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얼빈’의 안중근 의사로 돌아온 현빈의 어른이 되는 과정

하얼빈

영화 ‘하얼빈’은 끝없이 펼쳐진 꽁꽁 얼어붙은 강 위를 걸어나가는 안중근(현빈)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영화 ‘듄’을 촬영했던 카메라 ARRI 65에 담겨진 광활한 압도적인 광경 속에 홀로 걸어가는 안중근의 모습은 너무나 외롭고 고독하며 힘겨워 보인다. 영화 속에서 안중근은 육체적인 고통보다 더 큰 정신적인 고통을 감내하는 중이다. 신아산 전투에서 ‘만국공법’을 지켜야 한다며 풀어준 적장 때문에 동료들이 희생되는 사건을 겪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포기하고픈 마음에 얼음바닥에 눕기도 하지만, 그는 끝내 일어나 다시 그 얼음 위를 걸어나간다. 그 때 내레이션으로 흘러나오는 안중근의 목소리는 그가 무엇 때문에 포기하지 않았는가를 드러낸다. “그 순간에 깨달았습니다. 나는 죽은 동지들의 목숨을 대신하여 살고 있다는 것을.” 바로 먼저 간 동지들이 그를 계속 걷게 만들었던 거였다. 

 

‘하얼빈’에서 안중근을 연기한 현빈은 그 두만강을 건너는 장면을 몽골의 홉스골이라는 호수에서 홀로 그 한복판으로 들어가 걷고 쓰러지고 누워버리다 다시 일어나 걷는 그 일련의 과정들을 통해 찍었다고 한다. 영화만 봐도 그 촬영이 얼마나 힘겨웠을지 느껴지는데 이에 대해 ‘유퀴즈 온 더 블럭’에 나왔던 현빈은 의외의 말을 꺼내놨다. 힘들기보다는 그 “고립되어 있고 외로이 있는 상황들이” 오히려 안중근 의사를 연기하는데 도움이 됐다는 거였다. 끝이 보이지 않는 얼음 위를 한 발 한 발 끊임없이 내디뎌야 되는 그 마음이 어땠을지 그 혹독한 촬영 현장 덕분에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얼빈’ 촬영 당시, 홉스골에서 있었던 이 이야기는 현빈이라는 배우의 현재를 잘 보여준다. 한때는 비현실적으로 잘 생긴 외모 이야기가 배우로서의 이야기보다 더 많았던 현빈이었다. 하지만 그의 필모를 잘 들여다보면 그가 배우로서 얼마나 노력해왔고, 그 결과 현재의 아우라를 갖게 됐다는 걸 실감할 수 있다. 실제로 그를 스타덤에 올린 ‘내 이름은 김삼순’을 보면 당시 그가 연기했던 현진헌이라는 인물이 가진 새로움이 느껴진다. 김삼순을 직원으로 둔 까칠한 연하남 사장이다. 그 까칠한 인물이 김삼순에게 점점 빠져들고 그래서 한라산 꼭대기에서 “누구 맘대로 김희진이야! 난 삼순이가 좋다고 그랬지?”하고 말하는 장면에서 시청자들이 울컥하게 된 건 현빈의 눌러주는 연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무려 50%가 넘는 시청률을 기록한 이 작품을 통해 현빈은 폭넓은 팬층을 확보한 배우가 된다. 

 

그리고 김은숙 작가의 ‘시크릿 가든’으로 현빈은 스타 배우로서의 정점을 찍는데 이 작품 역시 쉬운 역할은 아니었다. 백화점을 소유한 재벌3세 역할이었지만 스턴트우먼인 길라임(하지원)과 몸이 바뀌게 되고 사랑에 빠지게 되는 판타지가 들어 있는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으로 백상예술대상에서 대상을 받은 현빈은 무수한 광고의 모델이 될 정도로 신드롬급의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현빈은 이러한 초절정의 인기 속에서도 그 순간에 깊숙이 빠져들지는 않았다. 그건 평소 부모님이 현빈에게 “큰 거에 빠져 심취해 있으면 작은 것의 감사함을 모를뿐더러, 그것이 없을 때의 상실감도 클 수 있다”고 말해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세상의 이목이 다 집중되던 그 순간에 현빈은 해병대에 입대했고, 그래서 백상예술대상의 대상 수상소감도 군대에서 군복을 입고 찍은 영상으로 전해졌다.

 

‘유퀴즈 온 더 블럭’에서 그는 군대가 차분하게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해줬다고 말했다. “제 일과 현빈이라는 사람을 떨어져서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이었어요. 그 시기가 굉장히 좋았던 시기였던 것 같아요. 내무반에서 TV를 보다가 다른 사람들의 작품이 나오면 그게 어느 순간 하고 싶은 거예요. 내 직업을 내가 이만큼 좋아하고 있고 이걸 놓지 않고 있구나 하는 걸 새삼 느끼게 된 좋은 시간이었죠.” 

 

이 시간들이 자양분이 되어 현빈은 전역 후 보다 성숙한 배우로서의 면모들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영화 ‘역린’으로 첫 사극을 찍었는데, 단 한 줄로 ‘세밀한 등 근육’이라고 써 있는 그 몸을 만들기 위해 헬스가 아닌 맨 몸 운동으로 잔근육을 만들 정도로 그는 연기에 진심이었다. 드라마 ‘하이드 지킬, 나’에서는 이중인격을 가진 인물을 연기했고, 영화 ‘공조’에서는 임무를 받고 남한으로 내려와 남한 형사와 공조 수사를 진행하는 북한 형사를 연기했다. ‘협상’에서는 처음으로 악역에 도전했고, 드라마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에서는 실제 게임 속으로 들어가는 판타지 설정의 드라마에 그의 연기가 현실감을 부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사랑의 불시착’으로 또 한 번의 신드롬을 불러 일으키며 함께 연기했던 손예진과 세기의 결혼에 골인해 가정을 이뤘다. 

 

이러한 일련의 성장 과정들이 있어서일까. ‘하얼빈’으로 돌아온 현빈은 어딘가 달라보인다. 안중근이라는 인물의 내면을 보다 깊이있게 담아내고 있는데, 그건 그 서른 즈음에 죽을 걸 알면서도 그 길을 외면하지 않고 걸어간 안중근을 이해하려한 그의 노력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또한 ‘하얼빈’에서 현빈은 다른 배우들과의 앙상블에 있어서도 도드라진 면모를 보인다. 물론 그가 주인공이지만 함께 독립 투쟁을 한 다른 인물들이 똑같이 주목될 수 있게 해준다. 그래서 ‘하얼빈’은 안중근 한 사람만이 아니라 우덕순(박정민), 이창섭(이동욱), 김상현(조우진), 공부인(전여빈) 같은 여러 독립군의 면면이 살아있는 작품이 됐다. 

 

“내가 한발짝 뒤로 물러나면서 어른이 되는 것 같다.” ‘유퀴즈 온 더 블럭’에서 현빈은 가정을 꾸린 후의 변화를 그렇게 말했다. 자신이 점점 뒤로 가면서 이 상황들을 책임져가는 것. 내 중심에서 내가 중심이 아닌 사람이 점점 되어가는 것이 바로 ‘어른’이 되어가는 것이라는 이야기다. 아마도 현빈의 연기에서 느껴지는 깊이는 여기서 나오는 게 아닐까. 한발짝 뒤로 물러남으로써 생겨나는 여유는 깊이를 만든다. 연기에 있어서나 삶에 있어서나 현빈이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글:국방일보, 사진:영화'하얼빈')

‘나의 완벽한 비서’의 이준혁이 자극하는 판타지

나의 완벽한 비서

‘살림’이나 ‘비서’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우리는 저도 모르게 여성을 떠올리는 경향이 있다. 가부장적 시대를 거치며 오래도록 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을 우리도 모르게 갖게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이러한 성 역할 고정관념은 깨지고 있다. 드라마만 봐도 그렇다. ‘소년심판’ 같은 드라마에 등장하는 여성 판사가 그렇고, ‘낭만닥터 김사부’에 등장하는 남성 간호사처럼 한때 판사하면 남성을 간호사 하면 여성을 떠올리던 고정관념을 깨는 인물들이 최근에는 일상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나의 완벽한 비서’는 이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드라마다. 제목에 등장하는 ‘비서’는 다름 아닌 이준혁이 역할을 맡은 유은호라는 남성이니 말이다. 

 

그런데 이 유은호가 강지윤(한지민)이라는 피플즈라는 헤드헌터 회사 대표의 비서로 스카웃되는 이유가 흥미롭다. 그건 싱글대디로 딸을 홀로 키우며 너무나 깔끔하게 육아와 가사를 하고 있는 그가 눈에 띠었기 때문이다. 완벽하게 정리정돈되어 있는 집안 구석구석과 꼼꼼하게 그 날 해야할 일들이 적혀 붙여져 있는 스케줄표를 본 강지윤의 친구이자 피플즈의 이사인 서미애(이상희)가 유은호가 비서로서 적임자라 판단하는 것. ‘살림’이라는 집안일을 잘하는 그 능력이 ‘비서’라는 직장 내의 능력이 되는 판타지를 이 작품은 건드린다. 아마도 육아 때문에 경력단절을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여성들이라면 유은호의 재취업(?)을 보며 어떤 통쾌함을 느끼지 않았을까. 이 인물이 일과 가정을 모두 쟁취하고픈 여성들에게 판타지를 주는 이유다. 

 

그런데 이준혁을 보면 일에 있어서도 또 살림에 있어서도 뭐든 척척 잘 해내는 유은호를 닮았다. 어떤 역할도 잘 살려내는 배우라는 점에서다. ‘나의 완벽한 비서’에서만 봐도 그렇다. 유은호는 회사에서 잘 나가는 능력있는 직장인이었지만 홀로지내며 마음에 빈 자리가 늘어가는 딸을 위해 육아휴직을 선택하는 인물이다. 그래서 가사일도 척척해내는 살림꾼이 된다. 능력있는 직장인과 살림 잘하는 살림꾼의 역할이 마치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생각해온 고정관념의 틀에서는 이 두 가지가 조화를 이루는 게 어려울 것처럼 보이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준혁은 자상함과 배려심이 일터의 능력으로도 발휘될 수 있다는 걸 이 두 역할을 하나로 묶어냄으로써 보여준다. 게다가 이 인물은 이제 강지윤이라는 회사 대표와의 사적 멜로로 나아갈 것으로 보인다. 회사에서 대표와 비서라는 위계 관계로 구분되지만, 그걸 뛰어넘는 사적 관계 또한 그려낼 거라는 것이다. ‘나의 완벽한 비서’에서 그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주는 것처럼 이준혁이라는 배우는 어떤 위치에 어떤 역할로 던져 놓아도 마치 그것이 진짜 그 사람의 모습인 것처럼 연기해내는 인물이다. 이른바 ‘연기 살림꾼’이라고나 할까. 

 

이준혁의 이러한 다재다능한 면이 도드라졌던 작품은 다름 아닌 ‘비밀의 숲’이었다. 여기서 그가 맡은 서동재라는 검사는 돈 밝히는 ‘스폰 검사’로서 사실상 악역이었다. 하지만 시청자들은 욕망에 이끌리며 왔다 갔다 하는 이 서동재라는 인물에 점점 애정을 갖게 됐다. 선과 악으로 단순히 나뉠 수 없는 ‘인간적인 매력’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이처럼 악역조차 애정을 갖게 만든 것이 가능해진 건 역시 이 복합적인 인물을 설득력 있게 연기해낸 이준혁의 공이 컸다. 그래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서동재라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는 스핀오프 ‘좋거나 나쁜 동재’라는 작품이 제작된 것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인물은 선과 악을 오가는 매력을 드러낸다. 그러면서 궁극적으로는 사건을 해결해가는 과정을 그리지만, 동시에 지극히 현실적인 욕망을 추구하는 그 모습 또한 끝까지 유지해 나간다. 어찌 쉬운 역할이라 할 수 있을까. 

 

이준혁의 다재다능함과 선과 악을 넘나드는 입체적인 이미지는 그가 걸어온 필모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를 본격적으로 시청자들에게 알린 건 가족드라마를 통해서였다. 문영남 작가의 ‘조강지처클럽’에서 한선수 역할을 연기했고, 또 ‘수상한 삼형제’에서는 김이상이라는 인물을 연기했다. 두 작품 모두 당대의 드라마 트렌드였던 가족드라마였다. 하지만 이준혁은 이러한 가족드라마 속 평범한 인물 연기에 머무르지 않고 ‘적도의 남자’의 이장일 같은 강렬한 악역에 도전하기도 했다. 또 ‘맨몸의 소방관’ 같은 전형적인 영웅 서사의 인물을 연기하기도 했고, ‘60일, 지정생존자’ 같은 작품에서는 선인지 악인지 알 수 없는 미스테리한 위치에 서 있는 인물을 특유의 선악을 넘나드는 이미지로 소화해내기도 했다. 가족드라마 같은 생활연기로 시작했지만 ‘비밀의 숲’을 넘어 ‘비질란테’, ‘다크홀’ 같은 장르물의 다소 판타지를 자극하는 연기까지 자신의 영역을 넓혀왔다. 또 ‘범죄도시3’에서는 메인 빌런인 주성철 역할을 맡아 20킬로에 가까운 벌크업으로 완전히 다른 이미지를 그려낸 바 있다.  

 

대중들은 이준혁을 진중함과 비열함 그리고 다정함을 오가는 배우라고 일컫는다. 입을 꾹 다물고 있을 때는 특유의 그 진중함이 묻어나지만, 때론 경박하게까지 보이는 수다쟁이가 되기도 하고 때론 그 표정 뒤에 숨겨진 모습으로 비열함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러면서 눈빛을 부드럽게 만들면 금세 한없이 다정한 연인의 얼굴로 변신한다. ‘나의 완벽한 비서’는 바로 그 다정함을 무기로 보는 이들을 무장해제하게 만드는 그의 얼굴을 드러낸다. 

 

‘살림’은 본래 불교용어에서 나온 말이지만 ‘집안의 경제나 생활 등을 맡아 운영, 관리하는 일’이라는 뜻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살린다’는 의미 또한 부가되어 있다. 사실 우리의 일상은 내버려두면 망가지거나 어지럽혀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너무 일상적이어서 잘 보이지 않지만 누군가의 살림이야말로 우리의 일상을 살리는 일이 된다. 이건 연기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아주 슬쩍 지나가는 역할이라도 이를 살려내기 위한 노력들이 뭉쳐질 때, 연기의 하모니가 힘을 발휘하고 이건 작품의 성공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살림’은 이제 고정된 성 역할의 의미에서 벗어나 누구나 추구해야할 가치가 아닐까 싶다. 어떤 역할이든 살려내는 연기 살림꾼 이준혁처럼. (글:국방일보, 사진:SBS)

‘오징어 게임2’로 돌아온 이정재, 돌고 돌아 서민의 편으로

오징어 게임2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 잘 들으세요. 이건 그냥 게임이 아닙니다. 게임을 하다 걸리면 죽습니다!”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2’에서 다시 그 죽음의 게임으로 돌아와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하게 된 기훈(이정재)은 사람들 앞에 나서서 그렇게 외친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의 말을 믿지 않는다. 미쳤다고 한다. 하긴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하다 죽을 수 있다는 말을 그 누가 믿겠는가. 하지만 기훈은 안다. 이미 한 번 그 잔혹한 게임을 치렀고, 그 곳에 참가했던 456명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1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알고 있다. 저 멀리 술래처럼 서 있는 영희 인형의 눈이 사람들의 움직임을 포착하고 있고, 움직임이 걸린 이들은 사정없이 사살될 거라는 걸. 한 번 겪어 봤기 때문에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안다는 것. 그것은 기훈이 이들을 피니시 라인까지 이끌어 살아남게 하려는 이유다. 

 

이 장면은 영웅의 탄생이 대단한 운명이나 사명감 같은 거창한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 기훈이 나서게 된 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죽어나갈 거라는 걸 알고 있어서다. 456명이 참여해 1인당 1억씩 배정된 목숨값을 사람들이 죽어나갈 때마다 적립해 최후의 1인이 456억을 독식하는 게임이 오징어 게임이 아닌가. 사실 이건 ‘오징어 게임’ 시즌1의 맨 마지막에서 미국으로 떠나려던 기훈이 발길을 돌리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떠나려던 기훈은 인천공항 지하철역에서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딱지남(공유)’에게 뺨을 얻어 맞아가며 딱지치기를 하는 사내를 보게 된다. 그건 이 잔혹한 게임이 여전히 계속 벌어지고 있다는 걸 말해준다. 어디선가 저마다 절박한 이유를 가진 이들이 모일 것이고, 그들 중 마지막 단 한 사람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처참하게 살해될 거라는 걸 알고 있는 그는 차마 그들을 외면하지 못한다. 

 

‘오징어 게임2’는 바로 그렇게 돌아온 기훈이 어떻게든 게임을 만든 이들을 찾아내 끝장내려는 과정을 담았다. 그런데 ‘오징어 게임’에서 이 평범 이하의 삶을 살다 456명 중 1인이라는 우승자가 되는 기훈의 모습에서는 이 캐릭터를 연기한 이정재가 겹쳐지는 면이 있다. 시작부터 ‘모래시계’로 한 순간에 스타덤에 올랐고, 영화 ‘젊은 남자’, ‘태양은 없다’, ‘하녀’, ‘도둑들’, ‘신세계’ 등등 하는 작품마다 승승장구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정재는 늘 ‘연기력’에 대한 의문부호를 달고 다니던 배우였다. ‘모래시계’에서 과묵하게 눈빛으로 순애보를 보여주는 보디가드 백재희로 주목받게 된 것도 실상은 연기력이 부족해서 대사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태양은 없다’에서 정우성과 함께 한 연기가 인상적이었지만 대중들은 그것 또한 이 두 배우의 투샷이 주는 비주얼 효과와 김성수 감독 특유의 스타일리시한 영상 연출 때문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실제로 이정재는 배우가 아닌 모델로 시작했다. 그러다 인상적인 초콜릿 광고로 인해 ‘모래시계’ 재희 역할에 발탁됐다. 워낙 좋은 비주얼에 조각같은 몸매를 갖고 있어 일약 스타덤에 올랐지만 그가 배우로서 온전히 성장할 수 있었던 건 다양한 작품에 도전해오면서다. ‘하녀’의 성적 판타지를 자극하지만 무책임한 주인집 남자를 연기했고, ‘도둑들’에서는 비열한 뽀빠이 역할을 소화했다. 또 ‘신세계’에서는 경찰과 조직 사이에서 줄을 타는 언더커버 역할로 아슬아슬하면서도 위태로운 인물을 자기 색깔에 맞게 연기해냈다는 평가를 얻기도 했다. 하지만 배우로서 이정재의 연기에 대한 호평이 쏟아진 건 영화 ‘관상’에서 수양대군 역할을 통해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내면서다. 극 중에서 ‘이리’의 상으로 소개되는 수양대군의 모습을 연기하기 위해 동물 다큐까지 참고해가며 연구한 이정재는 이 역할을 통해 그토록 오래 따라다니던 ‘연기력 논란’의 꼬리표를 뗄 수 있었다. 그 후 ‘암살’에서 희대의 친일파 역할을 소화한 이정재는 이제 그토록 청춘스타라는 이미지와 더불어 따라다니던 연기력에 대한 의구심을 완전히 지워버리고 배우로서 대중들 앞에 서게 됐다. 

 

그를 글로벌한 배우로 등극시킨 ‘오징어 게임’은 이러한 일련의 연기 경험들이 쌓여 만들어진 결과였다. ‘오징어 게임’의 기훈은 그의 빛나는 비주얼을 앞세우는 그런 역할들과는 거리가 있는 인물이었다. 밑바닥 인생이고 그래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잔혹한 게임에 저도 모르게 뛰어들었다가 그 치열한 과정을 거쳐 최후의 1인이 되는 인물이다. ‘오징어 게임’에서 이정재가 한 연기 중 가장 도드라진 장면이 달고나 미션에서 혓바닥으로 달고나를 핥는 장면이라는 외신들의 평가는 그의 연기가 이제 비주얼이나 멋진 이미지와는 상관없는 배역에 대한 깊은 몰입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걸 말해준다. 그렇게 한 때 연기력에 대한 의구심이 늘 따라다니던 이 배우는 ‘오징어 게임’으로 미국 배우조합상, 크리틱스 초이스 시상식, 제74회 프라임타임 에미상 등 미국 메이저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또 그는 디즈니+ ‘스타워즈’ 시리즈의 새 드라마인 ‘애콜라이트’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어찌 보면 국내 무수한 배우들 중 단연 도드라지는 한국배우로서의 꼭대기에 서게 된 것이다. 

 

이정재는 앞서도 말했듯 시작부터 반짝반짝 빛나는 청춘 스타였다. 워낙 도드라지는 비주얼을 갖고 있어 묵묵히 대사없이 눈빛만 보내도 대중들의 시선을 잡아끌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배우로서는 족쇄나 다름 없는 것이었다. 그가 꽤 오랜 세월을 거쳐 그 족쇄를 풀 수 있었던 건 어찌 보면 그 높은 위치에 서 있던 청춘 스타의 이미지를 벗어버리고 밑바닥으로 끊임없이 떨어지면서 서민들 가까이로 다가가려는 노력 때문이었다. 그는 비열한 역할은 물론이고 악역, 친일파 등 자신의 비주얼과는 상관없는 역할들 속에 뛰어들었다. 그 과정을 통해 얻게 된 게 ‘오징어 게임’의 기훈이 가진 서민의 얼굴이었다. ‘오징어 게임2’는 그렇게 지독한 생존을 통과한 그가 영웅적인 선택을 하는 모습들을 담았다. 저 높은 별이 아닌 바로 옆에서 우리와 함께 하며 그 아픔을 공감하는 영웅. 지난한 과정을 거쳐 글로벌 배우가 된 이정재에게서는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바로 그 서민 영웅의 페르소나가 어른거린다. (글:국방일보, 사진:넷플릭스)

빛과 어둠의 대비를 아는 배우, 주지훈의 여러 가지 얼굴

조명가게

“그 아저씨가 세상 무뚝뚝한데 은근 따뜻하지.” 디즈니+ 드라마 ‘조명가게’에서 간호사 영지(박보영)는 원영(주지훈)에 대해 그렇게 말한다. 원영은 암흑뿐인 사후세계에 유일하게 빛을 밝히고 있는 조명가게 주인이다. 빛이 너무 눈부시다는 핑계로 늘 선그라스를 끼고 있지만 사실 그건 의식을 잃고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배회하는 사람들과는 다른 자신(고양이 같은 눈빛을 가졌다)을 숨기기 위해서다. 하지만 선글라스의 용도는 정체를 숨기는 것만이 아니다. 눈빛으로 드러날 수 있는 속내를 숨기는 것도 그 중요한 용도다. 원영은 그 곳이 사후세계인지도 모른 채 조명가게를 찾는 이들에게 자신의 정체도 또 속내도 숨기려 한다. 그런데 그건 그들을 겁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이 곳에 대한 기억을 갖지 않게 하려는 노력이다. 의식을 잃고 사후세계에 발을 디뎠지만 다시 의식을 되찾고 돌아갔을 때 기억의 혼동을 일으키지 않게 하려는 배려다. 영지가 원영에 대해 무뚝뚝한데 은근 따뜻하다고 말한 건 그런 이유다. 

 

무뚝뚝한데 은근 따뜻한 이 배역에 주지훈만한 연기자는 없어 보인다. 주지훈은 지금껏 해왔던 연기들 속에서 무표정을 통해 표정을 극대화하는 연기를 줄곧 선보여온 배우다. 예를 들어 ‘마왕’ 같은 작품에서는 복수를 꿈꾸는 오승하라는 인물이 시종일관 무표정으로 등장하는데, 그래서 그가 가끔 살짝 입꼬리를 들어올리며 미소를 지을 때면 마치 악마 같은 섬뜩한 느낌을 자아낸다. ‘킹덤’에서도 왕세자지만 후궁에서 난 서자로서 계비의 위협을 받으며 각성하는 그 변화 과정을 주지훈은 무표정에서 시작해 생존하기 위해 점점 일그러져가는 얼굴을 통해 실감나게 보여준 바 있다. ‘지배종’ 같은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폭발사고로 병사들을 잃고 사건을 추적하는 우채운이라는 인물을 속내를 알 수 없는 특유의 무표정으로 연기해냄으로써 그 속내가 드러날 때의 반전효과를 극대화시켰다. 

 

이런 면모는 멜로 연기에도 똑같이 드러난다. 최근 방영되고 있는 ‘사랑은 외나무다리에서’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한국형 로맨틱 코미디 같은 설정을 가진 드라마다. 석지원(주지훈)과 윤지원(정유미)은 그 집안이 원수지간이다. 두 사람 역시 학창시절부터 티격태격하며 자라왔고 그러다 서로 좋아하게 됐지만 사소한 오해로 관계가 틀어지면서 애증이 싹텄다. 그리고 18년이란 세월이 흘러 다시 이사장과 체육교사의 관계로 다시 만나면서 그 관계가 이어진다. 어찌 보면 뻔한 구도지만, 이를 흥미롭게 만드는 건 석지원과 윤지원의 속내를 알 수 없는 말과 행동들이다. “나랑 연애합시다. 라일락 꽃 피면.” 이런 내기를 석지원이 툭 던지는 내면에는 진짜 다시 윤지원과 연애 하고픈 마음이 숨겨져 있지만, 그는 겉으로는 마치 내기에서 윤지원을 이기고픈 마음이 앞서고 있는 것처럼 위장한다. 그렇게 속내를 숨기다가 결국 석지원은 숨길 수 없는 감정을 윤지원에게 고백한다. “우리 그만합시다. 난 안되겠어. 그러니까 이딴 내기 집어치우고 나랑 진짜 연애하자. 윤지원.” 반듯한 모습으로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무표정을 하고 있던 이가 어느 순간 감정을 툭 드러내며 표정을 보여줄 때 전해지는 효과를 주지훈만큼 잘 알고 있는 배우는 없다. 

 

‘하이에나’ 같은 법정물에서도 주지훈은 윤희재라는 변호사 역할로 경쟁 관계에 있는 변호사 정금자(김혜수)와 대립 구도를 만들며 매번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 대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그는 스펙 없이 맨몸으로 부딪쳐 살아남으려 안간힘을 쓰는 정금자에게 서서히 마음이 움직이고 그래서 그녀의 편에 서게 되는 새로운 선택을 하게 된다. 여기서도 무표정에서 시작해 으르렁거리다가 멜로의 눈으로 바뀌어가는 주지훈의 얼굴이 효과를 발휘한다. 

 

이러한 무표정이 오히려 효과를 만들어내는 표정 연기의 반전은 여러모로 모델로 시작한 그의 필모와 무관하지 않을 듯 싶다. 옷을 강조해야 하는 모델들의 경우, 얼굴 표정은 최대한 절제하는 게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간간히 드러내는 표정은 오히려 그 전달하는 감정을 더 극대화시킨다는 걸 모델에서 연기자로 넘어오며 그는 경험적으로 알게 된 것 같다. 

 

주지훈의 이런 연기적 면모는 한 작품 안에서만 보이는 게 아니다. 일련의 작품 선택 과정을 보면 익숙한 얼굴이 전혀 다른 배역을 차기작으로 선택함으로써 그 반전효과를 내곤 했다는 걸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궁’으로 주목받으며 주로 멜로 연기를 해왔던 주지훈은 ‘마왕’ 같은 스릴러로 진지하고 무거운 얼굴을 보여줬다. 또 ‘신과 함께’ 같은 영화를 통해서 너무나 가볍게 여겨지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을 보여주더니 ‘암수살인’에서는 살벌한 희대의 살인마를 연기했다. 선과 악, 가벼움과 무거움을 오가는 배역 선택은 그래서 매번 ‘같은 배우 맞아’라는 반응들을 만들어내곤 했다.  

 

‘조명가게’는 그래서 주지훈이라는 배우의 특징을 가장 잘 담아낸 작품으로 보인다. 그건 어둠과 빛의 대비를 세계관으로 갖고 있는 ‘조명가게’에서 원영 역시 어둠 같은 무뚝뚝함을 가장하고 있지만 사실은 빛의 따뜻함을 숨기고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오래 전 아파트 붕괴 사고로 딸을 두고 먼저 세상을 떠났던 이 인물은 딸을 살리는 대가로 사후세계의 조명가게를 맡는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흐른 후 그 조명가게를 찾아온 딸을 우연히 만나는 순간, 드디어 선글라스로 가렸던 그의 감정이 폭발한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배회하는 이들을 위해 조명가게를 맡아온 그의 마음 깊숙한 곳에는 마치 그 곳을 찾는 이들을 딸처럼 바라보는 안타까움과 그리움이 숨겨져 있었다는 게 그 순간 드러난다.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살아가는 데 익숙하다. 하지만 그렇게 무표정이라고 해도 그 안에는 다양한 감정들이 존재한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마치 기계처럼 단조롭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느 순간 감정이 밖으로 드러날 때 생겨나는 인간의 증명. 그건 어쩌면 건조한 현대사회를 촉촉하게 해주는 희망 같은 것이 아닐까. 주지훈의 연기는 바로 그걸 증명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어둠 속에 오히려 더 빛나는 백열전구가 주는 희망을.(글:국방일보, 사진:디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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