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춘할망>, 청춘과 어르신에 대한 위로

 

나이가 젊다고 다 청춘이 아니듯, 나이 많다고 다 어른이 아니다. 아마도 최근 들어 가장 많은 키워드로 나오는 단어가 청춘어르신일 게다. ‘청춘이 원치 않았던 힘겨운 현실 앞에 숨가빠하고 있다면, ‘어르신들은 꼰대가 될 것인가 어른이 될 것인가를 사이에 두고 갈등한다. 그리고 이 둘은 연결되어 있다. 어른들에 의해 만들어진 세상이 청춘들의 현재 혹은 미래를 결정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영화 <계춘할망>은 이 서로 다른 두 세대 간의 따뜻한 소통이 느껴지는 영화다.

 

사진출처: 영화<계춘할망>

제목에서 보여지듯 <계춘할망>의 배경은 제주도다. 계춘(윤여정)은 이 할망의 이름이다. 어쩌다 손주 혜지를 홀로 키워온 계춘은 어느 날 아이를 잃어버린다. 평생을 아이를 찾아다니는 계춘은 어느 날 나타난 혜지(김고은)로 인해 이제 겨우 허리 펴고 잘 수 있는 행복감에 빠져드는데 그간 혜지가 살아온 삶이 심상찮다. 도둑질은 다반사고 조건만남을 빙자해 돈을 뜯기도 하는 불량한 아이들의 폭력 속에 무심히 살아온 그녀다. 그런 그녀를 계춘은 모든 걸 품어주는 제주의 바다처럼 안아준다.

 

사실 이야기는 어찌 보면 뻔해 보인다. 결국 혜지가 계춘의 사랑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 하지만 영화 속 디테일들은 이러한 당연한 수순의 이야기 속에 반짝반짝 빛나는 순간들을 채워 넣었다. 그림에 재능을 보이는 혜지와 그녀의 아픔을 알면서도 무심한 척 그녀를 바른 길로 인도하는 미술선생 충섭(양익준), 청춘의 설렘을 무겁지 않게 영화에 얹어주는 제주소년 한(민호), 그리고 그녀의 삼촌으로 늘 계춘을 걱정하고 돌보는 석호(김희원) 같은 인물들은 영화에 충분한 온기를 더해준다. 그림을 잘 그리려면 그림자가 아니라 빛을 봐야 한다는 충섭의 말대로 이 주변 인물들은 혜지에게 빛을 던져주는 존재들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빛은 계춘이다. 손과 얼굴에 가득한 주름살과 마치 옥수수수염처럼 빛이 바랜 머리칼은 그녀의 한 평생을 한 장면만으로도 충분히 이해하게 만든다. 그런 그녀가 저 멀리 혜지가 걸어오는 것만 봐도 그 주름이 확 펴지고 달려오는 모습은 그 자체로 뭉클함이 느껴진다. 그런 그녀가 혜지에게 말한다. “세상에서 살면서 딱 한 명 네 편만 있으면 살아갈 수 있다. ‘내 새끼라는 표현이 정확하게 맞을 정도로 계춘이 혜지를 대하는 모습은 바다그 자체다. 자신이 평생 물질을 하며 살 수 있게 해준 든든한 그녀의 편.

 

과연 우리 시대의 청춘들에게는 계춘 같은 든든한 편이 있을까. 힘겨운 현실 속에서 그저 생존하기 위해 엇나간 삶을 살아내기도 하는 청춘들이다. 하지만 그 청춘들의 삶은 어느 누구도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다.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세계에 질식하고 있을 뿐. 영화가 제주도까지 달려가 계춘이라는 할망을 통해 보여주려는 건 그래서 진정한 어른의 모습이다. 청춘들에게 저마다 든든한 편이 되어줄 수 있는 그런 어른.

 

계춘 같은 진정한 어른이 있어 혜지는 어둠을 비로소 빠져나와 미래를 향해 나갈 수 있게 된다. 아픔은 자양분이 되어 미술이라는 예술로 승화되고 거기에는 고스란히 혜지의 계춘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과 사랑이 담겨진다.

 

<계춘할망>에서 김고은은 역시 단단한 연기력으로 혜지라는 청춘의 아픔을 때론 퉁명스럽게 때론 따뜻한 눈물로 그려낸다. 윤여정은 늘 도회적인 이미지라는 틀에서 과감히 벗어나 손끝의 주름 하나로도 어르신의 감정을 담아내는 놀라운 연기변신을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 주목되는 또 한 명의 연기자는 김희원이다. 늘 악역으로만 나오던 그가 관객들의 심금을 울리는 연기를 보여줄지 누가 알았으랴.

 

김고은이라는 청춘과 윤여정이라는 어른이 만나 보여주는 건 청춘과 어른에 대한 위로다. 힘겨워도 세상에 한 사람 정도쯤은 자기편이 있다는 걸 청춘들에게 말해주면서, 동시에 헌신적이고 자기희생적인 어른의 삶이 얼마나 숭고한가를 들려준다. <계춘할망>은 그래서 이들이 서로 소통하는 과정만 봐도 눈물이 나는 영화다. 아파서가 아니라 너무 따뜻해서 나는 그런 눈물.

<싱 스트리트>, 존 카니의 음악영화는 늘 옳

 

<싱 스트리트>라는 영화에 있어서 존 카니 감독이라는 존재감은 가히 압도적이다. 이미 <원스><비긴 어게인>으로 음악영화의 묘미를 관객들에게 전한 바 있는 감독이니 이번 <싱 스트리트>에 대한 기대감은 굳이 여러 이유를 댈 필요가 없을 게다. 그리고 그 기대감은 역시 존 카니 감독의 음악영화는 늘 옳다는 만족감으로 돌아온다. <싱 스트리트>는 이전의 음악영화들이 준 감동 그 이상이다.

 

사진출처: 영화 <싱 스트리트>

<싱 스트리트>는 시간을 80년대로 되돌렸다. 사실 이 영화의 정서를 만들어내는 당대의 아하, 듀란듀란, 홀 앤 오츠 등의 곡만으로도 어쩌면 반색하는 관객들이 있을 법 하다. 그저 음악이 아니라 어떤 스피릿(Sprit)’이 느껴지던 그 때의 음악들. 지금 보면 웃음이 빵 터지는 뽕 들어간 의상과 폭탄 머리지만 그것이 하나의 시대 정서로까지 느껴지는 그 때의 아티스트들과, 그들을 흉내 내면서 스스로의 음악을 만들어가는 보이 밴드 싱스트리트의 매력이라니.

 

존 카니 감독은 역시 음악이 어떤 순간 우리를 매혹시키는 지 정확히 알고 있다. 85년 더블린. 경제상황이 어려워진 현실 때문에 학비가 싼 싱스트리트로 전학 온 코너(퍼디아 월시-필로)가 라피나(루시 보인턴)라는 뮤즈를 만나게 되면서 밴드를 하게 되면서 성장해가는 이야기. 거의 음치에 가깝게 노래하던 코너가 사랑을 알게 되면서 그 마음을 담아 가사를 쓰고 거기에 밴드의 만능 악기 연주자인 에이먼(마크 맥케나)의 도움을 받아 곡으로 탄생하는 과정은 신비로울 정도로 보는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음악은 지독한 현실을 뚫고 더 아름답게 피어난다. 더블린의 어두운 경제, 지독한 현실 속에서 꿈을 포기한 채 버텨내는 삶을 살아가는 그들이다. 부모로부터 학대받는 아이, 알코올 중독 때문에 병원에 입원한 아버지를 둔 미래의 음악가, 부모가 없는 편이 오히려 낫다며 항상 그곳으로부터 탈출하려 하는 청춘들... 그들의 고뇌와 방황은 고스란히 음악으로 승화된다.

 

코너의 음악이 감동적으로 다가오는 건 그것이 기술적으로 기교적으로 완벽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거칠지만 그 안에 온전히 자신의 마음을 담아내고, 그것을 음악으로 당당하게 전하는 그 모습 때문이다. 그래서 그 음악은 완전히 새롭게 들린다. 존 카니 감독은 바로 이 음악이 가진 마법적인 순간이 그 음악 자체의 소리가 아니라 거기 담겨진 음악을 만든 이들의 진심이라는 걸 영화를 통해 말해주고 있는 듯 보인다.

 

<비긴 어게인>을 통해 깊은 감동을 받았던 관객이라면 <싱 스트리트> 역시 충분히 만족할만한 영화다. 사실 어떤 면에서는 음악의 본질적인 면들을 훨씬 잘 드러냈다는 점에서 <싱 스트리트>는 존 카니가 만든 음악영화들의 근간을 보여줬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게다. 음악만으로도 충분하지만, 그 음악의 마법 같은 탄생 과정과 그것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그 과정까지를 담아낸 이야기는 영화를 보고난 뒤에도 오랜 여운으로 남는다.

 

코너가 그저 그런 아이에서 차츰 아티스트가 되어가는 과정은 이 아픈 현실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 하는 영화의 메시지로 승화된다. “너는 파괴할 줄만 알지. 뭔가 만들어낼 줄은 모르잖아.” 집에서 학대받으며 자라 학교에서 폭력을 일삼는 친구에게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이렇게 말하는 코너의 모습은 예술이 어떻게 그들에게 구원이 되어주었는가를 잘 보여준다. 이 부분은 80년대 더블린이라는 곳에서 살아가는 청춘들의 이야기가 현재를 사는 우리들에게도 깊은 감흥을 주는 이유다. 코너와 그가 만든 싱스트리트 밴드의 성장기는 지금 우리의 청춘에게는 큰 용기와 위안으로 다가올 만하다

관객에게 빙의체험을 하게 하는 <곡성>

 

나홍진 감독의 <곡성>은 호불호가 극명하게 나뉘는 영화다. 어떤 이들은 이 영화의 엄청난 에너지에 놀라고 기독교적 세계관을 뒤집어놓은 도발적인 구상에 혀를 내두른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영화가 일종의 미끼를 던져놓고 관객을 끝까지 이리저리 끌고 다닌다며 불편해 한다.

 

사진출처:영화<곡성>

영화 평론가나 기자 같은 전문가들은 <곡성>에 대해 대체로 호의적이다. 이것은 해외에서 특히 더 두드러진다. 칸 영화제에서 시사회가 끝난 후 전 세계 언론과 평단은 <곡성>에 대한 찬사를 서둘러 쏟아냈다. ‘올해의 영화’, ‘칸 영화제의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걸작’, ‘왜 경쟁부문에 안 올라왔는지 모르겠다’, ‘악마에 홀린 듯 대단한 걸작’, ‘넋이 나갈 만큼 좋다’, ‘최근 한국영화 중 최고등등 찬사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해외의 반응이 이처럼 뜨거운 건 이 영화가 지금껏 해왔던 그 어떤 영화들보다 독보적인 영역을 구축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저 작은 마을에 벌어지는 이상한 사건들과 죽어나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그 안에는 스릴러적인 요소는 물론이고 무당과 귀신이 등장하는 오컬트적 요소, 나아가 악마와 좀비까지 등장하는 다양한 요소들을 아우르고 있다.

 

<곡성>의 독특한 점은 어떤 명쾌한 메시지를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 자체로 <곡성>이라는 영화의 메시지다. 낚시라는 상징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물고기는 자신이 왜 미끼에 걸려 이리저리 휘둘리다 비극적인 끝을 맞이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이런 저런 의심을 하고 추정을 하고 믿어보기도 하지만 또 불신하며 배신한다. <곡성>의 종구(곽도원)은 그 과정을 몸으로 겪는 인물이다.

 

그리고 관객이 종구라는 인물을 통해 그 불가해한 일들을 겪어내며 풀어보려 안간힘을 쓴다는 점에서 그는 또한 관객의 매체가 되는 셈이다. 마치 무당이 귀신을 불러내어 그들의 세계를 들여다보고 그걸 이해해보려 하는 것처럼 종구는 관객에게는 <곡성>이라는 이해할 수 없는 세계를 들여다보게 만드는 무당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사실 어떤 상정된 메시지를 향해 당연히 달려가는 일반적인 영화를 보던 관점으로 <곡성>을 들여다보면 불편하기 이를 데가 없다. 종구라는 인물 속에 빙의되지만 그 인물이 보고 판단하는 것들이 오류투성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구는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마을에 벌어지는가를 궁구하며 그 깊숙이 파고 들어가지만 그럴수록 더 깊은 미궁에 빠져 허우적댄다.

 

영화 후반부에 일광(황정민)이라는 무당이 등장해 한판 살풀이굿을 하는 장면은 그래서 관객에게는 굉장한 에너지로 다가온다. 처음에는 이 조금은 허술해 보이는 종구라는 인물을 통해 코미디처럼 실실 웃으며 <곡성>의 영화 속으로 이끌려 들어간 관객들은 그가 처한 막막함과 절망감에 숨이 턱턱 막힌다. 마치 귀신들린 사람 같은 느낌을 관객 역시 똑같이 느끼게 된다. 그러니 일광의 살풀이는 마치 그걸 풀어줄 것 같은 강력한 에너지로 다가온다. 물론 풀어지기는커녕 더 복잡한 미궁으로 종구는 빠져버리지만.

 

<곡성>절대 현혹되지 마라라는 문구가 달려 있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현혹될 수밖에 없는 영화다. 절대 현혹되지 않으려는 안간힘은 사실은 현혹되고 있는 자신을 반증할 뿐이다. 종구는 그 미끼를 물었고 관객은 종구에 빙의되어 역시 미끼를 물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명쾌하지 않은 영화의 결론은 관객들에게 불편함을 주지만 그건 그렇기 때문에 중요하다. 감독은 의도한 바가 있겠지만 그 결론을 관객들의 몫이라고 남겼다. 이것도 어쩌면 미끼일 것이다. 사실 귀신과 영혼, 악마에 대해 현혹되는 이야기에 명쾌한 결론이 어디 있겠는가. 마치 명쾌한 결론이 있을 것이라는 우리의 생각을 영화는 역으로 공격한다.

 

<곡성>은 그래서 마치 빙의 체험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처음에는 믿지 않다가 바로 그 저항감 때문에 오히려 더 깊게 빠져들고 결국은 그 이면의 실체를 들여다보게 만든다. 그 체험이 모든 이들에게 즐겁기만 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 영화에 대해 극과 극의 반응이 나오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달라진 대중들, 해외 반응이 아직도 중요한가

 

“<아바타> 못지않은 작품 만들 겁니다.” “<아바타><트랜스포머> 정도의 기술력을 갖추지 않는다면 애초에 <디워2>를 만들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겁니다.” 중국 화인그로벌영사그룹에서 5억 위안(9백억 원)의 투자를 받아 제작하고 있는 <디워2>에 대해 심형래 감독은 이렇게 포부를 밝혔다.

 

사진출처:<디워2> 제작사

사실 모두가 심형래 감독은 끝났다고 생각하던 차에 중국으로부터 들려온 9백 억 투자 소식은 모두를 놀라게 만들었다. 그래서일까. 그간 언론에 별로 얼굴을 내밀지 않던 심형래 감독이 요즘 자주 인터뷰 지면을 채우고 있다. 그 이야기들을 들어보면 한 마디로 굉장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대중들은 반신반의하는 입장을 보인다.

 

국내에서 <디워>가 개봉됐을 때 일어났던 애국 마케팅 논란은 일종의 노이즈 마케팅으로 상승효과를 거둬 이 영화가 흥행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만들었다. 하지만 영화가 끝나고 심형래 감독의 파산 소식이 들려오면서 <디워>에 대한 반응은 시큰둥해졌다. 그래서일 것이다. 작품이 나오기도 전에 <디워2>에 대한 심형래 감독의 말들이 잘 믿기지 않는 것은.

 

국내의 시큰둥해진 반응에 해외의 투자 유치 같은 우리와는 상반된 반응을 꺼내 <디워2>를 홍보하는 건 어디선가 많이 봐왔던 영화 마케팅이다. 그간 그토록 많았던 영화제 반응과 해외 반응 같은 소식들은 사실은 국내 시장을 위한 마케팅방식의 하나였다. 그리고 실제로도 이런 방식은 꽤 괜찮은 효과를 가져 오기도 했었다. 하지만 과연 이런 방식이 지금도 유효한 걸까.

 

최근 칸느 국제영화제에서 연일 타전되어 들어오는 이야기는 박찬욱 감독의 신작 <아가씨>에 대한 해외 반응이다. 시사회가 열린 후 문제작이라는 이야기가 나왔고, 극과 극이라는 반응을 내세워 논쟁적인 영화로서의 이미지도 갖게 됐다. 게다가 마켓에서 업무가 마비될 정도로 뜨거운 구입 문의가 이어진다는 기사도 나왔다.

 

이것이 실제 상황이라면 <아가씨>로서는 좋은 일일 것이다. 하지만 사실 여부를 떠나서 이런 식의 홍보마케팅 방식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은 그다지 좋지 않다. 이러한 해외 반응에 더 이상 국내의 대중들이 혹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이런 식의 홍보마케팅이 궁금증을 유발할 수는 있겠지만 이제 영화의 성공여부는 작품의 성취에 의한 실제적인 입소문이 절대적이다.

 

아직 <디워2>는 제작도 되지 않았고 <아가씨>는 국내에서 관객들이 만나보지도 못했다. 그러니 그 기대감을 자아내는 해외 투자나 반응을 먼저 끄집어내는 지도 모른다. 투자를 얼마 받았건 해외 반응이 어떻건 작품에 대한 평가는 결국 작품 고유의 완성도나 대중성에 의해 냉정하게 이뤄질 것이다. 온전히 작품을 저마다의 취향으로 감상하는 시대에 마치 모든 걸 다 이룬 것처럼 보이는 영화 측의 설레발이 얼마나 효과적일까.

 

항간에는 아직도 해외 반응이 그리 중요한가 하는 질문을 던진다. 지금의 관객들은 확실히 달라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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