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사외전> 강동원, 복수극 속에서 그가 빵빵 터트린 이유

 

<검사외전>은 어떻게 설 명절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무려 5백만을 훌쩍 넘기는 관객을 동원하고 있을까. 사실 이 스토리는 그리 새로운 것도 아니다. 흔하디흔한 복수극.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게 된 검사가 그 안에서부터 치밀한 계획 하에 복수를 하는 이야기다.

 


사진출처: 영화 <검사외전>

장르적 유사성이나 이야기 구조상으로 보면 <베테랑>이나 <내부자들>과 크게 다른 느낌이 아니다. 거기에는 부패한 권력이 있고 부조리한 법 정의가 있으며 무고한 희생자가 있다. 사회 현실의 답답함을 영화 속으로 끌어와 속 시원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는 것. <검사외전>은 거기에 충실한 오락영화다.

 

아무리 좋은 것도 여러 번 보게 되면 식상해지기 마련이다. 따라서 이야기 구조나 정서에 있어서 <베테랑>이나 <내부자들>과 그리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 <검사외전>은 만일 그것 만이었다면 쉽게 성공하기 어려웠을 영화다. 하지만 <검사외전>에는 강동원이 있었다. 그저 살 생긴 강동원의 팬덤을 얘기하는 게 아니다. 그가 연기하는 재욱이라는 귀여운 사기꾼 캐릭터가 <검사외전>만의 독특한 재미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재욱은 사기꾼이다. 돈 많은 여자나 후려내는 그렇고 그런 인물이지만 그가 보여주는 특유의 허세는 강동원이라는 연기자와 맞아 떨어지면서 관객들에게 시원한 웃음을 선사하는 캐릭터로 거듭난다. 잘 생긴 외모로 한껏 허세를 부리는 모습도 우습지만, 그런 그가 주먹이 무서워 찌질한 모습을 드러낼 때는 더욱 웃기다. 사기꾼이기는 하지만 어딘지 속내는 착해 보이고 어떤 면에서는 당하는 삶을 살아왔다는 점은 그가 밉지 않은 이유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캐릭터를 매력적으로 만드는 건 정치인과 검사가 맞붙는 이 거창한 복수극 속에서 그가 위치한 어딘지 방관자적인 태도다. 그는 물론 억울하게 감방에 들어온 변재욱(황정민)을 돕는 입장에 서지만 사회 정의라던가 부조리에 대한 고발 같은 거창한 목적 따위는 그에게 없다. 그저 돈이 앞서고 그것이 아니라면 살아남기 위해 뛰는 것이며, 그저 가끔씩 인간적인 정 때문에 일에 뛰어들 뿐이다.

 

재욱의 위치는 정확히 서민들의 시선을 만들어낸다. 도대체 저 사회 정의고 어쩌고 하는 거대담론이 중요한 건 알겠는데 그게 우리네 서민들에게 어떤 희망을 준 적이 있는가 하고 그는 되묻는 듯하다. 그런 거대담론과 대결하기 보다는 그저 눈앞의 삶을 잘 살아가는 것이 더 갈급한 일이라는 걸 재욱이라는 캐릭터는 대변하고 있다.

 

그러니 복수극이라는 무거운 틀 속에서, 그것도 썩은 정치와 검은 돈과 유린되는 법 정의라는 어마어마한 사건들 속에서 일종의 냉소를 날리는 듯한 재욱의 캐릭터는 그 자체로 관객들에게 웃음을 자아내게 만든다. 잔뜩 긴장한 대치 상황 속에서 그가 등장하기만 하면 빵빵 터지는 건 그래서다. 그러면서도 어딘지 정의가 이기기를 바라는 재욱의 모습에 관객들도 자연스럽게 빙의되어간다.

 

<검은 사제들>이라는 영화가 결코 대중적일 수 없으면서도 흥행에 성공한 이면에 많은 이들이 강동원의 존재감을 얘기한다. 다른 이도 아니고 강동원이 사제복을 입었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관객들의 마음이 움직였을 거라는 것이다. <검사외전>도 마찬가지다. 강동원이 과거 <전우치>에서 보여줬던 그 냉소적이면서도 허세가 가득하고 그것이 기분 좋은 유쾌함으로 느껴지게 만드는 그 면면들이 <검사외전>에서도 빛을 발한다. 흔히들 강동원은 늘 옳다고 말하지만 그것이 왜 그런가를 확인시켜주는 영화다.

<로봇소리>, 이성민의 연기 속에 담긴 희생자들의 절절한 판타지

 

영화 <로봇소리>는 우리네 영화사에서는 독특하게도 로봇이 등장하는 영화다. 위성에서 뚝 떨어져 나온 로봇. 스스로 움직이기도 하고 소리를 내기도 한다. 영화 속 설정으로는 갈수록 인지기능이 높아지고 어떤 인간적인 감정까지도 슬쩍 내보이는 그런 로봇이다.

 


사진출처: 영화 <로봇소리>

하지만 이것은 영화 속 캐릭터로서의 로봇 설정이지 실제 과학적으로 엄밀히 따져보면 허술한 면이 꽤 많은 로봇이다. 기판을 다 드러낸 채 바닷물에 빠져도 고장이 나지 않는 것도 그렇고, 거의 모든 전화 기록들을 감청하고 저장한다는 설정도 과학적으로 따지면 가능할 것 같지 않다.

 

할리우드에서 만일 이런 영화를 만들었다면 로봇에 현실감을 주려 노력했을지 모른다. 그래서 실제 과학적으로 구현될 법한 개연성을 로봇의 캐릭터에 넣으려 했을 것이다. <터미네이터>처럼 가능하면 감정까지 보여주는 그런 캐릭터. 하지만 <로봇소리>는 애초에 이러한 과학적 개연성을 추구하는 SF 영화를 지향하지 않았다. 대신 이런 능력을 가진 로봇이 있다면 하는 가정 하에 한 아버지의 절절한 부성애를 그리려 했다.

 

그러니 과학적인 허술함은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게 되었다. 살짝 살짝 들어가 있는 유머코드는 이 과학적 허술함을 웃음으로 극복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그것보다는 다른 것에 더 집중하라고 영화는 말한다. 그 다른 것은 다름 아닌 실종된 딸을 10년 간 찾아다닌 해관(이성민)이라는 아빠다.

 

여기서 중요해지는 건 해관과 로봇이 그럴 듯하게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점이다. 극의 설정 상 로봇은 갈수록 해관과 마치 친한 동료처럼 가까워지고 교감해나가야 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그토록 찾으려 애쓴 실종된 딸의 모습과 겹쳐지는 단계로까지 가야한다. 하지만 알다시피 로봇은 연기를 할 수가 없다. 그 몫은 오로지 해관을 연기하는 이성민에게 돌아간다.

 

이성민의 연기가 빛을 발하는 것은 바로 이 로봇과의 관계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 심도를 만들어가는 그 지점이다. 이성민은 처음에는 그 로봇의 낯설음에 놀랐다가 차츰 어쩌면 이 로봇이 자신의 딸을 찾게 해줄지도 모른다는 희망 속에 한없이 가까워진다. 로봇과 툭탁대기도 하고, 투덜거리며 핀잔을 주기도 하는 그 자연스러운 이성민의 모습은 그래서 이 어찌 보면 차가운 쇳덩어리에 불과한 로봇이 점점 따뜻함을 가진 존재로까지 느껴지게 만드는 이유가 된다.

 

이성민은 이 차갑기만 한 로봇에 소리라는 예쁜 이름을 지어준다. 그리고 마치 10년 전 실종되어 버린 딸에게 해주지 못한 것에 대한 부채감을 소리를 통해 풀어내보려 한다. 그가 딸이 사라진 지하철 철로에 내려가 그 차가운 철로를 매만지며 흘리는 통한의 눈물이 말해주듯, 해관의 절절한 딸에 대한 마음은 그래서 그가 소리라는 로봇을 마치 딸이나 되는 듯 보호해주고 말을 건네는 장면에 아무런 이물감을 느끼게 만들지 않는다.

 

다시금 생각해 보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감정도 없는 무생물인 로봇이 그 함께 있는 연기자의 연기를 통해 하나의 생명력을 부여받게 된 것은. 그래서 영화의 마지막에 가면 어쩔 수 없이 로봇 소리에게 감동을 느끼게 되는 건 사실 알고 보면 이성민이라는 든든한 연기자 덕분이다. 그의 연기는 차가운 로봇마저 따뜻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이성민의 연기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건 사건 사고가 유달리 많은 우리사회의 현실이다. 그 많은 사건 사고들 속에서 얼마나 많은 무고한 시민들의 생명이 사라져갔던가. 그 부채의식은 이성민의 절절함 속에서도 또 심지어 로봇이라는 조금은 과한 설정 속에서도 그 판타지를 긍정하게 만드는 이유가 된다. 저렇게라도 해서라도 희생자들의 아픔과 고통이 위로받을 수 있다면 판타지라도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일 테니.

알 수 없는 분노와 <레버넌트>에 대한 기대감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새 영화 <레버넌트-죽음에서 돌아온 자(이하 레버넌트)>에 대한 관객들의 반응이 심상찮다. 필자가 찾아간 극장에서는 외화로서는 이례적으로 자리가 없을 만큼 관객들로 가득 메워졌고 그 관객들은 상당히 기대감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개봉일 첫날 하루 동안 이 영화는 126599명을 동원하며 국내 박스오피스 정상을 차지했다.

 


사진출처: 영화 <레버넌트>

도대체 무엇이 이 이국적인 영화에 우리 관객들을 기대하게 만들었을까. 아마도 가장 큰 것은 이 영화가 갖고 있는 생존과 복수라는 두 가지 코드가 아니었을까 싶다. <레버넌트>는 서부개척시대 이전 그 혼돈의 미 대륙에서 펼쳐지는 휴 글래스(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라는 사냥꾼의 놀랍고도 경이로운 생존기를 그리고 있다.

 

죽음에서 돌아온 자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휴 글래스는 도저히 생존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한 겨울 눈보라가 몰아치는 그 곳에서 사냥을 하던 중 회색곰의 습격을 받아 온 몸이 찢겨진 채 동료들에게 버려지게 되는 것. 그 와중에 함께 사냥을 나갔던 아들 호크는 살해당하고 뒤에서는 인디언들의 추격을 받는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 어려울 것 같은 그 만신창이의 그를 일으켜 세우는 건 다름 아닌 살해당한 아들이다. 차라리 죽는 것이 더 편안해 보이는 그 상황에서는 그는 놀라운 생존력으로 조금씩 자신을 회복시켜나간다. 자연은 그에게 도전이지만 동시에 그에게 살 수 있는 무언가를 던져주고 때로는 혹독하게 자신을 몰아세우기도 하는 신 같은 존재로 다가온다.

 

동물의 내장을 생으로 뜯거나 뼈 속의 골수를 빼먹고 먹을 수 있는 풀들을 씹으며, 걷지 못하는 몸으로 기어서 다니다가 인디언을 만나 급류에 빠지고 얼어붙을 것 같은 몸을 모닥불에 녹여가며 심지어 절벽에서 떨어져도 버텨내는 그 극한의 생존기는 마치 베어 그릴스의 야생 버전을 보는 듯한 실감을 준다. 글래스를 쫓아다니며 거의 비슷한 눈높이에서 촬영된 영상들은 관객들의 몰입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여기에 꽃미남 따위는 잊어버리라고 선언하는 듯한 디카프리오의 미친 연기력은 그의 생존을 향한 절절함과 분노 같은 감정들까지 관객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준다. 하나의 산을 넘으면 또 다른 산이 나타나는 그런 끝없는 생존의 도전 속에서 글래스가 살아남는 그 과정들은 디카프리오의 온 몸을 던지는 연기로 생생하게 전해진다. 연기도 하나의 노동이라면 이 작품만한 노동 강도가 없을 정도로 힘겨운 연기들을 디카프리오는 진짜 글래스가 되어 보여준다.

 

최근의 대중문화 콘텐츠들을 보면 알 수 없는 분노같은 것들이 어른거리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이를테면 작년 1천만 관객을 동원한 <베테랑>이나, 청소년 관람 불가 등급으로 850만 관객을 넘어선 <내부자들>이 그렇다. 드라마에서도 <리멤버-아들의 전쟁> 같은 드라마는 그 분노의 코드를 가져와 16% 이상의 시청률을 내고 있다. 이 분노의 정서는 <레버넌트>라는 영화가 우리네 관객을 매혹시키는 중요한 기제가 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생존과 복수는 흔한 소재들처럼 보이지만 지금의 우리네 대중들의 마음을 가장 끌어당기는 소재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어려운 현실을 하루하루 살아가는 대중들은 저 글래스가 겪는 고통과 분노 그리고 그 죽음 같은 생존기에서 어떤 깊은 공감과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타란티노는 왜 <헤이트풀8>에 아날로그를 고집했을까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헤이트풀8>은 결코 일반 관객들에게 쉽지만은 않은 영화다. 그것은 영화가 어렵다거나 지루하다는 뜻이 아니다. 지금껏 멀티플렉스관에 상영되곤 하던 빠르게 전개되는 자극적인 영상과 속도감에 익숙한 관객들에게는 조금 낯설 수 있다는 뜻이다.

 


사진출처 : 영화 <헤이트풀8>

영화 시작에 눈 덮인 예수상에서 카메라가 천천히 빠져나오며 저 뒤편으로 펼쳐지는 새하얀 설원 위로 말들이 끄는 마차 한 대가 화면 앞까지 달려오는 롱테이크는 이 영화가 어떤 영화인지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 영화 속 카메라는 여러 공간과 시간 속 인물들을 넘나들며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상황들을 보려 하지 않는다. 대신 마치 숨은 그림 찾기라도 하듯 한 공간에 붙박아 놓고 그 안에 담겨진 내밀한 이야기들을 반전에 반전으로 드러내보여주려 한다.

 

눈보라 때문에 한 잡화점에 모이게 된 8명은 저 마다의 사연을 갖고 있다. 그들은 결코 선과 악으로 구분될 수 있는 그런 인물들이 아니다. 무언가 숨겨진 속내들이 있고, 그것은 그들의 출신이나 갖게 된 직업 그리고 나아가 피부색과도 무관하지 않다. 그래서 이처럼 저마다의 욕망들을 갖고 모이게 된 8인이 벌이는 죽고 죽이는 살벌하지만 그 타란티노 특유의 농담이 섞인 살육전은 미국의 역사와 절묘하게 중첩되는 재미도 쏠쏠하다.

 

물론 중반 이후로 접어들면 마치 <저수지의 개들>을 다시 보는 듯한 기막힌 타란티노식 심리극이 총잡이들의 사투로 풀어지는 흥미진진한 긴박감을 만들어내지만 사실 거의 1시간에 걸친 도입 부분의 인물들에 대한 길고 긴 수다와 농담들은 미국의 문화나 역사를 잘 모르는 관객들 입장에서 보면 지루하게 느껴질 법도 하다. 놀라운 건 무려 167분에 달하는 런닝타임을 갖고 있는 이 영화가 그 긴 시간 동안 보여주는 이야기의 공간은 좁은 잡화점 한 곳에 거의 집중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영화가 아날로그적인 느낌으로 다가오는 건 단지 타란티노가 이 영화를 울트라 파나비전 70(Ultra Panavision 70) 렌즈에 70mm필름으로 찍었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다. 그 고집스런 선택으로 이미 디지털화되어 있는 미국의 영화관에 영사기를 세워 돌리기 위한 막대한 투자가 이어졌다는 이야기는 놀랍기까지 하다. 하지만 이런 카메라와 필름의 질감이 만들어내는 것보다 더 아날로그적인 건 서부극이라는 장르가 그렇기도 하거니와 그것을 그저 총잡이들의 스펙터클이 아니라 그 안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심리극을 한 공간에서 보여주는 그 대목이다.

 

울트라 파나비전이라는 어찌 보면 과거의 스펙터클 영화를 찍어내던 방식을 가져오지만 결과적으로는 작은 잡화점 안에 카메라를 세워놓았다는 건 그래서 아이러니다. 아마도 타란티노에게는 울트라 파나비전도 저 <벤허>의 질감이 보여줬던 것처럼 이제는 스펙터클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아날로그적 감흥으로 다가왔던 모양이다. <헤이트풀8>은 그래서 마치 잘 짜여진 대본을 갖춘 한 편의 연극처럼 보이기도 한다.

 

타란티노의 이 옛 방식을 고집한 촬영은 그래서 지금의 멀티플렉스 영화관들과 마찰을 빚는다. 이미 디지털화되어 있고 또 어찌 보면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 3D에서 4D까지 나가며 관객들을 태울 준비가 되어 있는 멀티플렉스 영화관들과 아날로그 방식의 <헤이트풀8>은 그래서 마치 일대 대결을 벌이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단 몇 초 동안 자극에 자극을 이어가는 작금의 영화들의 시각적이고 순간적인 현란함에 옛날 방식의 어찌 보면 진짜 영화들이 그리워지는 관객이라면 이 영화는 충분히 그 감흥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타란티노식의 핏빛 농담은 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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