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씨부인전’, 임지연이 보여주는 사람의 진가

옥씨부인전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불태(百戰不殆)다.” 손자는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고 한 바 있다. 그런데 이 말은 병법에만 적용되는 말이 아니다. 손자병법이 사회생활에서의 처세술이면서 동시에 삶의 철학으로도 읽히듯이, 이 말은 우리가 자신의 삶을 어떻게 대해야 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는가에 대한 방법론으로도 읽힌다. 그런데 이 말에서 우리는 흔히 ‘상대를 안다는 것’에 더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즉 대적해야할 상대를 분석하는 일이 승리의 첫걸음이라 여기곤 한다. 그런데 상대에 대한 분석만큼 중요한 것이 ‘나를 아는 것’이다. 진짜 자신의 온전한 모습을 알지 못한다면 엉뚱한 길에서 시간만 낭비할 수 있고, 나아가 진짜 자신 안에 있는 잠재력을 발휘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배우 임지연이 최근 몇 년 간 성장해온 과정을 보면 바로 이 잠재력이 느껴진다. 온전한 자신을 찾아냄으로써 거기서 비롯되어 무한정 튀어나오는 잠재력이.

 

사실 임지연이라는 배우를 대중들 앞에 각인시킨 작품은 영화 ‘인간중독’이었다. 하지만 이 작품이 임지연의 진가를 끄집어낸 작품은 아니다. 베트남전이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남편의 상사와 불륜을 저지르는 인물을 연기하면서 임지연은 가녀리면서도 때론 대담한 모습을 그려냈지만 그건 그녀의 진가를 오히려 가려버렸다. 안타깝게도 이 작품과 더불어 ‘간신’에서도 관습적인 역할이 주어지면서 그녀의 이미지는 고정되고 한정되는 듯 보였다. 드라마를 통해 임지연은 그 이미지를 벗어버리려 애썼다. ‘상류사회’, ‘대박’, ‘닥터스’, ‘불어라 미풍아’, ‘웰컴2라이프’, ‘장미맨션’ 등등 다양한 작품에서 액션은 물론이고 코미디, 사극, 청춘물, 스릴러까지 도전했지만 이 초반의 굳어진 이미지의 변신은 결코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 끝없는 노력과 도전은 ‘더 글로리’의 박연진을 만나면서 결국 성취로 돌아왔다. 학교폭력을 스스럼없이 저지르면서도 아무런 죄의식조차 느끼지 못하는 이 희대의 악역은 드디어 과거의 그 관습적인 이미지를 깨버리고 임지연의 연기자로서의 잠재력을 끄집어냈다. 물론 ‘더 글로리’의 주인공은 학교폭력의 피해자인 문동은(송혜교)이고 그래서 그녀가 하나하나 실행해가는 복수극이 이 작품의 매력이지만, 그 동력을 만든 건 다름 아닌 박연진이라는 악역 캐릭터였다. 그녀를 미워하면 할수록 이 작품의 복수극은 시원해졌고, 그건 또한 임지연에게 덧씌워져 있던 껍질을 벗겨주었다. 대중들은 송혜교만큼 임지연에게도 열광했다. 

 

그리고 이어진 ‘마당이 있는 집’은 드디어 잠재력이 열린 임지연의 가능성들이 생각보다 훨씬 넓다는 걸 보여줬다. 이 작품을 통해 임지연이 만난 추상은이라는 인물은 ‘더 글로리’의 박연진과는 정반대에 서 있는 인물이었다. 박연진이 가해자라면 추상은은 피해자이고, 박연진이 분노를 불러일으켰다면 추상은은 연민을 불러일으켰다. 지독한 폭력 앞에 덜덜 떨던 이 인물이 드디어 벼랑 끝에서 ‘선택’을 하고 실행을 한 후 빗속에서 덜덜 떨며 보여주는 장면은 거의 접신한 듯한 몰입감을 만들었다. 특히 그 후 이 인물이 보여주는 먹방 장면은 심지어 삶의 허기까지 느껴지는 명장면으로 남았다. 

 

임지연의 이런 행보를 염두에 두고 보면 ‘옥씨부인전’이 작품이 새삼스럽게 보인다. 구덕이라는 노비가 도망쳐 우연히 만난 옥태영이라는 양반집 아씨의 삶을 대신 살게 된다는 파격적인 내용을 가진 이 사극에서, 임지연은 바로 그 구덕이였다가 옥태영이 된 인물을 연기했다. 노비와 양반으로 나뉘는 반상의 법도가 엄연한 조선사회에서 그 정체를 숨긴 채 양반행세를 하며 살아가는 인물의 생존기를 그린 작품이지만, 이 작품은 또한 연기와 삶에 대한 통찰이 엿보이는 작품이기도 하다. 노비의 삶에서 벗어나 양반집 아씨가 된 옥태영은 그 가짜 신분의 삶에서 오히려 그 진가를 드러낸다.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항변할 기회조차 없는 민초들을 대변하는 외지부(당대의 변호인) 일을 하게 되면서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진짜 양반집 아씨로 살아왔다면 알 수 없었을 민초들의 삶을 옥태영이 속속들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아이러니를 담고 있다. 진짜가 아닌 가짜의 삶을 선택한 이가 바로 거기서 자신의 진가를 발휘하게 된다는 아이러니다. 

여기서 들여다 봐야 할 것은 과연 무엇이 진짜이고 가짜인가 하는 점이다. 구덕이라는 노비로서의 삶은 스스로 선택한 삶이 아니다. 그저 주어진 운명에 의해(외부의 힘에 의해) 정해진 삶일 뿐이다. 하지만 옥태영으로서의 삶은 자신이 선택한 삶이다. 그래서 구덕이가 선택하고 하나하나 만들어가는 옥태영의 삶은 진짜 옥태영의 그것과는 다른 것이다. 그런 점에서 구덕이는 옥태영이라는 자신이 선택한 제2의 삶을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다. 

 

‘옥씨부인전’이 보여주는 구덕이가 옥태영이라는 인물이 되어 제2의 삶을 살아가는 과정은 연기자들이 역할을 맡아 연기하는 과정과 그리 다르지 않다. 임지연은 박연진도 아니고 추상은도 아니며 그렇다고 구덕이도 또 옥태영도 아니다. 하지만 그 역할을 맡아 임지연은 자신의 안에 숨겨져 있는 박연진, 추상은, 구덕이, 옥태영을 끄집어낸다. 그것이 바로 연기의 세계다. 그래서 어떤 경우는 특정한 역할이 그 연기자의 진짜 잠재력을 꺼내주기도 한다. 임지연이 소화했던 박연진, 추상은 같은 역할들이 그것이다. 

 

결국 삶에서 중요한 건 진정성이 아닐까. 온전히 나를 깊게 들여다보지 않으면, 그저 주어진대로 누군가 원하는대로 휘둘리는 삶을 살게 될 수도 있다. 보다 나은 삶은 그래서 먼저 진짜 나를 아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옥씨부인전’에서 구덕이가 온전히 옥태영이 되어서야 비로소 자신의 진가를 찾아낸 것처럼. 또 ‘더 글로리’를 만난 후 진가를 알게 된 임지연처럼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글:국방일보, 사진:JTBC)

‘조명가게’로 또다시 간호사로 돌아온 박보영

조명가게

“저도 예전에 큰 사고를 당하고 의식불명을 겪었었거든요. 그 때 의사선생님이 저희 엄마한테도 같은 말씀을 하셨었대요. ‘환자의 의지가 중요하다.’ 우리 엄마도 그게 무슨 말인지 몰라서 속상하셨대요. 방법이 없구나 싶으셨대요. 하지만 전 다시 살았어요. 저도 제가 어떻게 의식을 되찾았는지 모르겠어요. 저희 엄마는 그저 매일매일 기도했대요. 저한테 의지를 불어넣고 싶으셨대요. 그래서 생각해요. 어쩌면 나 혼자만의 의지는 아니지 않았을까.” 

 

디즈니+ ‘조명가게’에서 영지(박보영)는 의식이 없는 환자 때문에 절망하는 부모에게 그 아픔을 공감하며 위로의 말을 건넨다. 그녀 역시 사고로 의식 불명이 되었었지만 살아난 경험이 있었다는 것. 하지만 자신이 어떻게 의식을 되찾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매일매일 기도했던 엄마 같은 이들의 의지들이 보태져 생겨난 기적같은 일이었을 거라며 절망하는 환자의 부모를 토닥인다. 

 

이 장면은 강풀 작가의 웹툰을 원작으로 하는 ‘조명가게’라는 독특한 작품의 메시지이자 세계관을 잘 보여준다. 이 작품은 의식을 잃고 어둠만 가득한 무의식의 골목길을 헤매는 이들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 낯선 곳은 마치 귀신들이 출몰하는 곳처럼 그려지지만, 드라마는 그 곳이 바로 의식을 잃고 사경을 헤매는 환자들의 무의식 속이었다는 걸 드러낸다. 그런데 그 무의식은 실제 현실에 영향을 받는다. 예를 들어 이들이 누워 있는 중환자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소리는 환자들의 귓속으로 파고들어, 무의식 속 빛 하나 없는 무서운 골목길을 통과할 때 들려오는 노래가 된다. 어둠만 가득한 무의식의 골목길에 환한 빛을 비추는 조명가게. 그건 강풀 작가가 사고로 중환자가 되어 사경을 헤매는 이들과 그 가족들에게 전하는 따뜻한 위로이나 희망의 메시지다. 환자의 의지는 물론이고 환자의 가족이나 지인들이 깨어나기를 애타게 기도하는 그 마음들이 또 다른 의지가 되어 조명가게처럼 환자들에게 빛이 되어줄 것이고, 그것이 그들을 깨어나게 하는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는 의미다. 

 

그래서 간호사 영지는 사실상 조명가게 그 자체나 마찬가지 같은 존재다. 어두운 터널 속에 갇힌 환자와 가족들에게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로 따뜻한 빛을 전해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박보영이 바로 그 영지 역할을 맡은 게 우연처럼 보이지 않는다. 악역이든 심지어 19금 역할이든 뭘 해도 ‘뽀블리(박보영+러블리)’라 불리는 배우가 아닌가. 박보영은 영화 ‘과속스캔들’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후, ‘늑대소년’이나 드라마 ‘오 나의 귀신님’ 등 주로 러블리한 멜로의 주인공 역할로 대중들의 머릿 속에 각인된 배우다. 하지만 그것은 박보영이라는 배우가 가진 밝은 에너지 때문에 생겨난 착시현상에 가깝다. 생각해 보면 ‘늑대소년’은 우연히 시골에서 만나게 된 늑대소년과의 독특한 판타지 멜로였고, ‘오 나의 귀신님’ 역시 19금 귀신이 빙의된 인물로 1인2역을 해야하는 작품이었다. ‘힘쎈여자 도봉순’은 어떤가. 국내드라마에서는 거의 처음 시도됐던 여성 슈퍼히어로물이었다. ‘어느 날 우리집 현관으로 멸망이 들어왔다’는 제목처럼 멸망(서인국)이라는 판타지적 존재와 엮어지는 멜로를 연기했고,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는 모든 것이 무너진 세계에서의 생존기를 담은 재난물의 주인공이었다. 

 

오히려 이처럼 다채로운 장르와 독특한 설정의 작품들을 연기하면서도 여전히 ‘뽀블리’로 기억되는 그 지점이 놀랍게 여겨지는데, 이게 가능해진 건 어떤 역할을 해도 타인을 흉내내는 게 아닌 바로 자신으로 그 역할을 소화해내는 이 배우의 특별함 때문이다. 예를 들어 ‘ 오 나의 귀신님’에서 그녀가 맡은 나봉선이라는 캐릭터는 음탕한 처녀 귀신이 빙의되면서 셰프인 강선우(조정석)에게 도발적으로 다가가는 인물인데, 어찌 보면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역할이었다. 하지만 박보영이 연기하면서 그런 도발적인 모습조차 귀엽게 여겼졌고 그래서 불편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반응들이 나오기도 했다.

 

그런 박보영이 최근에는 ‘위로의 아이콘’으로 떠오르고 있다. 공교롭게도 전작이었던 넷플릭스 드라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에서도 박보영이 맡은 정다은이라는 인물은 정신병동의 간호사였다. 환자들을 위해 헌신하며 그 아픔까지 들여다보려는 이 간호사는 자신 또한 우울증에 걸려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는데, 그 과정을 통해 보다 환자들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현대인들이 가진 정신적인 불안감을 따뜻하게 보듬어주고 이해해주고 공감해주는 인물인 것이다. 박보영은 이 작품을 통해 그저 귀여운 이미지만이 아니라, 다양한 감정의 깊이를 보여주는 배우라는 걸 증명해냈다. ‘조명가게’에서도 마찬가지다. 박보영이 연기하는 영지는 자신 또한 똑같이 사고와 의식불명을 겪었던 그 경험을 통해 다른 환자들에게 보다 가까이 다가간다. 그들의 입장을 이해하려 하고, 그들이 그 어두운 터널을 통과해 조명처럼 밝은 빛으로 빠져나오는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도한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일까. 현대인들은 이른바 ‘위험사회’에 노출되어 있다고 말한다. 갖가지 사고와 사건의 위험은 물론이고, 매일 같이 누적되는 피로와 스트레스가 만들어내는 정신적인 위험도 커져만 간다. 그래서 박보영이 연달아 간호사 역할로 보여주는 그 따뜻하고 밝은 이미지는 우리에게는 이 어두운 세계 속에서 길을 잃지 않게 해주는 밝은 조명 같은 위로로 자리한다. 이것이 박보영이라는 페르소나가 우리의 마음을 그 존재 자체로 따뜻하게 해주는 이유다. (글:국방일보, 사진:디즈니+)

가수와 배우를 자유자재로 오가는 김형서 혹은 비비 

열혈사제2

“달다달고 달디달고 달디단 밤양갱-” 비비가 부른 ‘밤양갱’은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소박한 가사와 멜로디가 특징인 곡이다. 헤어지는 남자가 너는 바라는 게 너무 많다고 말하지만 비비는 바라는 게 하나 뿐이라며 그건 바로 ‘달디단 밤양갱’이라고 노래한다. ‘밤양갱’에 대한 여러 해석이 가능하지만, 비비의 소녀 같은 모습이 블링블링하게 이어지는 뮤직비디오를 보면 그것은 아마도 달콤한 사랑 정도의 의미가 아닐까 싶다. 장기하가 쓴 곡이라 그런지 ‘말 놀이’ 같은 느낌을 주는 이 소박한 곡은 그러나 공개된 이후 신드롬을 일으켰다. 갖가지 버전의 ‘밤양갱’ 패러디 영상들이 등장했고, 한번 들으면 잊혀지지 않는 가사는 저도 모르게 흥얼거리게 만드는 마법을 부렸다. 그 ‘밤양갱’ 뮤직비디오에서 이 곡을 부른 비비는 장기하(떠나가는 남자 역할이다)와 출연해 풋풋하지만 이별에 가슴 아파 하는 소녀를 연기한다. 말맛이 살아있는 노래도 그 맛을 딱 살려 부르는 실력이 엿보이지만, 동시에 천연덕스러운 연기 또한 자연스럽다. 

 

그러고 보면 비비가 노래를 발표할 때마다 냈던 뮤직비디오는 노래만이 아닌 연기가 그의 또 다른 영역이라는 걸 보여준 바 있다. ‘가면무도회’ 같은 뮤직비디오를 떠올려보라. 마치 영화 ‘킬빌’의 여주인공처럼 칼을 휘두르고 총을 쏠 때마다 가면 쓴 이들이 죽어나가는 액션이 압권인 뮤직비디오가 아니었나. 또 ‘나쁜X’의 뮤직비디오도 그렇다. 그건 한 편의 누아르라고 해도 될 법한 영상이고 액션 연기였다. 그래서 이 곡들에 대한 반응은 하나 같이 노래가 아닌 영화 한 편을 본 것 같다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니 비비가 김형서라는 자신의 본명으로 작년에 영화 ‘화란’과 드라마 ‘최악의 악’으로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인 후 올해도 ‘강남 비-사이드’에 이어 ‘열혈사제2’로도 연기의 길을 이어가고 있는 그 흐름이 자연스럽다. 그건 가수가 연기 영역에도 도전해 ‘연기돌’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흐름과는 사뭇 다르다. 애초부터 가수와 연기 두 영역을 동시에 해왔고, 그 양자에서 자기만의 존재감을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다고나 할까. 특히 그가 해온 작품들이 대부분 누아르나 범죄스릴러 같은 장르라는 점이 이색적이다. 보통의 신인 연기자들이 시도하기 쉽지 않은 영역이 바로 ‘몸을 쓰는’ 액션 연기인데 오히려 김형서는 이 분야에 더 독보적이다. 

 

디즈니+ 드라마 ‘강남 비-사이드’에서 김형서는 강남 클럽에서 폭력에 노출된 피해자들 중 한 명으로 친구가 위험해지자 자신이 대신 희생하는 인물 재희를 연기했다. 결코 만만치 않게 가해자들과 맞서다가 끝내 그들에게 당할 처지가 되자 스스로 끝을 내는 결기를 보여주는 인물이다. 아직 20대 중반의 나이지만 쓰디 쓴 인생 밑바닥 연기를 보여줬다. 이 작품에서 재희라는 인물이 중요한 건, 그를 사랑했던 윤길호(지창욱)와 그의 절친이었던 예서(오예주)를 행동하게 만들어 작품에 동력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중요한 역할에 김형서가 캐스팅된 건 그의 전작이었던 ‘최악의 악’의 영향이 컸다. 김형서는 ‘최악의 악’에서 중국의 거대 마약조직 두목의 딸 이해련 역할을 맡아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래서 이를 제작한 사나이픽처스가 또다시 디즈니+의 투자를 받아 내놓은 ‘강남 비-사이드’에 김형서는 또다시 지창욱과 함께 출연하게 됐다. 연기 영역에서의 가능성을 인정받았다는 뜻이다. 

 

물론 워낙 도발적인 눈빛으로 누아르적인 분위기를 보여주는 범죄스릴러에 자주 등장했던 탓에 김형서의 연기가 그런 영역에만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였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아직 새로운 역할을 선보일 기회가 없어 생겨난 착시현상에 불과하다는 걸 김형서는 SBS 드라마 ‘열혈사제2’로 보여준다. ‘열혈사제’는 사제의 신분이지만 나쁜 놈들을 때려잡는 열혈 신부 김해일(김남길)의 활극이다. 지난 시즌에 이어 이번 시즌2에서는 부산으로 내려와 그 곳에서 마약 카르텔과의 한판 승부를 벌인다. 그런데 김형서가 맡은 역할은 바로 그 부산에서 새롭게 조력자로 등장한 마약수사대 구자영 형사다. ‘강남 비-사이드’나 ‘최악의 악’과 달리 한층 발랄한 액션 활극인지라 이 작품은 다소 과장된 액션과 서사가 특징이다. 그래서 김형서는 시원시원한 액션 연기와 더불어 만화 같은 코믹한 연기 또한 선보이는데, 할리퀸으로 분장하고 나쁜 놈들 때려잡는 액션은 SNS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또 본래 부산 출신이어서 이 역할에 딱 어울리는 구수한 사투리 구사로 캐릭터를 잘 살려내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비비 혹은 김형서를 보면 그 연기의 이미지에서 여러 가지 맛이 느껴진다. ‘밤양갱’ 뮤직비디오의 순하고 달달한 맛도 있지만, ‘최악의 악’이나 ‘강남 비-사이드’, ‘열혈사제2’에서의 신맛과 짠맛, 쓴맛까지도 그 연기에는 담겨있다. 그런데 그 연기에서 일관적으로 느껴지는 건 직설적이고 거침이 없는 면모다. 흔히들 그래서 ‘MZ대세’라는 표현을 많이 쓰는데, 그건 아마도 타고난 아티스트의 끼가 자연스럽게 밖으로 드러남으로써 생겨난 결과가 아닐까 싶다. 

 

연기와 노래의 영역이 성역처럼 구분되던 시대는 지나갔다. 그래서 연기돌이라는 표현도 이제는 낯선 과거의 유물처럼 여겨진다. 노래를 하는 것과 연기를 하는 것은 물론 기술적으로는 다소 다를 수 있지만 어떤 감성을 전한다는 본질에 있어서는 통하는 면이 있다. 조금 낯설어도 과감하고 솔직하게 도전함으로써 그것이 통한다는 것을 비비는 김형서를 오가며 보여주고 있다. 영역의 한계란 어쩌면 우리 스스로 그어놓은 선 때문에 생겨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해보지 않아서 처음엔 낯설고 어려울 수 있지만, 일단 뛰어들고 보면 어디선가 경험했던 것들이 새로운 영역에서도 여전히 도움이 된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주저할 이유가 뭔가. 비비처럼.(글:국방일보, 사진:SBS)

‘조립식 가족’으로 새로운 가족상, 아빠상 보여준 최원영

조립식 가족

“어떤 부모가 자식을 키워 줘? 키우는 거지. 잘 먹고, 잘 자고, 재밌게 살고 그러라고 키우는 거지. 돈 내놓으라고 키우는 거야? 갚으라고 키우는 거냐고?” 드라마 ‘조립식 가족’에서 윤정재(최원영)는 강해준(배현성)에게 그렇게 말한다. 윤정재와 강해준. 벌써 성이 다르다. 그런데 이 윤정재는 자신이 강해준의 아빠라는데 아무런 주저함이 없다. 진짜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10년 전 윤정재는 우연히 선을 보게 된 강서현(백은혜)의 아들 강해준을 집으로 데려왔다. 해준의 엄마는 서울로 돈 벌러 간다고 떠난 후 소식이 끊겼다. 이모 강이현(민지아)의 집에 맡겨진 해준은 이 아빠는 차마 외면하지 못하고 집으로 데려온다. 그리고 어린 해준이 “감사합니다. 아저씨가 아빠하면 좋겠어요.‘라고 하자, 정재는 아이를 받아들인다. ”그래. 그럼 여기 있을 동안은 아빠 해.“ 

 

그렇게 윤정재의 아들로 10년 간이나 살아왔지만 강해준에게는 이 아빠에 대한 부채감 같은 게 있다. 자신을 아들로 키워준 것을 은혜로 생각하고 갚고 싶어한다. 친아빠가 나타나 미국 농구 유학을 떠났지만 발목을 다쳐 돌아온 강해준은 그간 패션 모델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번 돈 8억이 든 통장을 윤정재에게 내민다. 하지만 기뻐할 줄 알았던 이 아빠는 불같이 화를 낸다. “누가 그래 갚으라고? 너 아빠가 그런 거 하라고 미국 보냈어?”

 

이 아빠에게는 친딸인 윤주원(정채원)도 있지만 또 한 명의 아들도 있다. 이웃집 김대욱(최무성)의 아들 김산하(황인엽)다. 딸 윤주원이 어려서 오빠 오빠 하며 잘 따랐던 김산하는 그 나이에 엄마에게 버림받았다. 윤주원은 그것도 눈에 밟혔다. 그래서 자기 집에서 같이 밥을 먹으며 지내다 보니 김대욱도 김산하도 가족이 됐다. 김산하 역시 친 아빠가 있지만 윤주원에게도 아빠라고 부르는 이유다. 

 

이 이상한 아빠 윤주원은 사실 세상에서 찾아보기 힘든 판타지에 가까운 인물이다. 그런데 그 판타지를 현실감 있게 만들어낸 건 다름 아닌 배우 최원영이다. 역시 배우인 심이영과 결혼해 슬하에 두 명의 자녀를 두고 있는 이 아빠는 ’조립식 가족‘을 통해 부성애와 모성애가 결합된 이 판타지적 인물을 현실로 끄집어낸다. 칼국수집을 하는 이 인물은 그래서 요리로 그 마음을 표현한다. 정성껏 요리를 만들어내고 그걸 맛나게 먹는 가족들(성도 다르고 피도 다르지만)을 보며 흐뭇해한다. 세상 엄마들의 모습 그대로다. 하지만 동시에 자상한 아빠로서의 따뜻함도 보여준다. 성도 다른 아이들이 한 집에서 함께 밥을 먹고, 게다가 아빠 둘이 한 집에 있는 걸 이상하게 바라보는 동네의 시선에도 단호하게 맞선다. 김산하의 아빠 김대욱과는 오래된 친구처럼 저녁에 술 한 잔 나누는 사이지만, 아이들 이야기를 하며 의견다툼을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은 마치 오래된 부부처럼도 보인다. 최원영은 이 부성애와 모성애를 모두 가진 새로운 아빠상을 그려냈다. 만만찮은 연기의 내공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최원영은 2002년 영화 ’색즉시공‘으로 데뷔해 영화와 드라마를 오가며 무수한 작품들을 소화했다. 워낙 선한 외모를 갖고 있어 드라마 ’선덕여왕‘의 계백이나 ’상속자들‘의 윤재호 같은 평범한 훈남 역할이 많았지만, ’매드독‘에서 메인 빌런인 주현기 역할로 연기 변신에 성공하면서 스펙트럼을 넓혔다. 이후 ’닥터 프리즈너‘에서도 악역 연기로 시청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면서도 ’반짝이는 워터멜론‘ 같은 작품에서 더할 나위 없는 훈훈한 모습을 선보이기도 했다. 어찌 보면 선과 악을 극단적으로 오가는 면모를 보여줬던 건데, 그의 연기 폭이 계속해서 확장되어 왔다는 걸 잘 보여주는 사례다.  

 

그 과정들을 거쳐 ’조립식 가족‘으로 돌아온 최원영은 이 기막힌 가족의 서사가 근거를 갖게 해주는 작품의 중심적인 역할을 해낸다. 엄마는 없고 아빠만 둘인데다 성도 다른 말 그대로의 ’조립식‘ 같은 가족을 진짜 가족처럼 만들어내는 끈끈한 정을 부여하는 역할이다. 이 작품이 특이한 건, 보통 우리네 드라마에서의 고정되어 오기도 했던 성 역할이 뒤집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대부분 아빠들이 아이들을 버리고 가고 엄마가 아이들을 지키는 것이 드라마 속 고정된 성 역할이었지만, ’조립식 가족‘은 정반대다. 이 작품에는 엄마들이 모두 아이를 버리고 떠나가고 그 버려진 아이를 챙기는 건 이 이상한 아빠다. 이건 이 드라마의 원작이 중국드라마 ’이가인지명‘이기 때문에 생긴 판타지다. 중국은 우리와 달리 아빠들이 가족들의 식사를 챙기는 일이 일상적이다. 그건 아빠들의 성인지 감수성이 남달라서가 아니라 문화 자체가 달라서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 ’조립식 가족‘이 새롭게 보여주는 이 아빠상은 현재 우리의 달라지고 있는 가족형태 속에서 의미 있어 보인다. 가부장적 가족관과 그 속에 자리한 보수적인 아빠상은 이제 지나간 시대의 유물이 됐다. 그보다도 자상하고 집안일도 함께 챙기는 새로운 아빠상이 요구되는 현실이다. 무엇보다 혈연과 핏줄을 강조하던 옛 가족관은 그것이 야기하는 사회 문제들이 적지 않다는 점에서 우리 시대에 맞는 새로운 대안적 가족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목소리들이 적지 않다. 내 핏줄만 소중하다 여기는 그런 구시대적 가족관으로는, 지금처럼 함께 더불어 살아가야 다 살 수 있는 공존의 시대를 버텨낼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윤정재라는 아빠의 존재는 ’조립식 가족‘이라는 새로운 가족이 조립될 수 있는 바탕이 되어준다. 핏줄이 아니어도 함께 밥 먹고 지내온 그들을 가족으로 보듬고 그렇게 실제로 새로운 가족이 되게 만드는 인물. 가족보다는 개인이 더 중요해진 현실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아빠라 판타지처럼 보이지만, 요즘 같은 가족 해체 시대에 대안적 가족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인물이 바로 그다. 선과 악을 극단적으로 오가는 연기를 해내며 스펙트럼을 넓혀온 배우 최원영이 이 이상한 아빠 역할을 통해 우리 시대의 페르소나로 떠오르는 건 그 인물이 가진 대안적 성격 때문이다. 세상 어디에도 없어 보이지만, 이제 우리에게 꼭 필요한 새로운 아빠상을 그는 기막힌 연기로 우리 앞에 보여주고 있다. (글:국방일보, 사진: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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