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드풀>, 기존 슈퍼히어로 밟고 올라선 슈퍼히어로

 

만일 어른들을 위한 슈퍼히어로를 만든다면? 누구나 한번쯤 상상은 해봤을 것이다. 그런데 막상 만든다면 어떨까? 손발이 오글거리지 않을까. ‘지구를 구한다같은 대명제가 그렇고, ‘정의가 어떻고 자유가 어떻고 하는 거창한 주장이 그렇다. 무엇보다 타이즈 위에 팬티를 입는 그 복장이 대략난감이다.

 


사진출처:영화<데드풀>

<데드풀>은 그래서 어른들을 위한 슈퍼히어로를 등장시키면서 그 오글거리는 기존의 슈퍼히어로물들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잘근잘근 씹어댄다. <X>의 자비에는 대머리 아저씨가 되고 데드풀을 연기한 레이놀즈가 주연을 맡았던 DC코믹스의 <그린 랜턴>은 초록색 슈트의 흑역사가 되어버린다.

 

심지어 <데드풀>은 이런 슈퍼히어로물에 엄청난 돈을 쏟아 부어 제작하는 제작자들에게조차 시작부터 비아냥을 쏘아댄다. 오프닝 크레딧에 이 영화를 일부 얼간이들을 위한 영화(Some Douchebag’s Film)‘라고 명명하고 팀 밀러 감독 자신을 돈을 다소 과하게 받은 얼간이 연출가(Directed by Some Overpaid Tool‘라고 자처한다.

 

이렇게 스스로를 포함하는 슈퍼히어로를 비아냥대는 슈퍼히어로물이라는 기막힌 설정은 <데드풀>이 꽤 단순하고도 전형적인 슈퍼히어로 장르를 따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흥미로워지는 대목이다. 어른들이 슈퍼히어로물을 볼 때 느끼는 이중적인 감정, 세상에 저런 게 어딨어?’하고 유치한 시선을 보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꽤 쿨 하다고 느끼는 그 감정을 이 영화는 아예 드러내놓고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래서 이 영화는 때론 지나치게 폭력적일 정도로 섬뜩한 장면에서조차 유머를 만들어내고, 선정적인 장면에서도 비실비실 피어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게 만든다. 그러면서 이 이상한 슈퍼히어로의 목적은 오로지 자신을 그렇게 슈퍼히어로(혹은 슈퍼노예?)로 만든 악당들을 철저하게 응징하는 것뿐이다. 지구를 지킨다거나 정의 같은 거창함도 없다. 그저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 앞에 흉측한 몰골로 나타날 수 없이 어쩔 줄 몰라 하는 지극히 평범하다 못해 찌질하게까지 보이는 한 남자가 거기 있을 뿐이다.

 

슈퍼히어로들의 특징인 죽지 않는다는 명제도 <데드풀>에서는 냉소적으로 다뤄진다. 즉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인물로 그려지는 것. 이것 역시 슈퍼히어로들에 대한 거꾸로 바라보는 관점이다. 영생하는 신적인 존재는 과연 좋기만 한 것일까. 죽고 싶을 정도로 망가진 흉측한 몰골로 영생한다는 건 천형이 아닐까.

 

당연히 이 <데드풀>의 세계는 선과 악이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누군가 자신에게 고통을 주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 고통을 몇 배로 되갚아주는 것뿐이다. 이 아무 것도 정해져 있지 않은 세계와, 어찌 보면 정해져 있는 것들을 하나하나 끄집어내 특유의 입담으로 잘근잘근 씹어버리는 통쾌함. 이것이 <데드풀>을 보며 느껴지는 해방감이 아닐까. 아이의 손을 잡고 슈퍼 히어로물을 보러 가서는 결코 느끼지 못했던

<귀향> 어째서 모두가 봐야하는 영화일까

 

단 한 장면만으로도 가슴이 먹먹하다. 구덩이에 아무렇지도 않게 버려진 소녀들. 흙투성이의 맨발과 아직 채 마르지도 않은 것만 같은 눈물 자욱. 다른 곳에서 봤다면 그 색색의 한복이 그토록 고울 수 있었을 그녀들이 거기 그렇게 방치되어 있다. 그녀들의 몸은 차갑게 식어버렸지만 직전에 남긴 그녀들의 마지막 목소리들이 귀에 쟁쟁 울리는 듯하다. 그 구덩이는 <귀향>이라는 영화가 애써 재현해내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아예 없었던 것이 될 뻔했을 게다. 그것이 또 끔찍하고 먹먹하다.

 


사진출처:영화<귀향>

어찌 보면 그리 대단히 돈이 많이 들 것 같지도 않은 이 영화가 빛을 보기까지 무려 14년이 흘렀다는 사실은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그 앳된 나이에 그 먼 곳까지 끌려가 지옥을 살다 겨우겨우 살아 돌아온 분들은 아마 더 오랜 세월을 기다렸을 것이다. 영화 속에서 그렇게 살아 돌아온 영희(손숙)가 몸은 돌아왔어도 마음은 진정으로 귀향하지 못했다고 하는 그 말 속에 그녀의 고통스런 한 평생이 느껴진다. 그 곳에서 여전히 고향으로 가지 못하고 있는 소녀들을 어이할까. 그것은 영희가 가진 부채감이고 또한 그녀가 우리에게도 전하는 부채감이기도 하다.

 

사실 상업적인 선택이 일반화되어버린 요즘 같은 시대에 꼭 봐야 하는 영화라는 문구는 낯설게 다가온다. 하지만 <귀향>은 꼭 봐야 하는 영화다. 그것은 우리가 봄으로써 기억에 담아질 수 있고, 그 하나하나의 기억들을 통해 사실이 왜곡되거나 묻혀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대중오락의 성격을 띤지 오래지만 사실 그 이전에는 기록물로서의 가치가 분명했다. <귀향>은 결코 지워져서는 안될 기록이다. 우리의 기억과 가슴에 새겨둬야 할 기록.

 

물론 그렇다고 <귀향>이 다큐적인 기록에 머무는 영화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귀향>은 극영화로서의 완성도를 갖추고 있는 영화다. 씻김굿의 형태를 띠고 있는 이 영화는 무녀를 등장시켜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고 그 돌아오지 못한 소녀들을 위한 위령제를 올리고 있다. 실상은 훨씬 더 끔찍한 지옥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그렇게 끌려갔던 소녀들을 극도로 배려하려는 자세를 보인다. 영화는 그래서 상징적인 장면들이 많다. 하지만 그 상징은 위안부의 실상을 이미 알고 있는 우리에게는 그 눈빛과 더럽혀진 발 얼굴에 가득한 멍 자국만으로도 커다란 아픔으로 다가온다.

 

이처럼 과거의 소녀와 현재의 소녀가 무녀를 통해 만나는 과정은 어쩌면 없는 일인 양 단절되어 버린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려는 안간힘처럼 보인다. 처음 위안부문제가 제기되고(당대에는 정신대라고 불렀지만) 그걸 피해자들이 신고하는 일조차 미친 짓으로 치부되던 시기가 있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런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려는 피해자 할머니들의 노력은 그것이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누구나 다 알아야할 실상이라는 걸 알게 해주었다.

 

이 영화를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오히려 부끄러운 일이다. 이 영화는 더 많은 사람들이 봐야 한다. 그리고 그 아픔 역사를 기억에 새기고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그 분들이 돌아올 수 있다. 그 구덩이에서 아직까지도 돌아오지 못한 소녀들이. 그리고 몸은 돌아왔어도 여전히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할머니들이.

<좋아해줘>, ‘좋아요누를 수밖에 없는 66색 매력

 

영화 <좋아해줘>의 제목은 페이스북의 좋아요에서 따왔다. SNS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좋아요의 의미는 남다르다. 그것은 의례적인 클릭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진심어린 관심의 표명이기도 하고 나아가 애정어린 시선이 되기도 한다. 물론 그 많은 마음의 표현들 중 선택할 수 있는 게 좋아요하나밖에 없다는 건 SNS가 가진 한계지만 어쨌든 디지털 시대에 우리는 이 연결고리를 통해 먼저누군가를 만나기도 한다.

 


사진출처 : 영화 <좋아해줘>

정통 로맨틱 코미디의 장르문법에 충실한 <좋아해줘>의 이야기는 저 옴니버스식 구성으로 다채로운 사랑의 양상을 담아내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러브 액추얼리>식을 따르고 있다. 세 커플이 등장하고 그들의 이야기는 병렬적으로 구성되다가 함께 겹쳐지기도 한다. 전형적인 로맨틱 코미디 장르 서사를 따르고 있지만 SNS라는 소재가 뻔하지 않은 재미를 선사한다.

 

한류 스타 노진우(유아인)과 스타작가 조경아(이미연), 천재적인 재능을 가졌지만 장애를 가진 작곡가 이수호(강하늘)와 연애고수지만 마음이 따뜻한 신입 PD 장나연(이솜), 나이들었지만 어딘지 어리바리한 스튜어디스 함주란(최지우)과 그녀와 동거하게 되는 자칭 연애전문가이자 요리사 정성찬(김주혁). 이들의 멜로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SNS를 활용한다. 노진우는 조경아의 SNS 사진을 통해 그녀에게 점점 빠져들고, 이수호와 장나연은 SNS로 밀당을 한다. 함주란은 정성찬이 코치하는 대로 SNS에 사기 사진(?)을 올려 관심있는 남자의 주목을 끌려한다.

 

SNS를 통해 벌어지는 멜로의 이야기가 가진 참신함이 존재하지만 무엇보다 이 영화에 몰입하게 만드는 건 이들 6명의 배우들이 마치 진짜 자신들의 모습인 양 보여주는 6색의 매력이다. 유아인은 역시 톱스타답게 허세로 똘똘 뭉친 캐릭터지만 미워할 수 없는 귀여움과 박력을 겸비한 매력을 선보이고, 이미연은 여전히 젊은 세대에게도 어필하는 털털한 매력을 한껏 뽐낸다. <동주>에서 확연히 느낄 수 있었던 그 진정성이 느껴지는 눈물 연기가 매력적인 강하늘과 <마담 뺑덕>과는 전혀 다른 순수하고 따뜻한 매력을 드러내는 이솜의 연기도 돋보인다. 또한 <12>과 일련의 나영석 PD 예능에서 각각 빛났던 김주혁과 최지우의 빵빵 터지는 로맨틱한 웃음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사실 이 영화에서 아쉬운 것은 개봉 시기다. 만일 이 영화가 연말 크리스마스 시즌 정도에 개봉되었다면 어땠을까. 훨씬 더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해주는 영화가 되지 않았을까. 하지만 알다시피 작년 한 해 동안(심지어 연말까지) 극장가를 달군 장르들은 사회극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있는 일종의 복수극들이었다. <베테랑>에서부터 <내부자들> 그리고 <검사외전>까지. 이런 상황이니 로맨틱 코미디 같은 가벼운 멜로물이 설 자리가 없었던 것.

 

하지만 꽤 오랫동안 극장가에서 복수와 분노로 들끓는 영화들에 조금 지쳐 있다면 <좋아해줘> 같은 마음까지 밝아지는 편안한 영화가 쉼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저 면면을 보기만 해도 좋아요를 눌러주고 싶은 배우들이 저마다의 매력을 톡톡 터트리며 그간 무거웠던 우리네 감성을 가볍게 털어주는 듯한 유쾌함이 절로 느껴지는 영화다

<동주>, 그의 부끄러움이 시대의 부끄러움으로 다가왔다

 

오랜만에 좋은 영화를 봤다. 사실 요즘 멀티플렉스에서 방영하는 영화들을 볼라치면 그 화려한 색감과 입체적인 연출 그리고 몇 초도 지나지 않아 시간과 공간을 점핑하듯 널뛰는 편집 속에서 영화를 본 것인지 롤러코스터를 탄 것인지 알 수 없어질 때가 있다. 그런데 <동주>는 정반대다. 흑백 영화이고 영화의 흐름도 유려할 정도로 천천히 움직인다. 본래 인물을 염두에 두고 그려낸 것이겠지만 동주(강하늘)의 어딘지 어눌할 정도로 느린 말투까지도 지금의 속사포로 쏟아내는 영화 속 대사와는 너무나 다르다.

 


사진출처: 영화 <동주>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정반대로 가는 영화가 마음을 뒤흔든다. 그것은 물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윤동주 시인의 청춘과 죽음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는 마치 윤동주 시인에게 후대로서의 예우를 보내듯 지극히 절제된 영상으로 그 얼굴에 비춰지는 정조와 생각들을 담아낸다. 영화는 그래서 지나칠 정도로 담담하지만 영화를 보는 이들의 가슴은 이내 먹먹해진다. 영화가 앞질러가며 우리의 눈과 귀를 자극으로 가리지 않으니, 그 정지된 듯한 화면 속에 동주의 눈빛 하나, 물기하나 없이 마른 입술, 흑백으로 처리되어 핏기는 알 수 없으나 투명해질 정도로 창백한 얼굴의 음영은 그대로 우리의 가슴을 서늘하게 파고든다.

 

강하늘의 목소리로 다시 읽혀지는 윤동주의 시는 영화를 통해 다시 생생하게 살아난다. 너무 유명해 흔해져버린 서시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같은 구절이 영화 속에서 되살아난 동주의 시선과 겹쳐지면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새삼 의미를 전해준다. 영화가 지금의 우리에게 던지는 두 가지 화두는 청춘부끄러움이다.

 

영화 속 윤동주는 그의 평생의 지기이자 경쟁자이자 사촌이었던 송몽규(박정민)와는 사뭇 다르다. 몽규가 당대 일제에 대항하던 행동파였다면 동주는 스스로 회고하듯 그의 그림자같은 존재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현실을 회피하기 위해 시로 숨어들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시란 본래 현실과 무관할 수 없다. 진실 된 시를 쓴다는 건 그가 서시를 통해 다짐하듯 한 점 부끄럼이 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시인 동주는 어쩌면 시인으로서의 자신의 삶을 걸어간 것뿐이다. 다만 부끄러운 삶을 살지 않기 위해 노력했을 뿐이다. 하지만 이것이 어찌 쉬운 일일까. 부끄럽지 않게 살아간다는 것은 부끄러운 현실과 마주쳤을 때 첨예한 갈등과 마찰을 만들어내기 마련이다. 동주가 살았던 일제 강점기는 그래서 일본의 제국주의라는 현실이 그에게 부끄러운 삶을 용납하지 않게 했을 것이다.

 

어느 시대나 청춘은 있었고, 청춘은 언제나 시대 때문에 아파왔다. 지금의 세대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준익 감독의 말처럼 <동주>는 그래서 지금 우리 시대에도 작지 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이 땅의 무고한 청춘들은 모두가 그저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길 바라고 있을 뿐이다. 다만 부끄러운 현실이 그들을 바람에 스치우게 하고 있을 뿐.

 

바람에 맞서 서 있는 나무의 그 격렬한 고통은 스스로 항변해서가 아니라 그 자리에 오롯이 서 있음으로 해서 바람의 존재를 알린다. 동주라는 존재가 그렇다. 그는 당대의 현실 앞에 오롯이 부끄럽지 않게 서 있었기 때문에 그 혹독했던 현실의 부조리를 우리 앞에 드러냈다. 그리고 동주는 그 한 세기를 건너 힘겨운 현실 앞에 괜찮다는 듯 짐짓 무표정한 얼굴로 버텨내고 있는 지금의 청춘들과 겹쳐진다. 비록 힘겨워졌지만 부끄러워 할 필요는 없다. 현실이 부끄러운 것이니. <동주>가 지금의 청춘들에게 전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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