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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 정덕현
스파게티 웨스턴, 만주 웨스턴, 김치 웨스턴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하 놈놈놈)’의 시공간적 배경은 일제시대 만주다. 일제시대에 만주라는 공간이 함유하는 의미는 말 그대로 의미심장하다. 당대에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우리나라에서 만주는 대륙으로의 진입로이자 가능성의 공간이었다. 게다가 일제시대라는 독특한 시간적 배경은 그 가능성의 공간 위에 이질적인 문화들을 공존시킨다. 중국과 일본과 우리나라는 물론, 호전적인 북방민족들과 러시아 그리고 각종 신기한 문물들을 들고 중국을 통해 들어온 서구인들까지 공존하는 일제시대의 만주는 요즘으로 치면 퓨전문화가 살아있는 공간이었다. 게다가 법이나 규범보다는 총이 앞서는 무법천지로서의 만주는 오히려 국가 간의 분쟁이 벌어지는 상황 속에서는 자유에 가까운 공간..
B급 농담 질펀한 섹시한 폭력, ‘플래닛 테러’ 어린 시절 했던 놀이 중에는 이른바 ‘엉망진창 놀이’라는 게 있었다. 진흙탕에서 뒹굴거나, 케이크를 잔뜩 얼굴에 바르거나 사방으로 던지고, 때로는 손바닥 가득 물감을 칠하고는 커다란 도화지 위에 아무렇게나 막 칠하는 그런 놀이. 엉망진창 놀이의 묘미는 처음 손이나 몸을 더럽힐 때만 조금 꺼려지지 아예 포기하고 나면 묘한 자유의 쾌감을 만끽할 수 있다는 점이다. 피가 철철 흐르고 살점이 튀며 머리가 호박처럼 쪼개지는 ‘플래닛 테러’는 바로 그 엉망진창 놀이를 닮았다. 일단 마음의 저항감을 없애고 그 피칠갑의 영상에 몸을 맡기게 되면 그 재미에 푹 빠지게 된다는 점이 그렇다. 엉망진창 놀이에 잘 꾸며진 영상이 대수일까. 일부러 B급 영상을 표현하기 위해 고의로..
‘쿵푸 팬더’, 그 젓가락 쿵푸의 재미 술에 비틀비틀 취해 움직이면서 상대를 공격하는 ‘취권’은, 부모나 사부의 원수를 갚는 전통적인 쿵푸영화의 비장함을 거꾸로 꼬집으면서 성룡의 코미디 쿵푸 시대를 열었다. 이어서 나온 ‘사형도수’와 ‘소권괴초’는 1979년을 성룡의 해로 만들었다. 성룡의 쿵푸는 액션의 하드코어에 가까운 이소룡 쿵푸, 사무라이식 퓨전의 냄새가 났던 외팔이 시리즈 왕우의 쿵푸와는 달랐다. 이소룡처럼 타고난 강자도 아니고, 왕우처럼 비장하지도 않은 대신 성룡은 웃겼다. 배꼽 잡게 웃다보면 어느새 성룡은 모든 적들을 다 물리치고 있었다. 그 유쾌함 속에서는 전통적인 쿵푸 영화가 가진 개연성 같은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쿵푸 팬더’에 바로 그 성룡이 원숭이 역할로 목소리 출연한 것은 우연이 ..
디지털 시대의 아날로그 영웅들 1982년 극장가는 두 명의 할리우드 액션스타들로 들썩거렸다. 그 한 명은 후에 아이콘이 될 모자를 쓰고 손에는 채찍을 들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머리를 헝겊으로 질끈 동여맨 채, 손에는 달랑 대검 하나가 들려 있었다. 바로 ‘레이더스’의 인디아나 존스(해리슨 포드)와 ‘람보’의 존 람보(실베스타 스텔론)다. 그들의 무기가 말해주듯이 이들은 말 그대로 몸과 몸이 부딪치는 정통 아날로그 액션 히어로들이었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현재, 이 아날로그 액션 히어로들은 여전히 건재하다. 인디아나 존스와 람보는 ‘크리스탈 해골의 왕국’과 ‘라스트 블러드’라는 부제를 각각 달고 다시 극장가에 걸려졌다. 최근 돌아온 아날로그 액션 히어로들은 이들만이 아니다. 이미 ‘다이하드 4.0’..
‘올드보이’, ‘괴물’을 잇는 ‘추격자’의 영웅 ‘추격자’에 대한 칸의 반응이 심상찮다. 도대체 ‘아이언맨’처럼 몸에 잔뜩 무기들을 장착하고 하늘을 날아오르는 영웅도 아니고, ‘인디아나 존스’처럼 채찍 하나와 명석한 두뇌, 그리고 놀라운 순발력으로 고대의 유물들을 찾아내는 영웅도 아닌, 그저 보도방 여자를 미친 듯이 찾아 헤매는 이 중호(김윤석)라는 소시민적인 영웅의 어떤 점이 세계의 이목을 매혹시켰을까. ‘올드보이’, ‘괴물’에 이어 ‘추격자’가 내세우는 영웅은 역시 서민이다. 그것도 평범 이하거나 때론 비열하기까지 한 서민. 이 평범한 서민들은 어느 날 비범한 사건에 휘말리게 되고, 그 사건을 해결하기는커녕 점점 나락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올드보이’의 오대수(최민식)는 평범한 샐러리맨으로 살아가다..
자본에 포위된 청춘들, 혹은 우리들의 자화상 술이 잔뜩 취해 비틀대며 들어온 호스트 승우(윤계상)는 화장실 변기에 대고 토악질을 해댄다. 한 번, 두 번.... 구역질이 끄집어올린 욕망의 덩어리들이 입에서 뿜어져 나온다. 그 날 그가 마신 술은, 과거 별 볼일 없었으나 상전벽해한 부동산으로 대한민국 1%가 된 옛친구들이 준 불평부당함이 독처럼 퍼진 술이었다. 왜 누구는 갑자기 부자가 되고 왜 누구는 갑자기 날선 세상에 던져져 몸뚱어리 하나를 파는 대가로 욕망의 언저리만 핥으며 살아가야 하나. 이 구토의 장면이 ‘비스티 보이즈’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다면 아마도 그 이유는 승우가 가진 불평부당함과 조우하는 어떤 구석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비스티 보이즈’는 자본주의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일상적인 것으로..
바보와 버려진 신발, 그리고 서민들 어느 동네나 유명한 바보 한 명쯤은 있게 마련. 그 바보를 만났을 때, 당신은 어떻게 했나. 그냥 그런 존재는 없는 것처럼 지나쳐버렸던가. 너무 더러운 그 모습에 벌레 쳐다보듯 피했던가. 혹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눈앞에서 꺼지라고 했던가. 대부분은 이것들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당혹스럽게도 당신이 지나치거나 벌레 보듯 도망쳤던 바로 그 바보가 주인공이다. 신발을 닮아버린 바보, 승룡이 영화 ‘바보’의 바보, 승룡이(차태현)는 늘 맨발이다. 그 맨발을 지켜주던 낡은 신발이 있지만 칠칠치 못하게 늘 잃어버리고 만다. 구멍난 낡은 신발은 바로 바보 승룡이 자신을 닮았다. 어린 시절, 연탄가스 사고로 아버지를 잃고 자신마저 바보가 되었으며, 그런 바보에게 어..
‘추격자’의 엄중호와 ‘노인을 위한...’의 안톤 시거 최근 주목받고 있는 ‘추격자’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기묘하게도 유사한 스토리 구조를 갖고 있는 영화들이다. 거기에는 희대의 살인마가 등장하고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숨가쁘게 펼쳐진다. 즉 이 영화들은 모두 고전적인 형사물이나, 스릴러에 단골로 등장하는 ‘추격과 도망’이라는 장르적 모티브를 잘 활용하고 있다. 또한 이 영화들은 그 장르적 틀 위에서 어떤 의미망을 포착하려 한다는 점에서도 유사하다. ‘추격자’에서 추격자는 보도방을 운영하는 전직형사 엄중호(김윤석)이고 도망자는 연쇄살인범 지영민(하정우)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이것은 정반대다. 추격자는 희대의 살인마인 안톤 시거(하비에르 바르뎀)이고 도망자는 그다지 선해 보이지만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