보지 못한다. 별들은 분명 지금도 이야기를 건네고 있지만 도시의 소음에 먹어버린 귀는 그 소리를..
자연, 자연스러운 스토리텔링 우리에게 ‘무소유’의 삶을 몸소 보여주고 떠난 법정 큰 스님이 평생 강조했던 것 중 하나가 바로 ‘자연(自然)’이라고 한다. 자연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숲과 바다 같은 그 자연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고, 한자 그대로의 뜻으로 ‘스스로 그러한’ 것을 뜻하기도 한다. 즉 어떤 인위적인 흐름이 부여되지 않은, 그냥 그대로 흘러가는 것이 바로 자연이고, 그것을 우리는 숲과 바다와 나무 같은 자연을 통해 발견한다. 자연의 흐름이란 실로 단순하고 명쾌하다. 즉 태어나고 성장하고 쇠약해지다가 사라지는 것이다. 법정 큰 스님은 우리에게 이 자연적인 삶을 거스르지 말고 그 흐름대로 살아가라고 말씀하셨다. ‘무소유’는 자연이 자연적으로 살아가기 위한 가장 중요한 방식이었다. 무언가를 가진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