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씨부인전’에 이어 ‘중증외상센터’로 펄펄 나는 추영우

중증외상센터

“네 일반외과 양재원입니다.” 넷플릭스 드라마 <중증외상센터>에서 양재원(추영우)은 그렇게 전화를 받고는 달려간다. 뛰고 또 뛴다. 한국대학병원에 처음 온 백강혁(주지훈)의 눈에 양재원이 들어온 건 바로 그 모습이다. 응급환자를 향해 달리고 달리는 모습을 보고는 백강혁은 이 친구를 자신의 1호 제자로 삼기로 마음 먹는다. 왜? 거기서 환자의 생명만을 보는 의사의 본분 같은 걸 봤기 때문이다. <중증외상센터>는 의학드라마에 활극 같은 다소 과장된 장르적 장치를 넣었지만 그 근간에 깔려 있는 건 바로 이 지점이다. 환자의 생명만을 생각하는 의사. 당연한 거라고? 아니다. 최근의 병원은 거대 자본으로 운영되는 기업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백강혁이 한국대학병원에 와서 응급환자들을 더 살려내면 낼수록 병원의 적자와 손해는 늘어난다. 환자를 이송하기 위해 헬기를 띄우고, 비싸지만 어려운 수술들도 거침없이 해내는 중증외상센터의 맹활약이 그래서 병원 경영자들에게는 눈엣가시다. 하지만 계산보다는 본분을 향해 달려가는 낭만적인 중증외상센터 사람들을 시청자들은 응원하게 된다. <중증외상센터>라는 드라마가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까지 화제를 불러일으킨 힘의 원천이다. 

 

<중증외상센터>가 큰 성공을 거둔 이유를 설명했지만, 이건 고스란히 최근 대세 배우로 떠오르고 있는 추영우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작품 속에서 환자만을 향해 뛰고 또 뛰던 양재원처럼 그는 작품의 성공만을 위해 뛰고 또 뛰는 배우다. 이 작품 속에서 그가 맡은 양재원은 중증외상센터팀의 ‘1호’라 불릴 정도로 중요한 역할이긴 하지만, 무엇보다 백강혁이라는 인물을 보좌하는 역할이다. 그래서 추영우는 이 인물이 너무 도드라지지도 그렇다고 너무 존재감 없게도 보여지지 않게 해야한다. 주지훈과 맞추는 연기합을 보면 추영우는 자신이 어떤 역할을 해야하는지를 명확히 알고 있다. 멋있는 모습보다는 백강혁이라는 놀라운 선택의 연속을 보여주는 인물 앞에서 시종일관 경악해 소리지르고, 놀라며, 감탄하면서도 때론 서운해하면서 성장해가는 ‘리액션’이 그 역할이다. 그렇게 받아주는 역할을 충실히 해줌으로써 백강혁이라는 인물이 빛나게 하는 것. 그것이 이 작품에서 그가 맡은 ‘팀 플레이’다. 그런데 그렇게 한 발 물러나 자신을 내세우기보다 받아주는 역할을 제대로 하면서 추영우라는 배우의 입지 또한 단단해진다. 추영우가 있어 주지훈도 빛나게 된다는 걸 확인하게 된다. 

 

이처럼 중심에 나서기보다는 한 발 물러나 자기 역할을 충실히 하는 모습은 <중증외상센터>만이 아닌 그가 최근 출연했던 <옥씨부인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옥씨부인전>에서 그는 송서인이라는 양반가 자제였다가 자신이 기생의 소생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집을 나와 천승휘라는 전기수로 살아가는 인물을 맡았다. 게다가 주인공 옥태영(임지연)이 혼인하게 되는, 얼굴이 똑같은 성윤겸이라는 인물 또한 연기했다. 즉 세 사람의 연기를 한 셈이다. 그만큼 중요한 역할인데 추영우는 그렇다고 전면에 나서지는 않는다. 대신 실질적인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옥태영의 한 발 뒤에서 그녀를 돕고 응원하고 사랑하는 자신의 위치를 지킨다. 노비였지만 양반이 되어 억울한 처지에 놓인 민초들을 돕는 옥태영이 계속 그렇게 살 수 있도록 지켜봐주고 밀어주는 인물이다. <중증외상센터>에서 백강혁을 든든히 받쳐주던 양재원이나, <옥씨부인전>에서 옥태영을 지지해주는 송서인이나 거의 비슷한 결을 가진 인물인데, 공교롭게도 추영우가 그 역할들을 맡아 비슷한 시기에 대중들에게 선보였다. 

 

사실 추영우는 이제 겨우 스물다섯이고, 2021년에 <You Make Me Dance>라는 작품으로 데뷔한 신인이다. 그간 <경찰수업(2021)>, <학교2021>을 거쳐 <어쩌다 전원일기(2022)>와 <오아시스(2023)>로 주목을 받았다. 특히 <오아시스>에서 최철웅이라는 콤플렉스 가득한 악역 연기는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러더니 올해 <옥씨부인전>과 <중증외상센터>를 통해 순식간에 대세 배우로 떠올랐다. 그는 올해도 넷플릭스 <광장>과 tvN <견우와 선녀>로 대중들을 만날 예정이다. 

 

추영우가 이처럼 단기간에 대세 배우로 떠오르게 된 데는 앞서 말했듯 <옥씨부인전>과 <중증외상센터>에서 그가 맡은 ‘지지해주는 역할’이 중요했다. 신인으로서 당연한 역할이고 응당 거쳐야 하는 연기지만 여기에는 추영우가 가진 연기자로서의 매력이 한 몫을 했다. 그건 이 배우가 가진 인간미를 드러내는 ‘빈 구석’이다. 추영우는 완벽함이나 카리스마보다는 다소 허당기 있는 면모를 꺼내놓을 때 매력이 느껴지는 배우다. 그래서 <중증외상센터>나 <옥씨부인전>에서 숨막히는 극적 긴장감을 슬쩍 풀어헤치는 그의 ‘빈 구석’이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살짝 웃게 만드는 그 빈 구석을 통해 숨통을 틔워주는 모습이라고나 할까. 

 

추영우는 2023년에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연기관’에 대한 질문에 “배우들은 본인의 연기관이 항상 바뀐다”고 전제한 후 “지금은 나만의 뚜렷한 개성이 드러나는 연기라기보다 어떤 작품의 한 장면에 딱 녹아들 수 있는” 연기가 좋은 연기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면서 인테리어에 비유해 “하나의 색으로 통일했는데 거기에 어울리지 않는 가구가 있으면 되게 보기 싫다”며 “잘 어울리는 소품이 될 수 있는 연기가 좋은 연기” 같다고 했다. 사실 신인이라고 해도 이렇게 자신을 ‘소품’으로 낮추고 자신만이 아니라 작품 전체가 빛날 수 있게 ‘튀지 않는’ 연기를 하는 것이 좋은 연기라고 말하기는 쉽지 않다. 오히려 존재감을 드러내고픈 욕망이 더 클 수밖에 없는 신인들이 아닌가. 

 

하지만 그 말대로 작품에 어울리는 소품을 자청하고 그 역할에 녹아들면서 추영우는 그 소품의 진가를 드러났다. 이것은 자신을 꽉 채우려는 것보다는 다소 비워놓는 것으로서 느껴지는 그의 인간미와 어우러져 대중들의 사랑을 받게 됐다. 함께 살아가는 사회 속에서 저마다 목소리를 내는 이들은 넘쳐난다. 그 누구도 소품이 되기를 바라지는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서일까. 전체를 생각해 자기 역할을 찾아내고 그 역할에 충실한 이들이 오히려 도드라진다. 추영우가 그렇다.(글:국방일보, 사진:넷플릭스)

‘중증외상센터’의 윤경호, ‘트리거’의 주종혁, ‘옥씨부인전’의 추영우

중증외상센터

넷플릭스 드라마 <중증외상센터>는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까지 그 반응이 폭발적이다. 물론 그 중심에는 주지훈과 추영우의 극을 이끌어가는 티키타카가 가장 큰 힘을 발휘하고 있지만, 여기에 윤경호의 지분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항문외과 과장 한유림이라는 역할을 통해 초반에는 빌런으로서의 극성을 끌어올리더니 후반에는 개과천선한 모습으로 빵빵 터지는 통쾌한 웃음까지 전해줬다. 

 

한유림은 어찌 보면 <중증외상센터>의 킥이라고 할 정도로 드라마의 맛을 만들어내는 인물이다. 초반에 백강혁(주지훈)을 견제하고 질투하며 밀어내려 하는 이 밉상 캐릭터는 그 갈등요인을 통해 극의 긴장감을 높여 놓는다. 하지만 의학드라마에 활극이라는 장르를 더한 만큼 백강혁이 난관을 넘어설 때마다 무너지는 한유림의 리액션은 시청자들에게 통쾌함을 안기기가 충분하다. 

 

하지만 중반을 넘어서면서 사고를 당해 위급한 딸을 살려낸 백강혁에게 굴복한 한유림은 중증외상센터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백강혁을 지지하게 되고, 그의 부재중 응급현장에 직접 뛰어들며 “나는 백강혁이다”를 외치는 코믹한 모습으로 시청자들을 빵 터트린다. 백강혁을 원수처럼 생각하던 그가 이제는 추종자가 되는 반전이 활극 코미디적 요소와 어우러져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된 것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건 백강혁이라는 인물과 한유림의 관계다. 그건 마치 신적인 존재(딸을 구해줬으니 왜 그렇지 않을까!)와 그를 절대적으로 따르는 추종자의 모습으로 그려진다는 점이다. 백강혁이 무언가를 할 때마다 졸졸 따라다니거나 그가 없을 때 백강혁을 한없이 찾고 그가 나타나자 “너무 힘들었다”며 그에게 안기는 모습은 그래서 더할 나위 없는 귀여운 매력으로 다가오게 만든다. 마치 귀여운 반려견 같은 이른바 ‘댕댕미’라고나 할까. 

 

최근 드라마에는 이 같은 카리스마적 존재를 따르는 댕댕미를 보여주는 캐릭터들이 갈수록 존재감을 높이고 있는 걸 발견할 수 있다. <중증외상센터>에서 백강혁과 함께 센터를 지키며 성장해가는 캐릭터인 양재원(추영우)도 그런 면모들을 갖고 있다. 빈 구석을 보여주고 무너지는 이 캐릭터의 리액션은 백강혁이라는 인물의 카리스마를 강조해주면서 시청자들에게는 귀여운 매력을 어필한다. 

옥씨부인전

추영우가 최근 <중증외상센터>와 <옥씨부인전>을 통해 연타석 홈런을 치고 대세 배우로 떠오른데는 바로 이러한 댕댕미 캐릭터와 이 배우의 매력이 잘 어우러진 결과다. <옥씨부인전>에서도 추영우가 맡은 전기수 천승휘라는 인물은 무대에 설 때면 강력한 카리스마를 보여주지만 옥태영(임지연) 앞에만 가면 귀여워지는 댕댕미를 보여준다. 추영우는 조금은 빈 구석을 보여줌으로써 인간미를 드러내는 매력이 있는 배우다. 그런 점에서 카리스마 있는 백강혁이나 옥태영 같은 인물 옆에 서 있는 역할을 연기할 때 그 존재감 역시 빛이 난다. 

 

댕댕미를 가진 캐릭터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사례는 디즈니+ 드라마 <트리거>의 강기호(주종혁)라는 인물이다. 스펙이 없어 아직 자기 프로를 해보지 못하고 오소룡(김혜수)의 보조 역할에 머물러 있는 이 인물은 그 팀에 갑자기 한도(정성일)가 들어오자 그를 견제하면서도 형처럼 따르는 댕댕미로 짠내와 웃음을 동시에 선사한다. 때때로 오소룡이 한도를 더 챙겨주는 것 같을 때 시무룩한 질투의 시선을 보이는 강기호의 모습은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다. 

트리거

그런데 이 역할은 주종혁이라는 배우가 맡으면서 빛을 내고 있다고 말할 정도로 이 배우의 지분이 많아 보인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권민우라는 인물로 ‘권모술수’로 대변되는 경쟁자의 면면을 연기했던 것으로 주목을 받은 주종혁은 이번 작품에서는 이와는 너무나 다른 모습으로 시청자들의 시선을 강탈하고 있다. 앞으로의 성장 가능성이 너무나 주목되는 배우다. 

 

한때는 카리스마가 가장 주목되는 캐릭터의 매력이었다면, 최근에는 정반대로 ‘댕댕미’를 보여주는 귀여움이 새롭게 떠오르는 캐릭터의 매력이 되고 있다. 그건 손에 닿지 않는 카리스마보다는 내 옆에 존재할 것 같은 인간미가 동질감의 공감을 주기 때문이다. 이들이 있어 긴장감 넘치는 드라마 속에서 시청자들은 잠시 숨쉴 틈을 가질 수 있고, 날아오를 것 같은 허구적 상상의 나래 속에서 현실감을 잃지 않을 수 있다. 또한 원탑 중심으로 쏠린 시선을 주변부로 되돌려 다양한 캐릭터의 묘미를 다채롭게 보여주는 역할도 한다. 무엇보다 힘겨운 현실 속에서도 우리가 잠시 웃을 수 있고 때론 그것이 살 수 있는 힘을 만든다는 걸 이들만큼 잘 보여주는 이들이 있을까. 이 귀여운 인물들이 드라마의 킥으로 떠오른 이유다. (사진:넷플릭스, 디즈니+, JTBC)

‘검은 수녀들’로 돌아온 송혜교, 더 멋있어졌다

검은 수녀들

2013년 대전에서 잠깐 배우 송혜교를 만난 적이 있다. 제2회 아시아태평양 스타 어워즈(APAN STAR AWARDS)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하면서 갖게 된 기회다. 당시 송혜교는 <그 겨울, 바람이 분다>로 대상을 받았다. 그 해에는 <직장의 신>의 김혜수, <여왕의 교실>의 고현정, <내 딸 서영이>와 <너의 목소리가 들려>의 이보영이 후보로 올라 송혜교와 치열한 경합을 벌였는데 결국 심사위원 모두의 만장일치로 그녀가 대상으로 결정됐다. 당시 심사위원들은 심사기준이 오로지 연기력 하나라는데 입장을 같이 하면서 그 같은 결정을 내렸다. 송혜교는 대상 수상자로서 간소하게 준비된 애프터파티에 참여했다. 스타라는 틀에 가둬져 있었지만 배우가 되기 위해 몸부림을 쳐온 송혜교의 면면을 유심히 봐왔던 나로서는 그 날의 수상이 남달랐다. 그래서 할 말도 많았지만 막상 송혜교를 만났을 때는 아무런 얘기도 하지 않는 게 낫겠다 싶었다. 그건 그 상이 끝이 아니고 이제 배우로서의 시작에 해당될 것이어서, 샴폐인을 일찍 터트리는 괜한 상찬으로 혹여나 앞으로 가야할 길에 방해가 되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가을동화(2000)>와 <올인(2003)>, <풀하우스(2004)>를 거쳐 톱스타의 반열에 올랐지만, 송혜교는 늘 갈증이 컸다. 반짝 스타가 아닌 롱런하는 배우로서의 길을 고민했던 거였다. 노희경 작가의 <그들이 사는 세상(2008)>을 거친 후, <그 겨울, 바람이 분다(2013)>에서는 깊고 쓸쓸한 내면이 느껴지는 그녀의 연기가 도드라지기 시작했다. 급기야 김은숙 작가와 만났던 <태양의 후예(2016)>를 통해 포텐셜이 터졌다. 멜로는 물론이고 액션부터 재난까지 다양한 장르가 겹쳐진 블록버스터였다. 도도하지만 뜨거운 가슴을 가진 강모연이라는 의사 역할로 송혜교는 <풀하우스>에 이어 또다시 아시아의 별로 떠올랐다. <풀하우스> 때와 달랐던 건, 그것이 그저 스타로서의 반짝임이 아니라 배우로서의 성장을 보여줬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송혜교의 갈증은 여전히 채워지지 않았다. ‘멜로 퀸’이라는 수식어는 늘 따라다녔다. 실제로 멜로의 여주인공 역할을 대부분 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걸 단순히 ‘멜로 퀸’이라는 한 마디로 정리한 건 어딘가 송혜교에게는 억울한 일이다. 같은 멜로라도 그녀가 해온 작품들을 따라가보면 여성의 성장사가 보여질 정도로 다채로운 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을동화>나 <풀하우스>가 동화처럼 풋풋했던 사랑을 표현했다면, <황진이>는 절절한 시대적 질곡 앞에 선 여성의 강단 있는 삶이 있었고, <그들이 사는 세상>과 <태양의 후예>에서는 일과 사랑의 영역을 모두 주도하고픈 여성의 삶과 사랑이 있었다. 이 과정을 거쳐 <지금, 헤어지는 중입니다>에서는 유한한 삶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고 사랑할 수 있을까를 묻는 한층 성숙해진 멜로 연기를 선보였다. 

 

이러한 성장 과정들을 묵살한 채, ‘멜로 퀸’이라는 말로 가둬버리는 세간의 시선 앞에 송혜교는 새로운 선택을 시도한다. 마침 김은숙 작가가 의기투합했다. 그녀 역시 ‘멜로 장인’이라는 수식어에 가둬져 갑갑함을 느끼던 차였다. 그래서 나온 작품이 <더 글로리(2022-2023)>였다. 학교폭력이 소재였고, 송혜교는 피해자인 문동은을 연기했다. 멜로는 저 뒤편으로 사라졌고 대신 그 자리를 처절하면서도 처연한 복수극이 채웠다. 대중들은 열광했다. 문동은이 보여주는 거침없는 말과 행보를, 송혜교가 연기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짜릿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그건 마치 억압된 자아가 드디어 바깥으로 나와 제 할 말을 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학교폭력으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온 문동은은 그렇게 부활하여 제 할 말을 했고, 그 문동은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송혜교는 또 한 번 깨어날 수 있었다. 

 

<더 글로리>로 송혜교는 백상예술대상 TV부문 여자 최우수연기상을 거머쥐었다. 또 제2회 청룡시리즈어워즈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마침 백상예술대상을 심사하게 된 나는 감회가 새로웠다. 2013년 대전의 한 시상식 뒷풀이에서 잠깐 얼굴을 본 후 10년이 지난 송혜교는 그 때 꿈꿨던 배우, 아니 대배우의 길 위에 서 있었다. 

 

최근에 그녀는 <검은 수녀들>이라는 영화로 돌아왔다. 오랜만에 찍은 영화였다. 사실 영화 자체로는 그다지 새로운 재미요소가 있다고 보기는 어려운 작품이다. 하지만 오컬트 장르에서 구마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사제가 아니라, 수녀가 전면에 나선다는 것만으로도 남다른 의미를 가진 작품이다. 게다가 송혜교가 연기하는 유니아 수녀는 담배를 피우고 관습에만 머물러 있는 사제들에게 욕을 하며 마치 휘발유를 뿌리듯 성수를 통에 담아 부마자들에게 들이붓는 파격 그 자체를 보여주는 수녀다. 그런데 이 수녀는 절차나 규정보다 악마가 깃들어 죽을 위기에 처한 소년을 구하기 위해 뭐든 하는 그런 ‘열혈수녀’다. 사제들 중심으로 이뤄진 사회 속에서 소외된 구마하는 이 수녀는, 무병을 앓고 무속인이 될 운명이었지만 수녀가 되어 이를 거부하고 있던 미카엘라 수녀(전여빈)와 함께 소년을 구하기 위해 나선다. 모두 소외된 자들이고, 그래서 사회적 약자들처럼 보이는 이들의 연대가 오컬트 특유의 구마의식보다 더 전면에 나와 있는 듯한 작품이다. 

 

작품에 대한 평가는 호불호가 갈리지만, 적어도 송혜교의 이 작품 속 연기에 대한 이야기는 호평 일색이다. <더 글로리>에 이어 거침없는 수녀의 말과 행보를 보며 시원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는 관객들이 적지 않다. 그저 반짝반짝 빛나는 별이 아니고, 또 그저 ‘멜로 퀸’이라는 수식어 하나에 가둬지지 않는 거침없는 송혜교의 연기 변신에서 느껴지는 시원함이다. 송혜교는 스포트라이트를 받아 빛을 내기보다는 차라리 그 빛을 떠나 다크해짐으로써 더욱 매력적인 ‘검은’ 언니가 되어 있었다. 혹여나 시상식장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면 이번에도 입다물 생각이다. 그녀의 성장은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니.(글:국방일보, 사진:영화'검은 수녀들')

‘트리거’의 열혈 탐사보도 팀장, 사이다 캐릭터의 귀환

트리거

“야 임마! 넌 사내새끼가 기집X 밑에서 일하냐, 쪽팔리게!” 다짜고짜 총부터 들이대는 사이비 종교 교주가 탐사보도 프로그램 ‘트리거’의 팀장 오소룡(김혜수)이 여자인 걸 알고는 남자 팀원에게 영 감수성 떨어지는 시대착오적 발언을 던진다. 그러자 오소룡이 여유있게 웃으며 말한다. “제가 또 보통 기집X은 아니거든요.” 디즈니+ 드라마 ‘트리거’의 시작과 함께 등장하는 이 장면은 오소룡이라는 이름부터 예사롭지 않은 인물에 대한 기대감을 세워 놓는다. 그건 바로 이 진실을 알리는 탐사보도를 위해서는 물불 가리지 않는 캐릭터의 매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역할을 연기하는 김혜수에 대한 기대감도 빼놓을 수 없다. 똑같은 역할을 해도 김혜수가 하면 어딘가 다르다. 대체불가의 호방함이 캐릭터에 묻어난다. 그 인물이 시원시원한 사이다 캐릭터라면 그 청량감과 폭발력은 그래서 더 강력해진다. 

 

실제로 ‘트리거’의 첫 번째 에피소드로 등장하는 사이비 종교 단체와의 일전이 그렇다. 보도를 위해 패러글라이딩을 타고 높은 사이비 종교 집단의 벽을 넘어들어가는 장면은 현실성이 없지만, 김혜수가 연기하니 어딘가 그럴 듯해 보인다. 장전된 총구 앞에서도 “쏴봐”라고 외치며 눈 하나 까닥하지 않는 모습에서부터 시청자들은 이미 설득 당했다. 그러니 사실상 진실 보도에 대한 판타지적 욕망을 담은 ‘트리거’에서 시청자들의 마음은 오소룡이라는 인물을 입은 김혜수를 보자마자 마음을 정하게 된다. 하고 싶은 거 다 하라고. 

 

김혜수 특유의 이 호방한 느낌은 처음부터 생겨난 게 아니다. 물론 어려서부터 태권도 유단자로 사범님 앞에 “태권!”하고 거수경례를 했던 시절부터 그 호방함은 내면에 장전되어 있었던 게 분명하다. 열여섯의 어린 나이에 광고모델로 주목받아 영화 ‘깜보’로 연기자를 시작했을 때부터 그 어린 나이에 성인연기까지 맡는 대범함이 그냥 생겼을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혜수가 처음 대중적인 배우로서 자리매김한 건 이런 호방함과는 사뭇 거리가 있는 청순 가련한 역할을 통해서였다. 바로 이명세 감독의 영화 ‘첫사랑’에서의 박영신이라는 인물이다. 이 역할로 김혜수는 최연소 청룡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면서 ‘첫사랑’의 아이콘으로 급부상했다. 물론 그런 이미지가 김혜수는 부담스러웠다고 한다. 그래서 드라마 ‘한지붕 세가족’에서 젊은 미시족 연기로 변신을 시도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때부터 김혜수는 ‘섹시 이미지’로 주로 소비되는 성장통을 겪었다. 백상연기대상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던 영화 ‘얼굴 없는 미녀(2004)’가 대표적인 그 사례다.

 

하지만 김혜수 본연의 호방함의 본색은 ‘타짜(2006)’를 통해 드디어 대중들을 매료시키기 시작한다. “나 이대 나온 여자야”라는 유행어까지 만든 김혜수는 이 때부터 맡는 역할마다 자신만이 가진 스타일을 더함으로써 대체불가의 배우로 서게 된다. 드라마 ‘직장의 신(2013)’은 김혜수가 가진 시원시원한 여걸의 면모와 더불어, 코믹함과 카리스마를 넘나드는 다채로운 모습들을 미스김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보여줬다. 영화 ‘차이나타운(2015)’에서는 사채업자 대모로서 조직 보스 역할을 김혜수만의 느와르적 카리스마를 더해 꺼내 놓았고, 드라마 ‘시그널’에서는 차수현이라는 인물의 과거 젊은 시절의 신출내기 형사와 현재의 베테랑 형사팀장을 오가는 연기를 선보여 백상예술대상 여자 부문 최우수연기상을 수상했다. 이처럼 김혜수는 청순함에서부터 코믹함과 더불어 관능미, 카리스마까지 소화해내면서도 어느 하나의 이미지에 고착되지 않는 연기자가 됐다. 무엇보다 김혜수에게서 주목되는 건 10대 시절부터 현재의 50대까지 하이틴부터 시작해 청년과 중년을 넘어오는 그 모든 과정들 속에서 대중들과 그 성장사를 함께 했고 그 속에서 자신만이 가진 색깔을 분명히 찾아냈다는 점이다. 똑같은 역할을 해도 그만의 매력이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건 그래서다. 

 

성공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변호사(하이에나)나 근엄하고 냉철하면서도 속으로는 따뜻한 진심이 숨겨진 소년부 엘리트 판사(소년심판)도, 또 심지어 조선시대에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았을 자식들을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중전(슈룹)이나, 돈되는 거라면 뭐든 하는 팜므파탈의 밀수꾼(밀수)까지 김혜수여서 보다 매력적으로 그려진 인물들이 대중들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트리거’ 역시 이 흐름 그대로 김혜수표 열혈 탐사보도 팀장이 보여주는 매력이 강력한 기대감을 만들어낸다. 

 

본래 드라마나 영화가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건, 당대의 갈증을 판타지로 채워주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 작품 속 인물들은 시대의 다양한 갈증들을 대변하기 마련이다. 김혜수가 시대의 아이콘처럼 보이는 건, 바로 그 갈증을 대변하는 인물들을 자기만의 색깔로 일관되게 보여줬기 때문이다. ‘직장의 신’의 미스 김이라는 인물을 통해 비정규직 여성들의 억눌린 마음을 시원하게 풀어줬고, ‘차이나타운’ 같은 작품에서는 남성 전유물로 여겨져온 느와르가 여성을 통해서도 충분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시그널’이 포기하지 않는 베테랑 형사를 통해 미제사건의 피해자들의 마음을 어루만졌다면, ‘하이에나’ 같은 작품에서는 성공을 향해 질주하며 사랑도 쟁취하고픈 현대여성들의 마음을 대변했다. 그러면서 이 역할 하나하나에 본인이 갖고 있는 호방한 면모들을 더함으로써 더 톡 쏘고 시원한 사이다 캐릭터를 구현해냈다. 

 

많은 역할들 속에서 김혜수가 해온 연기의 면면을 보면 작은 것들에 연연하기보다는 보다 굵직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모습이 눈에 띤다. 물론 그렇다고 세세한 디테일을 중요시 여기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그 세심함들이 하나의 목표를 향해 시원하게 뻗어 나간다는 뜻이다. 흔히들 ‘호방함’이란 작은 것들을 신경쓰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곤 하는데 김혜수를 보면 그것이 오해라는 걸 알게 된다. 디테일들을 갖고 있으면서도 목표를 향해 주저하지 않는 마음. 김혜수라는 대체불가 호방본색의 페르소나가 새해에 우리에게도 제안하는 매력이 아닐까.(글:국방일보, 사진:디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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