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시세끼 light’에 엄태구가 출연하자 생겨난 일

삼시세끼 light

“어떻게 보면 태구는 약간 좀 내성적인 면이 있잖아. 그런 성격인데 어떻게 연기를 할 생각을 했을까?” tvN ‘삼시세끼 light’의 마지막 게스트로 출연한 엄태구에게 유해진은 불을 피우며 조심스럽게 묻는다. 사실 그건 시청자들도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상남자 카리스마를 보이곤 하던 모습과는 너무나 상반되게 엄태구는 극내향인으로 유명하다. 이런 사실은 이미 드라마 ‘놀아주는 여자’로 큰 인기를 끌었을 때, ‘유퀴즈 온 더 블럭’에 나왔던 모습으로 더 많이 알려졌다. 목소리 데시벨 자체가 낮아서 소곤거리는 듯 말하고 또 너무 낯을 가려서 카메라 앞에 얼굴보다 정수리가 더 많이 나온 엄태구였다. 그의 앞에서 토크를 잘 이끌어내는 걸로 정평이 난 유재석조차 요령부득의 모습으로 웃음을 줬다. 

 

‘삼시세끼 light’에 나와서도 다르지 않았다. 이미 유해진과는 ‘택시운전사’를, 차승원과는 ‘낙원의 밤’을 함께 찍은 사이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낯을 가리며 대선배들 앞에서 극도로 조심하려 하고 또 어떻게든 도움이 되려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게스트들을 편안하게 해주는 유해진, 차승원인데다, 역시 뭐 하나 강요하는 것 없는 ‘삼시세끼’에서도 그럴 정도다. 그러니 배우로서 작품에 들어가 연기를 할 때는 어떻게 할까 궁금해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유해진의 질문에 엄태구는 친한 친구들과 있을 때는 장난을 많이 치기도 하는 편이라고 답했다. 다만 자신도 안그러고 싶은데 낯을 본인이 불편할 정도로 가린다고 했다. 자연스러운 척하면 오히려 어색해진다는 엄태구에게 유해진은 억지로 그럴 필요는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이가 얼마나 되냐고 갑자기 물었는데, 엄태구가 마흔 둘이라고 하자 깜짝 놀라며 “나이 들면 변한다”고 말하려 했는데 “넌 굳어진 것 같다”며 “있는 그대로 사는 거지”라고 유해진은 말해줬다.

 

유해진이 있는 그대로 사는 거라고 말하긴 했지만, 배우라는 직업을 가진 엄태구는 그 상황 자체가 있는 그대로 살 수는 없다. 사람들 앞에 나서서 연기를 해야한다. 실제로 그는 그런 성격 때문에 연기를 계속 해야하나 고민을 했었다고 한다. 2007년 영화 ‘기담’으로 데뷔해 무수한 작품들에 단역, 조역, 주연을 맡았지만 그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다 2016년 상영된 ‘밀정’에서 하시모토 역할로 두각을 드러냈다. 그는 ‘유퀴즈 온 더 블럭’에 나와 당시 연기를 그만둘 생각을 하고 있던 차였는데 송강호 선배가 자신에게 “힘들지?”하며 따뜻하게 대해줘 큰 힘이 됐다고 했다. 그 때의 인연으로 송강호는 자신이 주연으로 나왔던 ‘택시운전사’에 엄태구를 추천했고, 그렇게 출연해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군인 역할로 또다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가 주로 해온 역할은 차승원과 함께 출연했던 ‘낙원의 밤’ 같은 누아르에 어울리는 강렬한 모습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그는 드라마 ‘놀아주는 여자’에서 멜로 연기를 인상적으로 보여줌으로써, 그 강렬한 모습들이 일종의 작품 속에서 굳어진 그의 이미지일뿐이라는 걸 드러냈다. 

 

‘놀아주는 여자’에서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에 강렬한 눈빛을 가진 그가 상대역인 한선화 앞에서 순한 양처럼 돌변하는 모습은 시청자들에게도 빵터지는 웃음과 짜릿한 카타르시스를 줬다. 이 작품이 그에게 너무나 어울렸던 건, 극 중 그가 맡은 지환이라는 인물이 어두운 과거를 청산한 큰 형님 캐릭터였다는 점이다. 그래서 맨주먹으로 맞붙는 액션 연기도 등장했지만, 아이들과 놀아주는 은하(한선화) 앞에서 갈수록 달달해지는 반전 모습을 보여줬다. 배역 자체가 엄태구가 여러 작품들 속에서 굳어져 온 강렬한 카리스마의 껍질을 하나하나 벗겨내고 그 안에 담겨진 그의 순하디 순한 면모를 꺼내는 과정을 담고 있었다. 엄태구의 변신에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태구는 멜로다’라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그런데 알고 보면 그 모습이 어쩌면 엄태구의 진면목에 가깝다는 걸 시청자들은 그 후 출연한 몇몇 예능 프로그램들을 통해 알게 됐다. 지나칠 정도로 낯을 가리고, 남을 배려하느라 말 한 마디도 마구 꺼내놓지 못하는 섬세한 성격이 그였다. 그걸 알고 나니 이 배우가 지금껏 해온 연기의 길이 얼마나 도전의 연속이었을 지가 가늠이 됐다. 그저 지나치는 역할 하나도 쉬운 게 없었을 터였다.

 

조분조분 조용하게 말하는 엄태구에게 ‘삼시세끼 light’의 유해진과 차승원도 덩달아 비슷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저도 모르게 그렇게 된 것이지만, 거기에는 유해진과 차승원의 배려도 담겨 있었다. 차승원은 자꾸만 “태구가 너무 좋아”라고 말했고, 유해진은 특유의 너스레로 그를 편안하게 해주려 애썼다. 차승원이 만든 음식을 맛보며 과장된 리액션을 보였던 다른 게스트들과 달리, 엄태구는 낮게 “정말 맛있습니다”라고 말했지만 그건 진심이 담겨 있어 더 리얼하게 느껴졌다. 처음에는 너무 말이 없고 말을 해도 너무 데시벨이 낮아 심심하다고 여겨졌지만, 차츰 적응하다 보니 그것이 전국의 한적한 곳을 찾아가 음식을 해먹는 ‘삼시세끼’라는 프로그램의 색깔이기도 했다는 게 새삼 느껴졌다. 

 

차승원은 자신이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지리산 등반을 나서서 했는데 그건 여러모로 엄태구를 배려한 선택처럼 보였다. 무언가를 해야 오히려 편안할 거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렇게 노고단까지 함께 오르고 내려오는 길 엄태구는 훨씬 편안해진 모습으로 차승원에게 마음을 털어놨다. “예능을 많이 안해봤는데 제가 힐링 되는 건 처음인 것 같아요. 항상 긴장만 하다가 되게... 자괴감이 많았었어요. 너무 스스로가 답답하고 일상적인 대화도 잘 못한다고 느꼈어요. 제가. 근데 그 모습을 좋아해 주시는 게 너무 신기해서 있는 그대로 더 놔둬도...” 엄태구의 그 말에 차승원은 말했다. “그런 네가 너무 좋아. 난. 뭐 변하지도 않겠지만... 그냥 변하지 마라.” 

 

사실 타고난 내향인들이 억지로라도 친해져야만 하는 사회생활을 하는 건 그 자체로 도전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때로는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게 해주고 끝내 그 진가를 드러내게 해주는 건 몇몇 주변사람들의 말 한 마디 때문이기도 하다. “힘들지?”라고 그 속마음을 읽어주고, 있는 그대로의 네가 좋다며 “변하지 마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어 그들은 그 도전을 멈추지 않는다. 이것이 모든 게 도전이었을 극내향인 엄태구라는 페르소나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이야기다. (글:국방일보, 사진:tvN)

‘전,란’의 진지함과 ‘아마존 활명수’의 발랄함을 넘나드는 배우

아마존 활명수

“저는 이번에 통역을 맡은 장 프리크손 빵게라입니다.” 영화 ‘아마존 활명수’에서 진선규 배우가 맡은 역할은 아마존에 있는 볼레도르라는 작은 나라에 양궁 감독으로 초빙받아 가게 된 진봉(류승룡)의 통역사다. 한국계 볼레드로인으로서 잘하진 않지만 한국어를 하는 이 인물은 그렇다고 볼레도르 언어 또한 능숙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는 진봉과, 그가 감독을 맡아 함께 하게 된 신이 내린 활솜씨의 아마존 전사 3인방 사이에서 엉뚱한 통역을 하는 모습으로 웃음을 준다. 그런데 이 이색적인 인물이 구사하는 볼레도르 언어가 예사롭지 않다. 그저 흉내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진짜 볼레도르 언어란다. 물론 아쉽게도 영화에서는 볼레도르 언어보다 한국어로 연기하는 모습으로 대부분 채워졌지만, 진선규는 실제로 이 언어를 배우려 노력했고 촬영 당시에는 원어 버전과 한국어 버전을 모두 연기했다고 한다. 어차피 한국인들이라면 잘 알아듣지 못할 언어를 진선규는 왜 그토록 열심히 준비했을까. 이것은 웃음에 초점이 맞춰진 코미디라고 해도 이 배우가 얼마나 연기에 진심을 담으려 하는 인물인가를 보여준다. 

 

사실 ‘아마존 활명수’는 기발하지만 엉뚱한 발상을 담은 코미디 영화다. 한때 양궁 국가대표 메달리스트로서 코리아 활명수(활을 잘 쏜다는 의미)로 불리던 진봉이, 이제는 구조조정 1순위의 회사원이 되어 그 위기를 벗어날 기회로 아마존에 있는 볼레도르의 양궁 감독으로 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아마존에 뚝 떨어진 진봉이 그 곳 원주민들과 벌이는 좌충우돌과 거기서 만난 아마존 전사 3인방을 양궁 선수들로 키워내 한국에서 열리는 국제대회에서 맹활약하는 과정이 담겼다. 너무나 엉뚱한 이야기지만 한국과 아마존이라는 그 거리감을 단번에 좁혀줌으로써 허공에 붕 뜰 수 있는 이야기에 보다 현실적인 느낌을 얹어주는 인물이 통역사 빵식이다. 그러니 빵빵 터트리는 슬랩스틱류의 코미디 속에서도 양측 문화를 소통시키는 이 인물의 진정성이 필요해진다. 그가 굳이 볼레도르 언어까지 배워가며 연기를 준비한 이유다. 

 

진선규는 그 역할이 악역이든, 선역이든 혹은 지독한 비극이든 아니면 웃음 터지는 발랄한 코미디든 척척 제 몸에 맞는 옷처럼 입어버리는 배우로 정평이 나 있다. ‘범죄도시’에서 빡빡 밀고 나와 위성락이라는 살벌한 악역으로 대중들의 눈도장을 찍었던 그가, ‘극한직업’에서 형사지만 잠복근무 하다 치킨집 요리사가 된 모습으로 빵빵 터지는 웃음을 전해줬을 때 대중들은 전선규가 다채로우면서도 존재감이 확실한 배우라는 걸 알게 됐다. 물론 단독 주역을 맡은 건 작년에 개봉됐던 ‘카운트’에서가 처음이었지만, 다른 인물들과 함께 주연으로 나설 때마다 그는 자기만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한국형 우주 배경의 SF 영화였던 ‘승리호’에서의 타이거 박이나, ‘공조2’에서 현빈과 대적하는 메인 악역 장명준, ‘외계+인2’에서의 능파 역할이나 최근 넷플릭스를 통해 방영된 ‘전,란’에서 강동원의 스승으로 등장한 김자령 역할이 그 사례들이다. 

 

드라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사극 ‘육룡이 나르샤’에서 남은 역할로 인상적인 연기를 남겼고, 범죄스릴러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에서는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고통스러워도 범죄자들의 마음을 읽어내는 프로파일러 역할을 소화해 박수갈채를 받았다. 갑자기 지진으로 붕괴된 건물 안에서 펼쳐지는 치열한 생존게임을 다룬 ‘몸값’에서는 드라마 내내 팬티 한 장을 입고 하는 액션 코미디를 선보였으며, 오컬트 장르인 ‘악귀’에서는 민속학자 역할로 등장해 특별출연이었지만 마지막회까지 모습을 드러내며 사실상 극을 이끌어가는 모습을 보여줬다. 사극과 현대극, 스릴러와 코미디를 종횡무진 넘나드는 변화무쌍한 모습이지만 그에게도 한 가지 변하지 않는 게 있었다. 그건 바로 자신이 하는 작품과 역할에 진심을 담는다는 점이다. 

 

이런 모습은 진정성이 점점 중요해진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힘을 발휘했다. 재작년 tvN에서 방영됐던 ‘텐트 밖은 유럽’은 사실상 이 프로그램을 이끄는 유해진과 여행 예능에 첫 출연한 진선규의 공조로 화제가 됐던 프로그램이었다. 두 사람은 당시 영화 ‘공조2’에서 북한형사와 범죄조직 리더 장명주로 함께 출연해 치열한 대결을 벌인 바 있었다. 하지만 ‘텐트 밖은 유럽’에서 진선규는 너무도 선하고 순수한 소년미를 드러내면서, 서글서글하고 아재미 가득한 매력을 가진 유해진과 기막힌 형동생 케미를 선보였다. 그 모습이 너무 달라 ‘유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했을 때 MC 유재석은 “어떤 게 진짜에요?”라고 물었는데, 그 때 진선규가 한 말이 걸작이다. 그것이 바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말이며 ‘연기에 대한 자신의 가치관’이라고 했던 것. 그래서인지 최근 쿠팡플레이 ‘SNL코리아’에 출연한 진선규는 저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자신을 내려놓는(?) 모습으로 큰 웃음을 줬다. 특히 개그우먼 이수지가 보이스피싱을 하는 린쟈오밍 역할로, 진선규가 위씅락 역할로 분한 ‘범죄도시의 사랑법’은 유튜브에도 소개되어 큰 화제가 됐다. ‘개그콘서트’에서 이수지가 했던 보이스피싱 개그와 ‘범죄도시’의 세계관을 엮어 기막힌 ‘격정 멜로’로 풀어낸 이 코미디 영상은 조회수가 160만을 넘기고 댓글이 900여개가 달리는 인기를 끌고 있다. 

 

물론 그의 이러한 카멜레온 같은 완벽한 변신은 그냥 생겨난 결과가 아니다. 그는 작품에 대해 철저히 준비해오는 배우로도 정평이 나 있다. ‘몸값’을 찍을 때 그와 함께 연기했던 전종서는 촬영 2개월 전 리허설 때부터 진선규가 대사를 모두 암기해 와 깜짝 놀랐다고 인터뷰를 한 바 있다. 그만큼 어떤 역할이든 사전에 캐릭터를 분석하고 준비함으로써 남다른 자기만의 아우라를 갖게 됐지만, 진선규는 그럼에도 여전히 자신은 ‘좋은 배우’라는 목표를 향해 가는 상태라고 자신을 낮춘다. 이번 ‘아마존 활명수’에서도 그에 대해 류승룡은 “지금껏 보지 못했던 그런 캐릭터에 대한 연구를 하고 그것을 해내는” 모습을 보여줬다고 극찬했지만, 진선규는 오히려 “‘극한직업’ 이후로 다시 한 번 더 형 옆에서 코미디로 배울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선악과 희비를 넘나드는 다채로운 아우라를 그가 어떻게 갖게 됐는가를 드러내는 대목이다. 낮은 자세로 진지하게 임하는 변함없는 진정성이 바로 그것이다. (글:국방일보, 사진:영화'아마존 활명수')

‘정년이’와 ‘나의 해리에게’로 주목받는 배우, 오경화

정년이

“암시롱도 않당께. 야 그런 꿈이 있다는 것도 다 네 복이다, 어? 네 마음이 정 그러면 가서 끝까지 한번 부딪혀 봐.” tvN 드라마 ‘정년이’에서 윤정년(김태리)의 언니 윤정자(오경화)는 그런 말로 동생의 꿈을 응원해준다. 천재 소리꾼이었지만 세상에 상처받고 조용한 삶을 살아온 윤정년의 엄마 서용례(문소리)는 그래서 딸이 소리를 하는 걸 반대한다. 그럼에도 소리가 좋아 무대에 서고 싶다고 하자 서용례는 그 고집을 꺾기 위해 윤정년을 광에 가둬버린다. 먹을 것도 주지 않는 엄마 때문에 동생이 걱정된 윤정자는 잘못했다고 빌라 하지만 윤정년의 마음은 확고하다. 지금 자신의 마음을 꺾어버리면 평생 후회할 것 같다는 것. 1956년 전후로 피폐해진 삶 속에서 하루 먹을 거리를 찾아 생계를 유지해야만 했던 그 시절에 꿈이란 언감생심이다. 하지만 동생이 꿈을 갖고 있다는 것에 윤정자는 용기를 낸다. 그 닫힌 문을 열어주고 동생이 꿈을 향해 훨훨 날아가라고 말해준다. 

 

비록 언니라고 하더라도, 내가 없는 재능을 갖고 있고 그래서 무언가를 꿈꾸는 이를 시기하거나 질투하지 않고 응원해주는 건 결코 쉬운 일은 아닐게다. 하지만 이 언니는 동생이 꿈을 향해 나가는 걸 마치 자신의 일처럼 응원한다. 자신이 하지 못하는 것을 대신 해주는 것처럼. 그래서 그 응원에는 어떤 결과에 대해 자신에게도 돌아올 보상 따위가 덧붙여져 있지 않다. 물론 정년이는 돈 많이 벌어 돌아와 엄마와 언니를 호의호식해주겠다고 말하지만, 윤정자는 이렇게 말한다. “성공 못해도 자꾸 집 생각나고 서러운 생각 들면 돌아와잉? 내가 밤에도 문 안 잠글랑게. 응?” 

 

윤정년과 윤정자의 이 눈물 겨운 장면에는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드라마 ‘정년이’에 시청자들이 빠져들게되는 지점이 담겨있다. 시청자들은 윤정년을 응원해주는 윤정자의 모습에서 대책없이 빠져드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건 윤정자의 마음을 공감하게 되는 지점이고, 그래서 그 마음 그대로 윤정년을 응원하게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향후 매란국극단에 들어가게 된 윤정년이 마주하게 될 갖가지 난관들과, 그걸 하나하나 뚫고 나가며 성장해가는 과정은, 그걸 알게 된 윤정자가 흐뭇해할 모습 그대로 시청자들을 흡족하게 만드는 과정들이 된다. 전체를 두고 보면 아주 짧은 분량에 불과한 출연이지만, 윤정자의 존재감이 ‘정년이’라는 드라마에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가를 말해주는 대목이다. 

 

윤정자 역할을 연기한 배우 오경화는 주로 이런 역할들을 도맡아 왔다. 주인공의 친구 역할이거나 직장 내 부하직원 같은 주변인물이다. ‘무인도의 디바’에서는 서목하(박은빈)와 정기호의 친구 문영주 역할이었고, ‘하이에나’에서는 정금자(김혜수) 변호사의 비서인 이지은 역할이었다. 그러니 그가 하는 역할은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주인공을 빛나게 하고 때론 도와주며 응원하는 역할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정년이’에서 오경화가 보여주는 연기는 정년이 역할의 김태리만큼 도드라진다. 실제로 두 사람이 등장하는 장면이 나왔을 때 시청자들 반응의 대부분은 “오경화가 누구냐”는 놀라움이었다. 약하게 떨리며 슬픔을 꾹꾹 눌러 물기가 가득하고 어딘가 어눌해서 오히려 순수하게 느껴지는 그 목소리로 전하는 대사는 짧은 순간이지만 가슴을 툭툭 건드리는 힘이 느껴졌다. 실로 조역의 힘이 어디에 있는가가 정확히 느껴지는 연기랄까. 

 

이런 연기가 우연이거나 대본이 만들어낸 캐릭터의 힘 덕분이 아니라는 걸 보여준 건, 같은 시기에 방영됐던 ENA ‘나의 해리에게’에서 주은호(신혜선)의 친구 역할로 미디어N 서울 주차관리소에서 함께 일하는 김민영 역할을 통해서다. 실종된 동생 때문에 경계성 정체성 장애를 겪는 아나운서 주은호는 또다른 인격인 주혜리가 되어 이 주차관리소에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다. 그것이 동생이 평상시 하고 싶어했던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거기서 만난 동료이자 친구 김민영과의 우정이 시청자들의 가슴을 뜨겁게 만든다. 결국 고통의 과정을 통해 정체성 장애를 회복하고 돌아온 주은호가 김민영을 찾아와 “너와 있던 시간이... 참 행복했어”라고 말할 때 시청자들도 똑같은 마음이 된 건 그들의 우정이 남달랐기 때문이다. 대단한 일이 벌어진 것도 아니고, 그저 평범하게 함께 주차관리소에서 수다를 떨고 일상을 보냈던 그들이다. 하지만 그 순간들이 얼마나 소중했던가가 느껴지는 건, 이제 주은호가 김민영에게 이별을 이야기해야 하는 상황을 맞이해서다. 정체성 장애를 극복하고 주은호가 된 이상 주혜리는 자신에게서도 또 김민영에게서도 떠나보내야 하는 존재가 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은호가 자신의 또다른 인격이었던 주혜리를 떠나보내기 위해 마련한 이별파티에서 김민영이 이를 거부하는 모습은 오경화 특유의 꾹꾹 눌러담는 연기를 타고 시청자들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근데 있잖아. 난 주혜리랑 인사하기 싫어. 난 주혜리랑 이별한 적이 없거든. 이별할 필요도 없고. 친구끼리 이별하는 거 손절인데, 난 주혜리랑 손절한 적이 없어서. 그래서 난 인사를 못해. 혜리야.” 

 

물론 오경화는 2016년 ’걷기왕‘이라는 영화로 데뷔해 아직까지는 대중들에게 선명하게 각인되지는 않은 신인배우에 가깝다. 하지만 그간 해온 여러 드라마와 영화 같은 작품들 속에서 이 배우는 자기만의 확실한 색깔들을 채워 넣는 연기를 보여줬다. ’정년이‘에서는 꿈조차 꾸지 못하는 현실에 동생을 응원하는 역할을 연기했지만, 실제 현실에서 오경화는 마치 드라마 속 정년이처럼 연기의 세계 속으로 뛰어들어 하나하나 작품을 해내며 자신의 영역을 만들어가는 인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우리 시대에 오경화라는 배우가 더더욱 주목받는 건, 주역만큼 중요해진 조역의 역할을 이제 대중들도 인지하고 있다는 뜻이면서 이처럼 늘 응원해주는 든든한 존재에 대한 대중들의 갈증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당신에게는 오경화 같은 존재가 있는가. 혹은 당신은 누군가에게 오경화 같은 존재인가. 오경화라는 이 시대의 페르소나는 우리 스스로에게도 그런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글:국방일보, 사진:tvN)

‘이토록 친절한 배신자’로 돌아온 한석규, 그 인간적인 얼굴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

“내 기억 속에 무수한 사진들처럼 사랑도 언젠가는 추억으로 그친다는 걸 난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만은 추억이 되질 않았습니다.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날 수 있게 해준 당신께 고맙단 말을 남깁니다.” 허진호 감독의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1998)’에서 정원(한석규)은 그렇게 조용히 다림(심은하)을 남기고 죽음을 맞이한다. 어려서 하나 둘 아이들이 돌아간 텅 빈 운동장에 앉아 모두 그렇게 떠나갈 것이라는 걸 묵묵히 받아들이던 정원은 시한부 인생이라는 판정도 그렇게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 담담한 체념을 뚫고 어느 날 갑자기 다림이 그의 삶 속으로 들어오고 평온했던 일상은 흔들린다. 더 그와 함께 웃고, 떠들고, 살고 싶어지는 것. 하지만 그는 결국 죽음을 받아들이고 다림에게 좋은 기억으로만 남게 하기 위해 아무 말 없이 떠난다. 그는 사라졌지만 그의 마음은 사진으로 남았다. 사진관 앞에 전시된 액자 속에서 수줍게 웃는 다림의 사진으로. 눈내린 어느 날 다림은 그 사진을 발견하고 환하게 웃는다. 

 

다림이 정원과의 기억을 그 액자 속의 사진으로 기억하는 것처럼, 20년이 넘게 흘렀지만 한석규라는 배우는 이 영화로 여전히 기억된다. 너무나 평범하고 수수하지만 다정함이 묻어나는 얼굴에 부드러운 중저음의 목소리. 환하게 웃고 있지만 그 뒤편에는 죽음 같은 무거운 비극이 숨겨져 있어 보다보면 어딘가 마음이 촉촉해지는 그런 배우가 바로 한석규다. 특히 이런 따뜻한 웃음 속에 담긴 어딘가 쓸쓸한 삶의 비의 같은 것들은, 밝고 뜨겁던 여름을 지나 이제 슬슬 스산해져가는 날씨에 하나둘 낙엽이 떨어지는 가을을 닮았다. 그래서 가을이 오면 더더욱 그가 떠오른다.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다. 우리네 삶이 조금 스산해도 괜찮아. 서로 따뜻하게 웃어주는 우리가 있잖아. 

 

그가 최근 주연을 맡은 MBC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의 장태수 역시 한석규 특유의 비감이 효과를 발휘하는 캐릭터다. 그는 범죄현장을 분석하는 일로 이력이 난 베테랑 프로파일러다. 그런데 그의 딸 하빈(채원빈)이 자꾸만 수상하다. 사이코패스 성향을 보이는 하빈에 대한 의심은 어려서부터 시작됐다. 캠핑을 갔다가 함께 산에 들어간 어린 동생이 절벽에서 추락사한 채 발견됐을 때 하빈은 피투성이였다. 가족이면 무조건 믿어줘야 한다는 아내 윤지수(오연수)와 달리 그는 프로파일러로서 하빈을 의심한다. 혹 어린 동생을 그가 죽인 건 아닌가 생각할 정도로. 점점 가족 사이에는 균열이 생기고, 결국 이혼한 아내가 자살하게 되면서 장태수와 그의 딸 하빈의 관계는 더 냉담해진다. 또다시 벌어진 살인사건 속에서 자꾸만 하빈의 흔적들이 발견되면서 장태수는 더더욱 괴로워한다. 진실을 향해 나가는 길이 그에게는 가시밭길이다. 어쩌면 딸이 살인자라는 걸 자기 손으로 밝힐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는 사건만큼 그 안에서 겪는 인물들의 감정과 심리가 중요한 작품이다. 한석규는 바로 이 장태수라는 인물이 가진 감정들을 고스란히 시청자들이 빠져들게 해주는 연기를 선보인다. 주름진 얼굴이 잔뜩 찡그러진 채 화면 가득 음영을 담아 전해질 때, 시청자들은 그의 고통을 공감하게 된다. 어떻게든 사건의 진실이 밝혀져 그를 미치게 만드는 의심(그것도 가족에 대한 의심이다)을 끝내주기를 시청자들은 바라게 된다. 부디 그가 두려워하는 일이 진실이 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의 원리에 대해 쓴 ‘시학’에서 비극이란 한치 앞을 모르는 인간에 대한 연민의 감정에서 만들어진다고 했다. 한석규는 바로 이 지점을 정확히 알고 있는 배우다. 그래서 딸을 의심하는 프로파일러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네 삶의 비의까지를 담아내는 깊이있는 연기를 선보인다. 과연 우리는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운명 앞에서 어떤 모습을 보일 것인가. 미국의 정신과 의사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1969년에 쓴 ‘죽음과 죽어감’에서 사람이 죽음을 선고받고 이를 받아들이는 과정을 5단계로 구분했다. 부정, 분노, 협상, 우울, 수용이 그것이다. 장태수가 처한 비극을 한석규는 이 5단계 감정들을 끄집어내 표현한다. 때론 부정하고 분노하다가 때론 타협하고 결국 절망 끝에 우울에 빠지고 수용하는 그런 감정들이 그의 얼굴 표정 하나하나에 새겨진다. 

 

한석규를 영화계에서는 ‘90년대 한국영화의 페르소나’라고 부른다. 80년대의 페르소나가 안성기라면 90년대는 바로 그가 우리 영화의 곳곳에서 강력한 존재감을 보였던 얼굴이라는 뜻이다. 보편적인 평범한 얼굴이지만 그래서 그는 ‘은행나무 침대’ 같은 사극으로, ‘닥터 봉’ 같은 로맨틱 코미디로, ‘초록물고기’나 ‘넘버3’ 같은 사회극적 요소가 강력한 장르물로, 또 ‘쉬리’ 같은 액션에서도 모두 작품에 잘 스며드는 연기를 선보이며 90년대를 구가했다. 그리고 그의 존재감은 최근에는 드라마에서도 빛을 발하고 있다. ‘뿌리깊은 나무’, ‘비밀의 문’ 같은 사극은 물론이고 ‘낭만닥터 김사부’ 같은 작품의 김사부 역할로 시대의 아이콘이 됐다. 특히 무려 시즌3까지 방영된 ‘낭만닥터 김사부’나 왓챠에서 방영됐던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 같은 작품을 통해 특유의 비감을 잘 표현해내는 저력을 선보였다. 어딘지 쓸쓸하지만 그 삶의 비극을 받아들인 자의 밝음이 담긴 비감이 그것이다.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는 암 투병을 해 점점 음식을 먹을 수 없게 된 아내를 위해 특별한 레시피를 찾고 준비하는 남편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으로, 한석규는 바로 그 남편 역할을 맡았다. 점점 죽어가는 아내를 보며 아파하고 안타까워 하면서도 단 한 숟갈이라도 먹는 모습을 보기 위해 애쓰는 이 인물에서도 저 ‘8월의 크리스마스’의 정원이나,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의 장태수가 겹쳐진다. 결국은 겨울을 피할 수 없는 운명이지만, 이를 담담히 맞이하는 자의 쓸쓸함 같은 것이랄까. 하지만 그 쓸쓸함이 지나고 나면 다시 삶이 만발하는 봄이 올거라는 걸 그 다정함과 따뜻함으로 전해주는 배우. 스산한 가을이 오면 그가 떠오르는 이유다.(글:국방일보, 사진: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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